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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경복, 고봉만 역, 책세상, 2003.




머리말


  이 논문의 주제를 철학이 제안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ㅇ지만 철학자들이 해결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문제의 하나로 본다. 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p. 35.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류의 모든 진보가 인간을 끊임없이 원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수록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p. 34.



  사람들을 구별하는 차이의 기원을 인간 구조의 변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서로 평등하다. p. 34.



  자연권droit naturel의 참된 정의가 그만큼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p. 36.



  사람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적절하게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규칙을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 이렇게 모여진 규칙들에다 자연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널리 실시해보니 결과가 좋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근거는 없다. 이것이 정의를 만들어내고 거의 터무니없는 일치에 의해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매우 편리한 방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p. 38.



  우리가 이 법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법의 강제를 받는 사람의 의지가 그 법을 의식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이기 위해서는 그 법이 자연의 소리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p. 38.



  거기에[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원리이다. 사회성의 원리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연법의 모든 규칙들은 우리의 정신이 이 두 가지 원리 사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일치와 조합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pp.  38-39.



  지식도 자유도 없는 동물들이 이 법칙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도 타고난 감성에 의해 어느 정도 우리의 본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도 자연법에 관여하며 인간은 그들에 대해 어떤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내가 동포에게 어떤 종류의 해도 입혀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동포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 같은 특질은 동물과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므로, 적어도 동물은 인간에 의해 불필요하게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p. 39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건강•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p. 45.



  대체 이 논문에서는 정확히 말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이 진보하는 가운데 폭력에 이어 권리가 생기고 자연이 법에 굴복한 시기를 지적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떠한 기적의 연쇄로 인해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 인민peuple이 현실의 행복을 대가로 하여 관념 속에서 안식을 찾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p. 46.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연 상태가 존재했다는 데 대해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성서를 읽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지식과 계율을 받은 최초의 인간은 이 같은 자연 상태에 있지 않았다. ...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기이한 사건에 의해 다시 자연 상태로 떨어진 셈이다. 이것은 변호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며 전혀 증명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므로 우선 이 모든 사실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 조금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추구할 수 있는 연구는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라 다만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p. 47.







        제 1 부


  인간의 자연 상태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인간을 그 기원을 통해, 이를테면 종의 최초의 발아를 통해 검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대신 인간은 어떤 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이 두 발로 걸어 다니고 현재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손을 사용했으며 자연 전체에 시선을 보내고 하늘의 광대한 넓이를 눈으로 가늠했으리라고 가정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성된 존재에게서 그가 받았을지 모를 종교 교육에 의한 신앙으로 축적된 지식과, 오랜 세월에 걸친 진보를 통해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인위적인 능력을 제거해버린다면, 요컨대 인간을 자연의 손에서 갓 나온 그대로의 상태에서 생각해보면, 아는 거기서 어떤 동물보다는 약하고 민첩하지 못하지만 결국 그 어떤 동물보다 유리하게 조직된 한 동물을 떠올리게 된다. pp. 50-51.




  자연은 그들에게 스파르타의 법률이 시민의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과 똑같이 행동한다. 즉 자연은 훌륭한 체격을 가진 자들은 더욱 강건하게 만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모두 도태시켜버리는 것이다. p. 52.



  동물의 힘에 있어서 뛰어난 이상으로 자신이 재주에 있어서는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p. 54.



  동물보다 더 무서운 적으로서 인간의 적절한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는 상대는 인간의 타고난 연약함, 유년기나 노화, 온갖 종류의 병들이다. 처음 두 가지는 모든 동물들에게 공통되지만 마지막 것은 주로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모두 우리가 약하다는 슬픈 증거들이다. pp. 54-55.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령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 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나는 감히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며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주저 없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 ... 인간의 질병사(疾病史)는 문명 사회의 역사를 더듬어봄으로써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 56.



  사회화하고 노예화한 인간은 연약하고 겁이 많아지며 비굴해진다. 게다가 나약하고 여성화된 생활 양식은 인간의 힘과 용기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든다. ... 인간과 동물은 자연에 의해 동등한 대우를 받으므로 인간 스스로가 그가 길들이는 동물보다 그 자신에게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을 더욱 타락시키는 특별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p. 58.



