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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동물에게도 평등을


제 1 절 인종주의와 종족주의


1.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 모든 인간의 평등을 보장해 줄 평등의 근본적인 원칙

우리가 도덕적 사고를 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들에 대하여 동등한 비중을 둔다는 것. (p. 43, 제 2 장)


2. 인간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로 확장

①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이 인간 종족 내에서 타자 관계에 대한 도덕적 근거로 타당하다면, 인간이 아닌 동물들과의 관계에도 타당한 도덕적 근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② 논거: 고통을 겪는 능력, 고통을 받거나 기쁨을 얻는 능력은 이익일반을 갖기 위한 전제이다. 따라서 타자의 이익을 고려할 때 감각(sentience)이 유일한 경계선이다.

  (고통에서 벗어나야 할 궁극적인 도덕적 이유는 고통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 p. 43)

③ 함축: 당사자의 이익 고려에서 당사자가 누구를 닮았느냐, 어떤 능력을 가지느냐와는 무관하다. 단순히 다르다는 사실로 다른 종의 존재들을 착취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④ 예: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은 유럽계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같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종족의 차이로 고통의 가치평가를 할 수는 없다.


3. 반론과 재반론

① 반론 i):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과 실험실 쥐의 고통은 다르다.

⇔ 재반론: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이 암으로 죽는 인간 아닌 것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한 이익의 평등 고려를 확장하지 못하게 하지 못한다.

-같은 양의 고통: 아기를 한 대 칠 때의 고통의 양은 말의 경우 큰 매로 두들겨 팰  때의 고통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에게 마땅한 이유 없이 그만한 고통을 가하 는 것이 잘못이라면 마땅한 이유 없이 말에게 같은 양의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 마찬가지로 쥐에게 마땅한 이유 없이 고통을 가하는 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

- 인간은 예기적 두려움을 갖지만 동물은 그런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반론?

→답변: 실험에서 정상적인 성인보다는 동물을 이용해야 할 종족주의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답변은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어린이들 등을 실험에 사용할 이유를 제공할 것이다.

② 반론 ii): 여러 종족들의 고통 비교 불가능하다.

⇔ 재반론: 인간들의 고통 역시 정확히 비교될 수 없다.

⇨ 결론: 고통은 나쁜 것이며, 고통을 겪고 있는 존재는 인종, 성, 종족에 관계없이 방지되거나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이 얼마나 나쁘냐 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 그것이 얼마나 지속적인가에 달려 있다.



제 2 절 종족주의의 실제

1. 음식으로서의 동물

① 주장: 동물 고기가 필수품이기보다 사치품일 때 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다.② 근거: 동물의 고기는 사람들이 그 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먹는 사치품이다.

i) 동물의 고기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적합한 음식을 쉽게 얻을 수 있다.

ii) 동물의 고기가 양호한 건강상태나 장수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의학적)

iii) 동물 고기는 동물 사육에 사용된 곡물의 영양가의 10% 정도만 인간에게 소비된다.

⇒ 동물 고기를 먹는 인간의 이익은 먹혀지는 동물의 생명과 복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에 따를 때 작은 이익 때문에 큰 이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예외: 에스키모들은 육식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 환경에 살고 있으므로, 생존이라는 이익이 그들이 죽이는 동물의 생존이라는 이익을 능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2. 동물 실험

(1) 동물 실험 옹호 주장의 모순점: 동물 실험은 인간에 대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주장이 동물 실험의 정당화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이 경우, 동물 실험 옹호자는 인간과 동물이 중요한 점에서 비슷하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2) 예에 의한 반대

① 생산품 안정성 시험을 위한 동물 실험. 이것들은 인간의 고통을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 제약회사의 샴푸와 화장품 시험을 위한 드레이즈 테스트(Draize test), 인공색소나 방부제와 같은 식품 첨가물에 대한 LD50 시험.)

② 핵공격을 받은 후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군인들의 능력 알기 위한 붉은털 원숭이 실험

③ 대학의 여러 실험

⇒ 이러한 동물 실험에서 인간의 이익이란 없거나 매우 불확실하다. 반면에 다른 종의 구성원들이 잃게 되는 것은 확실하고 실제적이다.


(3) 동물실험 찬성론자들의 [공리주의적] 반론: 동물실험 반대론자들은 한 마리의 동물 실험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동물 한 마리 < 인간 수천 명)

① 싱어의 답변: 하나 혹은 한 다스의 동물이 수천을 구하기 위하여 실험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옳고, 이익에 대한 평등한 고려와도 일치한다.

② 동물 실험 반대론자들의 반론: 그렇다면, 회복불가능한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고아에게 그 실험을 하려고 하는가? 동물과 뇌손상자들을 도덕적으로 구별하는 특징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그런 인간에게 실험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면, 동물 실험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3. 종족주의의 다른 형태들

모피무역, 여러 종류의 사냥, 서커스, 로데오, 동물원, 애완동물 사업 등.



제 3 절 몇 가지 반론들


1.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동물이 고통을 당할 때의 행동으로 알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① 모든 척추동물, 특히 새나 포유동물의 신경체계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것과 유사하다.

②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을 수 있게 하는 어떤 근거도 식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식물은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된 신경체계가 없다.


2. 동물들은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가?

(1) 동물은 동물을 먹는다.

①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반대: 생선의 위 속에 더 작은 생선이 들어 있었다. 생선들이 서로 먹는다면 인간이 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② 싱어의 반론

i) 동물이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음식 확보를 위한 것이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동물 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다.

ii) 동물들로부터 도덕적 지침을 구해야만 한다는 논변을 사용하는 것은 기이하다.

iii) 동물은 여러 대안을 고려할 능력이나 식사의 윤리성을 반성할 능력이 없다. 동물들에게 그들의 일에 책임을 지우거나 그들이 다른 동물을 죽인다고 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대접 받아야 한다고 판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한 육식

①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한 진화론적 육식 옹호론: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강한 놈이 약한 놈을 먹고 산다. 동물은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는 왜 먹지 말아야 하는가?

② 반론

i) 사실상의 잘못: 동물을 먹는 것이 자연적인 진화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가정이 잘못이다. 생존을 위해 사냥하는 소수의 원시문화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공장식 농장의 대규모 가축 사육은 생존과 상관이 없다.

ii) 추론상의 잘못: 동물이 동물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그러한 육식 과정에 간섭하는 것이 그릇도니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2년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아이를 낳지 않도록 간섭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3. 인간과 동물의 차이들

(1) 도구나 언어 사용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구별 경계인가

①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 → 갈라파고 섬의 딱따구리는 선인장 가시 이용

② 인간만이 도구를 유일하게 만든다? → 탄자니아 정글의 침팬지가 나뭇잎을 씹어 스펀지를 만들고, 벌레를 잡을 도구를 만들기 위해 가지에서 잎을 훑는다.

③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은 미국식 수화를 배웠다. 고래와 돌고래는 그들 나름의 복잡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존재의 고통을 무시할 이유는 될 수 없다.


(2) 생각이나 추론, 자의식, 자율성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경계인가?

자의식적 존재가 우선적 고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자의식적인 존재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그의 이익에 반할 것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자의식적이지 못한 존재의 이익에는 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도라면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과 양립가능하다. 그러나,

① 반박 1: 자의식적인 존재의 고통이 단순히 감각적인 존재의 고통보다 더 크지 않을 경우,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로운 존재이므로 전자의 고통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즉, 자의식의 유무가 이익의 비교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 자의식은 고려될 필요가 없다.

② 반박 2: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인간은 다른 많은 동물들보다 더 자의식적이지도 않고 더 자율적이지도 않다. 자의식과 자율성의 간격이 도덕적 위치의 차이를 결정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동물로서의 도덕적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3) 자율성과 자의식을 구별 기준으로 삼아도 문제 없다는 주장 세 가지

① 주장 1: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정상적인 인간의 종에 속하는 구성원이기 때문에 마치 정상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진 듯이 다루어야 한다.

⇔ 반론: 사람들을 개인으로 다루어야지 집단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민족 집단간 IQ의 차이). 특정한 인종이나 성에 속하는 사람들을 더 잘 대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듯이 우리 종족의 구성원을 다른 종족의 구성원보다 더 잘 대해서는 안 된다.

② 주장 2: 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인간이며, 우리는 다른 동물과 가지지 못하는 특별한 관계를 그들과 갖는다.

⇔ 반론: 애정에 의존하는 이 입장은 도덕적 의무를 감정에 호소하는 문제가 있다.

③ 주장 3: 미끄러운 경사길 논변 - 예를 들어, 일단 우리가 정신적 장애를 가지는 사람이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허용하면, 우리는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해서, 사회적 부적응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등의 전체주의로 나아간다. 따라서 음식으로 사용되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의 구분 기준으로 종족을 제시할 수 있다.

⇔ 반론: 위의 위험으로 감각 있는 존재들이 익을 무시하는 상황을 교정하려는 시도를 단념할 필요는 없다.


4. 윤리와 호혜성

① 계약론적 주장: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동물은 윤리적 계약의 경계 밖에 있다.

② 반론: 윤리적 판단의 기원에 대한 설명(explanation)과 판단의 정당화(justification)를 구분해야 한다. 윤리학의 기원을 상호 이익을 위한 묵시적인 계약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럴듯하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윤리체계의 옳음이나 그름에 대한 견해를 무엇이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계약론적 윤리관은 상호 이익의 묵시적 계약에 대한 보편화 과정을 인간 공동체라는 경계에서 정지시킨다.

③ 계약론의 문제점:

i) 윤리의 영역에서 동물,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나 유아 등을 배제

ii) 계약의 궁극적 이유는 자기이익이다. 윤리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면 윤리적으로 대우할 이유가 사라진다.

iii) 노예들은 계약 주체가 아니게 된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은 아무런 의무가 없다. 후손들에 대한 의무가 없다.

④ 느슨한 계약론의 대안: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실제 상호작용의 능력과 무관하게, 그런 능력의 소유 시점과 무관하게 상호 협약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도덕적 공동체 내에 있는데, 이들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실제로 그들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느냐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들이 언제 이러한 능력을 가지느냐와 무관하게, 상호적인 협약에 참여할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가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 반론: 더 이상 상호성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다.

제 5 장 살생: 동물


제 1 절 동물도 인격체일 수 있는가?


어떤 동물이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1) 동물이 자의식적이란는 증거들

침팬지 와슈와 저지 원숭이 코코와 미카엘의 수신호 조작, 오랑우탄 찬텍의 수화 학습: 원숭이들은 과거나 미래의 사건을 가리키는 데 수신호를 사용한다.

⇒ 수신호를 하는 원숭이들이 자의식적이라 가정해 보자. 그들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자의식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닌 동물 중 그들이 예외적임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이러한 동물들과 다른 동물들이 자의식적이라는 점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것인가?

(2) 반론: 스튜어트 햄프셔(Stuart Hampshire)와 리히(Michael Leahy) - 사유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동물은 언어가 없으므로 반성할 수단과 미래의 행위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단이 없다. 따라서 이런 동물에게 의도를 부여할 수 없다.

(3) 싱어의 재반론: 언어가 없는 동물도 의도를 가지고 있다. 동물이 개념적으로 생각한다고 가정해야 설명되는 예들이 있다. 열쇠로 상자를 열어 바나나를 얻는 침팬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나뭇잎을 먹는 침팬지, 암컷 유인 시 지배적 수컷을 기만하는 침팬지, 바나나를 얻기 위해 어른 침팬지가 떠날 때가지 기다리는 어린 침팬지 ⇒ 침팬지도 의도를 갖고 추리.



제 2 절 인간 아닌 인격체를 죽이는 것


인간 생명의 신성성 이론

① 주장: 인격체의 생명은 신성하다는 주장. 인간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 특별한 가치를 가지거나 보호되어야 한다.

② 이 주장의 확장: 인간이 아닌 어떤 동물이 인격체라면 이 동물의 생명도 특별한 가치를 갖거나 보호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우리 종족의 생명을 다른 종족의 생명보다 중요시하는 이론을 배격해야만 한다.

→ 파생되는 결과: 다른 종족의 어떤 구성원은 인격체이며, 우리 종족의 어떤 구성원은 인격체가 아니다. [인격체가 생명의 가치 평가에서 중요한 기준이라면,] 인격체인 다른 종족의 구성원보다 인격체가 아닌 우리 종족의 구성원을 죽이는 것이 언제나 더 나쁜 것은 아니다. 즉, 인격체인 침팬지를 죽이는 것은 인격체가 아니고 될 수도 없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고래, 돌고래, 개 또는 고양이도 자의식적이고 미래감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인격체일 가능성이 있다.

④ 의심의 이득: 만약 인격체를 죽이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을 죽이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죽이려는 어떤 존재가 인격체인지 아닌지 의심이 간다면 죽이지 말아야 한다. (사슴 사냥꾼들의 규칙) 이에 따라 동물 살생은 그릇된 일이다.


제 3 절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


1. 동물 살생에 반대하는 공리주의적인 간접적 이유들

① 동물을 죽이는 많은 방식들이 즉각적 죽음을 주지 않는다.

② 한 동물의 죽음이 그 짝이나 그 무리의 다른 구성원에게 주는 영향도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살생이 일으킬 수도 있는 고통이나 아픔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는 살생을 반대할 이유가 될 수 없다.


2. 살생이 고통 주지 않고 다른 것들에 손해를 주지 않을 때 공리주의적 판단

(1) 사전 존재적 견해(prior existence view): 고통보다 많은 쾌락이 있을 것 같은 삶을 살 존재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 육식을 위한 동물 살생은 일반적으로 그릇된 일이다. 육식을 통해 갖게 되는 우리의 이익은 그들이 누릴 쾌락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전체적 견해(total view): 육식의 정당화에 사용됨- 대체가능성 논변

① 주장: 감각 있는 존재가 쾌락과 같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경험을 하는 한, 그러한 존재는 가치 있는 존재이다. 감각 있는 존재는 가치로운 것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며, 내용물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을 수 있듯이 감각 있는 존재는 대체 가능하다. 따라서 육식가들은 일부 동물을 먹음으로써 쾌락의 상실을 야기하지만, 더 많은 동물의 출생을 야기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다른 동물에 부여하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육식을 정당화할 수 있다.

② 대체가능성 논변에 대한 반론

  i) 현대의 공장식 농장에서 고통스럽게 사육되는 동물의 육식을 정당화할 수 없다.

  ii) 육식옹호자들은 왜 가능한 최대다수의 행복한 존재들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더 좋은지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인간을 제거하는 것이 행복을 증진시킨다면?)

③ 솔트의 반론: 존재와 비존재의 비교를 시도하는 것은 혼동된 사고에 기인한다.


(3) 파피트(Derek Parfit)의 가설적 상황: 대체 가능성 논변을 강화하는 상황이다.

 

첫 번째 여인

두 번째 여인

상황

임신 3개월. 태아는 미래의 삶의 질을 낮출 결함을 가짐. 부작용이 전형 없는 약을 먹으면 결함 완치 가능

3개월 내 임신하면 아이는 아이의 삶의 질을 상당히 낮출 수 있는 치료불가능한 결함 가짐. 3개월 후 임신 시 결함 없음.

선택

약을 먹지 않았음

기다리지 않고 임신함

판단

여인은 잘못했음

여인은 잘못하지 않았음

근거

아이에게 해를 끼쳤음. 약을 먹었다면 결함 치료 가능

여인의 대응: 3개월 후 임신했으면 이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임.

① 두 번째 여인이 잘못했다고 믿는다면,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3개월 후 임신했을 때 태어났을 아이를 존재하지 못하게 한 것이 잘못이라고 대답하려면, 다른 사정이 같다면 장애 없는 아이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② 낳을 수 있었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덜 만족스러운 삶의 질을 가진 아이를 낳은 것이 잘못이라고 대답하는 것. 즉,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 그러나 이 대답 역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 파피트의 가설적 상황으로부터 본 대체 가능성의 문제에 대한 대답

① 핵심 문제: 대체 불가능성의 기준 - 가능적인 사람으로부터 실재적인 사람으로 가는 과정의 어떤 단계에서 대체가능성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② 대체 불가능성의 기준: 자신을 일정한 시기에 걸쳐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그래서 더 오래 살기를 갈망할 수 있는 자의식적인 능력이 대체 불가능성의 구별 기준이다.

③ 선호공리주의로부터의 지지: 선호공리주의는 고통이나 행복보다는 선호의 만족에 관심을 갖는다.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는 개별자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의미로도 어떤 양의 행복을 담고 있는 용기로 간주될 수 없다. 자의식적인 존재들의 경우 계속 살기를 욕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존재들의 죽임은 다른 존재들의 태어남으로 보완될 수 없는 손실을 가하는 것이다. 반면, 의식적이지만 자의식을 결여한 존재들은 쾌락과 고통과 같은 경험들의 그릇들이라는 그림에 거의 일치하여 살고 있다. 이런 비자의식적인 존재들의 경우 태어나게 함과 죽임이 서로를 상쇄한다.

④ 보편화 가능성의 시험으로부터의 지지: 내가 자의식적인 존재가 되었다가 의식적이지만 비자의식적인 존재가 된다고 할 때, 오직 전자의 경우에만 미래지향적 욕구를 갖는다. 이 경우에만 죽음은 일시적인 의식의 상실보다도 큰 상실이며 다른 존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보완될 수 없다.


(5) H. L. A. Hart의 비판에 대한 고려

① 하트: 공리주의자에게는 자의식적 존재도 비자의식적 존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체 가능해야만 한다. 선호공리주의자냐 고전적 공리주의자냐 하는 것은 아무 차이가 없다. 즉, 선호 공리주의 역시 극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어떤 선호들이 다른 존재의 선호에 의해 능가될 수 있다면, 왜 그들을 대체한 존재들의 새로운 선호에 의해서는 능가될 수 없는가?

② 반론: 현존 선호의 만족은 좋은 일이지만, 새로운 선호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일괄거래는 현존 선호의 만족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선호를 만들고 충족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③ 선호를 도덕장부 상의 부채로 생각하는 방법

i) 선호를 만드는 것은 도덕장부 상의 부채로 생각될 수 있다. 충족되지 않는 선호를 만들면 부채를 지는 것이고, 이것은 그릇된 일이다. 한 아이를 태어나게 하여 그의 선호가 충족될 수 있다면 상쇄할 수 있는 부채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다.

ii) 파피트의 두 여인에 대한 판단: 둘 모두 잘못이다. 두 여인은 모두 그들이 낳을 수 있었던 아이보다 장부에 보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아이를 쓸데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iii) 이 견해의 문제점: 최선의 삶도 장부에는 조그만 부채를 남기게 된다. 우리들 중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선호를 만들고 충족시키는 것에 대한 도덕장부 모델은 성립하지 않는다.

④ 여행 모델:

i) 한 유아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결정하는 것을 진행 중인 여행을 금지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는 심각하게 나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항해자는 아무런 계획도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ii) 점차 잠정적으로라도 목적지가 정해지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연성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이 행해짐에 따라, 그 여행을 끝내게 하는 것이 점점 더 그릇된 일이 된다.

iii) 이 모델에 따르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 존재들은 교체 불가능하다.

iv) 이 모델에 따르면 비참한 존재를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존재를 실망과 좌절에 빠지도록 되어 있는 여행으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파피트의 두 여인은 모두 같은 정도로 그릇된 일을 했다.



제 4 절 맺는 말


① 동물 중 자신을 과거와 미래를 가지는 개별적 존재로 생각하는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② 이성과 자의식이 없는 동물을 죽이는 경우에는 살생에 반대하는 주장이 약하다. 이런 동물을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그릇되었다면 그것은 이 존재가 담고 있는 쾌락의 감소 때문이다. 이런 동물들이 전체적으로 보아 즐거운 삶을 살지 못했을 것 같은 때에는 직접적으로 그릇된 것이 없다. 또 이들이 상실한 이익은 존재하게 될 다른 동물의 이익에 의해 대체 가능하기도 하다. 한 동물이 즐거운 삶을 살고 있고 고통 없이 죽음을 당하며 그 동물의 죽음이 다른 동물에게 고통을 일으키지 않고 그 동물이 죽지 않았더라면 태어나 살 수 없었을 다른 동물의 삶에 의해 대체 가능한 경우에는, 자의식이 없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 그릇되지 않을 수 도 있다.

③ 그러나 이런 관점의 적용은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 관점은 공장식 농장도 정당화할 수 없고(고통 가함), 야생동물의 살생도 정당화할 수 없다(대체되지 않음).

④ 실천적 도덕원칙의 수준에서,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음식을 얻기 위한 동물 살생은 전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플라톤의『국가•정체』, 박종현 역, 서광사, 1997 

 


1.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


  “저로서는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자의 편익(이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 주장합니다.” 338b (p. 82)

  “적어도 법률(nomoi)을 제정함에 있어서 각 정권(arche)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하여서 합니다. 민주 정체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주 정체는 참주 체제의 법률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정치 체제들도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를, 즉 자기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올바른 것으로서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 및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자로서 처벌하죠.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게 바로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 즉 수립된 정권의 편익이 올바른 것이지요. 확실히 이 정권이 힘을 행사(지배)하기에, 바르게 추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올바른 것은 동일한 것으로, 즉 더 강한 자의 편익으로 귀결합니다.”  338d-339a (pp. 83-84)


소크라테스의 반론: 트라시마코스는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통치자들도 실수를 한다. 어떤 법률은 옳게 제정하지만 어떤 법률은 옳게 제정하지 못한다. 이때 옳게 제정한 것은 자신들에게 편익이 되도록 제정한 법률이고, 옳지 못하게 제정한 것은 통치자들 자신들에게 편익이 되지 못하게 제정한 법률이다. 따라서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통치자들에게 편익이 되지 못하는 것을 따르는 것도 올바른 것이 된다. 따라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자기논박적이다. 339b-339d (pp. 84-85)


트라시마코스의 재반론: 전문가가 실수를 하는 때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한에서만 전문가이다. 그래서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 실수하지 않으며, 실수를 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정하게” 된다. 341a, (p. 88)


소크라테스: 어떤 기술은 그 기술들이 관여하는 대상의 편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 어떤 전문적지식(episteme)도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를 받는 자의 편익을 생각하며 지시”한다. 342d, (p. 92)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 밖의 다른 어떤 통솔(다스림, arche)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또한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342e, (pp. 92-93)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양이나 소를 치는 이들이 양이나 소에게 좋은 것을 생각하며 이들에게 좋은 것을 해주는 것이 사실은 양이나 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양이나 소를 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통치술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래서 “올바름 및 올바른 것이란실은 ‘남에게 좋은 것’, 즉 더 강한 자 및 통치자의 편익이되, 복종하며 섬기는 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인 반면에, ‘올바르지 못함’은 그 반대의 것이어서, 참으로 순진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조종하거니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저 강한 자에게 편익되는 것을 행하여, 그를 섬기며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결코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343b-d (pp. 93-94)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목자 논변에 반박한다. 그는 “모든 다스림(통솔)은 ,그것이 다스림인 한은, 나라의 다스림이든 또는 사사로운 다스림이든 간에, 다름 아닌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돌봄을 받는 쪽을 위한 최선의 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345d-e (p. 98).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도 자진해서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밖의 다른 다스림에서도 자진해서 다스리려 하지 않으며 보수를 요구한다는 경험적 사실 때문이다. 345e, p. 98.


