블로그 이미지
망각의 강은 영혼이 육체에 깃들 때에만 건너는 것이 아니다.
지송리

태그목록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장자(莊子)의『장자』

2010. 5. 1. 13:43 | Posted by 지송리

 장자(莊子)의『장자』

 

1. 1장 「소요유(逍遙遊)」의 의미


 북녘 바다의 물고기 곤, 이 새가 변하면 붕.

-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를 일으키기를 3천리,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9만 리, 6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p. 28.

  붕은 매미와 비둘기의 비웃음을 사지만, 이것들은 붕의 뜻을 모른다. 생과 사의 짧은 순간만을 사는 이것들은 대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붕은 도를 깨친 존재이다.


- 만약 천지의 본연의 모습을 모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자가 되면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게 있으랴. 그래서 「지인에게는 사심(私心)이 없고, 신인(神人)이게는 공적이 없으며, 성인(聖人)에게는 명예가 없다.」고 한다. p. 34.


- 장님에겐 빛깔의 아름다움이 안 보이고 귀머거리에겐 음악의 황홀한 가락이 안 들리지만,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비단 육체에만 한하는 게 아닐세. 지식에도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네. 그게 바로 지금의 자네를 말함일세. 신인의 덕은 만물을 혼합해서 하나로 만들려는 거지.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기를 바라지만, 신인이 무엇 때문에 [보잘것 없는] 천하를 위해 애써 수고하려 하겠나.


소요한다는 것은 무궁한 경지에서 노닒을 뜻한다. 세상사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 따라서 소요유는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을 뜻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구별을 한다. 선악, 시비, 미추, 삶과 죽음, 귀천 등의 구별이 있다. 이것들은 마음을 혼란되게 하는 것일 뿐이다. 도의 세계, 그 경지에서는 이런 것들의 구별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소요유의 경지란, 현실의 구별과 분별을 ‘초월한 완전히 자유로운 세계, 즉 대자연의 커다란 품에 안길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 (안동림, 해제, p. 25.)




2. 「제물론」의 구별 거부


  제물은 ‘만물(세상의 모든 사물)을 고르게’ 함을 이른다. 유일절대의 도의입장에서 현실 세계의 갖가지 현상, 시미, 선악, 미추, 정사(옳고 그름), 화복, 길흉, 각몽(깨어 있음과 꿈꿈), 생사 등을 명확히 부분하려는 상대적 가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지를 밝힌다. 대붕은 절대자(자유인)의 조건은 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고 궁극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안동림 해제, p. 45.)

  따라서 제물은 절대적인 명지(明智)의 경지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에 의한 구별과 시비가 없어진다. 즉, 인간의 지식은 상대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장자가 상대주의에 머무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명지와 같이 절대적인 도를 파악하는 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도의 경지는 인간의 상대성을 넘어선, 초월한 상태이다.


- (남곽자기가 말하기를) 지금 나는 스스로를 잊어 버렸다. 너는 그걸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사람의 퉁소 소리는 들어도 땅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했고, 또 땅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해도 아직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했겠지. p. 47.


스스로를 잊은 상태란, 망아의 상태, 즉, 만물과 하나가 된 경지. 일체의 구별이 없어진 상태. 근심과 걱정은 구별에서 온다. 자타의 구별로부터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근심과 걱정이 생겨난다. 망아에 이르러 구별이 없어지면, 자기를 위해, 또는 타자를 위해 근심과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평안과 안정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위의 퉁소 소리 우화에서 ‘구멍은 인간이나 사물의 덧없음을, 소리는 시비를 일삼는 사고나 언설을, 바람은 좀처럼 포착하기 힘든 도를 나타내고 있다.’ 소리는 시끄럽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 입장에서 보면 그런 자잘한 소리는 덧없는 것이다. 하늘의 퉁소 소리는 다른 소리들이 날 수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인 셈이다.