  우선 나는 모든 동물을 하나의 정밀한 기계로밖에 보지 않는다. ... 나는 인간이라는 기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동물의 활동에서는 자연만이 오로지 모든 것을 행하는 데 반해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연의 활동에 협력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즉 동물은 본능에 따라,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에 따라 취사 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동물은 자기에게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에게 아무리 유리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신에게 해로워도 종종 그 규칙을 벗어나 행동한다.  p. 60.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지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특질이다. 자연은 모든 동물에게 명령하고 동물은 이에 따른다. 인간도 같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복종하느냐 저항하느냐의 선택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자유로움을 인식한다. 인간 영혼의 정신성이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자유의 의식을 통해서였다. p. 61.



  ... 나는 양자를 이렇게 구별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또 하나의 매우 특수한 성질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개량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인간은 환경의 도움을 얻어 다른 모든 능력을 점차 발전시켜가는 이러한 가능성을 종의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차원에서도 소유하고 있다. ... 인간과 동물을 분명히 구별하는 거의 무제한적인 이 가능성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며, 평온하고 순진무구한 나날이 계속되는 저 원초적인 상태로부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을 이끌어낸 것도 바로 이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오류, 악덕과 미덕을 몇 세기 동안의 흐름 속에서 부화시켜 드디어 인간을 자기 자신과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이 가능성이다. p. 62.



  주석 70)에서 (저자 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처럼 불행하게 만드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방대한 학문 연구, 수많은 기술의 발명, 막대한 노력이 소요된 심연 매립과 산을 깎고 바위를 쪼개고 운하를 만드는 등의 큰 공사, 토지 개간, 인공호 건설, 소택지 간척, 거대한 건물의 축조, 거대한 배의 건조 등 인간의 막대한 사업들을 생각할 때, 또 한 편으로는 이모든 것이 인류의 행복에 미친 참된 이득을 조금이라도 깊이 연구해볼 때,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불균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의 무분별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사리 분별을 못하고 어리석은 교만과 그지없이 공허한 자기 예찬을 위해 자연이 호의적으로 막아주었던 모든 참상을 오히려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pp. 171-172.


  인간은 본래 선량하며 나는 그러한 사실을 증명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토록 타락하게 만든 것은 그의 체질 속에 일어난 변화와 진보 그리고 그가 획득한 지식이 아닐까? 우리는 인간 사회를 얼마든지 찬미할 수 있으나 그 사회는 결국 사람들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겉으로는 상부상조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가능한 모든 해를 끼치려고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파멸시켜야 하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적이 되어야 하며 이해 관계의 충돌로 말미암아 사기꾼이 되는 상태가 과연 어떨 것인가를 반성해보아야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회는 각자가 타인에게 봉사함으로써 이득을 보게끔 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해를 끼침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얻지 않으면 그야말로 다행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pp. 172-173.


  사회 속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에게는 우선 생활필수품을, 다음에는 사치품을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에는 환락에 이어 엄청난 부와 시종과 노예가 따른다. 그는 잠시도 쉴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욕망이 자연적이고 절박하지 않을수록 정념이 점점 고조된다는 사실이며,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을 만족시키는 힘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자는 한참 동안 많은 재물을 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것을 착취하여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인간 사회, 적어도 모든 문명화된 인간 심정의 은밀한 의도를 담고 있는 도덕적인 그림이다. pp. 173-174.


  말살, 독살, 납치 등의 범죄와 그에 대한 처벌 역시 명백히 사유 제도의 탓, 따라서 결국은 사회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p. 174.


  사치는 치료하고자 하는 악보다도 훨씬 나쁜 치료법이다. 사치는 오히려 그 자체가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어떤 국가에서나 모든 악 가운데서 최악의 형태다. 사치는 자신이 창출해낸 무수한 종복들이나 부랑자들을 기르기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파멸시킨다. p. 176.


  사회와 그 사회가 발전시킨 사치는 자유 학예, 수공예, 상업, 문예를 낳는다. 이것들은 산업을 발달시키고 풍요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국가를 망치는 무용지물이다. p. 176.