소크라테스는 이어, “각각의 기술이 제공해 주는 이득은 그 특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346c (p. 99) 그래서 전문가가 얻는 보수와 같은 이득은 부수적 이득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통치자들이 얻는 이득은 부수적 이득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기술(techne)이나 다스림(통치: arche)도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줄곧 말해 왔듯, 그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며 지시를 내린다는 것, 다시 말해서 더 약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오. 보시오, 트라시마코스 선생! 바론 그런 까닭으로 해서 방금도 내가 말했던 것이오. 아무도 자진해서 다스리는 일(통치)을 맡아 남의 나쁜 일들을 바로잡는 일을 하려 들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보수를 요구하는데, 이는 자신의 기술로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을 하지도 않으며, 또한 자신의 기술에 다라 지시를 내릴 경우에도, 그런 것을 지시하는 일도 없고, 오히려 그 다스림을 받는 쪽을 위한 최선의 것을 하고 지시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오. 다스리는 일(관직)을 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인 것 같소. 그럿이 돈이든 명예이든 간에, e는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게 벌이 되는 간에 말이오.”라고 말한다. 346e-347a (p. 100)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보다 더 행복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347e (p. 102)

우선, 소크라테스는 “나라나 군대,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 또는 어떤 집단이 올바르지 못하게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에, 만약에 그들이 자기네기리 서로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다면, 그 일을 그들이 조금인들 수행해 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351c (p. 112) 그래서 “올바르지 못함의 기능(ergon)이 이런 것이라면, 즉 그것이 깃들인 곳에는 증오를 생기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자유민들 사이에서건 도는 노예들 사이에서건 간에 일단 생기게 되면, 그것은 서로들 미워하고 대립하게끔 만들고, 다라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351d-e (p. 112) 소크라테스는 이를 한 개인 차원에도 적용한다. 그래서 “올바르지 못함은 한 개인 안에 깃들이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이 본성상 하게 되어 있는 바로 그런 작용들을 하게 될 것으로 나는 생각하오. 첫째로, 그것은 당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갈등이 생기게 하고 한 마음이 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들 것이며,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이 되게끔 만들고 말 것이오.” 352a (p. 113)

소크라테스는 이를 기능, 특히 혼의 기능으로부터 논증하고자 한다.

“어떤 기능이 부여되어 있기도 한 각각의 것에는 ‘훌륭한 상태’(훌륭함: arete) 또한 있다”고 한다. 353b (p. 116). 그래서 “‘그 특유의 훌륭한 상태’에 의해서는 그 기능이 제 할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되지만, ‘나쁜 상태’에 의해서는 나쁘게 수행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353c (p. 117) 이를 혼에 적용하여 “나쁜 상태의 혼으로서는 ‘잘못’ 다스리고(통솔하고) 보살피겠지만, 훌륭한(좋은) 상태의 혼으로서는 이 모든 일을 ‘훌륭하게(잘) 해내게’ 될 게 필연적”이라 주장하며 353e (p. 118), “우리는 앞서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은 혼의 ‘훌륭한 상태’(훌륭함, 덕)이지만, ‘올바르지 못함’은 그것의 ‘나쁜 상태’ (나쁨, 악덕)라는 데 동의”했음을 상기시키면서 353e (p. 118), “올바른 혼과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게(잘) 살게 되겠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353e (p. 118). 결과적으로 “훌륭하게(잘) 사는 사람은 어쨌든 복받고 행복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이는 그 반대일 것”이며 354a (p. 118), “올바른 사람은 행복하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54a (p. 119)






2.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국가』 2권에서 올바름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이론적으로(in theory; 말로) 세워 보는 국가


“어쩌면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아내기도 더 쉬울 걸세. 자네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도록 하세나.” 368e-369a (p. 146)

“만약에 우리가 이론상으로 수립되고 있는 한 나라를 관찰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나라의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 역시 생겨나고 있는 걸 보게 되겠지?” 369a (p. 146)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라가 생기는 것은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일세.” 369b (p. 146)

“나라를 수립시키는 것은 우리의 ‘필요’가 하는 일인 것 같으이.” 369c (p. 147)

“여러 가지 필요 중에서도 첫째이며 가장 중대한 것은 생존을 위한 음식물의 마련일세.”  369d (p. 147)

“그리고 둘째 것은 주거의 마련일 것이며, 셋째 것은 의복 및 그와 같은 유의 것들의 마련일세.” 369d (p. 147)


공동선(common good)을 지향하는 국가

소크라테스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의 일(ergon)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koinon)으로 제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369e(pp. 147-148). 그래서 “각 부류의 사람들이 생산하게 되는 물건들을 이 나라 자체 안에서는 서로들 어떻게 나누게 되겠는가?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협력(공동) 관계’(koinonia)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었지.”라고 말한다. 371b (p. 151. 즉,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나라는 협력 공동체이다. 노동분업에 의해 각장의 필요를 서로서로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함에 있어서 유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어느 한 집단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행복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 내서 이들을 이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이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를 행복하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네.” 420b-c (p. 258)


“나라 전체를 염두에 두고서, 나라에 그런 행복이 생기도록 지켜보는 한편, 이들 보조자와 수호자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일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일꾼들로 되게끔 만들고 설득해야 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강대해지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히게 되었을 때에야, 각각의 집단으로 하여금 제 각각의 성향이 제공하는 대로 행복에 관여하도록 허용해야만 하는 것일지를 우리는 검토해야만 하네.” 421b-c (p. 260)






3.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국가의 세 계급


“각각의 것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kata physin) 적기에 하되,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에 있어서이네.” 370c (p. 149)


수호자

“수호자들의 일(기능: ergon)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만큼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를 요구하는 반면에,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도한 요하는 것일세.” 374d-e (p. 159)

“장차 우리 나라의 ‘훌륭하고도 훌륭한’ 수호자로 될 사람은 의당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 격정적이고 날래며 굳셀 걸세.” 376c (pp. 163-164)

수호자들에게 시가와 체육 등을 교육한 다음에 할 일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야 바로 이들(수호자들) 중에서 누가 ‘다스리고’, 또 누가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하는게 아니겠는가?” 412b (p. 243) 그래서 “통치자들은 수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어야만 되니까, 이들은 나라를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412c (p. 243)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자신을 단정하고 조화로운 사람으로 드러내 보인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가장 유용한 사람일 걸세.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나 청연들 사이에서 그리고 어른들 사이에서 언제나 그런 시험을 거쳐 더럽혀지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을 우리는 나라의 통치자 및 수호자로 임명해야 하네.” 413e-414a (p. 246)

“그러니까 이들이야말로 외부의 적들에 대하여서도 그리고 내부의 동료들에 대하여서도 참으로 ‘완벽한 수호자들’이라 불러 지당할 것인즉, 이들은 내부의 동료들이 나라를 해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한편으로, 외부의 l적들이 그럴 수도 없도록 하겠지? 하지만, 이제껏 우리가 수호자들이라 불러 왔던 그 젊은이들은 통치자들의 신념을 위한 보조자들 및 협력자들이라 불러 마땅할 테고?” 414b (p. 247)

이 대목에서 보듯이 수호자에서 통치자와 보조자가 나타난다.

(신이 통치자는 황금, 보조자는 은, 생산자(농부와 장인들)에게는 청동을 섞어서 태어나게 했다는 설화. 415a-c (pp. 249-250).


따라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국가는 통치자로서의 수호자, 보조자로서의 수호자, 생산자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보조자인 수호자들이 시민들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를 제안한다.

“첫째로, 아무도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어떤 사유 자산도 가져서는 아니 되네. 그 다음으로는, 누구든 원하는 자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그런 집이나 곳간은 이들 중의 누구에게도 있어서는 아니 되네. 그리고 생활 필수품은, 절제할 줄 알고 용감한 전사들이 필요한 정도만큼의 것을 다른 시민들한테서 이들의 수호에 대한 보수로서 일정하게 정하여 받되, 이는 이들의 연간 소요량을 초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의 것이어야만 하네. 또한 이들은 공동 식사를 하면서, 마치 야영하는 군인들처럼, 공동으로 생활해야만 하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들에게 일러 주어야 할 것이니, 이들은 자신의 혼 안에 신들이 준 신성한 금은을 언제나 지니고 있어서, 이에 더하여 속인의 금은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도한 신에게서 받은 그 소유물을 사멸하는 인간의 소유물과 섞음으로써 더럽히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짓인데, 이는 다중의 화폐와 관련해서는 하고많은 불경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들의 것은 오염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일세.”416d-417a (p. 252)






4. 플라톤의 4주덕, 특히 올바름에 대하여


“물론 이 나라가 지혜롭고 용기 있으며 절제(절도) 있고 또한 올바를 것이라는 건 아주 분명하이.” 427e (p. 274)


1. 지혜(sophia):

“우리가 자세히 말한 이 나라는 정말로 지혜로운 나라일 것으로 내게는 생각되네. 그건 이 나라가 분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428b (p. 274)

“그렇지만 바로 이것, 즉 분별은 일종의 앎(episteme)인 것이 분명하이. 사람들이 분별 있게 되는 것은 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게 확실하겠기 때문일세.” 428b (p. 274)

“이제 막 우리에 의해서 수립된 이 나라에 사는 시민들 중의 어떤 사람들에겐 이런 어떤 지식이 있는가? 즉 이 나라의 부분적인 것들 중의 어떤 것에 관련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전체와 관련해서 어떤 방식으로 이 나라가 대내적으로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가장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를 숙의 결정해 주게 될 그런 지식 말일세.” 428c-d (p. 275) (이것이 수호술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지혜로운 것은 수호자들이 수호술이라는 지혜를 갖고 때문이라 본다.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그 작은 부분, 즉 각자 안에서 지배를 하며 이것들을 지시한 그런 부분에 의해서이니, 이 부분은 그 나름으로 이들 세 부분의 각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들 셋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유익한 것에 대한 지식을 그 자신 속에 지니고 있네.” (개인의 혼의 지혜와 관련하여)


2. 용기(andreia)

“내 말은 용기란 일종의 보전이란 뜻일세.” 429c (p. 277)

“법에 의한 교육을 통해, 두려워할 것들이 무엇무엇이며 또 어떠한 것들인지, 이와 관련해서 생기게 된 소신(판단)의 보전일세.” 429c (p. 277)

“두려워할 것들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관한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판단)’의 지속적인 보전과 그런 능력을 나로서는 용기라 부르며 도한 그렇게 간주하네.” 430b (pp. 278-279)

“나라를 위해 전쟁을 하고 군인으로 복무하는 이 부류 이외의 다른 어떤 걸 보고서 그 나라를 비겁한 나라니 또는 용기 있는 나라니 하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429b (pp. 276-277)

즉, 소크라테스는 한 국가가 용기 있는 것은 수호자들이 용기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절제

“절제란 어쩌면 일종의 질서요, 어떤 쾌락과 욕망의 억제일 걸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이긴다’(자기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표현을 써서 ... 말하듯이 말일세. 430e. (pp. 280-281)

“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한결 나은 것과 한결 못한 것이 있어서, 성향상 한결 나은 부분(면)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할 경우, 이를 가리켜 ‘자기 자신을 이긴다’고 말하는데, 이는 어쨌거나 칭찬하는 것일세.” 431a (p. 281)

“단순하며 절도 있는 욕구는, 지성(nous)과 바른 판단을 아울러 갖춘 헤아림(추론)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어서, 소수의 사람에게서, 성향에 있어서도 가장 훌륭하지만 교육도 가장 훌륭하게 받은 사람들에게서 만나 보게 될 걸세.” 431c (p. 282)

“이곳에서는 다수의 미천한 사람들의 욕구가 소수의 한결 더 공정한 사람들의 욕구와 슬기에 의해 제압되고 있”다. 431c-d (p. 282) 그래서 욕구가 제압되는 것을 절제라 주장한다.

“그건 용기나 지혜는 그 각각이 그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만 있어도, 뒤엣것은 그 나라를 곧 지혜로운 나라로, 반면에 앞엣것은 그걸 용기 있는 나라고 되게 하지만, 절제는 그러질 못하기 때문일세. 절제는 정말로 나라 전역에 걸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협화음처럼, 가장 약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가장 강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 그리고 중간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같은 노래를 합창함으로써 전음정을 통하여 마련되는 것일 세. ... 이 ‘한마음 한뜻’이, 즉 나라에 있어서나 한 개인에 있어서 성향상 한결 나은 쪽과 한결 못한 쪽 사이에 어느 쪽이 지배를 해야만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절제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옳을 걸세.” 431e-432b (pp. 283-284)

절제는 시민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피지배자는 복종을, 지배자는 지배를 하는 것이다.


4. 올바름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하기 시작할 당초부터 언제나 준수해야만 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게, 또는 그것의 일종이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일세. ... 각자는 자기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에서 자기의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에 종사해야 된다는 것이었네.” 433a (p. 285)

“또한 더 나아가서는 ‘제 일을 하고 참견하지 않는 것’이 올바름(올바른 상태)이”다. 433a (p. 285)

“이것이, 즉 ‘제 일을 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게 ‘올바른 상태’(올바름)인 것 같으이.” 433b. (p. 286)

“‘제 것의 소유’와 ‘제 일을 함’이 올바름(올바른 상태)이라는 데 합의를 보았네그려.” 433e-434a (p. 288)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국가에서의 올바름을 개인에게서의 올바름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한다.

“‘올바름’의 개념(형상) 자체의 관점에서는 올바른 사람은 올바른 나라와 아무런 차이도 없고, 닮은 것일 걸세.”  435b (p. 290)

“실은 한 나라가 올바른 나라인 것으로 생각된 것은 이 나라 안에 있는 성향(physis)이 다른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했을 때이며, 그리고 또한 이 나라가 절제 있고 용기 있으며, 또한 지혜로운 나라인 것도 바로 이들 세 부류가 처한 상이한 처지(감정 상태: pathos)와 상이한 습성(성격 상태: hexis)으로 인하여서였네.” 435b (pp. 290-291)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종류들을 자신의 혼 안에 지니고 있어서, 나라에 있어서의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로 인해서 나라의 경우와 똑같은 이름들로 불릴 자격이 당연히 있다고 우리는 판단할 걸세.” 435b-c (p. 291)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혼이 헤아리게(추론하게)되는 부분을 혼의 헤아리는(추론적, 이성적) 부분이라 부르는 반면, 그것으로써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 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헤아릴 줄 모르는)이며 욕구적인 부분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는 않을 걸세.” 439d (p. 300)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격정(기개: thymos)이 욕구도 아니고 이성적인 부분도 아니라는 논의를 펼친다. 439e-440c (pp. 300-303)

“나라 안에 있는 것들과 똑같은 부류의 것들이 개개인의 혼 안에도 있고, 그 수도 똑같다는 데 대해서 우리가 훌륭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네.” 441c (p. 303).

즉, 나라에 통치자, 보조자, 생산자가 있듯이 이에 대응하여, 인간의 영혼에도 이성적인 부분, 격정(기개), 욕구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복합성을 본 사람이다.


“사람이 올바르게 되는 것도 나라가 올바르게 된 것과 똑같은 방식에 의해서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걸로 나는 생각하네.” 441d (p. 304)

“실상 이 나라가 올발랐던 것이 그 안에 있는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함’에 의해서였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잊지 않고 있을 게 확실하이.” 441d (p. 304)

“우리 각자의 경우에도, 자신 안에 있는 부분들의 각각이 제 일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올바른 사람으로, 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도리 것이라는 점일세.” 441d-e (p. 304)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들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443d (p. 308)

“이와는 달리 ‘올바르지 못함’은 이들 세 부분간의 일종의 내분이며, 참견과 간섭, 그리고 혼 전체에 대한 어떤 일부의 모반임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444b (p. 309)






5. 플라톤의 이상 국가: 최선자 정체 - 철인왕(philosopher-king)이 통치하는 국가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도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과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다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껏 우리가 논의를 통해서 자세히 말해 온 그 정체가 결코 가능한 한도까지 성장하여 햇빛을 보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473c-e (p. 365)

“우리는 철학자도 지혜(sophia)를 욕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지혜는 욕구하되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자라고 주장하지 않겠는가?” 475b (p. 369)

“[참된 철학자들이란] 진리(alegheia)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하네.” 475e (p. 370)

“있는 것(실재: to on)에는 인식(앎: genosis)이, ‘있지 않은 것’(비실재)에는 필연적으로 무지가 상관할진대, 그것들 ‘사이의 것’에 상관하는 것으로는 무지와 인식(앎: episteme) ‘사이의 어떤 것’을 찾아야만 되지 않겠는가?” 477a-b (p. 374)

“그런데 우리가 의견(판단: doxa)이라고 말하는 게 있겠지?” 477b (p. 374)

“인식은 ‘있는 것’(실재)에 관계하며,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겠지?” 478a(p. 376)

“반면에 ‘판단’(의견)은 ‘의견을 갖게 됨’이겠지? 478a (p. 376)

“각각의 그 자체의 것들을, 따라서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들’을 보는 사람들의 겨우는 어떤가? 그러니까 이들은 인식을 하지, ‘의견을 갖는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479e (p. 381)

“‘각각의 실재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들)로 불러야지 의견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불러서는 아니 되겠지?” 480a (p. 382)

“‘좋음의 이데아’가 ‘가장 중요한(최고의) 배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 이데아 덕분에 올바른 것들도 그 밖의 다른 것들도 유용하고 유익한 것들로 된다는 것을 자네는 여러 차례 들었을 테니까 말일세.” 505a (p. 428)


태양에의 비유(507e-509b)(pp. 435-439)

“그러니까 ‘보는’(‘봄’의) 감각과 ‘보이는’(‘보임’의) 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종류의 것에 의해, 즉 서로를 연결해 주는 다른 어떤 멍에들보다도 더 귀한 멍에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네. 빛이 정녕 귀하지 않은 게 아니라면 말일세.”

“그러니까 원래 시각은 이 신(태양)에 대하여 이런 관계에 있겠지?”

“시각 자체도, 그리고 시각이 그 속에 있게 되는 것, 즉 우리가 눈이라 일컫는 바로 그것도 태양은 아닐세.”

“그러나 눈은 감각과 관련되는 기관들 중에서는 어쨌든 태양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일세.”

“그런데 눈은 자기가 갖는 이 힘 또한 태양에서, 마치 넘쳐 흐르는 것을 받듯, 분배받아 갖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태양도 시각이 아니고, 이(시각)의 원인이 되는 것이어서, 시각 자체에 의해 보이게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태양을 ‘좋음’의 소산(소생)으로, 즉 ‘좋음’이 이것을 자기와 ‘유비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생기게 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나. 다시 말해, ‘좋음’이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지성에나 알려질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지성(정신: nous)과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에 대해서 갖는 바로 그런 관계를 태양은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 ‘시각’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갖는다고 말일세.”

“혼의 경우도 이렇게 생각해 보게. 진리(aletheia)와 실재가 비추는 곳, 이곳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이를 지성에 의해 대뜸 알게 되고 인식하게 되어,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h보이네. 그러나 어둠과 섞인 것에, 즉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의견’(판단: doxa)을 갖게 되고, 이 의견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가짐으로써 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이번에는 지성을 지니지 못한 이처럼 보인다네.”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dynamis)을 주는 것은 ‘좋음의 이데아’라고 선언하게. 이 이데아는 인식(episteme)과 진리의 원인(aitia)이지만, ‘인식되는 것’이라 생각하게나. 반면에 이 둘이, 즉 인식(앎: gnois)과 진리가 마찬가지로 훌륭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이 이데아는 이것들과도 다르며 이것들보다 한결 더 훌륭한 것이라 믿는다면, 자넨 옳게 믿게 되는 걸세. 그러나 인식과 진리를, 마치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의 빛과 시각을 태양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만, 태양으로 믿는 것은 옳지 않듯,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이들 둘을 ‘좋음’을 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으나, 어느 쪽 것도 [바로] ‘좋음’이라 믿는 것은 옳지 않다네. 오히려 ‘좋음’의 처지(상태: hexis)를 한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네.”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의 ‘인식됨’이 가능하게 되는 것도 ‘좋음’으로 인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ousia)을 갖게 되는 것도 그것에 의해서요, ‘좋음’은 [단순한] ‘존재’(ousia)가 아니라, 지위와 힘에 있어서 ‘존재’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나.



  7권은 동굴의 비유로 시작한다. 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것을 설명하는데, 사실 이것은 계몽(enlightenment)과 다름없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것이 계몽인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계몽된 자로서의 철학자가 계몽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다른 죄수들(사람들)로 하여금 좋음의 이데아를 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계몽이 아니라 인간 전체로서의 계몽을 말한 것과 유사하게 읽힌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통치자가 되어야 할 철학자가 좋음의 이데아를 관조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에 머무르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한다.