- 훌륭한 지혜는 한가하고 너그러우나 하잘것없는 잔꾀는 사소한 일을 따지려 든다. 훌륭한 말은 담담하나 쓸데없는 잔말은 이러쿵저러쿵 시끄럽다. …… 탐욕에 빠져 버리면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p. 51.


- 감정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감정이 나타날 데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에 가깝다고 하겠으나 무엇이 갖가지 감정을 생기게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p. 53.


- 참된 주재자가 있는 모양이지만 그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용은 뚜렷한데 그 형태는 볼 수 없다. 실체는 있으나 모습이 없다. p. 54.


- (편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덕이] 지극한 사람의 행동을 들은 일이 없는가? 간담을 잊고 눈귀[ 따위의 감각 기관]까지도 잊어버린 채 무심하게 세속밖에서 떠다니고 인위를 일삼지 않는 자연 속에 노닌다. p. 482.


- 무지 무심하여 의식을 작용시키지 않고 모든 생각을 버려 의심을 품지 않으며 온갖 것이 생기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은 전송하고 오는 것은 맞이하며 오는 것을 막지 않고 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배반하는 자를 그대로 버려두고 순순히 따르는 자를 그대로 두어 각기 힘을 다하도록 놓아둡니다. p. 493.




3. 도(道) 또는 도추(道樞)와 ‘제물론(齊物論)’의 의미


- 성인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의 조명에 비추어 본다. 그리고 커다란 긍정(긍정의 세계)에 의존한다. …… 저것과 이것이 그 대립을 없애 버린(대립을 초월한 절대적인) 경지, 이를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라 고 한다. 지도리이기 때문에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무한한 변전에 대처할 수 있다. 옳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며, 옳지 않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다. 그러므로  [시비를 내세우는 짓은] ‘명지’의 처지에 서느니만 못하다. p. 59.


- 길이란 그 곳을 다니니까 생기게 마련이고, 사물은 이름을 붙이니까 그렇게 된다. p. 61.

도추의 경지는 절대적 자연의 이치에 이른 경지. 구별이 없고 자연과 만물이 하나가 된 경지. 여기에 구별을 붙이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간의 상대적 지식에 의한 것. 인간은 그러한 상대적 지식에 의해 구애되고 속박된다. 유가의 정명은 이름을 바르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지 절대적인 도의 관점은 아니다. 정명에 의하면 시비의 판단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시비의 판단이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


- 충분히 자기의 삶을 즐길 수 있으면 도에 가깝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길 뿐, 그러면서도 그런 따위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을 도라 한다. p. 63.


- 애초 사물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경지이다. (무의 경지), 지극하고 완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일 수가 없다. 그 다음 경지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구별을 두지 않는 (사물과 자아가 하나라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구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시비를 고려하지 않는 입장이다. 시비가 나타나면 도가 파괴되는 원인이 되고, 도가 파괴되면 또한 편애(애증)가 이루어지는 원인이 된다. pp. 65-66.


→ 유가의 정명, 예악과 같은 것은 시비의 구별로부터 나옴. 인간을 구속하는 것.


- 자기의 판단을 가하지 않고 상시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 이것을 참된 명지에 의거함이라 한다. p. 67. [만물제동의 경지]


- 도란 본래 한계가 없고, 말이란 애초 일정한 의미 내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말로 표현하려 하면] 구별이 생기게 된다. p. 72.


- 대체로 참된 도는 명칭으로 나타낼 수가 없고, 참된 변론은 말로 할지 못한다. …… 알지 못한다는 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다. …… 이러한 경지를 보광(葆光: 속에 간직된 도)이라고 한다. p. 73.




4. 4장「인간세(人間世)」에서 나타나는 처세술로서의 ‘무용(無用)의 용(用)’


- 학문은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입장.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이의 학문관은 그런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등용되어 나라에 쓰임이 있는 것이 사대부가 할 일이다. 글만 읽는 것은 무용하다고 했다. 그러나 장자는 처세에서 자연의 도에 맡긴다. 특히 지식은 경쟁심에서 생기고 지식이란 다투기 위한 도구(p. 105)라고 한다. 그래서 노자의 ‘절성기지 민리백배’라는 말을 따른다.