  그러한 것들이 급기야는 가장 부유한 나라들까지도 벗어날 수 없는 모든 불행의 민감한 원인들이다. 산업이나 기술이 널리 보급되고 발전함에 따라 농민은 더욱 천대를 받고 몇몇의 사치를 위한 세금을 부담하면서 노동과 굶주림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마련이다. p. 176.


  나는 누군가가 마지막에, 인간이 발명한 기술이나 법률 같은 이 모든 위대한 것이 페스트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까 봐 두렵다. 우리에게 거주 공간으로 제공된 이 세계가 너무 비좁아지지 않도록 종의 지나친 번식을 억제하는 유익한 페스트 말이다. p. 177.


  사회를 파괴하여 내 것과 네 것의 경계를 없애고 숲으로 돌아가 곰들과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나의 적대자들이 내리는 결론이지만, 나는 그와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는 것에 대해 그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그에 대한 예방책을 마련하고자 한다. ...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저 태고의 원시적인 순진성을 되찾아보자. ... 인류의 악덕을 버리기 위해 그 지식도 버림으로써 인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정념이 원시의 순수성을 영원히 파괴해버린 나와 같은 인간들은 이제는 풀이나 도토리로 살아갈 수 없고 법률이나 통치자 없이 살아갈 수 없다. pp. 177-178.



  인간성을 탐구하는 자들이 뭐라고 하든지 인간의 지성은 정념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으며 누구나 알다시피 정념도 지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우리의 이성이 완성되는 것은 바로 이 양자의 활동에 의해서다. p. 63.



  그들[미개인들]의 욕망은 육체적인 욕구를 초월하지 못한다. ... 죽음과 그 공포에 대한 지식이란 인간이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 중의 하나다. pp. 63-64.



  ... 정신의 진보는 국민이 자연으로부터 받았거나 상황에 따라 국민에게 강요된 필요에 정확하게 비례하며 따라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재촉하는 정념에 비례한다. p. 64.



  요컨대 토지가 그들 사이에 분배되어 있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자연 상태가 조금도 소멸되어 있지 않는 한, 어떻게 그 같은 상황에서 땅을 경작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p. 67.



  모여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쓰이기 전에 인간에게 필요했던 유일한 언어는 ‘자연 그대로의 외침’이었다. ... 그들은 음성 어조의 변화를 증가시켰고 거기에 몸짓까지 덧붙였다. ... 또한 몸짓은 주의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주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마침내 몸짓 대신에 음성을 분절하여 발음하는 것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 이와 같은 대치(代置)는 모두의 동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또한 아직 훈련을 전혀 거치지 않아 조잡한 기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방식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원 일치의 동의에는 적절한 동기가 있어야 하며, 말의 사용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pp. 71-72.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관념은 단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인식될 수 없으며, 특히 지적 능력은 절들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일반적인 관념을 파악할 수 없다. ... 모든 일반적인 관념은 순전히 지적인 것이다. ... 만약 당신이 거기서 모든 나무에 공통된 것만을 보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무라고 할 수 없다. 순전히 추상적인 존재들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마음속에 그려지거나, 혹은 언술에 의해서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삼각형의 정의만이 삼각형의 참된 관념을 준다. 여러분이 머릿속에 하나의 삼각형을 그리자마자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삼각형이지 이미 다른 삼각형은 아니다. ... 따라서 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며 말해야만 한다. pp. 73-74.



  언어가 제정되기 위해서는 이미 결합된 사회가 있어야 했는지, 도는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 이미 발명된 언어가 있어야 했는지,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필요했는가 하는 문제다. p. 76.



  나는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중에서 어는 것이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지를 묻고 있다. ... 미개인은 자연 상태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본능 속에 갖고 있었으며,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훈련된 이성 속에 갖고 있었다. pp. 77-78.