“나라의 수립자들인 우리의 할 일은 가장 훌륭한 성향(자질)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앞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최고의) 것이라고 말한 배움에 이르도록, 그래서 ‘좋음’을 보게끔 그 오르막을 오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되, 이들이 일단 이 길을 올라, 그것을 충분히 보게 되면, 이제 이들이 허용받고 있는 걸 이들에게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일세.” 519c-d (p. 458)

“바로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할 분, 저들 죄수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서 저들과 함께 노고와 명예를, 이게 다소 하찮은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간에,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일세.” 519d (p. 458)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며, 이들로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로 하여금 더 못한 삶을 살도록 만들게 될 텐데요?” 그가 말했네. 519d (p. 458)

“여보게 자넨 또 잊었네. 법(nomos)은 이런 것에, 즉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각별하게 잘 지내도록(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걸 말일세.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에 의해서 화합하게 하고 각자가 공동체에 이롭도록 해 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그런다네. 또한 법은 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생기도록 하는데, 이는 각자가 내키는 대로 향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나라의 단합을 위해 이 사람들을 십분 이용하기 위해서일세.” 519e-520a (p. 458)

“글라우콘, 더 나아가 이 점에 유의하게나. 즉 우리의 이 나라에서 철학자들로 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지켜주도록 우리가 강요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들에게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올바른 걸 이들한테 말해 주게 된다는 걸 말일세. 우리는 이렇게 말할 걸세. ‘...하지만 우리느니 여러분 자신들과 함께 여느 시민들을 위해, 마치 벌떼 사이에 있어서 지도자들 및 왕들처럼 여러분을 탄생시켜서는, 여느 시민들보다도 더 훌륭하고 완벽하게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또한 양쪽 생활 다에 더 잘 관여할 수 있도록 했소.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느 시민들과의 동거를 위해 각자가 번갈아 내려가서는,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오.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그곳 사람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보게도 될 것이며, 각각의 상들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들의 상들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여러분이 아름다운 것들과 올바른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 진실된 것을 이미 본 탓이오. 또한 이렇게 해서 우리와 여러분의 이 나라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경영될 것이니, 결코 꿈 속에서 경영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 520a-c (pp. 458-460)



정체(Politeia)의 종류와 변혁: 정체의 변화의 원인은 관직 장악 집단의 내분

  8권 이하에서는 정체의 유형에 대해서 논의한다. 그래서 ‘최선자 정체 > 명예 지상 정체 > 과두 정체 > 민주 정체 > 참주 정체’의 도식을 설명한다. 이 각 정체에 대응하는 혼의 상태도 함께 다루는데, 결국 어떤 상태의 혼이 지배적이냐에 따라 각 정체 유형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위의 도식은 좋음의 상태에 따른 도식이면서도 정체가 나쁜 상태로 변화해 가는 순서를 나타낸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한 마디로 내분이라 할 수 있다.


① 최선자 정체: 철인왕이 통치하는 정체, 아내 공유, 아이들에 대한 공동 육아와 교육

② 명예지상정체: 승리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 잘못된 동숙으로 인해 철과 동의 성분이 든 사람들 등장하여 재화의 사유화와 노예제 수립. 이 정체의 통치자는 평화보다는 전쟁 취향인 사람들이며 재물에 대해 욕심을 낸다. 기개(격정)의 덕이 우세하여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정체이다.

③ 과두정체(oligarchia): 평가 재산에 근거한 정체. 부자들이 통치하고 가난한 사람은 통치에 관여하지 못한다. 명예지상정체는 재화의 사유화로 인해 부를 찬양하게 됨으로써 과두정체로 변화한다.

④ 민주정체(demokratia): 가난한 사람들이 내란을 일으켜 승리하게 되면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시민권과 관직을 배정하고, 관직은 추첨에 의해 할당된다. 자유 시민인 까닭에 이들은'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자유가 개개인과 각 가정에까지 스며들어 무정부상태가 된다.

⑤ 참주정체(tyrannis): 부의 분배를 미끼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선동하여 참주가 된 자는 적을 숙청한다.





Immanuel Kant, 『윤리 형이상학 정초(Grundlegun zur Metaphysik der Sitten)』, 백종현 역, 아카넷, 2005.




머리말




(1) 이성인식의 구별

① 질료적 이성인식: 어느 객관의 고찰. 특정한 대상들과 그 대상들이 종속되는 법칙들을 다루는 질료적 철학

ⓐ 물리학 - 자연의 법칙을 다룸, 자연이론. 경험 대상인 자연에 법칙들 규정함.

ⓑ 윤리학 - 자유의 법칙을 다룸, 윤리학. 자연에 의해 촉발되는 의지에 법칙들 규정함.

② 형식적 이성인식: 객관들의 구별 없이, 순전히 지성과 이성 자신의 형식 및 사고 일반의 보편적 규칙들 다룸

ⓒ 논리학: 형식적 철학. 사고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은 경험에서 취한 근거들에 의존할 수 없으므로 어떤 경험적 부분도 가질 수 없다.


(2) 순수 철학: 이론들을 오로지 선험적 원리들로부터 개진하는 철학, 경험적 부분 배제

① 논리학: 순전히 형식적인 것

② 형이상학: 지성의 특정한 대상들에 제한된 순수 철학

ⓐ 자연 형이상학: (경험적인) 물리학에 앞에 있음

ⓑ 윤리 형이상학: 실천적 인간학 앞에 있음


(3) 선험 법칙으로서의 도덕 법칙(『윤리형이상학 정초』, pp. 68-69)

① 단지 경험적인 인간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서 독립적인 순수 도덕철학의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의무와 윤리적 법칙들의 통상적인 이념으로부터 그러한 도덕철학이 있어야 함이 저절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② 만약 법칙이 도덕적으로, 즉, 책무의 근거로서 타당해야 한다면, 그 법칙은 절대적 필연성을 동반해야만 한다. (예: ‘너는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책무의 근거는 인간의 자연본성이나 세계 내의 정황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오로지 순수 이성의 개념들 안에서만 선험적으로 찾아야 한다.

③ 한낱 경험의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는 훈계는 경험적 근거들에 의지하고 있는 한, 실천적 규칙일 수는 없지만 도덕 법칙일 수는 없다.

④ 도덕 법칙은 경험적인 것을 품고 있는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며, 모든 도덕철학은 전적으로 순수한 부분에 의거하고,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선험적 법칙들을 수립해 준다.


(4)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윤리형이상학 정초』, pp. 69-72)

① 선험적으로 우리 이성 안에 놓여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원천들을 탐구하기 위해, 그리고 윤리들 자체를 올바르게 반정할 실마리와 최상의 규범이 필요하기 때문에, 윤리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②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윤리 법칙에 알맞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윤리 법칙을 위하여(때문에) 일어난 것이어야 한다.

③ 윤리 법칙에 알맞은 것은 단지 우연적일 수 있는데, 비윤리적 근거는 때때로 합법칙적인  행위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④ 윤리 법칙은 순수성과 진정성에 있어 순수 철학이 아닌 곳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순수 철학(형이상학)이 선행해야만 한다.

⑤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의 의욕 일반의 작용들과 조건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5) 『윤리 형이상학 정초』 저술에 대한 변(『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2-74)

① 형이상학을 위해 순수 사변 이성 비판 저술, 윤리 형이상학의 기초로는 순수 실천 이성 비판. 그러나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전자만큼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이성은 도덕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가장 평범한 지성에서조차도 쉽게 매우 정확하고 세밀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동일한 단 하나의 이성만이 있을 수 있고, 순전히 그 적용에서만 구별된다. 따라서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과의 통일은 어떤 공동의 원리에서 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완벽함을 성취할 수 없기에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라는 명칭 대신 ‘윤리 형이상학 정초’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③ 윤리 형이상학은 토대적인 예비 작업으로 대중적이고 또한 평범한 지성에도 걸맞을 수 있다.


(6) 정초의 목적과 집필 방식(『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4-76)

①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는 도덕성의 최상 원리의 탐색과 확립이다.

② 저술 방식:  만약 사람들이 보통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인식의 최상 원리를 규정하는 데에 이르는 분석적인 길을 취하고, 다시금 거꾸로 이 원리의 검토 및 이 원리의 원천들에서 출발하여, 그 원리가 사용되고 있는 보통의 인식에 이르는 종합적인 길을 취한다.



제 1 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 이행




(1) 선의지(『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7-80)

① 선의지: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

② 선의지가 없으면 지성, 기지, 판단력, 그밖의 정신의 재능들, 용기, 결단성, 초지일관성 같은 기질상의 성질들은 극도로 악하고 해가 될 수 있다.

③ 권력, 부, 명예, 건강, 행복도 마음 및 마음의 전체 원리에 미치는 영향을 올바르게 하고, 보편적이며 합목적적으로 만들어 주는 선의지가 없으면 악해진다.

④ 선의지는 행복을 누릴 품격[자격] 있음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을 이룬다.

⑤ 여러 성질들은 내적인 무조건적인 가치는 갖지 못하는 것으로 선의지를 전제한다.

선의지는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결과는 성취 또는 목적에 대한 유용성으로 선한 것이 아니다.

⑦ 선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킬 능력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이 의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해 오직 선의지만 남더라도, 선의지는 그 자신 안에 온전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으로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2) 본능: 행복이 목적이 아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0-82)

① 이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자에게 보존과 번영, 즉 행복이 자연의 본래 목적이라면, 본능에 의해 규칙이 정확하게 지시될 수 있을 것이고, 행복이라는 목적도 더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② 행복이 목적이라면, 자연은 이성이 실천적 사용에서 이성 스스로 행복과 그 수단을 구상해 내는 오만불손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방지했을 것이다. 즉, 자연은 목적과 수단의 선택을 본능에 믿고 맡겼을 것이다.

③ 이성이 행복에 집착할수록 인간은 참된 만족에서 멀어진다. 게다가 사람들은 행동거지에 대한 이성의 영향을 허락하지 않는 세속적인 부류의 인간을 오히려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④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은 본래 행복이 아니라 훨씬 더 품격 있는 실존의 의도에 맞춰져 있고, 인간의 사적 의도는 최상의 조건인 이 의도 뒤에 있어야 한다.


(3) 이성: 인간 실존의 의도에 대한 이념이 존재한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2-84)

이성은 의지에 영향을 미쳐야 할 실천 능력으로서 품수[선천적으로 타고남]되어 있고,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다른 의도를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를 낳는 것이어야 한다.

② 그러므로 이 의지는 유일한 선, 전체 선일 수는 없으나 최고선이어야만 하고, 행복을 포함하여 여타의 모든 선을 위한 조건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성의 개발은 행복의 달성을 갖가지 방식으로 제한한다.

③ 이성은 선의지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최고의 실천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성만이 규정하는 목적을 실현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다.


(4) 의무에 대한 명제 세 가지

더 이상의 의도가 없는 선의지라는 개념은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는 없으며 단지 계발될 필요만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 개념은 행위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언제나 상위에 있어 여타 모든 가치의 조건을 이룬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 84)


제 1 명제: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4-89)

ⓐ 의무에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된 모든 행위는 배제한다.

ⓑ 의무에 맞기는 하지만 의무에 대한 경향성 없이 다른 경향성으로 인해 한 행위들도 배제한다.

ⓒ 의무에 맞으며 주관이 그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는 행위도 배제(예: 가게 주인이 어리숙한 고객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것. 이익이 그런 정직을 요구했을 수도 있으므로)

ⓓ 예

ⅰ) 생명 보전은 의무이며 누구나 생명 보존에 대한 직접적인 경향성을 가진다. 그러나 생명 보전이 의무에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도덕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ⅱ) 선행(동정심)은 의무이고 매우 사랑받을 만한 일이지만, 이것은 명예에 대한 경향성 같은 것이어서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존중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ⅲ)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의무이다. 경향성이 아니라 의무에서 자신의 행복을 촉진할 때에야 그 태도에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ⅳ) 사랑도 의무이다. 그러나 의무로부터 하는 선행은 실천적 사랑이지 정념적 사랑이 아니다. 경향성은 지시명령할 수 없는 반면, 실천적 사랑만이 지시명령될 수 있다.

제 2 명제: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의욕의 원리에 의존한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9-90)

ⓐ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그 도덕적 가치를 행위 대상의 현실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욕구능력의 모든 대상과는 무관하게 행위를 일어나게 한 의욕의 원리에 의존한다.

ⓑ 만약 행위가 의무로부터 말미암아 일어난다면, 의지에서 모든 질료적 원리는 제거된 것이므로, 의지는 의욕 일반의 형식적 원리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제 3 명제: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1-92)

ⓐ 결과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경향성에 대해서는 존경을 가질 수 없다. 경향성을 시인하고 좋아할 수 있을 뿐이다.

ⓑ 결과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근거로서 나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이, 경향성을 압도하는 것, 선택에서 경향성을 배제하는 것, 즉, 순전한 법칙 그 자체만이 존경의 대상일 수 있고, 그와 함께 명령일 수 있다.

ⓒ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경향성의 영향과 의지의 일체 대상을 전적으로 격리해야 한다.

ⓓ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법칙, 주관적으로는 이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이다. 따라서 나의 모든 경향성을 단절하고, 그러한 법칙을 준수한다는 준칙만이 남는다.

(참고 1: 준칙은 의욕의 주관적 원리이고, 객관적 원리는 실천 법칙이다.)

(참고 2: 법칙에 의한 의지의 직접적 규정 및 그 규정에 대한 의식이 존경이다.)


(5) 법칙(『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2-97)

법칙의 표상이 의지의 동인이며 윤리적이다: 최고의 무조건적인 선은 오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서만 마주칠 수 있다. 의지의 동인이 예상되는 결과가 아니라 법칙의 표상인 한에서, 이성적 존재자에게서만 생기는 이 법칙의 표상 자체만이 윤리적이라 불릴 수 있는 탁월한 선을 이룰 수 있다. 이 탁월한 선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하는 인격 자체 안에 이미 현전한다.

② 의지를 단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의지를 규정해야 한다. 의지에서 모든 충동을 제거했으므로, 남는 것은 행위 일반의 보편적 합법칙성뿐이고, 이것이 의지의 원리로 쓰여야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합법칙 일반이 의지의 원리이다: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어야만 할 것을 내가 의욕할 수 있도록 오로지 그렇게만 처신해야 한다.

ⓐ 거짓 약속의 예: 내가 궁지에 빠졌을 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의도에서 어떤 약속을 해서는 안 되는가?

i) 영리한 거짓 약속[영리의 준칙]: 거짓말로 이 곤경을 벗어나더라도 거짓말로 인한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신용의 훼손으로 인해 나중에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음을 숙고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점을 숙고하더라도 이것은 의무로부터가 아니라 걱정스런 결과에 대한 숙고일 뿐이다.

ii) 의무의 원리: 내가 만약 의무의 원리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악하다. 거짓 약속이 의무에 맞는지 알기 위해 보편화 테스트를 한다. 나의 준칙[곤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리함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에 정말로 만족할 것인가? 이에 대해, 비록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의욕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법칙에 따르게 되면 약속이라는 것이 아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거짓말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거짓말은 허사이고, 설사 그들이 믿는다 해도 그들은 나에게 똑같은 화폐[거짓말]로 되갚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리함의 준칙은 법칙이 되자마자 자기파괴적이다.

④ 보편화 테스트: 나의 의욕이 윤리적으로 선하기 위해 내가 행해야만 할 것을 판별하는 방법

ⓐ 보편화 테스트: ‘너 또한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그 준칙은 버려야 한다.

ⓑ 보편적 법칙 수립에 대한 존경: 이성은 나에게 이런 보편적 법칙 수립을 존경하도록 강요한다.

ⓒ 존경과 의무: 존경은 경향성에 의해 칭찬받는 것의 모든 가치를 훨씬 능가하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다. 그리고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나의 행위들의 필연성이 의무를 형성한다. 의무는 그 가치가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 자체로 선한 의지의 조건이므로, 여타의 모든 동인은 이 의무에게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6) 평범한 인간이성의 도덕 인식에서 도덕의 원리에 도달(『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7-101)

① 평범한 이성은 도덕 원리를 가치판단의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성에게 자신의 원리에 주목하도록 하기만 하면 선악과 의무의 구별을 쉽게 할 수 있다.

② 평범한 인간지성에서 그 실천적 가치판단능력이 이론적 가치판단능력보다 월등히 앞선다. 평범한 이성이 경험법칙들과 감관의 지각들에서 이탈한다면, 이성은 순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실천적인 것에 있어서 가치판단력은, 평범한 지성이 실천 법칙들로부터 모든 감성적인 동기들을 배제할 때, 그 자체가 제대로 장점을 드러낸다. 즉, 평범한 지성은 사태에 잘 적중할 것이다.

③ 자연적 변증학: 의무의 엄격한 법칙들에 반대하여 궤변을 늘어놓고, 그 법칙들의 타당성을 우리의 소망이나 경향성들에 더 맞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짓은 평범한 실천 이성조차도 인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인간 이성은 자신의 권역에서 벗어 나와 실천 철학의 분야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따라서 실천적인 평범한 이성도 이론 이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대한 완벽한 비판을 필요로 한다.



제 2 절 대중적 윤리 세계지혜에서 윤리 형이상학으로 이행



(1) 의무 개념을 경험적 실례에서 도출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

① 실천 이성의 평범한 사용에서 의무 개념을 도출한 것은 우리가 의무 개념을 경험개념으로 취급한 것은 아니다. 경험에 주목한다면 순수한 의무로부터 행위하는 마음씨에 관한 확실한 실례를 들 수 없다.

② 의무에 맞는 행위의 준칙이 오로지 도덕적 근거들과 의무의 표상에만 의거한 경우는 단 하나라도 경험을 통해서 결정하기는 단적으로 불가능하다.

③ 인간애 때문에 우리 행위들이 대부분 의무에 맞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위들의 의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자기이지, 번번이 자기부정을 요구할, 의무의 엄격한 지시명령이 아니다. 의무에 대한 우리의 이념들의 함몰을 막아주고, 의무의 법칙에 대한 공고한 존경을 영혼 중에 보존하는 것은 오로지 이성이 현상과 독립적으로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지시명령한다는 명확한 확신뿐이다.

④ 윤리성의 개념에서 진리성 또는 어떤 가능한 객관과의 관계를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윤리성의 법칙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 일반에게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어떠한 경험도 명증적 법칙들의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지 못한다.

⑤ 모든 실례는 근원적인 실례가 될 만한 것인지 도덕성의 원리에 따라 평가되어야만 한다. 즉, 어떤 실례도 도덕성의 개념을 맨 위에서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윤리적인 것에서 모방이란 없으며, 실레들은 단지 격려하는 데 쓰일 뿐이다.


(2) 대중적 실천 철학이 아닌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

① 윤리 이론을 형이상학 위에 세우고, 그 뒤에 대중성을 통해 유포시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첫 단계의 연구에서부터 대중성을 좇는 것은 불합리하다.

②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 윤리성의 원리들은 온전히 선험적으로, 일체의 경험적인 것에서 자유롭게, 단적으로 순수한 이성개념들 중에서만 만날 수 있다면, 이 연구를 순수한 실천적 세계지혜[철학] 또는 윤리 형이상학으로 따로 떼어내어 완벽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③ 윤리 형이상학은 의무들에 대한 훈계들을 실제로 수행하기 위해 최고로 중요한 숙원 사항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의무 표상과 윤리 법칙의 표상은 오직 이성의 길을 통해서만 경험적인 다른 동기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④ 모든 윤리적 개념들은 선험적 이성 안에 자신들의 자리와 근원을 가지며, 이것들은 어떤 경험적인 우연적 인식으로부터 추상될 수 없다. 바로 윤리적 개념들의 근원의 순수성에 최상의 실천 원리들로 쓰이기 위한 존엄성이 놓여 있다.

⑤ 순수한 실천 이성의 전체 능력을 규정하는 일은, 이론적인 의도에서 순전이 사변이 문제될 때에, 최대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최대로 중요하다. 즉, 도덕 법칙들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 타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도덕 법칙들을 이성 존재자 일반의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하고,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인간학을 필요로 하는 모든 도덕을 인간학과는 독립적으로 순수한 철학으로서, 즉, 형이상학으로서 완벽하게 진술해야 한다.

⑥ 우리는 실천적인 이성 능력을, 이 이성 능력을 규정하는 규칙들로부터, 의무 개념이 생겨나는 곳에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명료하게 서술해야만 한다.


(3) 의지와 명령

① 의지(『윤리형이상학 정초』, p. 115)

ⓐ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즉, 원리들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또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법칙들로부터 행위들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이성이 요구되므로, 의지가 실천 이성이다.

ⓒ 의지: 의지는 이성이 경향성에 독립해서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즉,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② 명령(『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16-118)

ⓐ 강요: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들이 주관적으로는 우연적이고, 그러한 의지를 객관적인 법칙들에 맞게 결정하는 것은 강요이다. (의지가 주관적인 조건들인 동기들에도 종속되는 경우)

ⓑ 객관적인 원리의 표상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서 (이성의) 지시명령(Gebot)이라 부르며, 이 지시명령의 정식을 명령(Imperativ)이라 부른다.

ⓒ 모든 명령은 당위[‘해야 한다’]로 표현되며, 그에 의해, 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주관적 성질상 필연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의지에 대한 관계(강요)를 고지한다.

ⓓ 명령들이 주어지는 상대는 제시된 선을 언제나 행하는 것은 아닌 의지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선한 것은 이성의 표상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타당한, 즉,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 자체로서 타당한 근거들에서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쾌적과는 다르다)

(칸트의 주석

경향성: 욕구능력의 감각에 대한 의존성. 따라서 경향성은 항상 필요를 실증한다.

[이해]관심: 우연히 결정될 수 있는 의지의 이성 원리에 대한 의존성.)

ⓔ 완전한 선의지는 객관적인 법칙들 아래에 있지만, 그것이 법칙에 맞는 행위를 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선의지는 그것의 주관적인 성질상 스스로 오로지 선의 표상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적 의지에 대해서는 어떤 명령도 타당하지 않다.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욕이 이미 법칙과 필연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4) 명령의 구분(『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18-124)

① 가언 명령: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 행위가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즉 수단으로서 선한다면, 가언적 명령. 행위가 가능한 또는 현실적인 의도를 위해 좋다[선하다]는 것을 말한다. 가능한 의도의 경우 명령은 미정적-실천 원리, 현실적 의도의 명령은 확정적-실천 원리이다.