- 격언에 “군주의 명령을 고치지 말라. 성공하려고 무리하게 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그저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을 유유히 자유롭게 풀어 놓고,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몸을 맡긴 채 중도를 지켜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p. 126.


- 내가 선생을 생각해 보니 선생은 자기 지식을 꾸며서 어리석은 사람을 놀라게 만들고 스스로의 행실을 닦아 남의 잘못도니 행동을 돋보이게 하며 눈부시게 마치 해나 달을 들고 가기라도 하듯 했을 거요. 때문에 재난을 면하지 못하오. (대공임이 공자에게 한 말) p. 495.

  장자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순응의 사상, 즉 부득이한 데에 몸을 맡기고 소요자적하라는 장자 본래의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쓸모없는 상수리나무 이야기는 무용의 용. 처세술. 인간 세상에 쓸모가 없어야 천수를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나는 그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므로 화를 아주 면하지는 못한다. 만약 [쓸모 있음과 없음 따위를 초월한] 자연의 도에 의거하여 유유히 노닌다면 그렇지 않게 된다. p. 487.


- 모순되어 보이는 장자의 말: 무한한 자연의 도의 경지에 노니라 한다. 그러나 편자와 손휴의 이야기에서 편자가 말하기를 “만약 저 새를 키우는 방법으로 새를 보양하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강이나 호수에 떠 있게 하며 제멋대로 먹게 하여 새의 본성에 따라 유유히 노닐게 하는 것뿐이다. 지금 손휴는 소견이 좁은 사람인데 내가 지인의 덕을 말해 주었으니 이건 비유컨대 생쥐를 수레나 말에 태우고 메추라기를 종소리나 북소리로 즐겁게 해주려 한 짓과 같아.” p. 484.




5. 장자의 이상적 인간상인 진인(眞人) (「대종사(大宗師)」 참고)


- 진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참된 지식이 있게 마련이다. …… 옛날의 진인은 역경을 [억지로] 거역하지 않았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아무 일도 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잘못을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고, 잘 되어도 자랑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다. [그] 지식이 [세속을 초월하여 자연의] 도이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그런 것이다. p. 176


- 옛날의 진인은 삶을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미워할 줄도 모른다.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무심(無心)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그 [태어난] 시초를 모르고, 그 [죽은 뒤]의 꿑을 알려 하지 않는다. 삶을 받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죽으면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이런 경지를 「분별심으로 도를 버리지 않고, 인위로 자연을 돕지 않음」이라 하고, 이런 [경지에 있는]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 pp. 178-179.


- [외계의] 사물을 [그 자체에 맡겨 두지 않고] 뜻대로 하기를 바라는 자는 성인이 아니다. [특정한 것에 대한] 친밀감이 있는 자는 인자(仁者)가 아니다. 자연을 [인위적인] 시간으로 구분하는 자는 현자가 아니다. 이(利)와 해를 구별하는 자는 군자가 아니다. 명예를 좇아 자기를 잃는 자는 선비가 아니다. 몸을 망치며 참된 삶을 잃고 있는 자는 [남에게 부림을 받을 뿐] 남을 부리지 못하는 자이다. pp. 180-181.


- 그 하나의 입장으로 [절대적인] 하늘(자연)의 무리가 되고, 하나가 아닌 입장으로 [차별적인] 사람의 무리가 된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고 [조화되어] 있다. 이런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 p. 185.


- 자연은 우리에게 모습을 주었다. 또 우리에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우리에게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며, 우리에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삶을 좋다고 하면 곧 스스로의 죽음도 좋다고 하는 셈이 된다. p. 188.


- 성인(聖人)은 그 무엇도 빠져 나갈 수 없는 [만물을 포함한] 경지에서 노닐며 만물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려 한다. p. 190.