  우선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서로간에 도덕적인 관계도, 분명한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아서 선인(善人)일 수도 악일 수도 없었으며, 악덕도 미덕도 가지고 잇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p. 78.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나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발달이나 법의 구속 때문이 아니라, 정념이 평정을 유지하고 악덕을 모르기 때문이다. ... 홉스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원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있어 인간의 강렬한 자기애가 크게 완화되도록, 또는 이 자기애가 생기기 전에 자기 보존의 욕구가 완화되도록 인류에게 주어진 원리다. 이 원리로 말미암아 인간은 공포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선천적인 감정에서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하게 된다. ...나는 지금 연민pitié에 대해 마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처럼 약하고 온갖 불행에 빠지기 쉬운 존재들에게 걸맞은 성향이다. 연민은 인간의 반성하는 모든 습관에 앞서는 것이므로 더욱 보편적이고 인간에게 유익한 미덕이며,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때로는 동물들도 뚜렷한 징후를 보이곤 하는 미덕이다. ... 『꿀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저자가 인간을 동정심 많고 감수성이 에민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예로 한 비통한 죄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냉정하고 치밀한 문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기뻐한다. 그 죄수는 한 마리 야수가 어린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 날카로운 이빨로 그 아이의 손발을 물어뜯고 꿈틀거리는 내장을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이 목격자라도 어찌 마음에 끔찍한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광경을 보고도 기절한 어머니나 곧 숨이 넘어가려는 어린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뻗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찌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pp. 79-82.



  이것은 모든 반성에 앞서는 자연의 순수한 충동이며, 또 아무리 타락한 풍속이라 하더라도 파괴하기 어려운 자연적 연민의 힘이다. ... 사실 너그러움이나 관대함 도는 인간애란 약자나 죄인 또는 인류 일반에 적용된 연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잘 생각해보면 친절이나 우정까지도 특정한 대상에 쏠린 변함 없는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는가? 동정심이란 우리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놓는 감정일 뿐이다. ... 사실 동정은 고통을 목격하는 동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과 마음속으로 하나가 되면 될수록 더욱 강해질 것이다. ...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 이 반성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 미개인에게는 이와 같은 훌륭한 재능이 전혀 없다. 그리고 지혜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무턱대고 인류 최초의 감정에 몸을 맡긴다. pp. 82-83.



  그러므로 연민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하면서 종 전체의 상호적 보존에 기여함이 분명하다.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깊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도와주러 나서게 되는 것은 바로 연민 때문이다. 연민은 자연 상태에서 법과 풍속과 미덕을 대신하며, 아무도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저항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이점을 누린다. ... 요컨대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원칙과는 별 관계가 없더라도 인간이 악을 행했을 때 느끼는 혐오감의 원인은 교묘한 논거 속보다 오히려 자연의 감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pp. 83-84.



  그들은 서로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 따라서 허영심도 신중함도 존경도 경멸도 모르고 지냈다. p. 84.



  인간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여러 가지 정념들 중에는 이성을 필요로 하는 열렬하고 격렬한 정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장애를 물리치며, 본래는 인류를 보존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면 인류를 파멸시키기 십상일 만큼 무서운 정념이다. p. 85.



  우선 정념들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억제를 위한 법률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p. 85.



  미개인들에게 이 감정[사람의 감정]은 거의 무가치한 것임에 틀림없다. ... 미개인들은 자연이 심어준 성욕을 따랐을 뿐이며, 자기가 자연에서 얻지 못한 취향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개인들에게는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좋은 것이다. p. 86.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그토록 자주 인간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오게 만드는 저 격렬한 열정을 사회 속에서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p. 87.



  결론을 내려보자. 원시의 인간은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고, 싸움도 교제도 없으며, 타인을 해칠 욕구가 없듯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어쩌면 동류의 인간을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그저 숲속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정념의 지배를 받을 뿐 스스로 자족하면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감정과 지적 능력만을 갖고 있었다. 원시의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눈으로 보아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것만 쳐다보았다. 그의 지능은 그의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발달하지 못했다. 우연히 그가 어떤 발견을 한다 해도, 그는 자신의 자식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수할 수 없었다. 기술은 발명자와 더불어 소멸했다. 교육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진보도 없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대가 이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세대는 언제나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으므로, 최초 시대의 모든 조야함 속에서 수백 년이 되풀이되며 흘러갔다. 종은 이미 늙었으나 인간 개체는 항상 어린애로 머물러 있었다. p. 89.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사회 상태보다 자연 상태에서 훨씬 적으며 아울러 자연적 불평등이 인류에게는 제도의 불평등에 의해 한층 증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90.