ⓐ 미정적-실천 원리: 행위가 가능한 의도를 위해 좋은 경우의 명령. 이성적 존재자임과는 무관하게, 그래서 목적의 합리성과 선함과는 무관하게, 임의적인 목적들을 위한 수단들의 사용에서 숙련에 마음을 쓰게 하는 명령. 숙련의 규칙들. 기술적 명령

ⓑ 행위가 현실적인 의도를 위해 좋은 경우의 명령.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서 현실적인 것으로 전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 필연성에 따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전제할 수 있는 의도인 행복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표상하는 가언 명령은 확정적이다. 영리함의 충고들. 실용적 명령.

② 정언 명령: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명령. 행위가 그 자체로 선 한 것으로 표상된다면, 즉, 그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으로,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정언 명령.

ⓐ 명증적-실천 원리: 어떤 의도와도 관계없이, 어떤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단언하는 정언 명령. 어떤 처신을 의도를 조건으로 두지 않고 직접적으로 지시명령하는 명령. 질료나 행위 결과와는 상관없이, 형식 및 형식으로부터 행위 자체가 나오는 원리에 관여한다. 윤리성의 명령(법칙). 도덕적 명령

 

판단의 양태

목적-수단의 관계

관계 영역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언 

명령

미정적-실천 원리

숙련의 규칙들-목적 설정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수단들 가능

(기술에 속하는)

기술적 명령

분석적-목적을 의욕하는자는 수단 또한 의욕

확정적-실천 원리

영리함의 충고들-이성적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을 간주하는 목적에 대한 수단(행복에 대한 수단)

(복지를 위한) 실용적 명령

분석적-목적이 주어졌고, 이를 위한 수단 또한 의욕

정언 

명령

명증적-실천 원리

윤리성의 명령들(법칙들)

- 행위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지시명령

(윤리에 속하는) 도덕적 명령

선험적 종합적-실천 명제


*** 법칙만이 무조건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필연성을 개념을 동반하며, 명령이란 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시 말해 경향성에 반하여서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다.


(5) 윤리성의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pp. 128-131)

① 정언 명령의 가능성은 선험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② 정언 명령은 선험적 종합적-실천 명제이다.

③ 명령은 법칙 외에 오로지 이 법칙에 적합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함유하지만, 법칙은 그것을 제한했던 아무런 조건도 함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행위의 준칙이 법칙에 적합해야 할, 이 법칙 일반의 보편성만 남는다. 이 적합성만이 명령을 본래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pp. 131-132)

⇒ 정언 명령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제1정식: 보편 법칙의 정식) (pp. 132-133)

④ 의무의 사례들에 대한 고려: 도덕적 평가 규준은 우리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pp. 133-137)

ⓐ 자살 금지의 의무: 자살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기사랑의 원리가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 자기 사랑의 사명이 생의 촉진을 추동하는 것인 바로 그 감각이 생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자연은 자기 자신과 모순을 일으킨다.

ⓑ 거짓 약속 금지 의무: 자기사랑의 원리에 입각해 거짓 약속을 하는 경우도 자기모순적이다. 왜냐하면 거짓 약속은 약속 및 목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재능 개발의 의무: 재능을 내버려 두고 생을 안일과 향락에 바치는 것은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능력은 온갖 가능한 의도들을 위해 쓰이도록 주어져 있으므로,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능력이 발전될 것을 필연적으로 의욕하기 때문이다.

ⓓ 타인을 도울 의무(사랑과 동정의 의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보편적 자연법칙이 잘 존속할 수 있음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원리가 어디서나 타당하기를 의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라면 자신이 기대하는 모든 희망을 스스로 앗아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⑤ 만약 의무가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 의미를 갖고, 실제적인 법칙수립을 가져야만 한다면, 이 의무는 오로지 정언 명령들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p.139)

⑥ 인간의 특수한 자연소질로부터, 어떤 감정이나 성벽으로부터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 타당하지는 못한 특수한 성향으로부터 도출된 것은 우리에게 준칙은 제공할 수 있어도, 법칙은 제공할 수 없다. 도덕감 같은 천성적 감각이나 착한 본성과 같은 후견자적인 자연본성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지만, 결코 이성이 명하는 원칙들을 제공할 수는 없다. 윤리에 있어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고유한 행위의 원리가 오직 경험이 제공할 수 있는 우연적인 근거들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 있다. (pp. 140-142)


(6) 정언 명령의 도출

① 실천 철학은 윤리 형이상학으로 나아간다. 비록 결코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일어나야만 할 것의 법칙들, 객관적-실천적 법칙들을 납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의지가 순전히 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의지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가 문제이다. 따라서 경험적인 것과 관계를 갖는 모든 것은 제외된다. 이성이 독자적으로 태도를 결정한다면, 이성은 이 일을 반드시 선험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pp. 143-144)

의지: 의지란 어떤 법칙의 표상에 맞게 행위하게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이다. 의지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들에게서만 만날 수 있다. (p. 144)

목적: 의지의 자기 규정에서 객관적 근거로 쓰이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이 순전한 이성에 의해 주어진다면, 이 목적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똑같이 타당하다. 그 결과가 목적인 행위의 가능 근거만을 함유하는 것은 수단이라 불린다. (pp. 144-145)

ⓐ 욕구의 주관적 근거는 동기이며 의욕의 객관적 근거는 동인이다. 주관적 목적은 동기의 의거하는 반면, 객관적 목적은 동인들에 의존한다.

ⓑ 실천적 원리들이 모든 주관적 목적들을 도외시한다면, 그 원리들은 형식적이다. 반면 주관적 목적들을, 즉, 모종의 동기들을 기초로 한다면 그것들은 질료적[실질적]이다. 이 질료적 목적들은 행위의 결과로서 임의로 설정되는 것으로 단지 상대적이다. 그래서 이 상대적인 목적들은 단지 가언적인 명령들의 근거일 뿐이다. 목적의 현존재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목적 그 자체로서 일정한 법칙들의 근거일 수 있는 것은 정언적 명령의 근거이다.

④ 인격(pp. 1145-148)

ⓐ 인간과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하며, 수단으로서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 이성이 없는 존재자들은 단지 수단으로서 상대적 가치만을 가지며, 그래서 물건들이라 불린다. 반면 이성적 존재자들은 인격들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자들의 본성이 그들을 이미 목적들 그 자체로 표시하고, 그런 한에서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들은 주관적 목적들이 아니라 객관적 목적들이다. 즉, 인격들의 현존 그 자체가 목적인, 그것 대신 다른 어떤 목적도 두어질 수 없는 것들로, 다른 것들은 한낱 수단으로서 이에 봉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서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을 우리는 만날 수 없다.

제 2 정식 - 인격의 정식: “무릇 최상의 실천 원리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인간의 의지에 관련한 정언 명령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구에게나 목적인 것의 표상으로부터 의지의 객관적 원리를 형성하고, 그러니까 보편적 실천 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이 원리의 근거인즉, 이성적 자연 본성은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현존을 이렇게 표상한다. 그런 한에서 이 원리는 그러므로 인간 행위들의 주관적 원리이다. 그러나 또한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자도, 나에게도 타당한 바로 그 동일한 이성 근거를 좇아, 그의 현존재를 그러한 것으로 표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객관적 원리로서, 최상의 실천 근거인 이 원리로부터 의지의 모든 법칙이 도출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실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제 2 정식: 인격의 정식)(pp. 147-148)

ⓓ 실례 (pp. 148-151)

i)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ii) 거짓 약속은 다른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iii) 인간성의 완성을 향한 소질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인간의 보존과는 양립할 수 있으나 목적의 촉진과는 양립할 수 없다.

iv) 타인의 행복에서 아무것도 고의로 빼앗지 않는다면, 인간성은 성립할 수 있지만, 목적 그 자체인 인간성에 단지 소극적으로 합치할 뿐 적극적으로 합치하지는 않는다.

⑤ 제 3 정식: 자율의 정식 - 경험과는 무관한 원리: 인간성과 목적 그 자체로서의 모든 이성적 자연[존재자] 일반의 원리는 경험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 아니다.(pp. 151-156)

ⓐ 보편성 요구: 경험으로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 적용되는 것을 규정할 수 없다.

ⓑ 객관적 목적: 모든 주관적 목적들을 제한하는 최상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객관적 목적이고, 이것은 순수한 이성으로부터 생겨난다. 모든 실천적 법칙 수립의 근거는 객관적으로는 규칙에 있고, 이 규칙을 법칙일 수 있도록 만드는 보편성의 형식에 있으나, 주관적으로는 목적에 있다. 모든 목적들의 주체는 목적 자체인 이성적 존재자이다. 이로부터 세 번째 실천 원리, 즉, 보편적 법칙 수립의 의지는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이 나온다.

의지는 자기 법칙수립적인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법칙에 종속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종속된다. (p. 152)

ⓒ 이성적 존재자들에 대한 보편적 명령들은, 사람들이 의무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할 때,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언적인 것으로 상정된 것이다. 정언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실천적 명제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무로부터의 의욕에서 모든 관심의 포기는 정언적 명령과 가언적 명령의 구별 표지로서, 그 명령 자신 안에 그 명령이 함유하고 있는 어떤 규정에 의해, 함께 암시되어 있다. 이 원리는 셋째 정식에서, 즉, 보편적-법칙수립적 의지로서의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에서 증명된다.

ⓓ 셋째 원리, 모든 준칙을 통해 보편적으로 법칙을 수립하는 의지라는 개개 인간 의지의 원리가 정언 명령이 되기에 적합하다: 보편적 법칙 수립의 이념 때문에 어떤 이해 관심에도 기초하지 않고, 모든 가능한 명령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무조건적일 수 있다. 또는 거꾸로 말하면, 하나의 정언 명령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하는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동시에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인 자기 의지의 준칙에서 모든 것을 행하라고 지시명령할 것이다. 이 경우에만 실천 원리, 그리고 의지가 복종하는 그 명령은 무조건적일 것이다.

ⓔ 의지의 자율의 원리: 무조건적인 이 원리를 의지의 자율이라 한다. 반면 조건적인 명령은 이해관심으로 인한 행위의 필연성으로 타율이라 불린다.

― 의지의 실천 원리 세 가지, 즉, 정언 명령의 세 가지 정식 ―

 

1.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2.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3. 보편적-법칙수립적 의지는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이다. (의지의 자율의 원리)


(7) 목적의 나라(『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56-161)

① 목적의 나라: ‘나라’는 공동의 법칙들에 의한 서로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을 뜻한다. 그래서 이성적 존재자들의 개성적 차이와 사적 목적을 배제하고,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이성적 존재자들과 그들이 세우는 고유한 목적들이 체계적으로 연결된 전체, 그래서 앞에서 말한 원리들에 따라 가능한 목적들의 나라가 생각될 수 있다.

② 이성적 존재자들 모두는 모두를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만 한다는 법칙 아래에 종속되어 있다. 이로부터 공동의 객관적 법칙들에 의한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이 생긴다.

③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수립자로서 타자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이 나라에서 원수(元首)로서 속해 있는 것이다.

④ 도덕성은 이성적 존재자에 의해서만 목적들의 나라가 가능해지는, 그러한 법칙 수립에 대한 모든 행위의 관계에서만 존립한다. 이 법칙 수립은 개개 이성적 존재자 자신에서 만날 수 있고, 그의 의지로부터 생겨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지의 원리인즉, 준칙이 보편적 법칙임이 그 준칙과 양립할 수 있는, 그러므로 오로지,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하는 자로 볼 수 있는, 그런 준칙 이외의 것에 따라서는 행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준칙들이 이 객관적 원리와 이미 필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원리에 따르는 행위의 필연성은 실천적 강요, 즉, 의무라 불린다.

⑤ 객관적 원리에 따라 행위해야 하는 실천적 필연성인 의무는 감정이나 충동 그리고 경향성에 의거해 있지 않고, 순전히 이성적 존재자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거한다. 이 관계 안에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항상 동시에 법칙수립자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의지의 각 준칙을 보편적으로 법칙수립하는 것으로 모든 타자의 의지에 관계시키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행위에도 관계시킨다. 이성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세우는 법칙 이외의 어떤 것에도 복종하지 않는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의 이념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⑥ 목적들의 나라에서 모든 것은 가격을 갖거나 존엄성을 갖는다.

ⓐ 시장 가격: 보편적 인간의 경향성과 필요들에 관련되어 있는 것은 시장가격을 가짐.

ⓑ 애호 가격: 필요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무목적적인 유의에서 마음 능력의 흡족함에 따르는 것은 애호가격을 갖는다.

ⓒ 존엄성: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은 내적 가치, 즉, 존엄성을 갖는다.

⑦ 도덕성이 이성적 존재자가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도덕성을 통해서만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수립적인 성원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성과, 윤리적일 수 있는 한에서의 인간성만이 존엄성을 갖는다.

⑧ 윤리적으로 선한 마음씨 또는 덕으로 하여금 그토록 높은 요구를 할 권리를 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선한 마음씨 또는 덕이 보편적 법칙 수립에 있어 이성적 존재자에게 가져다주고, 그로써 이성적 존재자로 하여금 목적들의 가능한 나라의 성원이 될 수 있게끔 해주는 몫(持分)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을 수립하는 자로, 모든 자연법칙들에 대해 자유롭게, 오직 자신이 세운 법칙들에만 복종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리고 모든 가치를 규정하는 법칙수립 자신은 바로 이 때문에 존엄성을 가지며 이에 대해 이성적 존재자는 존경이라는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율은 인간과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의 근거이다.


(8) 윤리성의 원리를 표상하는 세 가지 정식의 통일

① 형식: 보편성 - 준칙들은 보편적 자연법칙들 같이 타당해야 하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② 질료: 목적 -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서 준칙에 대해 목적들을 제한하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

③ 완벽한 규정: ‘모든 준칙은 자신의 법칙 수립에 의해 자연의 나라로서의 목적들이 가능한 나라와 조화로워야 한다.’


(9) 무조건적으로 선한 의지

①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때에도 자신과 결코 상충할 수 없는, 악할 수 없는 의지는 단적으로 선하다.

② ‘그것의 보편성을 법칙으로서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 항상 행위하라’가 선의지의 최상 원칙이다.

③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보편적 법칙으로서의 의지의 타당성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에 따른 사물들의 보편적 연결과 유사함을 갖는다. 따라서 선한 의지의 정식, 즉, 정언 명령은 ‘그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자연법칙들로서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준칙들에 따라 행위하라’로 표현될 수 있다.

④ 이성적 자연존재자가 자신에게 세우는 목적이 선의지의 질료가 된다. 그러나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이념에서는 목적은 산출되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립적 목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즉 그 목적에 결코 반해서 행위해서는 안 되며, 한낱 수단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개개 의욕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이 목적은 모든 가능한 목적들의 주체 이외의 것일 수 없고,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주체이기도 하다.

⑤ 결론: 개개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서 그가 언제든 종속해 있을 모든 법칙들에 대해,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자로 간주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와 함께 나오는 결론은,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이 법칙수립자로서 자신 및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준칙들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성적 존재자들의 세계(예지적 세계)가 목적들의 나라로 가능하며, 그것도 성원인 모든 인격들의 고유한 법칙 수립에 의해 가능하다.



윤리성의 최상 원리로서의 의지의 자율(pp. 169-170)


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방식만을 선택한다. 이 실천 규칙은 종합 명제이다. 명증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이 종합 명제는 온전히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순수 실천 이성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율의 원리만이 도덕의 유일한 원리라는 점은 윤리성의 개념들을 순전히 분해만 해보아도 충분히 밝혀진다.



윤리성의 모든 사이비 원리들의 원천으로서 의지의 타율(pp. 170-171)


만약 의지가 자기 자신을 넘어 나가서 객관들 중 어느 하나의 성질에서, 자기를 결정하는 법칙을 구한다면, 언제나 타율이 나타난다. 이때에는 객관이 의지와의 관계를 통해 의지에게 법칙을 준다. 이 법칙들은 가언적이다. 이에 반해 도덕적인, 즉 정언 명령은 내가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러그러하게 행위해야 함을 말한다.



타율의 가정된 기본개념들로부터 가능한 윤리성의 모든 원리들의 구분


(1) 의지의 타율의 원리로서 경험적 원리와 이성적 원리

① 경험적 원리: 행복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 자연적 감정 또는 도덕적 감정 위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경험적 원리들은 도덕 법칙들을 세우기 위한 기초로 사용될 수 없다. 보편성이나 무조건적인 실천적 필연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행복의 원리가 윤리성의 기초로 놓는 동기들은 윤리성을 매장시키고 윤리성의 전체적인 숭고함을 파괴한다. 도덕 감정 윤리성 및 윤리성의 존엄성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러나 도덕 감정이라는 느낌에 호소하여 보편적 법칙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천박한 짓이다. 항상 차이가 있는 감정들은 선악에 대한 동일한 척도를 제공하지 못한다.

② 이성적 원리: 완전성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 우리의 의지의 가능한 결과로서 완전성이라는 이성 개념 위에 세워져 있거나,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원인으로서 자립적인 완전성(신의 의지)이라는 개념 위에 세워져 있다. 윤리성의 이성적 근거들, 또는 이성적 근거들 가운데서도 완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은 신의 최고로 완전한 의지로부터 윤리성을 도출해내는 신학적 개념보다는 더 좋다.


(2) 의지의 타율

① 타율: 의지를 규정하는 규칙을 위해 의지의 객관이 근저에 놓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 규칙은 의지에 대해 타율일 따름이다.

② 타율의 명령은 조건적이다: 객관을 의욕한다면, 또는 객관을 의욕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하게 행위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무릇 객관이 의지를 규정하는 것은, 행복의 원리에서처럼 경향성에 의한 것이든, 완전성의 원리에서처럼 우리의 가능한 의욕 일반의 대상들에 지향되어 있는 이성에 의한 것이든, 의지가 결코 직접적으로 스스로 행위의 표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견되는 행위 결과가 동기들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즉, 나는 다른 어떤 것을 의욕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행해야 한다.

③ 가언 명령의 법칙을 주는 것은 자연이다. 이 법칙은 단지 경험에 의해 인식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즉, 우연적인 것으로 명증적인 실천 규칙이기에는 부적당할 뿐 아니라 언제나 의지의 타율일 뿐이다. 이런 의지는 충동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주관의 자연 본성을 매개로, 외부의 충동이 의지에게 법칙을 제공한다.


(3) 단적으로 선한 의지

①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원리는 정언 명령이어야 한다.

②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모든 객관에 대해서는 무규정적인 채, 한낱 의욕의 형식 일반만을 보유할 것이며, 그것도 자율로서 보유할 것이다.

③ 즉, 개개 선의지의 준칙이 그 자신을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 수 있기에 적합함 그 자체가 유일한 법칙이다.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어떤 동기를 기초로 두지 않고 이 법칙을 자신에게 부과한다.


(4) 과제

① 어떻게 선험적인 종합적 실천 명제가 가능한가, 그리고 그 명제가 왜 필연적인가라는 과제에 대해 우리는 이 명제가 참이라고, 또 증명이 가능하다고 내세운 적이 없다.

② 우리가 한 작업은 일단 보편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윤리성 개념을 발전시켜, 의지의 자율이 이 윤리성 개념에 부착해 있다는 것, 즉, 윤리성 개념 근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③ 윤리성은 환영이 아니라는 주장(정언 명령과 의지의 자율이 진실하고 선험적 원리로서 단적으로 필연적이라면 나오는 주장)은 순수 실천 이성의 가능한 종합적 사용을 요구한다. 이런 사용을 위해서는 이 이성능력 자체에 대한 비판을 선행시켜야 한다.

제 3 절 윤리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 이성 비판으로 이행




자유 개념은 의지의 자율을 설명하는 열쇠이다


(1) 자유와 자연 필연성

① 의지는 생물이 이성적인 한에서 갖는 일종의 원인성이다. 자유는 이런 원인성의 특성이며, 자유는 그것을 규정하는 외래의 원인들에 독립해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자연필연성은, 외래 원인들의 영향에 의해 활동하게끔 규정받는, 모든 이성 없는 존재자들의 원인성의 특성이다.

③ 자유는 자연법칙들에 따르는 의지의 성질은 아니지만, 전혀 무법칙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변적인 법칙들에 따르는 특수한 종류의 원인성이다.


(2) 자율과 타율

① 자연 필연성은 작용하는 원인들의 타율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작용결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작용하는 원인을 원인성으로 규정한 법칙에 따라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② 의지의 자유가 자율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이 자율인 것이다.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이다’라는 명제는, 자기 자신을 보편적 법칙으로서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준칙 이외의 다른 어떤 준칙에 따라서도 행위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표시한다. 이것이 정언 명령의 정식이자 윤리성의 원리이다. 따라서 자유 의지와 윤리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는 한 가지이다.


(3) 윤리성의 원리는 종합 명제

자유 의지가 전제된다면, 윤리성 및 윤리성의 원리는 자유 의지의 개념을 분해하기만 하면 나온다. 그럼에도 윤리성의 원리는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그것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법칙으로 보인, 자지 자신을 자기 안에 함유할 수 있는, 그런 의지이다’라는 종합 명제이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개념의 분해에 의해 준칙의 보편성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종합 명제는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인식과 준칙의 보편 법칙성이라는 인식이 자유의 적극적 개념에 의해 결합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자유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속성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① 윤리성은 이성적 존재자들에게만 법칙으로 쓰이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타당해야 하며, 윤리성은 오로지 자유의 속성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하며, 자유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의 의지의 속성으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유를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부가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② 자유의 이념 아래서밖에는 행위할 수 없는 모든 존재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인 관점에서, 실제로 자유롭다. 즉, 자유와 불가분 결합되어 있는 모든 법칙들은 그 같은 존재자에게 타당하다.

③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가 그 아래서만 행위할 수 있는 자유의 이념을 또한 필연적으로 수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존재자에서는 실천적인, 다시 말해 그의 객관에 대해서 원인성을 갖는 이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외부의 영향에서 독립적으로 그 자신을 그의 원리들의 창시자로 간주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성은 실천 이성으로서, 또는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로서, 그 자신에 의해 자유롭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오로지 자유의 이념 아래서만 자신의 의지일 수 있고, 그러므로 그런 의지는 실천적 의도에서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부여되어야만 한다.