6.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 긍정적 함의와 한계


  긍정적 측면은, 구별의 철폐를 통해, 만민 평등을 넘어 만물평등에까지 이르는 평등주의를 추구한다. 이것은 신분적 질서의 철폐를 위한 혁명적 사상이라 할 만하다. 유교적 명분 논리를 비판하는 것은 명분에 의한 자유 억압을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대주의적 지식을 폐하고, 절대적인 지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속에서 자연과 합일되고 만물제동이 된 상태가 된다. 이것은 육체를 잊는 망아, 자신의 존재도 잊는 망아이다. 곧 정신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이것은 내면적인 관념적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 밖의 현실 세계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독단의 비판, 구속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기도취적일 뿐이다.

  또한 인간세의 처세술은 현실 순응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단지 천수를 누리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물아의 경지, 절대적인 도의 경지에 이를 필요가 있겠는가. 물아가 육체의 욕망을 잊는 상태임에도 육신의 보존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 모순되어 보이는 장자의 말: 무한한 자연의 도의 경지에 노니라 한다. 그러나 편자와 손휴의 이야기에서 편자가 말하기를 “만약 저 새를 키우는 방법으로 새를 보양하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강이나 호수에 떠 있게 하며 제멋대로 먹게 하여 새의 본성에 따라 유유히 노닐게 하는 것뿐이다. 지금 손휴는 소견이 좁은 사람인데 내가 지인의 덕을 말해 주었으니 이건 비유컨대 생쥐를 수레나 말에 태우고 메추라기를 종소리나 북소리로 즐겁게 해주려 한 짓과 같아.” p. 484.

  즉,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는 범인은 이르지 못한다. 그렇다면 장자의 주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6장 「대종사」


대종사의 앞부분은 진인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고, 후반부에는 도에 따르는 삶이 생과 사를 초월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있다.


- 도란 실제로 [겉에] 나타나는 작용이 있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가가 있으나 행동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을] 전할 수는 있으나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어 있고,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의 옛날부터 본래 존재하며, 귀신이나 상제를 영묘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낳고 있다. p. 191.


- [자여(子輿)는] 대답하기를, …… 대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그런 때를 만났음이며, 삶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의] 도리(道理)를 따름이다. 태어난 때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감정)이 끼어들 수 없다네. 이것이 옛날에 말하던 현해(懸解: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라는 걸세. 그런데 스스로 [그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건 [외계의] 사물이 얽혀 매듭져 있기 때문이지. 대체 사물이 자연의 도리에 이기지 못한다는 건 옛날부터 사실일세. 내 또한 어찌 [이 병을] 싫다 하겠나. p. 199.


- 자래가 대답했다. 「…… 자연은 내게 형체를 주었지. [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주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하나로 이어진 것이니], 내 삶을 좋다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고 하는 게 된다네.」 p. 201.


안동림 해석: 장자는 인간의 변생(變生)과 생사의 초월이라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 생사를 초월한다 함은 자연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p. 202.


-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가 말하는 이 「자기」라는 것이 과연 자기인지 어찌 알겠느냐. 그런데 또 자네는 꿈에 새가 되어 하늘에 이르기도 하고, 꿈에 물고기가 되어 연못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겠지. [그러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과연] 깨어 있으며 그러는 건지, 꿈꾸며 그러는 건지를 알 수가 없지 않느냐. 남의 결점을 고자질함은 웃는(포섭하는) 것만 못하고, 웃음을 즐김은 사물의 추이(推移)에 [그래도] 맡기는 일만 못하다. 추이에 편히 [몸을] 맡긴 채 변화를 따르면, 곧 고요한 하늘(자연)과 하나가 되는 [절대의] 경지에 들게 된다.