  그러나 원시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굴종과 지배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 게다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속의 쇠사슬이 있을 수 있겠는가? p. 91.


  

  굴종의 끈은 인간 상호간의 의존과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 필요성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이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는 이와 같은 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p. 92.



  이제 나는 그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을 인간 정신의 지속적인 진보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 이제 나는 인간 종을 손상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완성하고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듦으로써 사악하게 하며 마침내는 인간과 세계를 까마득한 출발점에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연을 검토하고 비교해보려 한다.p. 92.






        제 2 부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 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 무렵에 사태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 관념은 순차적으로 발생한 그 이전의 많은 관념들에 의존하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 한순간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 95.



  인간이 가진 최초의 감정은 자기 생존에 대한 것이며, 최초의 관심은 자기 보존에 대한 것이다. 땅에서 나는 생산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으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게 되었다. 굶주림이나 그 밖의 다른 욕구들이 그에게 갖가지 생존 방식을 차례로 경험하게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자기의 종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방식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난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러한 맹목적인 경향은 순전히 동물적인 행위만을 낳았을 뿐이다. p. 96.



  갓 태어난 인간의 상태는 이와 같은 것이었다. 최초에는 순수한 감각에 국한되어, 자연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자연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동물처럼 생활했다. 그러나 이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나타났고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 그는 자연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동물들과 싸우기도 했으며, 먹이를 두고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강자에게 양보했던 것을 다른 데서 보충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p. 96.



  인구가 증가하고 확산되면서 어려운 점들도 늘어났다. p. 97.



  우리가 표현하는 관계는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어떤 성찰,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안전에 가장 필요한 경각심을 가르쳐준 반사적인 조심성을 낳았다.

  이 같은 발전의 결과로 얻은 새로운 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에 대한 우월성을 자각하고 과시하게 했다. ... 이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눈길을 보냄으로써 비로소 자존심이라는 것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존재의 서열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던 중에 인류라는 자기의 종이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일찍부터 개인으로서도 첫째라고 자부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pp. 97-98.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과 동족들 사이 또는 자신의 이성과 자기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이 아직 모르고 있었던 그들과의 공통점까지 알게 되었다. ... 그들의 사고 방식이나 감정이 자기와 일치한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정신 속에 확립된 이러한 중요한 진리 때문에 그는 철학적 추론만큼이나 신속하고 확실한 예감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그들과 함께 지켜야 할 최상의 행동 규칙들을 지키게 되었다. p. 98.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호간의 약속과 그로 인한 이득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p. 99.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어느 지방이든 그 언어의 성립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발음이 명확해지고 합의에 의한 몇 가지 음들이 첨가됨으로써 그 지방 특유의, 하지만 조잡하고 불완전한 언어가 생겨났다. 그 언어는 오늘날 여러 미개 민족이 사용하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pp. 99-100.



  이와 같은 초기의 진보 덕분에 인간은 더욱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정신이 계몽됨에 따라 솜씨도 점점 향상되었다. ... 이윽고 인간들은 ... 돌도끼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이 돌도끼는 나무를 자르고 흙을 파고 나뭇가지로 오두막을 짓는 데 쓸모가 있었다. 사람들은 곧진흙 같은 것으로 그 오두막의 벽을 바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가족이 형성되고 구별이 생겨나고 일종의 소유 개념이 도입된 최초의 혁명기이다. p. 100.



  인간의 마음에 최초의 변화가 생겨난 것은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이 공동의 거처에서 함께 사는 새로운 상황의 결과였다. 함께 생활하는 습관은 인간이 체험한 가장 감미로운 감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부애와 부성애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가정은 상호간의 애착과 자유가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긴밀하게 결합된 하나의 작은 사회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일했던 남녀의 생활 방식에 처음으로 차이가 생겨났다. p. 101.



  그러한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한 도구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었고, 그들의 선조들이 알지 못했던 편리함을 얻기 위해 이 여가를 활용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꿈꾸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에게 부과한 최초의 멍에였고, 그들의 자손에게는 불행의 단초였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정신을 유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p. 101.