윤리성의 이념에 부착되어 있는 관심에 대하여


(1) 요약

① 만약 우리가 어떤 존재자를 이성적이고, 행위들에 대한 자기의 원인성을 의식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자 하면, 자유의 이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근거에서 이성과 의지를 갖춘 모든 존재자에게는 자신의 자유의 이념 아래서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속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② 자유의 이념에 대한 전제로부터 준칙이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박에 없읆을, 즉, 우리 자신의 보편적인 법칙 수립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의식도 나왔다.


(2) 위의 원리에 대한 관심

① 이성적 원리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이해관심 때문이 아니다. 이해관심은 정언 명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② 이성이 실천적이라면, ‘해야만 함’[당위]는 모든 이성적존재자에게 타당한 ‘하고자 함’[의욕]이기 때문에, 원리에 대한 관심의 발생을 고찰해야 한다.

③ 자유의 이념에서 도덕 법칙을, 곧 의지의 자율의 원리를 전제할 뿐이고, 이 원리의 실재성 및 객관적 필연성은 그 자체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리를 정확하게 규정한다 해도 이 원리의 타당성 및 복종해야 할 실천적 필연성에 관해서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법칙으로서 우리 준칙의 타당성은 왜 우리 행위들을 제한하는 조건이어야 하며, 이런 종류의 행위에 부여하는 가치를 무엇에 기초지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④ 우리가 행위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보종의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즉, 무엇으로부터 도덕 법칙은 구속력을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종의 순환론이다. 우리가 목적들의 질서 안에서 윤리 법칙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작용하는 원인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롭다고 상정하며,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의지의 자유를 부가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유와 의지의 자기 법칙수립은 둘 다 자율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중 하나가 다른 것을 설명하고 그것의 근거를 대는 데 사용될 수 없다.

(3) 순환론을 피하기 위한 방책: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①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우리에게 나타나는 표상들(감관의 표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들을 대상들이 우리를 촉발하는 대로만 인식하게끔 하고, 그때 대상들이 그 자체로 무엇일 수 있는가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다. 즉, 이런 종류의 표상들에 관해서는 우리가, 지성은 한낱 현상들의 인식에 이를 뿐, 결코 사물들 그 자체에는 이를 수 없다. 이런 구별로부터, 우리는 현상들 배후에 현상이 아닌 어떤 다른 것, 곧 사물들 자체를 용인하고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감성세계와 오성세계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② 자기 인식에서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어는 것이고, 내감에 의해 의식이 촉발되는 방식대로만 자기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순전히 현상들에서 합성된 그 자신의 주관의 성질을 넘어서 그것의 근저에 놓여 있는 다른 어떤 것, 곧 그의 자아를 그 자체로 상정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를 순전한 지각과 감각들의 수용성의 관점에서는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이지만, 인간에게서 순수 활동성임 직한 것(감관의 촉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의식에 이른 것)과 관련해서는 지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용어 설명(백종현 주):

① ‘Verstand’는 일반적으로 ‘지성’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지만, 이 경우에만은 ‘오성(悟性)’으로 옮겨 ‘예지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낫다. ‘Verstandwelt’가 ‘예지세계(intelligibele Welt)’ 또는 ‘이성세계(Vernunftwelt)’와 똑같은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말이다.

② 지성세계는 intellektuelle Welt. 칸트가 ‘Verstand’ 곧 ‘intellecuts’(‘지성’, 때로는 ‘오성’)에서 파생한 형용사 ‘intelletuell(지성적)’과 ‘intelligibel(예지적)’을 구별해서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지성적’은 인식을, ‘예지적’은 대상을 수식해 주는 말이라고 규정한 뜻에 따른다면, ‘intellektuelle Welt’는 ‘intelligibele Welt’라고 표현했어야 할 것이다.

이성(Vernunft; reason): 인간은 모든 사물들과, 그리고 인간이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한에서는 그 자신과도 구별되는 하나의 능력인 이성(Vernunft; reason)을 발견한다. 순수한 자기활동성으로서의 이성은 지성(Verstand; understanding)도 뛰어넘는다.

ⓐ 지성도 자기활동성이지만, 이 활동성으로부터, 감성적 표상들을 규칙들 아래로 보내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감성적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에서 통합하기 위해 쓰일 뿐인 개념들 외에는 아무런 개념도 산출할 수가 없다.

ⓑ 이성은 이념들 아래에서 순수한 자발성을 내보인다. 이성은 감성이 자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 훨씬 멀리까지 나아가며, 감성세계와 오성세계를 서로 구별한다. 이런 구별을 통해 지성 자신에게 그 경계를 지정해 주기도 한다. 이로 인해 이성적 존재자는 예지자로서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 이성적 존재자는 감성세계에 속해 있는 한에서 자연 법칙들(타율) 아래에 있으면서, 예지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이성에 기초하고 있는 경험적이지 않은 법칙들 아래에 있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그 자신의 의지의 원인성을 자유의 이념 아래서 말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감성세계의 원인들로부터의 독립성이 자유이므로) 자유의 이념에는 자율의 개념이 결합되어 있고, 자율의 개념과는 윤리성의 보편적 원리가 결합되어 있다. 이 윤리성의 원리가 이성적 존재자들의 모든 행위들의 근저에 놓인다.

ⓓ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오성세계의 성원으로 놓고, 의지의 자율을 이 자율의 결과인 도덕성과 함께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무지워져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감성세계에 속하면서 또한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정언적 명령은 가능한가?


① 오성세계와 감성세계의 성원: 이성적 존재자는 오성세계의 성원으로서 그의 모든 행위들은 순수 의지의 자율의 원리에 완전히 적합할 것이다.(윤리성의 최상 원칙에 의거한다)이성적 존재자는 감성세계의 일부로서 그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욕구들과 경향성들의 자연법칙에, 즉, 자연의 타율에 알맞게 취해진다.(행복의 최상 원칙에 의거한다)

② 오성세계의 법칙이 명령이며 여기에서 의무가 나온다: 오성세계는 감성세계의 근거를, 즉, 감성세계의 법칙들의 근거를 함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예지자로서 스스로를 오성세계의 법칙에 즉, 자유의 이념 중에 오성세계의 법칙을 함유하는 이성에, 따라서 의지의 자율에 복종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오성세계의 법칙들을 나에 대한 명령들로 보고, 이 원리에 알맞은 행위들을 의무들로 볼 수밖에 없다.

③ 따라서 자유의 이념이 나를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 만듦으로써 정언 명령들은 가능하다. 그리고 예지 세계의 성원이자 동시에 감성세계의 성원이므로 나의 행위가 항상 의지의 자율에 맞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행위들은 의지의 자율에 알맞아야만 하는 것이다.

④ 선험적 종합 명제: 정언적 당위는 선험적 종합 명제를 표상한다. 왜냐하면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나의 의지 위에 오성세계에 속하는 실천적 의지의 이념이 덧붙여지고, 이 의지는 전자의 의지가 이성에 따르는 최상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성세계에 대한 직관들에 법칙적 형식 일반으로서의 지성의 개념들이 덧붙여짐으로써 자연에 대한 모든 인식이 의거하는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⑤ 평범한 인간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이 연역의 옳음을 확증한다. 그는 경향성들과 충동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소망한다. 자유의 이념, 즉 감성세계의 규정하는 원인들로부터 독립함의 이념이 오성세계의 성원의 입장으로 그가 옮겨간다면, 그는 보다 좋은 인격일 것으로 믿는다. 그는 그런 입장 안에서 선의지를 의식한다. 이 선의지는 감성세계의 성원으로서 법칙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당위는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서 자신의 필연적인 의욕이고, 그가 자신을 동시에 감성세계의 성원으로 보는 한에서만 당위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모든 실천 철학의 최종 한계에 대하여



① 자유는 경험 개념이 아니며 경험 개념일 수도 없다. 필연성 역시 경험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험적 인식 개념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필연성 개념은 경험에 의해 확증되며, 경험, 즉 감관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야 한다면 불가피하게 전제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는 단지 이성의 이념일 따름이고, 객관적 실재성 자체는 의심스러우나, 자연은 그 실재성을 경험의 실례들에서 증명하고 또 필연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지성개념이다.

② 철학은 인간 행위들에서 자유와 자연필연성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자유 개념과 자연 개념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자유가 자연필연성과 모순된다면, 자유가 포기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③ 우리가 인간을 자유롭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자연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와 다른 관계로 생각한다. 자유로운 인간과 자연 필연성에 종속된 인간은 공존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주고나 안에서 필연적으로 합일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유의 이념으로 이성을 괴롭혀야 하는가의 근거를 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분쟁은 사변 철학의 소관사이다.

④ 의지의 자유에 대한 권리주장은 이성이 독립적이라는 의식 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예지자로 보는 인간은 자신을 의지를 가진, 즉, 원인성을 갖춘 예지자로 생각할 때, 자신을 자연법칙에 종속시킬 때와는 다른 질서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전혀 다른 종류의 규정 근거들과의 관계 속에 놓인다. 이로써 자신이 현상 중의 사물에 종속해 있고, 동시에 사물 그 자체로서는 자연 법칙들에서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즉 자신을 감관에 의해 촉발되는 대상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예지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욕구와 감각적 자극들을 배제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는 행위들이 자신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심지어는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 행위들의 원인성은 예지자로서 인간 안에 있으며, 예지 세계의 원리들에 따르는 작용과 행위들의 법칙들 안에 있다.

⑤ 인간이 예지 세계에 대해 아는 바는, 오직 이성만이 법칙을 수립한다는 것뿐이다. 또한 인간은 예지 세계에서 예지자로서만 본래적 자기이기 때문에, 그 법칙들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정언적으로 관계된다. 그래서 경향성과 충동들은 예지자로서 인간의 의욕의 법칙들을 훼손할 수 없다.

⑥ 자유가 의지라는 이성의 원인성과 결합된다는 점에서만 적극적이다. 자유의 적극적 측면이란 행위들의 원리가 이성원인의 본질적 성질에, 즉, 법칙으로서의 준칙의 보편타당성 조건에 알맞게, 그렇게 행위하는 능력이다. 실천 이성이 의지의 객관을 오성세계로부터 가져온다면, 그것은 실천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오성세계 개념은, 이성이 자신을 실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현상들 밖에서 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한 입장일 따름이다.

⑦ 순수 이성이 어떻게 실천적일 수 있는가를 이성이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성은 자신의 모든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과제와 같은 것이다. 자유는 순전한 이념으로서, 자유의 실재성은 자연법칙들에 따라, 또는 어떤 가능한 경험에서도 밝혀질 수도 없다. 유비의 의한 실례도 제시할 수 없고, 개념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다. 자유는 욕구 능력과는 구별되는 한 능력을 의식한다고 믿는 존재자에게 이성의 필연적인 저제일 뿐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을 현상으로만 보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것뿐이다.

⑧ 의지의 자유를 설명하는 일이 주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도덕 법칙들에 가질 수 있는 관심을 찾아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성이 실천적으로 되는 것은 관심에 의해서이다. 즉, 관심이 의지를 결정하는 원인인 것이다. 이성의 준칙의 보편적 타당성이 의지의 충분한 규정 근거일 때만, 이성은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순수 이성이 이념들에 의해 경험 안에 있는 어떤 결과의 원인이어야 하므로, 어떻게 그리고 왜 법칙으로서 준칙의 보편성이, 즉, 윤리성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가 하는 설명은 인간에게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윤리성이 관심을 끌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 아니라, 예지자인 인간의 의지로부터 윤리성이 생겨났기 때문에, 인간에게 타당하고 그 때문에 관심을 끈다.

⑨ ‘어떻게 정언 명령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은 우리가 자유의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한에서, 이 전제의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는 한에서만 대답될 수 있다. 즉, 예지자의 의지의 자유의 전제 아래서 의지의 자율은 의지가 결정될 수 있는 형식적 조건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인간 이성에 의해 통찰되지 않는다. 어떻게 법칙들로서 이성의 모든 준칙의 보편타당성의 순전한 원리가 그 자신만으로 동기를 제공하고, 순수하게 도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어떻게 순수 이성이 실천적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설명하는 데는 인간 이성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⑩ 감성의 분야로부터의 운동인들의 원리를 제한하는 것은, 감성의 분야에 한계를 긋고 그 분야가 모든 것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더 많은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맺음말


① 자연에 대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은 세계의 어떤 최상 원인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데에 이른다. 자유에 관한 이성의 실천적 사용 역시 행위들의 법칙들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데에 이른다. 인식을 필연성에 대한 의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이성의 모든 사용의 본질적 원리이다. 현존하는 것, 또는 일어나는 것, 일어나야만 할 것의 조건이 근저에 놓여 이지 않으면 이성은 어떤 필연성도 통찰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이성의 본질적인 제한이다. 그래서 이성은 무조건적으로-필연적인 것을 찾고 그것을 개념화하지 못하면서도 상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 전제와 화합하는 개념만 발견할 수 있으면 다행인 것이다.

② 우리는 비록 도덕적 명령의 실천적 무조건적 필연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필연성을 개념화하지 못함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바,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에까지 원리적으로 나아가려 하는 철학에 요구될 수 있는 전부이다.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경복, 고봉만 역, 책세상, 2003.




머리말


  이 논문의 주제를 철학이 제안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ㅇ지만 철학자들이 해결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문제의 하나로 본다. 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p. 35.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류의 모든 진보가 인간을 끊임없이 원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수록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p. 34.



  사람들을 구별하는 차이의 기원을 인간 구조의 변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서로 평등하다. p. 34.



  자연권droit naturel의 참된 정의가 그만큼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p. 36.



  사람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적절하게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규칙을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 이렇게 모여진 규칙들에다 자연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널리 실시해보니 결과가 좋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근거는 없다. 이것이 정의를 만들어내고 거의 터무니없는 일치에 의해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매우 편리한 방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p. 38.



  우리가 이 법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법의 강제를 받는 사람의 의지가 그 법을 의식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이기 위해서는 그 법이 자연의 소리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p. 38.



  거기에[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원리이다. 사회성의 원리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연법의 모든 규칙들은 우리의 정신이 이 두 가지 원리 사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일치와 조합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pp.  38-39.



  지식도 자유도 없는 동물들이 이 법칙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도 타고난 감성에 의해 어느 정도 우리의 본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도 자연법에 관여하며 인간은 그들에 대해 어떤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내가 동포에게 어떤 종류의 해도 입혀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동포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 같은 특질은 동물과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므로, 적어도 동물은 인간에 의해 불필요하게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p. 39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건강•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p. 45.



  대체 이 논문에서는 정확히 말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이 진보하는 가운데 폭력에 이어 권리가 생기고 자연이 법에 굴복한 시기를 지적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떠한 기적의 연쇄로 인해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 인민peuple이 현실의 행복을 대가로 하여 관념 속에서 안식을 찾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p. 46.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연 상태가 존재했다는 데 대해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성서를 읽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지식과 계율을 받은 최초의 인간은 이 같은 자연 상태에 있지 않았다. ...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기이한 사건에 의해 다시 자연 상태로 떨어진 셈이다. 이것은 변호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며 전혀 증명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므로 우선 이 모든 사실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 조금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추구할 수 있는 연구는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라 다만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p. 47.







        제 1 부


  인간의 자연 상태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인간을 그 기원을 통해, 이를테면 종의 최초의 발아를 통해 검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대신 인간은 어떤 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이 두 발로 걸어 다니고 현재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손을 사용했으며 자연 전체에 시선을 보내고 하늘의 광대한 넓이를 눈으로 가늠했으리라고 가정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성된 존재에게서 그가 받았을지 모를 종교 교육에 의한 신앙으로 축적된 지식과, 오랜 세월에 걸친 진보를 통해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인위적인 능력을 제거해버린다면, 요컨대 인간을 자연의 손에서 갓 나온 그대로의 상태에서 생각해보면, 아는 거기서 어떤 동물보다는 약하고 민첩하지 못하지만 결국 그 어떤 동물보다 유리하게 조직된 한 동물을 떠올리게 된다. pp. 50-51.




  자연은 그들에게 스파르타의 법률이 시민의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과 똑같이 행동한다. 즉 자연은 훌륭한 체격을 가진 자들은 더욱 강건하게 만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모두 도태시켜버리는 것이다. p. 52.



  동물의 힘에 있어서 뛰어난 이상으로 자신이 재주에 있어서는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p. 54.



  동물보다 더 무서운 적으로서 인간의 적절한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는 상대는 인간의 타고난 연약함, 유년기나 노화, 온갖 종류의 병들이다. 처음 두 가지는 모든 동물들에게 공통되지만 마지막 것은 주로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모두 우리가 약하다는 슬픈 증거들이다. pp. 54-55.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령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 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나는 감히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며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주저 없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 ... 인간의 질병사(疾病史)는 문명 사회의 역사를 더듬어봄으로써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 56.



  사회화하고 노예화한 인간은 연약하고 겁이 많아지며 비굴해진다. 게다가 나약하고 여성화된 생활 양식은 인간의 힘과 용기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든다. ... 인간과 동물은 자연에 의해 동등한 대우를 받으므로 인간 스스로가 그가 길들이는 동물보다 그 자신에게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을 더욱 타락시키는 특별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p. 58.



  우선 나는 모든 동물을 하나의 정밀한 기계로밖에 보지 않는다. ... 나는 인간이라는 기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동물의 활동에서는 자연만이 오로지 모든 것을 행하는 데 반해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연의 활동에 협력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즉 동물은 본능에 따라,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에 따라 취사 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동물은 자기에게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에게 아무리 유리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신에게 해로워도 종종 그 규칙을 벗어나 행동한다.  p. 60.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지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특질이다. 자연은 모든 동물에게 명령하고 동물은 이에 따른다. 인간도 같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복종하느냐 저항하느냐의 선택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자유로움을 인식한다. 인간 영혼의 정신성이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자유의 의식을 통해서였다. p. 61.



  ... 나는 양자를 이렇게 구별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또 하나의 매우 특수한 성질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개량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인간은 환경의 도움을 얻어 다른 모든 능력을 점차 발전시켜가는 이러한 가능성을 종의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차원에서도 소유하고 있다. ... 인간과 동물을 분명히 구별하는 거의 무제한적인 이 가능성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며, 평온하고 순진무구한 나날이 계속되는 저 원초적인 상태로부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을 이끌어낸 것도 바로 이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오류, 악덕과 미덕을 몇 세기 동안의 흐름 속에서 부화시켜 드디어 인간을 자기 자신과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이 가능성이다. p. 62.



  주석 70)에서 (저자 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처럼 불행하게 만드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방대한 학문 연구, 수많은 기술의 발명, 막대한 노력이 소요된 심연 매립과 산을 깎고 바위를 쪼개고 운하를 만드는 등의 큰 공사, 토지 개간, 인공호 건설, 소택지 간척, 거대한 건물의 축조, 거대한 배의 건조 등 인간의 막대한 사업들을 생각할 때, 또 한 편으로는 이모든 것이 인류의 행복에 미친 참된 이득을 조금이라도 깊이 연구해볼 때,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불균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의 무분별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사리 분별을 못하고 어리석은 교만과 그지없이 공허한 자기 예찬을 위해 자연이 호의적으로 막아주었던 모든 참상을 오히려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pp. 171-172.


  인간은 본래 선량하며 나는 그러한 사실을 증명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토록 타락하게 만든 것은 그의 체질 속에 일어난 변화와 진보 그리고 그가 획득한 지식이 아닐까? 우리는 인간 사회를 얼마든지 찬미할 수 있으나 그 사회는 결국 사람들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겉으로는 상부상조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가능한 모든 해를 끼치려고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파멸시켜야 하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적이 되어야 하며 이해 관계의 충돌로 말미암아 사기꾼이 되는 상태가 과연 어떨 것인가를 반성해보아야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회는 각자가 타인에게 봉사함으로써 이득을 보게끔 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해를 끼침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얻지 않으면 그야말로 다행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pp. 172-173.


  사회 속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에게는 우선 생활필수품을, 다음에는 사치품을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에는 환락에 이어 엄청난 부와 시종과 노예가 따른다. 그는 잠시도 쉴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욕망이 자연적이고 절박하지 않을수록 정념이 점점 고조된다는 사실이며,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을 만족시키는 힘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자는 한참 동안 많은 재물을 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것을 착취하여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인간 사회, 적어도 모든 문명화된 인간 심정의 은밀한 의도를 담고 있는 도덕적인 그림이다. pp. 173-174.


  말살, 독살, 납치 등의 범죄와 그에 대한 처벌 역시 명백히 사유 제도의 탓, 따라서 결국은 사회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p. 174.


  사치는 치료하고자 하는 악보다도 훨씬 나쁜 치료법이다. 사치는 오히려 그 자체가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어떤 국가에서나 모든 악 가운데서 최악의 형태다. 사치는 자신이 창출해낸 무수한 종복들이나 부랑자들을 기르기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파멸시킨다. p. 176.


  사회와 그 사회가 발전시킨 사치는 자유 학예, 수공예, 상업, 문예를 낳는다. 이것들은 산업을 발달시키고 풍요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국가를 망치는 무용지물이다. p. 176.


  그러한 것들이 급기야는 가장 부유한 나라들까지도 벗어날 수 없는 모든 불행의 민감한 원인들이다. 산업이나 기술이 널리 보급되고 발전함에 따라 농민은 더욱 천대를 받고 몇몇의 사치를 위한 세금을 부담하면서 노동과 굶주림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마련이다. p. 176.


  나는 누군가가 마지막에, 인간이 발명한 기술이나 법률 같은 이 모든 위대한 것이 페스트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까 봐 두렵다. 우리에게 거주 공간으로 제공된 이 세계가 너무 비좁아지지 않도록 종의 지나친 번식을 억제하는 유익한 페스트 말이다. p. 177.


  사회를 파괴하여 내 것과 네 것의 경계를 없애고 숲으로 돌아가 곰들과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나의 적대자들이 내리는 결론이지만, 나는 그와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는 것에 대해 그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그에 대한 예방책을 마련하고자 한다. ...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저 태고의 원시적인 순진성을 되찾아보자. ... 인류의 악덕을 버리기 위해 그 지식도 버림으로써 인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정념이 원시의 순수성을 영원히 파괴해버린 나와 같은 인간들은 이제는 풀이나 도토리로 살아갈 수 없고 법률이나 통치자 없이 살아갈 수 없다. pp. 177-178.