- [허유(許由)가 말하기를] 내 스승, 내 스승이란 [도는] 만물을 이뤄 놓으면서도 의롭게 여기지 않고, 만세에 미치는 혜택을 베풀면서도 어질다 생각하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 살면서도 늙었다 하지 않고, 천지를 싣고 감싸서 갖가지 모양을 조각해 내면서도 재주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노닐게 하는 경지일세. p. 214.


- [안회(顔回)가 말하기를] 「저는 좌망(坐忘)하게 됐습니다.」 중니는 놀라서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고 하느냐?」 안회가 대답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서, 형체를 떠나 지식을 버리고 저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중니는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 [하는 차별 따위]가 없어지고, [도와 하나가 되어] 변하면 한 군데 집착하지 않게 된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라야겠다.」 p. 216.



제 8장 변무: 인의에 대한 논박


-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길게] 이어 주면 괴로워하고, 두루미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 주면 슬퍼한다. p. 246.


- 세상에서 인덕이 있다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떨쳐 버리고 부귀를 탐하고 있다. 때문에 인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참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p. 247.


- 예악에 따라 몸을 굽히고, 인의에 순순히 좇아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본래의 일정한 모습을 잃는 짓이다. p. 248.

안동림 주: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을 인의 따위 자로 규정해 버리려는 유가는 바로 그 어떤 구속도 배척하는 장자에게는 그야말로 강렬한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p. 249.


- 내가 말하는 선이란 인의가 아니라, 본성의 덕에 순순히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선이란 흔히 말하는 인의가 아니라, 본래 그대로의 모습에 맡긴다는 뜻이다. p. 252.



제9장 마제


- 대체 지극한 덕이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새나 짐승과 함께 살고, 만물과 함께 나란히 모여 있었다. [그런데] 어찌 군자와 소인[이라는 차별]을 헤아리겠는가! …… 성인이 나타나게 되자, 애써 인을 행하고 허둥지둥 의를 행해서 온 천하가 비로소 의혹을 품게 되었다. 제멋대로 음악을 연주하고 번잡하게 예의를 반들어 천하에 비로소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p. 260.


- 성인이 나타나게 되자, 예의나 음악에 따라 몸을 굽혀서 그것으로 천하[사람]의 겉모습을 바로잡으려 하고, 인의를 내걸어 천하[사람]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자 백성은 애써 지식에 몰두하고 다투어 이득을 좇게 되었는데, [이제는] 막을 수가 없다. 이 역시 성인의 잘못이다. p. 262.



제10장 거협: 인간의 지혜 비판. 성을 끊고 지혜를 버려라.


-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지자(知者)란 큰도둑을 위해 [물건을] 모아두는 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소위 성인이란 큰도둑 때문에 [물건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p. 268.


- 전성자는 하루 아침에 제나라 군주를 죽이고 그 나라를 훔치고 말았다. 훔친 것이 그 나라뿐이었을까? 아울러 성인과 지자가 이룩한 법까지도 훔쳐 버렸다.


- (도척이 말하기를) 어디서나 도 없는 곳이 있겠느냐?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맞히면 성(聖)이고, 스며들 때 선두에 서는 게 용이다. 나올 때 맨 뒤에 있으면 의이고, 될지 안 될지를 아는 게 지이며, 분배를 공평하게 함이 인이다. p. 270

-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존중하고 천하를 다스린다 해도 결국 그것은 도척 같은 인간을 존중하고 이롭게 하는 셈이 된다. pp. 270-271.


- 인의로 [백성을] 바로잡으려 하면 그 인의도 아울러 훔쳐 버린다. p. 272.a


- 성인을 근절하고 지혜를 내버리면 큰도둑은 없어진다. p. 273.

[<노자> 제 19장: 절성기지 민리백배.]


- 증삼이나 사추의 행위를 떼어 내고, 양주나 묵적의 입을 막으며 인의를 물리치면 비로소 온 천하의 덕은 현묘한 도와 하나가 된다. p. 275.


- 지혜를 좋아한다는 것이 온 천하를 이렇듯 혼란하게 하다니 참으로 심한 짓이다. p.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