  ... 점차 서로 가까워져 모리를 이루고 드디어 각 지방마다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규칙이나 법률이 아닌 풍습과 성격의 공통성에 따라, 즉 같은 생활 양식이나 음식에 따라, 도는 기후의 공통된 영향에 따라 결합되어 있다. ... 젊은 남녀들이 이웃이 되어 오두막에 사록, 자연이 요구하는 일시적 교류가 곧 거듭되는 왕래로 인해 즐겁고 영속적인 또 다른 교류를 낳는다. ... 무의식중에 가치와 미의 관념을 얻게 되고 그것이 다시 좋고 나쁨에 대한 감정을 낳게 된다. pp. 102-103.



  여러 가지 개념과 감정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정신과 마음이 훈련됨에 따라, 인류는 점차 유순해지고 관계가 확대되고 유대가 강화되었다. ...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러한 최초의 선호(選好)에서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태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부러움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효모에서 생긴 효소가 마침내 행복과 무구(無垢)에 치명적인 화합물을 생성시켰다. pp. 103-104.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하여 존경이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형성되자, 누구나 자기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의범절의 의무가 미개인들 사이에도 생기게 되었으며 고의적인 범행은 모두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그 범행으로 인해 초래되는 손해보다는 인격을 모욕당했다는 점 대문에 더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관념들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하고 또 이들 민족이 이미 최초의 자연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인간은 본래 사악하므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규제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p. 104.



  우리는 사회가 형성되고 사람 사이에 여러 가지 인간 관계가 성립되자 이미 그들 사이에는 애초의 구조에서 물려 받은 것과는 다른 성질이 요구되었으며 도덕이 인간의 행위 속에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 원시 상태의 무위(indolence)와 우리 이기심의 극성스러운 활동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인간 기능 발달의 이 시기가 가장 해복하고 안정된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 인간이 그 상태에서 벗어난 것은 공동의 유용성을 위해서는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어떤 불행한 우연 때문일 뿐이다. p. 105.



  요컨대 그들이 혼자 할 수 있는 작업과 다른 사람의 협력이 필요 없는 기술에 전념하는 동안, 그들의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건전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계속해서 상호간에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렸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순간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곳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p. 106.



  토지의 경작은 필연적으로 토지의 분배라는 문제를 낳았으며 일단 소유가 인정되자 정의에 관한 최초의 규칙이 생겼다. ... 이러한 기원은 이제 막 생겨난 소유의 관념이 육체 노동 이외의 것에서 유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큼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다. ... 오직 노동만이 경작자에게 자신이 경작한 토지의 산물에 대한 권리를 적어도 수확기까지 부여하며, 따라서 토지에 대한 권리를 해마다 보유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토지의 점유possession가 반복되면 그것은 쉽게 소유로 전환된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 자연법에서 생겨난 권리와는 다른 ‘소유’라는 권리를 낳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p. 109.



  이리하여 자연적 불평등이 새로운 원인의 결합에 따른 불평등과 더불어 조금씩 전개되었다. p. 110.



  다시 말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체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에서 위압적인 호사(豪奢)의 과시와 기만적인 책략, 이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 마침내 인간은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진정한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열망 때문에 서로를 해치려고 하는 옳지 못한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더욱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친절의 가면을 쓰기 일쑤이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 pp. 111-112.



  이렇게 해서 가장 강한 자 또는 가장 궁핍한 자가 그의 힘이나 욕구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일종의 권리―그들이 볼 때 소유의 권리와 동등한 권리―로 생각함에 따라 평등은 깨지고 뒤이어 가장 끔찍한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 가장 강한 자의 권리와 최초의 점유자의 권리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투쟁과 살인에 의해 종식될 수밖에 없었다. 갓 태어난 사회는 더없이 끔찍한 전쟁 상태로 변해버렸다. p. 113.