  인간성을 탐구하는 자들이 뭐라고 하든지 인간의 지성은 정념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으며 누구나 알다시피 정념도 지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우리의 이성이 완성되는 것은 바로 이 양자의 활동에 의해서다. p. 63.



  그들[미개인들]의 욕망은 육체적인 욕구를 초월하지 못한다. ... 죽음과 그 공포에 대한 지식이란 인간이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 중의 하나다. pp. 63-64.



  ... 정신의 진보는 국민이 자연으로부터 받았거나 상황에 따라 국민에게 강요된 필요에 정확하게 비례하며 따라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재촉하는 정념에 비례한다. p. 64.



  요컨대 토지가 그들 사이에 분배되어 있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자연 상태가 조금도 소멸되어 있지 않는 한, 어떻게 그 같은 상황에서 땅을 경작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p. 67.



  모여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쓰이기 전에 인간에게 필요했던 유일한 언어는 ‘자연 그대로의 외침’이었다. ... 그들은 음성 어조의 변화를 증가시켰고 거기에 몸짓까지 덧붙였다. ... 또한 몸짓은 주의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주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마침내 몸짓 대신에 음성을 분절하여 발음하는 것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 이와 같은 대치(代置)는 모두의 동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또한 아직 훈련을 전혀 거치지 않아 조잡한 기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방식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원 일치의 동의에는 적절한 동기가 있어야 하며, 말의 사용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pp. 71-72.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관념은 단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인식될 수 없으며, 특히 지적 능력은 절들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일반적인 관념을 파악할 수 없다. ... 모든 일반적인 관념은 순전히 지적인 것이다. ... 만약 당신이 거기서 모든 나무에 공통된 것만을 보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무라고 할 수 없다. 순전히 추상적인 존재들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마음속에 그려지거나, 혹은 언술에 의해서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삼각형의 정의만이 삼각형의 참된 관념을 준다. 여러분이 머릿속에 하나의 삼각형을 그리자마자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삼각형이지 이미 다른 삼각형은 아니다. ... 따라서 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며 말해야만 한다. pp. 73-74.



  언어가 제정되기 위해서는 이미 결합된 사회가 있어야 했는지, 도는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 이미 발명된 언어가 있어야 했는지,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필요했는가 하는 문제다. p. 76.



  나는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중에서 어는 것이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지를 묻고 있다. ... 미개인은 자연 상태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본능 속에 갖고 있었으며,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훈련된 이성 속에 갖고 있었다. pp. 77-78.



  우선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서로간에 도덕적인 관계도, 분명한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아서 선인(善人)일 수도 악일 수도 없었으며, 악덕도 미덕도 가지고 잇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p. 78.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나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발달이나 법의 구속 때문이 아니라, 정념이 평정을 유지하고 악덕을 모르기 때문이다. ... 홉스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원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있어 인간의 강렬한 자기애가 크게 완화되도록, 또는 이 자기애가 생기기 전에 자기 보존의 욕구가 완화되도록 인류에게 주어진 원리다. 이 원리로 말미암아 인간은 공포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선천적인 감정에서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하게 된다. ...나는 지금 연민pitié에 대해 마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처럼 약하고 온갖 불행에 빠지기 쉬운 존재들에게 걸맞은 성향이다. 연민은 인간의 반성하는 모든 습관에 앞서는 것이므로 더욱 보편적이고 인간에게 유익한 미덕이며,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때로는 동물들도 뚜렷한 징후를 보이곤 하는 미덕이다. ... 『꿀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저자가 인간을 동정심 많고 감수성이 에민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예로 한 비통한 죄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냉정하고 치밀한 문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기뻐한다. 그 죄수는 한 마리 야수가 어린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 날카로운 이빨로 그 아이의 손발을 물어뜯고 꿈틀거리는 내장을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이 목격자라도 어찌 마음에 끔찍한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광경을 보고도 기절한 어머니나 곧 숨이 넘어가려는 어린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뻗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찌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pp. 79-82.



  이것은 모든 반성에 앞서는 자연의 순수한 충동이며, 또 아무리 타락한 풍속이라 하더라도 파괴하기 어려운 자연적 연민의 힘이다. ... 사실 너그러움이나 관대함 도는 인간애란 약자나 죄인 또는 인류 일반에 적용된 연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잘 생각해보면 친절이나 우정까지도 특정한 대상에 쏠린 변함 없는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는가? 동정심이란 우리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놓는 감정일 뿐이다. ... 사실 동정은 고통을 목격하는 동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과 마음속으로 하나가 되면 될수록 더욱 강해질 것이다. ...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 이 반성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 미개인에게는 이와 같은 훌륭한 재능이 전혀 없다. 그리고 지혜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무턱대고 인류 최초의 감정에 몸을 맡긴다. pp. 82-83.



  그러므로 연민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하면서 종 전체의 상호적 보존에 기여함이 분명하다.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깊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도와주러 나서게 되는 것은 바로 연민 때문이다. 연민은 자연 상태에서 법과 풍속과 미덕을 대신하며, 아무도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저항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이점을 누린다. ... 요컨대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원칙과는 별 관계가 없더라도 인간이 악을 행했을 때 느끼는 혐오감의 원인은 교묘한 논거 속보다 오히려 자연의 감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pp. 83-84.



  그들은 서로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 따라서 허영심도 신중함도 존경도 경멸도 모르고 지냈다. p. 84.



  인간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여러 가지 정념들 중에는 이성을 필요로 하는 열렬하고 격렬한 정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장애를 물리치며, 본래는 인류를 보존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면 인류를 파멸시키기 십상일 만큼 무서운 정념이다. p. 85.



  우선 정념들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억제를 위한 법률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p. 85.



  미개인들에게 이 감정[사람의 감정]은 거의 무가치한 것임에 틀림없다. ... 미개인들은 자연이 심어준 성욕을 따랐을 뿐이며, 자기가 자연에서 얻지 못한 취향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개인들에게는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좋은 것이다. p. 86.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그토록 자주 인간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오게 만드는 저 격렬한 열정을 사회 속에서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p. 87.



  결론을 내려보자. 원시의 인간은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고, 싸움도 교제도 없으며, 타인을 해칠 욕구가 없듯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어쩌면 동류의 인간을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그저 숲속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정념의 지배를 받을 뿐 스스로 자족하면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감정과 지적 능력만을 갖고 있었다. 원시의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눈으로 보아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것만 쳐다보았다. 그의 지능은 그의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발달하지 못했다. 우연히 그가 어떤 발견을 한다 해도, 그는 자신의 자식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수할 수 없었다. 기술은 발명자와 더불어 소멸했다. 교육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진보도 없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대가 이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세대는 언제나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으므로, 최초 시대의 모든 조야함 속에서 수백 년이 되풀이되며 흘러갔다. 종은 이미 늙었으나 인간 개체는 항상 어린애로 머물러 있었다. p. 89.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사회 상태보다 자연 상태에서 훨씬 적으며 아울러 자연적 불평등이 인류에게는 제도의 불평등에 의해 한층 증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90.



  그러나 원시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굴종과 지배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 게다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속의 쇠사슬이 있을 수 있겠는가? p. 91.


  

  굴종의 끈은 인간 상호간의 의존과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 필요성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이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는 이와 같은 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p. 92.



  이제 나는 그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을 인간 정신의 지속적인 진보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 이제 나는 인간 종을 손상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완성하고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듦으로써 사악하게 하며 마침내는 인간과 세계를 까마득한 출발점에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연을 검토하고 비교해보려 한다.p. 92.






        제 2 부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 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 무렵에 사태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 관념은 순차적으로 발생한 그 이전의 많은 관념들에 의존하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 한순간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 95.



  인간이 가진 최초의 감정은 자기 생존에 대한 것이며, 최초의 관심은 자기 보존에 대한 것이다. 땅에서 나는 생산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으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게 되었다. 굶주림이나 그 밖의 다른 욕구들이 그에게 갖가지 생존 방식을 차례로 경험하게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자기의 종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방식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난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러한 맹목적인 경향은 순전히 동물적인 행위만을 낳았을 뿐이다. p. 96.



  갓 태어난 인간의 상태는 이와 같은 것이었다. 최초에는 순수한 감각에 국한되어, 자연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자연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동물처럼 생활했다. 그러나 이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나타났고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 그는 자연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동물들과 싸우기도 했으며, 먹이를 두고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강자에게 양보했던 것을 다른 데서 보충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p. 96.



  인구가 증가하고 확산되면서 어려운 점들도 늘어났다. p. 97.



  우리가 표현하는 관계는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어떤 성찰,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안전에 가장 필요한 경각심을 가르쳐준 반사적인 조심성을 낳았다.

  이 같은 발전의 결과로 얻은 새로운 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에 대한 우월성을 자각하고 과시하게 했다. ... 이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눈길을 보냄으로써 비로소 자존심이라는 것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존재의 서열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던 중에 인류라는 자기의 종이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일찍부터 개인으로서도 첫째라고 자부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pp. 97-98.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과 동족들 사이 또는 자신의 이성과 자기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이 아직 모르고 있었던 그들과의 공통점까지 알게 되었다. ... 그들의 사고 방식이나 감정이 자기와 일치한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정신 속에 확립된 이러한 중요한 진리 때문에 그는 철학적 추론만큼이나 신속하고 확실한 예감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그들과 함께 지켜야 할 최상의 행동 규칙들을 지키게 되었다. p. 98.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호간의 약속과 그로 인한 이득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p. 99.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어느 지방이든 그 언어의 성립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발음이 명확해지고 합의에 의한 몇 가지 음들이 첨가됨으로써 그 지방 특유의, 하지만 조잡하고 불완전한 언어가 생겨났다. 그 언어는 오늘날 여러 미개 민족이 사용하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pp. 99-100.



  이와 같은 초기의 진보 덕분에 인간은 더욱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정신이 계몽됨에 따라 솜씨도 점점 향상되었다. ... 이윽고 인간들은 ... 돌도끼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이 돌도끼는 나무를 자르고 흙을 파고 나뭇가지로 오두막을 짓는 데 쓸모가 있었다. 사람들은 곧진흙 같은 것으로 그 오두막의 벽을 바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가족이 형성되고 구별이 생겨나고 일종의 소유 개념이 도입된 최초의 혁명기이다. p. 100.



  인간의 마음에 최초의 변화가 생겨난 것은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이 공동의 거처에서 함께 사는 새로운 상황의 결과였다. 함께 생활하는 습관은 인간이 체험한 가장 감미로운 감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부애와 부성애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가정은 상호간의 애착과 자유가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긴밀하게 결합된 하나의 작은 사회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일했던 남녀의 생활 방식에 처음으로 차이가 생겨났다. p. 101.



  그러한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한 도구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었고, 그들의 선조들이 알지 못했던 편리함을 얻기 위해 이 여가를 활용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꿈꾸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에게 부과한 최초의 멍에였고, 그들의 자손에게는 불행의 단초였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정신을 유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p. 101.



  ... 점차 서로 가까워져 모리를 이루고 드디어 각 지방마다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규칙이나 법률이 아닌 풍습과 성격의 공통성에 따라, 즉 같은 생활 양식이나 음식에 따라, 도는 기후의 공통된 영향에 따라 결합되어 있다. ... 젊은 남녀들이 이웃이 되어 오두막에 사록, 자연이 요구하는 일시적 교류가 곧 거듭되는 왕래로 인해 즐겁고 영속적인 또 다른 교류를 낳는다. ... 무의식중에 가치와 미의 관념을 얻게 되고 그것이 다시 좋고 나쁨에 대한 감정을 낳게 된다. pp. 102-103.



  여러 가지 개념과 감정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정신과 마음이 훈련됨에 따라, 인류는 점차 유순해지고 관계가 확대되고 유대가 강화되었다. ...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러한 최초의 선호(選好)에서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태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부러움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효모에서 생긴 효소가 마침내 행복과 무구(無垢)에 치명적인 화합물을 생성시켰다. pp. 103-104.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하여 존경이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형성되자, 누구나 자기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의범절의 의무가 미개인들 사이에도 생기게 되었으며 고의적인 범행은 모두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그 범행으로 인해 초래되는 손해보다는 인격을 모욕당했다는 점 대문에 더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관념들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하고 또 이들 민족이 이미 최초의 자연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인간은 본래 사악하므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규제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p. 104.



  우리는 사회가 형성되고 사람 사이에 여러 가지 인간 관계가 성립되자 이미 그들 사이에는 애초의 구조에서 물려 받은 것과는 다른 성질이 요구되었으며 도덕이 인간의 행위 속에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 원시 상태의 무위(indolence)와 우리 이기심의 극성스러운 활동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인간 기능 발달의 이 시기가 가장 해복하고 안정된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 인간이 그 상태에서 벗어난 것은 공동의 유용성을 위해서는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어떤 불행한 우연 때문일 뿐이다. p. 105.



  요컨대 그들이 혼자 할 수 있는 작업과 다른 사람의 협력이 필요 없는 기술에 전념하는 동안, 그들의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건전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계속해서 상호간에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렸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순간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곳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p. 106.



  토지의 경작은 필연적으로 토지의 분배라는 문제를 낳았으며 일단 소유가 인정되자 정의에 관한 최초의 규칙이 생겼다. ... 이러한 기원은 이제 막 생겨난 소유의 관념이 육체 노동 이외의 것에서 유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큼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다. ... 오직 노동만이 경작자에게 자신이 경작한 토지의 산물에 대한 권리를 적어도 수확기까지 부여하며, 따라서 토지에 대한 권리를 해마다 보유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토지의 점유possession가 반복되면 그것은 쉽게 소유로 전환된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 자연법에서 생겨난 권리와는 다른 ‘소유’라는 권리를 낳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p. 109.



  이리하여 자연적 불평등이 새로운 원인의 결합에 따른 불평등과 더불어 조금씩 전개되었다. p. 110.



  다시 말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체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에서 위압적인 호사(豪奢)의 과시와 기만적인 책략, 이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 마침내 인간은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진정한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열망 때문에 서로를 해치려고 하는 옳지 못한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더욱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친절의 가면을 쓰기 일쑤이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 pp. 111-112.



  이렇게 해서 가장 강한 자 또는 가장 궁핍한 자가 그의 힘이나 욕구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일종의 권리―그들이 볼 때 소유의 권리와 동등한 권리―로 생각함에 따라 평등은 깨지고 뒤이어 가장 끔찍한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 가장 강한 자의 권리와 최초의 점유자의 권리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투쟁과 살인에 의해 종식될 수밖에 없었다. 갓 태어난 사회는 더없이 끔찍한 전쟁 상태로 변해버렸다. p. 113.



  부자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유효한 이유나 자신을 방어할 충분한 힘도 없고, 한 사람 정도는 쉽게 짓누른다 해도 강도 떼에게는 오히려 짓밟힐 수밖에 없고, 상호간의 질투심 대문에 약탈의 공통된 희망으로 결집된 적들에 대항하여 자기와 동료들과 결합할 수도 없어서 만인에서 홀로 맞서게 되었다. 마침내 부자는 절박한 필요에 따라 인간의 정신 속에 스며든 적이 없는 가장 교묘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의 세력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 자신의 적대자들을 자신의 방어자들로 만들고, 그 적대자들에게 다른 준칙을 불어넣어 자연법이 자신에게 불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유리한 다른 제도들을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pp. 114-115.



  그 후 부자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쉽사리 생각해냈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말했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를 제지하며 각자에게 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해 단결합시다.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규칙을 정합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며, 어느 쪽도 차별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를 평등하게 서로의 의무에 따르게 하는, 말하자면 운명의 변덕을 보상하려는 규칙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힘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의 최고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현명한 법률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성원을 보호하고 방위하며,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영원히 우리를 단합시키는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p. 115.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심산으로 자신의 쇠사슬을 향해 달려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 제도의 이점을 느낄 만한 이성은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내다볼 정도로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p. 116.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러하거나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이다. p. 116.



  사람들은 세상 어디를 가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며, 누구의 머리 위에나 매달려 있는 검이 잘못되어 떨어질 때 목을 움츠려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기가 벌써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시민법이 공동체 성원들의 공통된 규칙이 되었으므로, 자연법은 서로 다른 사회 사이에서만 유지되었다. 이로써 자연법은 국제법이라는 명칭으로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자연적 동정심을 대신하는 것으로 약화되었다. pp. 116-117.



  이렇게 해서 서로간에는 여전히 자연 상태에 머무르고 있던 다양한 정치체들도 곧 개인을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 바로 그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 이것이 인간이 여러 사회로 분할된 데서 엿볼 수 있는 최초의 결과다. pp. 117-118.



  몇몇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는 강자의 정복이나 약자의 단결에서 유래한다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 그러나 내가 방금 설명한 원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첫째, 앞에서 말한 강자의 정복이라는 경우에서 정복의 권리 그 자체는 아무 권리도 아니므로 다른 권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 상태로 다시 돌아간 국민이 자진하여 정복자를 자기의 우두머리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 정복자와 피정복자인 국민은 언제까지나 서로 전쟁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 둘째, 약자의 단결이라는 경우를 놓고 볼 때, 이 ‘강하고’ ‘약하다’는 말 자체가 애매하다. ... 셋째, 자유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가 교환으로 얻을 것이 전혀 없는데도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을 자진하여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부자는, 이를테면 자기 재산의 모든 부분에서 민감하므로 손해를 입기가 훨씬 쉬웠다. pp. 118-119.



  정치 상태란 거의 우연의 소산이며 출발부터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점이 발견되고 대책이 제시되긴 했지만 구조적인 결함 자체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p. 119.



  국민들이 애당초 아무런 조건이나 반대 급부 없이 절대적 지배자에게 몸을 내맡겼다거나, 자존심이 강하고 쉽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공동의 안전을 위해 생각해낸 최초의 수단이 노예 상태에 뛰어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다. ...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란 한쪽이 다른 쪽에 예속되는 것이므로, 통치자의 도움을 빌려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모두 통치자의 손에 맡겨버린 것은 양식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 국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가 그에게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모든 국법의 기본적인 준칙이다. pp. 120-121.



  나는 노예가 된 인민이 쇠사슬에 매인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예속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p. 122.



  몇몇 사람들은 전제적인 정치 체제와 모든 사회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

  ... 아버지를 존경할 의무는 있어도 아버지에게 복종할 의무는 없다. ... 시민 사회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이 시민 사회에서 주된 힘을 끌어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개인이 여럿의 아버지로 인정받은 것은, 그의 둘레에 여럿이 모여 있을 때뿐이었다. pp. 122-123.



   이와 같이 권리를 통해 사실을 검토해보면, 전제 정치의 자발적인 성립이라는 주장에는 확실성이나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의무를 지우고 다른 한쪽에는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무를 지는 쪽만 손해를 보는 이러한 계약의 유효성을 납득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하겠다. ... 다만 이렇게까지 자기의 품위를 떨어뜨려도 아무렇지 않는 자들이 무슨 권리로 자손을 똑같은 불명예에 복종시킬 수 있으며, 또한 자손들이 그들의 적선으로 얻게 된 것이 아닌 자유라는 재산―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을 무슨 권리로 자손들 대신 포기하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pp. 123-125.



  푸펜도르프는 “인간은 합의나 계약에 따라 재산을 남에게 양도하듯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첫째, 내가 양도하는 재산은 나와 전혀 무관하여 설령 남용되더라도 상관이 없으나, 남이 내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며, 억지로 강요되어 저지르는 악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범죄의 도구가 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유권은 사람 사이의 합의와 제도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나 자유 같은 자연의 본질적인 선물은 그렇지 않다. ... 자유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자연에서 받은 선물이므로, 어느 부모도 자식들에게서 이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pp. 125-126.



  여기서는 다만 세상의 통념에 따라 정치체의 성립을 인민과 그들이 선택한 통치자 사이의 참된 계약이라고 보는 데서 그치고자 한다. 이 계약에서 당사자 양측은 그 속에 명시된 법규들을 준수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쌍방의 결합은 확고해진다. 인민은 사회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그들 모두의 의지를 하나의 의지로 결합시켰다. 그러므로 이 의지가 표명되고 있는 모든 조항은 각각 기본적인 법률이 되어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예외 없이 의무를 부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는 법률의 집행을 감시하는 의무를 맡은 행정관의 선정과 그 권력을 규정하고 있다. 이 권력은 정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되지만 그것을 변경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법률과 그 집행자들을 종경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명예가 주어지고, 집행자 개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선정을 위해 기울인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여러 가지 특권이 부가된다. 대신 행정관은 자기에게 맡겨진 권력을 오직 맡긴 자의 의향에 따라 행사하고 각자가 자기의 소유물을 언제나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와 같은 정치 구조가 갖는 불가피한 폐해를 경험으로 알지 못하게 되거나 인간 마음에 대한 지식을 통해 예상하기 전에는 이 정치 구조의 유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 그 유지에 가장 큰 이해 관계를 갖는 만큼, 그 정치 구조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pp. 126-127.



  계약을 그것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취소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 어느 쪽이든 상대가 그 계약 조건을 어기거나 그 조건이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언제고 계약을 포기할 권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이 원칙을 근거로 구축될 수 있는 것 같다. pp. 128.



  정부의 여러 가지 형태는 그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이 수립되던 시기에 개개인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크고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 p. 129.



  인민은 이미 종속과 휴식이 생활의 안락에 길들여져 쇠사슬을 끊을 만한 힘도 없었으므로 자기들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예속 상태를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 p. 130.



  이러한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의 설정이 제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p. 130.



  정치상의 차별은 필연적으로 시민들 간의 차별을 가져온다. 인민과 통치자들 사이에 증가되어가는 불평등은 이윽고 개인들 사이에서도 느껴지게 되며, 정념이나 재능에 따라, 그리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바뀐다. p. 131.



  개인이 동일한 사회 속에 결합되어 서로 비교하고 끊임없이 이용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차별을 고려하게 되면, 곧 그들 사이에 신용과 권위의 불평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부, 신분이나 지위, 권력, 개인적인 장점이 주요한 구분 기준이 되며 여기에 따라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위치를 차지하므로, 나는 이들 서로 다른 세력의 조화나 충돌이 국가의 구성이 좋은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임을 증명할 수 있다. pp. 132-133.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여 애쓴 결과 오히려 내부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p. 134.



  신분과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하찮은 학문에서, 이성과 행복과 미덕에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p. 135.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를 갖게 된다. ... 전제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이미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 이 자연 상태와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자연 상태의 차이는 후자가 순수한 자연 상태인 반면 전자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두 상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정부의 계약은 전제군주제에 의해 너무 많이 파기되어 있으므로, 전제 군주는 자기가 최강자로 있는 동안만 지배자이다. pp. 135-136.



  미개인은 안식과 자유만을 추구하고 한가로이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스토아 학파의 아타락시아ataraxia도 미개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항상 활동하면서도 땀을 흘리고 불안해하며 더욱더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 사실상 이 모든 차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pp. 138-139.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 p. 140.

  



에드워드 윌슨,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책의 구절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유전적으로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질문거리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p.46


  유전적으로 결정된 형질이란 최소한 하나 이상의 유전자가 존재함으로써 다른 형질들과 구별이되는 형질을 말한다. p. 46


  이런 사실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유전적 토대 위에 있다는 가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행동이 근연 관계에 있는 종들과 공유하고 있는 일부 유전자와 인간 종 고유의 유전자로 조직된다는 가설과 일치한다. p. 63


  유전자 가설의 핵심은 신다윈 진화론에서 직접 이끌어낸 명제, 즉 인간 본성을 형성하는 형질들은 인간 종이 진화해 온 기간만큼 적응을 거쳐왔고, 그 결과 유전자들은 그 형질들의 발달 성향을 지닌 운반체 집단을 통해 퍼진다는 명제이다. 적응이란 간단히 말해, 한 개체가 형질을 드러내지 않을 때보다 드러냈을 때 다음 세대에 그의 유전자를 발현시킬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본 개체들의 차등적 이점을 <유전자 적합성>이라고 한다. 유전자 적합성은 개체의 생존 능력 강화, 개체의 번식 능력 강화, 공통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는 친족들의 생존 및 번식 능력 강화라는 세 가지 기본 요소로 구성된다. pp. 63-64


  다윈이 자연선택이라고 부른 이 과정은 인과 관계의 꽉 짜인 순환을 의미한다. 만일 어떤 유전자를 소유한 개체에게 특정 형질이 발현된다고 예정되어 있다면, 즉 그 형질이 어떤 형태의 사회적 반응을 낳고 다시 우월한 적합성을 수반한다면, 그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더 많이 발현될 것이다. 자연선택이 무수한 세대 동안 계속된다면, 적합한 유전자는 집단 전체에 퍼질 것이고 그 형질은 종의 특징이 될 것이다. 수많은 사회생물학자, 인류학자, 기타 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인간 본성이 자연선택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p. 64.


  워딩턴은 발달이란 고지대에서 해안까지 뻗어 있는 경관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눈동자의 색깔, 오른손잡이 또는 왼손잡이, 분열증 같은 형질의 발달은 경사지에서 공을 굴리는 것과 비슷하다. 각 형질은 경관의 서로 다른 부분을 가로질러, 서로 다른 형상의 골짜기와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눈동자의 색깔에서는 청색이나 홍채 색소에 해당하는 유전자들이 출발점이 되고, 그 지형은 하나의 깊은 통로가 된다. 그 공은 하나의 운명을 향해 곧장 굴러간다. 즉 일단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면 한 종류의 색깔만이 가능하다. pp. 96-97.


  인간 행동의 발달 지형은 훨씬 더 폭넓고 더 복잡하지만, 그래도 지형인 것은 틀림 없다. ... 경관은 은유일 뿐이고, 더 복잡한 현상을 다루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관한 중요한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그 행동의 결정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각 행동을 유전자로부터 최종 산물까지 진행되는 발달 과정으로 나누어 처리하고 추적해야 한다. pp. 97-98


  인간의 정신은 경험을 통해 선과 점으로 뒤엉킨 그림들이 그려지는 백지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대안 중에 어떤 특정한 대안에 먼저 다가가서 본능적으로 특정한 하나를 선택하고, 유아에서 어른으로 자동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화하도록 정해진 신축적인 계획표에 따라 육체한테 어떤 행동을 하라고 촉구하는, 주변 환경을 빈틈없이 경게하는 탐색자, 즉 자치적 의사 결정 기구로 기술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오랫동안 해온 선택의 축적, 그것들의 기억, 앞으로 해야 할 선택에 대한 심사숙고, 각인된 감정들의 재경험, 이 모든 것이 정신을 구성한다. 한 개인의 의사 결정은 그를 다른 인간과 구별해 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결정에 따라붙는 규칙들은 모든 개인이 내린 결정들을 폭넓게 중첩시키고, 그리하여 인간 본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에 충분하고 강력한 수렴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빈틈이 없다. pp. 105-106


  하지만 개인의 세세한 행동들을 단기적으로라도 예측하려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술이 필요할 것이고, 그런 예측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지성을 지닌 존재의 능력을 넘어설 것이다. 고려할 변수들이 수백 가지 아니 수천 가지가 되면, 그 중 어느 한 변수가 지니는 미미한 부정확성이라도 정신 작용의 일부나 전체를 바꿔놓을 만큼 확대되기 쉽다.
 
게다가 아원자 입자에 적용되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여기에도 비유적으로 적용된다. 관찰자가 그 행동을 더 깊이 탐구할수록, 그 행동은 탐구 행위에 의해 더욱 변형되며 그 행위의 의미 자체는 선택한 측정 수단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관찰자의 의지와 운명은 관찰 대상자의 그것과 연계된다. 엄청난 수의 체내 신경 작용들을 동시에 그리고 원격적으로 기록할 능력이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관측 장치만이 그 상호작용을 허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수학적 비결정성과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 어떠한 신경계도 다른 지능 체계의 미래를 의미 있는 수준까지 상세히 예측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 법칙일지 모른다. ...
  인간 정신 같은 복잡한 활동을 예측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근본적인 어려움은 원래의 자료가 뇌의 심층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변형된다는 점이다. pp. 114-115


  타협안은 인지심리학자들이 스키마 또는 지식 구조라고 부르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스키마는 뇌 속에 있는 타고난 또는 학습된 구조로서, 신경 세포에 입력된 자료들은 이 스키마와 비교된다. 실제 패턴과 예상 패턴이 일치하면 몇 가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스키마는 좋고싫음에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파악하고 걸러내, 정신이 환경의 특정 부분을 더 생생하게 지각하고 특정 결정을 더 선호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개인의 정신적 <성향>에 기여할 수 있다. 스키마는 감각 기관에 실제로 입력된 것 중 누락된 부분을 세세하게 채울 수 있고, 현실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정신속에 창조할 수 있다. p. 117.


  가장 중요한 점은 뇌 속의 스키마가 의지의 물리적 토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의 활동은 되먹임고리를 통해 유도될 수 있다. 감각 기관이 뇌의 스키마로 전달하는 신호들은 감각 기관으로 되먹임되며, 행동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스키마가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순환은 반복된다. ... 정확히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증거는 없다. 지금은 그런 근본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p. 118

 

[끄적임]

사회 생물학과 진화론. 혁신적이지만 확신적이진 않다. 아직은 많은 주장들이 추정적 진술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연구가 훨씬 더 진척된다면, 추정이 확신으로 변모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키마 또는 지식 구조". 윌슨은 물리적  토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물리적 토대는 아직 아닌 것 같다. 사회 생물학의 문외한으로서 이 내용을 접했을 때에는, 선이해(pre-understanding)의 작동으로 말미암아,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형식의 일종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윌슨은 물리적 토대라 말한다. 물리적 토대라 한다면, 스키마가 뇌의 물리적 구조 중 일부일 것이다. 윌슨이 정확히 그런 뜻으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신뢰하는 심리학자 중 한 명에게 스키마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냐고 했다. 그러나 대답은 스키마가 학자마다 달리 쓰인다는 것이다. 이어진 질문은 스키마는 어떻게 획득되느냐는 것이었고, 대답은 학습에 의한 것이라 했다. 확인해야 할 것은, 윌슨이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느냐는 것인데, 이 책의 내용으로는 아직 불분명하다.

  경관의 비유는 유전자에 결정되는 특징을 상당히 정확히 묘사하는 것 같다. 유전자에 의해 100%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계가 존재한다. 이것이 답이다.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이지만, 유전자는 인간의 한계를 노정한다.

  자유 의지의 가능성, 즉, 의지의 비결정성을 윌슨은 두 가지 이유에서 지지한다. 수학적 비결정성(수많은 변수)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그러나 수학적 비결정성은 불필요한 것 같다. 신경의 작동이 전기화학 반응이라면, 이미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될 테니까. 확률적으로만 예측이 된다. 수학적 비결정성은 변수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다. 만일 수학적 비결정성이 redundant하지 않도록 해석하자면, 그러한 확률적 예측마저도 불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변수 때문에 사건의 인과적 연쇄를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수학적 비결정성을 redundant하게 간주한다면, - 이것은 철학의 사고 실험에 의해 가능하다 - 즉,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무한한 요소들을 우리가 안다고 가정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가 물리적으로 결정되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 의지를 정당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정한 확률적 예측 내에 존재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확률적 예측을 벗어나는 부분, 예를 들어 그것이 약 5%라 한다면, 자유 의지는 그 5% 내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유 의지는 elbow room 정도의 여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윌슨은 물리적 토대, 물질적 토대를 중요시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 이래 중요한 변혁의 과정을 따르는 노선이다. 그럼에도 의식의 문제에서는 여전히 철학의 일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너무 단순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창발론이 지금은 어쩌면 환원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 1 장 20대 80의 사회


  폐어몬트 호텔에 모여 국제회의를 열고 있는 이 세계적인 실용주의자들은 인류의 미래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 그것은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과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말이다.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은,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노동 가능한 인구 중에서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무역귀족 출신 워싱턴 시싶은, "더 이상의 노동력은 필요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일ㅇ자리를 구하는 사람들 다섯 중 하나면 모든 상품을 생산하고 값어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이 20%의 살마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돈벌이나 소비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간혹 1~2% 정도의 다른 사람들은 운 좋게 상속을 받아 이 대열에 추가로 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 중에서 80%는 놀아야만 하는가? 『노동의 종말』을 쓴 미국의 저술가 제리미 리프킨은 “확실히 그렇다.”라고 말한다. 26쪽.



  오히려 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티티테인먼트’가 판을 치게 될 것인데, 이 말은 원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만든 말이다. 그는 원래 폴란드 출신으로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안보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다. 그 뒤로 그는 지역전략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티티테인먼트'는 즐기는 것을 뜻하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미국 속어 ‘티쯔tits’를 합친 말이다. 다시 말해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27쪽.



  그러나 사회보장 국가를 지키려는 진영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싸움을 하고 있다. 물론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려는 자들의 논리는 엉터리이다. ‘세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계화'야말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낸다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독일 대기업들은 외국으로 나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이미 있던 기업들을 인수하고 경영합리화(!)를 통해 그 나라의 시장을 점령하느라 일하는 사람의 수만 줄이고 있다. 또 저들은 사회보장비 부담이 너무나 크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1995년의 경우 사회보장비가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년 전의 그것보다 줄어든 형편이다. 그들의 주장 중에 유일하게 맞는 말은 다른 선진국에서도 사회보장제도를 축소시키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나라들도 정부의 재정지출을 줄이고 있고, 임금을 줄여나가며, 복지 혜택을 줄이고 있다. 스웨덴에서 오스트리아,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다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저항의 물결도 거세게 일어났고, 아쉽게도 결국에는 좌절로 끝났다. 28-29쪽.



  또 다른 한편에서 범지구적 자본가들은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자꾸만 낮추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결국에는 창출된 전사회적 부에서 임금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어느 나라나 사정은 비슷하다. 사회적 부는, 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것인데도 그들이 가져가는 부분은 자꾸만 줄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마당에 어느 한 나라만이 나서서 “그렇게 하지 말자.”고 이야기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뤼디거 도른부시는 “이제 독일 모델은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32쪽.



  칼 마르크스가 죽은 지 110년이 넘는 이 시점에도 자본주의는 그 혁명적인 경제학자가 말했던 방향으로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경향은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을 높여나가기보다는, 오히려 줄여나가거나 노동력의 가치를 최소한으로 낮추려고 한다.” 이 말은 그가 1864년 9월 런던에서 열렸던 제1인터내셔널 회의에서 행한 주제발표 중에 나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초기 자본주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민주적으로 통제될 수 있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적 시절이 다 지나가고 오로지 반개혁적인 처사들만이 그 역사적인 파고를 드높이고 있다. 32-33쪽.



  “범지구적인 경제의 통합은 절대로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가들에 의해서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각 나라 정부와 의회는 온갖 협정서, 온갖 법률이나 결정들을 통해서 자본과 상품이 국경선을 넘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없애는 데 노력해 온 것이다.” 33쪽.



  “세계경제가 범지구적으로 통합되는 ‘세계화’ 과정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이론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그 기본적 주장은 모든 군소리를 다 뺀다면 다음과 같다. "시장은 좋은 것이고, 국가의 개입은 나쁘다.

   ... 국가에 의한 감독보다는 탈규제화, 무역과 자본이동의 자유화, 공공기업의 민영화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정책 기조의 핵심이다. 이런 정책 기조들이 시장 옹호론자들 중심의 정권이나 각종 국제기구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무역기구WTO>]에 의해 차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 수단들은 결국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을 위한 싸움에 동원되었고, 이 싸움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이 싸움이 이루어지는 영역은 제한이 없다. 항공 수송, 정보통신, 은행, 보험, 건설, 소프트웨어 개발 부문 등에서부터 마침내는 인간 노동까지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지구 위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 어느 누구도 시장의 수요와 공급 법칙이라는 냉혹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게 되었다. 34쪽.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 이른바 ‘터보-자본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의 생존 근거를 철저히 파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란 한편으로는 역량 있는 국가-개별 국가의 정책 집행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에 뿌리를 둔 사회 안정-민주주의적 안정성-이다. 그런데 최근의 변화 속도나 권력 및 복지의 재분배 구조를 보건대, 이 ‘터보-자본주의’는 새로운 질서가 싹터 나오기도 전에 예전의 사회질서를 송두리째 허물고 있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 역설적이게도 반혁명의 발상지인 미국 사회에서 그 사회적 결속력의 파괴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36쪽



  만일 모든 나라의 정부가 허구한 날 세계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만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미래 생존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보다 진지한 자세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모든 정치가들은 자신의 무능력만을 드러낼 뿐이고, 나아가 국가는 민주적인 정당성을 잃어버리게 도리 것이다. 한마디로, ‘세계화’를 민주주의 시각에서 보면, 자기가 숨겨놓은 덫에 스스로 단단히 걸려들어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는 셈이다. 36쪽.


  기업 경영의 논리와는 달리 민주사회에서는 결코 ‘잉여 인원’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가 없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분명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 시민들은 언론에서 뉴스가 나올 적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우리가 아니라 외국과의 경쟁 때문에’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 경제학적으로 보아도 잘못된 이런 식의 주장은 이제 우리가, 우리 아닌 모든 낯선 사람들과 ‘적대관계’에 설 것을 강요한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살길이 막막해진 수백만의 중산층 시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치료약을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분리주의, 또는 세계시장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 같은 방식들 속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사회에서 배척받은 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자기들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또 배척하고자 하는 것이다. 37쪽.



  맹목적 효율성 경쟁과 임금 인하를 기초로 진행되는 범지구적 경쟁과정은 전세계적으로 불합리성만 만들어낼 뿐이다. 이제는 저 아래쪽에서 정말로 극심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들만 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중산층으로 통해오던 사람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잃고 불쌍한 하류층으로 떨어질까봐 더 많은 두려움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매우 큰 잠재적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은 가난 그 자체라기보다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다.






제 2 장 온 세상이 모두 하향평준화되고 있다



  월트 디즈니사의 회장이며 매스컴계의 황제인 마이클 아이스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오락물은 개인의 가능성, 개인의 선택,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을 아주 다양하게 펼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이다.” ...

  그러나 러트거스 뉴저지 주립대학교 월트 휘트먼 센터 소장인 베자민 바버는 그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 바버는 아이스너 회장이 내세우는 ‘다양성’의 강점이라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혹평한다. 그에 따르면, “이 주장은 두 가지의 결정적인 내용에 대해 ‘눈 가리고 아옹’하고 있다. 하나는 그 선택의 종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가진 소망이 과연 아무런 사회적 연관 없이 독립적으로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버에 따르면 “디즈니가 지구촌 문화를 휩쓸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인간 문명사만큼이나 오래 된 한 현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어려운 것과 쉬운 것, 느린 것과 빠른 것,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 사이의 구분과 경쟁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렵고 느리고 깊이 있는 것들은 인간 사회의 놀라운 문화적 업적을과 결부된 것들이고, 반면에 쉽고 빠르고 단순한 것들은 “우리가 지닌 무관심, 안이함, 나태함 등에 상응하고 있다. 디즈니나 맥도널드, 그리고 M-TV는 모두 가볍과 빠르고 단순한 것에 호소하고 있다.” 47쪽.



  지구촌이 점점 좁아지고 여러 문화 사이의 동화작용이 촉진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그 결과 문화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범지구화된 단조로운 미국식 문화가 일률적으로 전세계 문화를 휩쓸게 된다. 뉴욕의 비도오 예술가인 쿠르트 로이스톤이 이미 이런 경향을 ‘스크리치’라고 예언한 바 있다. ... 이러한 문화의 특징은 한마디로, 야단스럽게 꾸미고 나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요란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지루하다. 모두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요란을 떠는 것을 좋아하는 이 ‘세계화’ 시대에 차라리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럴 여유도 없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의식도 없는 것 같다. 50쪽.



  상업주의적 이미지 공세가 강해진 결과, 이제는 옛날처럼 사람들이 자기 지역 고유의 문화적 소속감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

  이런 식으로 범지구화된 상품의 홍수가 수십 억의 수요를 따라 지구촌 곳곳으로, 특히 세계적 대도시의 쇼핑 골목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통찰력 있는 사회비평가인 이반 일리치가 일찍이 경멸조로 말한 것처럼, “갈증이라는 인간적 욕구를 코카콜라에 대한 갈망으로 전환시켜 내는 과정”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완성중에 있는 것이다. 52쪽.



  메스컴 속에서 느끼는 가까움이나 동시성은 결코 실제의 현실 속에서 문화적인 결속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더더군다나 현실의 지구 전역에서 경제적인 평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59쪽.



  “우리들이 대부분 지니고 있는 무관심과 냉담한 같은 것들은 이제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화되었다.” 이 말은 1995년 3월에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프랑수와 미테랑이 경고조로 한 말이다. 미테랑 대통령은 “여태껏 선진국이 후진국에 지원해 왔던 개발원조금 같은 것은 모두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세계 각국은 이웃 나라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오직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개탄한 바 있다. 62쪽.



  바로 유럽의 시민들조차 ‘세계화’라는 물결이 새시대의 예외없는 희생자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선진국 시민들도 고용불안과 장래불안, 그리고 아이들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면서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높이 쌓아가고 있다. ... 주지하다시피 이제 서구 사회도 서서히 경제적으로 양극화되어 간다. 63쪽,


  이제 소민족주의Tribalism가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소민족주의는 많은 지역에서 흔히 폭력적인 민족주의나 광신적 지역 맹신주의로 변질되고 있다.

  그리하여 19세기나 20세기 초와는 달리, 오늘날에 와서는 대부분의 전쟁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 안 여러 지역이나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과 국제기구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이러한 참극에 대해 오로지 배제와 억압의 논리와 대처한다. 64-65쪽.



  1993년 여름, 하버드 대학 교수 새뮤얼 헌팅턴은 미국에서 이름 높은 국제정치 학술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에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의 핵심적 주장은, 더 이상 냉전시대처럼 사회 이데올로기적 갈등이나 체제 갈등이 아니라, 다양한 문명들 사이에 생기는 종교적•문화적 분쟁들이 우리의 미래를 상당한 정도로 규정짓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

  사실상 이런 진단은 의심스럽기 그지 없다. 왜냐하면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무너진 최근에 들어서는 오히려 잘 산다고들 하는 서구 각국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자체의 사회보장제도를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있어 정치적 긴장을 ‘자초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급부상하는 아시아 각국은 아시아라는 지역 안에서도 결코 동질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해체와 분할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66-67쪽.



  세계의 정상급 정치가들은 이와 관련하여 상당히 불길한 변동을 감지한다. 최근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한 강연회에서 “우리는 범세계적 혁명의 와중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 지구는 크게 두 가지의 서로 대립적인 힘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지구화의 압력과 분열화의 압력이다.” 70쪽



  결국 지난 날 독재에 가까운 개발지상주의는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이 내세웠던 하나의 ‘무기’였음이 폭로되고 있다. 한마디로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구호는 ‘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구제하라!’이다. ... 이제 인류의 절대다수한테는 지위 상승이나 복지보다는, 추락과 생태계 파괴, 문화적 퇴보가 일상의 생활과정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현실화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세계적 엘리트들이 기존 선진국 안에서 <20 대 80의 사회>가 올 것이라던 예견은, 이제 전지구적 범위에서 <20 대 80의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다. 그 증거 자료는 충분하다.

  세계화의 모든 나라들 중 가장 부유한 5분의 1(20%)에 해당하는 나라들이 지구 전체 부의  생산 중 84.7%를 차지하며 전체 무역량의 84.2%를 차지하고 있다. 나아가 총국내저축액의  85.5%를 이들 5분의 1의 나라들이 가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구촌 범위에서의 <20 대 90의 사회>를 분명히 일러주는 증거들이다. 71쪽.



  최고로 잘사는 20%의 나라가 전세계 나무 사용의 85%, 금속 가공의 75%, 에너지 사용의 705를 차지한다. 이것의 귀결은 무엇인가? 대체로 평범하게 들리긴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아주 잔인하다. 이러한 자연 파괴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물질적 복지를 지구촌 모든 시민들이 공동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 ‘지구촌의 한계’가 서서히 인류 앞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72쪽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발전소들이 건설되고 자동차 문화가 지배하게 되면서 에너지 측면에서도 지구촌의 생태계 균형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

  이제 기후의 이상 변동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더구나 이를 완화시키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72-73쪽.