  부자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유효한 이유나 자신을 방어할 충분한 힘도 없고, 한 사람 정도는 쉽게 짓누른다 해도 강도 떼에게는 오히려 짓밟힐 수밖에 없고, 상호간의 질투심 대문에 약탈의 공통된 희망으로 결집된 적들에 대항하여 자기와 동료들과 결합할 수도 없어서 만인에서 홀로 맞서게 되었다. 마침내 부자는 절박한 필요에 따라 인간의 정신 속에 스며든 적이 없는 가장 교묘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의 세력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 자신의 적대자들을 자신의 방어자들로 만들고, 그 적대자들에게 다른 준칙을 불어넣어 자연법이 자신에게 불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유리한 다른 제도들을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pp. 114-115.



  그 후 부자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쉽사리 생각해냈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말했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를 제지하며 각자에게 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해 단결합시다.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규칙을 정합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며, 어느 쪽도 차별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를 평등하게 서로의 의무에 따르게 하는, 말하자면 운명의 변덕을 보상하려는 규칙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힘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의 최고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현명한 법률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성원을 보호하고 방위하며,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영원히 우리를 단합시키는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p. 115.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심산으로 자신의 쇠사슬을 향해 달려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 제도의 이점을 느낄 만한 이성은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내다볼 정도로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p. 116.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러하거나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이다. p. 116.



  사람들은 세상 어디를 가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며, 누구의 머리 위에나 매달려 있는 검이 잘못되어 떨어질 때 목을 움츠려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기가 벌써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시민법이 공동체 성원들의 공통된 규칙이 되었으므로, 자연법은 서로 다른 사회 사이에서만 유지되었다. 이로써 자연법은 국제법이라는 명칭으로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자연적 동정심을 대신하는 것으로 약화되었다. pp. 116-117.



  이렇게 해서 서로간에는 여전히 자연 상태에 머무르고 있던 다양한 정치체들도 곧 개인을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 바로 그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 이것이 인간이 여러 사회로 분할된 데서 엿볼 수 있는 최초의 결과다. pp. 117-118.



  몇몇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는 강자의 정복이나 약자의 단결에서 유래한다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 그러나 내가 방금 설명한 원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첫째, 앞에서 말한 강자의 정복이라는 경우에서 정복의 권리 그 자체는 아무 권리도 아니므로 다른 권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 상태로 다시 돌아간 국민이 자진하여 정복자를 자기의 우두머리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 정복자와 피정복자인 국민은 언제까지나 서로 전쟁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 둘째, 약자의 단결이라는 경우를 놓고 볼 때, 이 ‘강하고’ ‘약하다’는 말 자체가 애매하다. ... 셋째, 자유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가 교환으로 얻을 것이 전혀 없는데도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을 자진하여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부자는, 이를테면 자기 재산의 모든 부분에서 민감하므로 손해를 입기가 훨씬 쉬웠다. pp. 118-119.



  정치 상태란 거의 우연의 소산이며 출발부터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점이 발견되고 대책이 제시되긴 했지만 구조적인 결함 자체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p. 119.



  국민들이 애당초 아무런 조건이나 반대 급부 없이 절대적 지배자에게 몸을 내맡겼다거나, 자존심이 강하고 쉽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공동의 안전을 위해 생각해낸 최초의 수단이 노예 상태에 뛰어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다. ...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란 한쪽이 다른 쪽에 예속되는 것이므로, 통치자의 도움을 빌려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모두 통치자의 손에 맡겨버린 것은 양식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 국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가 그에게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모든 국법의 기본적인 준칙이다. pp. 120-121.



  나는 노예가 된 인민이 쇠사슬에 매인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예속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p. 122.



  몇몇 사람들은 전제적인 정치 체제와 모든 사회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

  ... 아버지를 존경할 의무는 있어도 아버지에게 복종할 의무는 없다. ... 시민 사회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이 시민 사회에서 주된 힘을 끌어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개인이 여럿의 아버지로 인정받은 것은, 그의 둘레에 여럿이 모여 있을 때뿐이었다. pp. 122-123.



   이와 같이 권리를 통해 사실을 검토해보면, 전제 정치의 자발적인 성립이라는 주장에는 확실성이나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의무를 지우고 다른 한쪽에는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무를 지는 쪽만 손해를 보는 이러한 계약의 유효성을 납득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하겠다. ... 다만 이렇게까지 자기의 품위를 떨어뜨려도 아무렇지 않는 자들이 무슨 권리로 자손을 똑같은 불명예에 복종시킬 수 있으며, 또한 자손들이 그들의 적선으로 얻게 된 것이 아닌 자유라는 재산―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을 무슨 권리로 자손들 대신 포기하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pp. 123-125.



  푸펜도르프는 “인간은 합의나 계약에 따라 재산을 남에게 양도하듯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첫째, 내가 양도하는 재산은 나와 전혀 무관하여 설령 남용되더라도 상관이 없으나, 남이 내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며, 억지로 강요되어 저지르는 악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범죄의 도구가 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유권은 사람 사이의 합의와 제도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나 자유 같은 자연의 본질적인 선물은 그렇지 않다. ... 자유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자연에서 받은 선물이므로, 어느 부모도 자식들에게서 이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pp. 125-126.



  여기서는 다만 세상의 통념에 따라 정치체의 성립을 인민과 그들이 선택한 통치자 사이의 참된 계약이라고 보는 데서 그치고자 한다. 이 계약에서 당사자 양측은 그 속에 명시된 법규들을 준수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쌍방의 결합은 확고해진다. 인민은 사회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그들 모두의 의지를 하나의 의지로 결합시켰다. 그러므로 이 의지가 표명되고 있는 모든 조항은 각각 기본적인 법률이 되어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예외 없이 의무를 부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는 법률의 집행을 감시하는 의무를 맡은 행정관의 선정과 그 권력을 규정하고 있다. 이 권력은 정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되지만 그것을 변경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법률과 그 집행자들을 종경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명예가 주어지고, 집행자 개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선정을 위해 기울인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여러 가지 특권이 부가된다. 대신 행정관은 자기에게 맡겨진 권력을 오직 맡긴 자의 의향에 따라 행사하고 각자가 자기의 소유물을 언제나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와 같은 정치 구조가 갖는 불가피한 폐해를 경험으로 알지 못하게 되거나 인간 마음에 대한 지식을 통해 예상하기 전에는 이 정치 구조의 유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 그 유지에 가장 큰 이해 관계를 갖는 만큼, 그 정치 구조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pp. 126-127.



  계약을 그것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취소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 어느 쪽이든 상대가 그 계약 조건을 어기거나 그 조건이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언제고 계약을 포기할 권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이 원칙을 근거로 구축될 수 있는 것 같다. pp. 128.



  정부의 여러 가지 형태는 그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이 수립되던 시기에 개개인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크고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 p. 129.



  인민은 이미 종속과 휴식이 생활의 안락에 길들여져 쇠사슬을 끊을 만한 힘도 없었으므로 자기들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예속 상태를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 p. 130.



  이러한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의 설정이 제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p. 130.



  정치상의 차별은 필연적으로 시민들 간의 차별을 가져온다. 인민과 통치자들 사이에 증가되어가는 불평등은 이윽고 개인들 사이에서도 느껴지게 되며, 정념이나 재능에 따라, 그리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바뀐다. p. 131.



  개인이 동일한 사회 속에 결합되어 서로 비교하고 끊임없이 이용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차별을 고려하게 되면, 곧 그들 사이에 신용과 권위의 불평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부, 신분이나 지위, 권력, 개인적인 장점이 주요한 구분 기준이 되며 여기에 따라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위치를 차지하므로, 나는 이들 서로 다른 세력의 조화나 충돌이 국가의 구성이 좋은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임을 증명할 수 있다. pp. 132-133.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여 애쓴 결과 오히려 내부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p. 134.



  신분과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하찮은 학문에서, 이성과 행복과 미덕에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p. 135.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를 갖게 된다. ... 전제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이미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 이 자연 상태와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자연 상태의 차이는 후자가 순수한 자연 상태인 반면 전자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두 상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정부의 계약은 전제군주제에 의해 너무 많이 파기되어 있으므로, 전제 군주는 자기가 최강자로 있는 동안만 지배자이다. pp. 135-136.



  미개인은 안식과 자유만을 추구하고 한가로이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스토아 학파의 아타락시아ataraxia도 미개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항상 활동하면서도 땀을 흘리고 불안해하며 더욱더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 사실상 이 모든 차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pp. 138-139.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 p. 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