  지구 온난화 현상 같은 이상기후 사태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득을 보게 되어 벼락부자가 되고, 바로 이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지구 온난화에 대한 근본적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가능한 노력이 말짱 허사이며 이제 세계는 멸망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확실히 잘못된 입장이다. ...

  ... 세계 생태주의자 그룹인 <그린피스> 의장 틸로 보드가 강조하듯이, “인류의 생택적 운명은, 물론 아시아에서 결정”되겠지만 지구의 생태친화적 재건설에 있어 1차적 책임은 우리 ‘지구촌’ 사회에 상품 유토피아와 상품 우상을 만들어낸 자들,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자본가 및 그 동조자들한테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78-79쪽.



  <로마클럽>의 버트란트 슈나이더가 말한 바대로,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외부의 그 어떤 형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81쪽.



  브라운은 이 맥락에서, 앞으로 이러한 곡물 생산 관련 자료들이 경제계에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분쟁까지도 초래할 위험이 크다고 경고하고 있다. ... “이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1인당 소비가능 곡물량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고 항상적이며, 또 단기적이 아니라 매우 장기적이기 때문에 진지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83-84쪽



  브라운에 따르면, “만일 인류가 더 이상 곡물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없다면 국제적으로도 정치적인 관계들이 상당히 불안정하게 바뀌게 될 것이다.” ... “바로 이러한 사실들은, 앞으로 식량 분야에서도 미국이 세계의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임을 증명한다.”고 결론짓는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는 식량이 정치적인 압력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

  ... 이제 미국은 “대중 문화의 슈퍼 권력체”로서 놀이 문화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범지구적인 식량 배분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 유럽 연합이 잉여 논산물의 수출에 대해 더 이상 보조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세금을 받아 가게 된다면, 그리하여 수출 단가를 높이게 된다면, 유럽연합 바깥의 다른 나라에서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생기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 3 장 세계금융시장의 독재



  이번 멕시코 구제금융은 두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경제사적으로도 가장 대담한 위기돌파책이라는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한 소수를 위해 다수의 혈세납부자들이 치러야 했던 가장 뻔뻔스런 날강도 사건이라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은 캉드쉬도 시인했다. 수백억 달러의 멕시코 구제금융은 대투기꾼들에게는 마치 기나긴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솔직히 고백하고 말았다. “이 세계는 유감스럽게도 이 소수의 몇몇 부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99-100쪽.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증권가(외환시장)나 은행, 보험업계, 그리고 투자기금이나 연금기금업계 등에 새로운 정치적 계급이 권력의 무대 위로 등장하였다. 바로 이 권력체의 영향력으로부터는 그 어느 국가, 기업, 그리고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어느 보통 납세자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 권력체란 다름 아닌 범지구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외환 및 주식증권의 거래꾼들이다. 이들은 급증하는 거대한 자유투자자본의 흐름을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아무런 제재나 간섭도 받지 않고 식은 죽 먹듯이 한 나라나 민족의 흥망성쇠를 하루 아침에 결정지을 수 있다. 100쪽.



  사실상 금융시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개가 납득할 만한 논리 속에서 나오고 있고, 또 대부분 선진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이 자초한 것이다. 그들은 이른바 ‘자유로운 무한국경 시장’이라는 경제학의 이름으로 이미 1970년대 이래오 모든 울타리를 체계적으로 제거해 왔다. 예전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돈과 자본의 흐름이 이러한 울타리를 통해 적절히 통제되었으나 이 울타리들이 사라지면서 통제불능의 상태가 된 것이다. ...

  찬찬히 추적해 보면, 돈의 흐름이 민족 국가의 통제없이 제멋대로 흘러다닐 수 있게 된 것은 1973년 들어 선진 자본주의 나라 사이에 당시까지 통하던 상호 고정된 환율제도가 붕괴하면서부터이다. 이것이 바로 2차대전 후 당시까지 유효했던 브레턴우즈 체제의 몰락이라는 것이다. ... [브레턴우즈 협약의]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회원국의 화폐는 미구 달러에 비해 그 교환 비율이 하나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은 그 달러를 금과 맞바꿀 수 있음을 보증하였다. 동시에 모든 외환거래는 국가의 감독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거액의 외화를 교환하거나 다른 나라로 빼돌리는 경우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다.  102-103쪽



  이들 나라의 독점 대기업(콘체른)들은 이자율이 낮은 다른 나라 자본을 쉽사리 빌려올 수 없어서 국제경쟁력이 떨어진다며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다. 마침내 영국은 1979년에 들어 최종적으로 자본 이동의 제한을 철폐했고, 일본은 그 다음 해에 자본시장 자유화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서방의 7대 경제 대국들이 그 경제 활동과 관련하여 결의한 것들은 대부분 세계의 다른 나라에도 점차적으로 관철되어갔다. 바로 이러한 일을 위해 IMF는 가장 이상적인 기구로 작동하였다. ... 지난 10여 년 간 IMF의 권력자들은 세계 각국에 금융대출을 해주면서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화폐를 태환화폐로 전환시켜 국제자본의 흐름에 개방 ―세계시장으로의 통합―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서 돈을 주었다. 104-105쪽.



  이 전문적 금융투기꾼들은 범지구적으로 연결된 전자정보망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의 빛과 같은 속도록 움직인다. 107쪽.



  달이면 달마다 새로운 상품들이 시장에 새로이 등장한다. 비록 이러한 상품들의 가짓수는 대단히 많지만 이들이 지닌 공통점이란, 그 상품의 가치가 현재나 미래의 실제 유가증권 내지 외환의 거래 가격에 근거해서 그로부터 도출―파생―된다는 점이다.

  ... 이러한 거래가 가지는 놀라운 효과 내지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이러한 거래를 통해 미래의 시세가 떨어질 위험 또는 부주의한(재수없는) 채무자가 떠맡는 위험과 실제 유가증권이나 외환을 구매하는 행위를 분리해 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미래의 위험(불확실성) 그 자체가 바로 거래대상이 되는 것이다. 111쪽.



  아주 작은 규모의 자본 거래조차도 상당히 큰 폭의 시세변동을 야기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중개인이나 거래꾼들의 집단적인 기대행동이 그 자체로 엄청난 물리적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12-113쪽.



  1990년 들어 독일이 통일되면서 유럽통화제도는 그 이음새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과 통화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사실상 파산 선고한 나라를 외상으로 사들인 셈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마르크화의 화폐량은 급속도로 치솟았고, 이것은 실물경제와는 상응하지 않는 가치변동을 초래하였다. 결국 높은 인플레율이 온 사회를 위협하게 되었다. 120쪽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지니스 위크』는 이 소로스라는 인물에 대해 “시장을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러한 별명은 이제 퀀텀사의 사업을 이끌고 있는 드루켄밀러에게 잘 어울리게 되었다. 121쪽.



  요컨대 독일 연방은행의 총재나 여러 다른 시장자유주의자의 눈에는,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모든 잘못은 거의 항상 정치가들에게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실례를 들자면, 디트마이어 총재는 1996년 2월에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얼마나 금융시장의 통제와 지배를 받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러한 시장자유주의의 입장은 현실 정치에 있어서도 매우 강력하게 관철되고 있는데, 사실상 이것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에서 나온 것이다. ... 이 이론을 통화주의라고도 하는데, ... 그 세계관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국경을 뛰어넘어 자유로이 진행되는 자본운동이야말로 자본 증식이나 자본 배분에 있어 가장 최적 상황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말이 바로 ‘효율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저축해서 모은 돈은 가장 높은 이윤이 나올 만한 곳을 찾아 온 세상을 비집고 다녀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효율성이 높은 곳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 반대의 경우에도 논리는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신용대부를 받고자 한다면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이자에 돈을 빌려줄 사람이나 기관을 찾아 선택하게 될 것이다.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모든 나라가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최선의 투자 효율성과 함께 최고의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논리에 따르면 모든 민족구가들이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모든 것을 시장에 내버려두면 둘수록, 그것은 좋다는 것이다. 126-128쪽.



  유감스럽게도 이런 논리는 우리를 대단히 혼란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곰곰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장자유주의적인 논리는 그와 결부되어 있는 정치적인 위험성을 절묘하게 은폐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비록 노골적으로 말은 하지 않을지라도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수의 관심사를 항상 사회전체의 공익과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계화된 금융시장의 돌가는 실태를 정확히 꿰뚫어보면 이러한 견해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국가들 사이에 금융정책적인 연결고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각국은 경쟁적으로 이자수익 등에 대한 세율을 낮추고자 하며, 국가 지출을 가능한 한 줄이고자 하고, 결국은 사회보장 등 사회적 형평성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마디로, 세계적 차원에서 부의 분배를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게 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28쪽.



  자본운동의 세계화와 더불어 국경 통제가 제거되면서(규제완화), 자본운동은 일종의 불운한 자기 동력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즉, 민족국가의 주권은 체계적으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그 결과 상당히 오래 전부터 거의 무정부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하게 되었다. 129쪽.



  먼 바다 금융기지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곳은 카리브해 연안의 케이맨 섬들이다. ...

  그러나 이러한 먼 바다 금융 시스템이 초래하는 해악은 거의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 ...

  ... 국가의 조세 통제권을 벗어나 일종의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일종의 채권자가 되고, 사기를 당한 국가는 일종의 채무자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채권자는 채무자로부터 아무런 이자 소득세도 물지 않고 이자 소득을 고스란히 챙겨간다. 130-132쪽.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인 집단들과 연결되어 돌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거의 노골적으로 또는 거의 공식적으로 정치적인 후원하에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들 정치가들은 이러한 먼 바다 금융기지를 묵인할 뿐만 아니라 적극 보호해주고 있으며 가능한한 그 국민주권의 행사를 최대한 자제하려고 애쓴다. 133쪽.



  여태껏 검은 돈을 주무르는 회사들은 그들의 ‘비밀스런’ 금융사업에 손을 대는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즉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막는다면 사업기지를 간단히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이라는 협박이다. 134쪽.



  조직된 국제금융업계의 압력은 너무나 거세어 각국 정부는 이들 업계의 압력에 굴복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

  ... 『뉴스위크』의 표현대로 일종의 ‘파우스트 협정’에 들어간다. 우선 국제금융체계로의 편입은 각국 정부에게 범지구적 자본 덩어리에 접근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각국은 이를 통해 자국 내 저축이나 부자들의 돈에만 의존하지 않고,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해외로부터 엄청난 규모로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능력 이상의 국가 부채를 질 수도 있게 되었다. ... 그러나 국제금융계로의 편입은 상당한 고통도 수반한다. 각 나라의 이자율은 서로 달라서 일종의 위계질서가 성립되는데, 돈은 항상 이자율이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곳을 찾아 부단히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돈은 힘센 자들에게 몰리게 되어 있다. 이들의 힘이 과연 얼마나 큰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기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135-136쪽.



  [무디스 투자서비스 회사]의 경영철학과 관심사를 매우 잘 말해 주고 있다. “상업금융은 현대의 발명품이다. 이것은 오로지 문명화되고 최고로 잘 통치되고 있는 나라에만 가능한 것이다. 신용(대부)이란 마치 현대 무역의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하기 위한 생명의 호흡과도 같다. 신용(대부)은 각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데 있어 세계적으로 모든 귀금속 광산들이 기여한 바에 비하면 수천 배 이상 기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136-137쪽.



  이러한 평가 점수가 가지는 의미는 깊고도 직접적이다. 투자기금회사나 은행의 거래꾼들은 바로 이 점수를 보고 그 나라의 국공채를 살 때 위험부담도를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위험할증료가 붙게 된다. 결국 무디스 투자서비스사는 이를 통하여 시장을 상지하는 은유요 동시에 시장의 기억자치가 되었다. 이 회사는 결코 잊는 법이 없다. 그리고 한번 입수한 정보는 수십 년이 지나야 폐기 처분한다. 138쪽.



  “우리는 단지 투자자들의 권익만 바라보고 일합니다. 우리가 정치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어떠한 외압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활동의 결과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이 회사의 평가 결과는 그 평가 대상 날에게는 수십억의 추가적인 이자부담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나아가 차기 선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나라 전체의 자존심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139쪽.



  시장 노리가 완고하게 관철되는 것은 결코 악랄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자본시장이 국제화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내국인 재산가들도 곧장 이러한 각국의 투자가치나 투자 위험도를 평가하는 심판관이 되기 때문이다. ... 유럽에서 이러한 현상을 가장 확실히 볼 수 있는 곳은 스웨덴이다. 이 나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복지정책으로 유명했는데, 그리하여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적 실현에 있어 상징적인 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흔적은 상당 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거대 기업들과 수억대 재산가들은 이미 1980년대 말부터 점점 더 많은 일자리와 저축자금을 해외로 이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

  ... 오늘날 스웨덴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재원이 독일에 비해 훨씬 적게 남아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 140-141.



  마찬가지의 각본이 독일에서도 사회복지 프로그램 감축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 보수주의적 자유민주주의자들 연합은 사회복지를 위한 조세제도의 전면적 개편을 요구하는 산업자본가들과 은행자본가들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기존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한발자국씩 축소시켜 나갔다. 같은 맥락에서 법인세율은 최근 들어서도 두 번씩이나 낮추어졌다. ... 반면에 모든 독일 통일의 추가 부담은 예외 없이 대중 납세자들의 어깨 위로 지워졌다. 이는 무엇보다도 임금 소득세와 부가가치세의 인상을 통해 진행되었다. 141-142쪽



  이제는 미국 정부조차 세계의 자본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기관들의 평가나 판단에 고분고분 순응하고 있는 형편이다. 142쪽.



  바로 이런 식으로 금융시장의 지배 아래로 한 사회가 편입된다고 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뜻하게 된다. ...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과거에 계급투쟁이나 개혁정책을 통하여 어렵사리 획득했던 사회복지체계 등 쟁취물들을 하루 아침에 문제삼아 허물어뜨리고자 한다. 143쪽



  여태껏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본’을 억제하거나 순치시켜 가면서 사회복지정책을 펴왔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의 범지구적 자유운동을 오히려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는 세력이 바로 그러한 체제 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지속적인 실질임금의 상승과 국가에 의한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은 지난 50년 동안에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냈고, 이들의 저축은 오늘날과 같은 국제금융시장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접적인 생활비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어 많은 사회적 저축이 가능했다. 그런데 바로 이 돈이 이제는 금융시장에서 커다란 사회적 권력으로 등장하여, 보험회사, 은행, 투자기금 회사 등이 노동조합 및 사회복지 국가를 공격하는 데 원동력으로 활용되고 있다. 144쪽.



  이른바 ‘시장’에 의한 국가의 맹목적인 ‘군기잡기’는 결구 통화주의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듯이 ‘건전한’ 것이 결코 되지 못한다. 민주주의 정치란 시장법칙 이외에도 필연적으로 여러 다양한 법칙에 따라야만 한다는 사실을 저들은 전혀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이 행사하는 권력은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이들을 단순 평준화시키거나, 아니면 이들 사이에 갈수록 커다란 긴장과 갈등이 일도록 위협하고 있다. 145쪽.



  국제금융시장의 사회적 권력은 여러 나라들 사이의 관계도 매우 불편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 나라의 정치적인 조세통제권으로부터 벗어나 주권을 무시하면서까지 ‘운동’하기 때문이다. 시장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외환시장과 증권시장을 일종의 세계금융계에서의 ‘재판정’이라고까지 칭송하고 있는데,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들을 재판정이라고 할 근거가 하나도 없다. 그들이 내리는 판단은 전혀 공정하지도 못하고, 어떤 법률적 근거에 다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며, 경제적인 질서가 아니라 혼란만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146쪽.



  바로 이러한 ‘탈출구의 위험’ 때문에 작은 나라들은 위험할증료를 더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경제적으로 볼 때 그러한 월니는 말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투자 비용을 지나치게 높이게 된다. 147쪽.



  이미 10여 년 전부터 미국은 통계적으로 외환수지상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 1993년 이래로 그 적자액은 자그마치 국민총생산액의 10%나 된다. 그래서 미국은 오늘날 순부채액 측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채무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기업이나 건축업자들은 결코 아무런 고율의 벌금이자도 물지 않는다. 그 까닭은 단지 미국 시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시장이 크면 달러화로 투입된 모든 투자가 상대적으로 안전하며 그래서 투자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달러화는 여전히 세계적으로 보유가치가 높은 화폐이다. 예컨대 모든 중앙은행이 지니고 있는 강성화폐 보유량의 60%는 달러화일 뿐 아니라, 모든 개별 저축의 절반 가량도 달러화로 이루어지고 있다. 147쪽.



  세계경제가 달러 화폐 공간의 상황 변동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워싱턴의 재정 및 금융정책가들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종종 분쟁에 휩싸이게 된다. 금융 경제적인 특권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이 은밀한 전쟁에서 그 세력관계를 재는 척도는 외환시세이다. ...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달러화 시세는 어느덧 세계시장을 둘러싼 일본이나 독일 등과의 경제 전쟁에서 일종의 ‘무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50쪽.



  한마디로 정부와 중앙은행은 달러 시세가 떨어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경제학 교수 빌헬름 한켈도 증언하고 있는 바, “달러화의 폭락은 교묘한 미국 통화정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 도처에 인플레의 위험에 시달리고 있는 약세 통화가 깔려 있는 상황에서 달러화는 오히려 과대평가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연방준비은행도 자국 통화의 가치를 어느 정도 억제해서 “문제를 다른 나라에게 전가해야만” 과대 평가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셈이다. ...

  그런데 1995년도 세계경제 통계를 보면 우리는 미국의 달러와 평가절하 전략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에서는 원래 예상했던 경제성장이 절반 정도밖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기초에는 달러화 하락으론 인한 독일 경제의 경쟁력 약화와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진행된 대량 해고의 물결이 놓여 있다. 이것은 일본 경제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일본서는 그 충격이 더 심했다. 일본의 대미통상 흑자액이 단지 12개월만에 무려 4분의 3이나 줄었다. 그 결과 일본은 경기불황뿐만 아니라 디플레이션 상태가지 경험하게 되어쏙, 실업자도 두 배로 늘게 되었다. 151쪽.



  장기집권중인 [말레이시아의] 총리 마하티르의 지휘와 비호하에 이 나라는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으로 급부상하였는데, 마하티르는 서구 열강들의 거만함, 퇴폐성, 제국주의적 의도 등에 대해 끊임없이 공격을 가해왔다.

  1988년에도 그는 제국주의자들 고유의 영역이라는 금융시자에서도 대반격을 가하고자 했다. 그 직전에 말에이시아 중앙은행인 네가라은행은 엄청난 손실을 기록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고금리 정책은 수년 동안 달러화 시세를 최고치로 몰아갔다. 그러다가 미국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일본, 영국, 독일 등의 중앙은행 책임자들과 비밀회담을 개최하여, 아픙로 공동 노력을 통해 달러화 가치를 다시 낮추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달러화는 자그마치 30% 정도가 폭락하는 대혼란이 초래되었다. ... 네가라 은행의 총재(탄 스리 다토 자파르 빈 후세인)는 그 동안 말레이시아의 은행이 벌어들인 달러화 보유고가 자기 잘못도 아닌데 가치가 훨씬 떨어져 버렸노라고 분노했다. ...

  특히 1990년에 있었던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게릴라전은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에 불과 몇 분 만에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은 자그마치 10억 파운드를 시장에 팔아 넘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1파운드당 4센트(미국)꼴로 파운드 시세를 하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

  ... 그런데 당시에는 네가라 은행보다 훨씬 더 과감한 사립은행들이 그 게릴라전을 모방하는 바람에 마침내 네가라 은행이 망하게 되었다. ...

  이와 같은 네가라 은행의 금융투기 사태는 범지구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귬융계가 스스로 초래하는 긴장관계에 얼마나 예민하게 노출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153-155쪽.


 

  미국과 아시아 각국 사이에 자주 마찰이 생기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달러화 보유고의 수치들은 “금융 대란을 초래할 수도 있는 엄청난 폭탄”을 의미한다고 1995년에 『이코노미스트』지는 경고했다. 156쪽.



  1991년 12월 11일 ... 그날 저녁 당시 유럽공동체 회원국 12개국 대표들은 하나의 의미심장한 계약서에 서명을 하였다. ... 그 계약이란 유럽연합이라는 국가 동맹을 건설한다는 것임과 동시에 회원국을 위한 공동의 화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

  이러한 과정이 초래할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가 하는 것은 이루 형용하기조차 어렵다. 우선은 장래의 ‘유로’화를 쓰는 연합 내 국가들이 지금까지의 분열된 통화정책이 가졌던 엄청난 단점을 극복하는데 매우 유리할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유럽연합 내 각국들은 어마어마한 정치적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들 나라는 더 이상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가질 수 없어 예전의 국민국가적 주권을 유럽연합의 중앙은행에 죄다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통화동맹의 어떠한 나라도, 예전과 같이 수출경제의 위기가 도래했을 때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함으로써 일종의 비상브레이크를 쓸 수 있던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회원국들은 금융정책, 조세정책, 사회정책을 매우 제한적으로만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단일통화동맹의 구상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신속하고도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치연합이 성립될 수 있는가의 여부가 곧바로 이 모든 구상의 사활이 걸린 결정적인 문제라 하겠다. 1156-158쪽.



  그[프랑스 재무장관 알퀴]에 따르면 이 모든 구상이 성공하는 경우, “유로화는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보유하기를 희망하는 화폐로” 출세할 수도 있을 것이라 하낟. 이것은 유럽 단일시장이 대략 4억 정도의 시민을 가진 세계 최대의 시장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 유럽은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어개를 겨룰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는 앞으로 ‘유로’화의 환율을 조절함으로써 유럽연합은 “무역정책을 위한 중요한 도구”를 얻게 되는 셈이라고, 그리고 이 도구는 지금까지의 수입관세 같은 그 어떠한 도구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159쪽.



  금융시장에 대항하는 국가의 잠재력을 다시 복원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통화동맹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모든 싸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59쪽.



  이러한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유로’화 구상에 반대한 국제 환투기꾼들은 막강한 동맹세력을 조직해 내기도 했다. ... “영국의 장관들과 관료들은 유럽 단일통화 프로젝트를 방해하기 위해 무대 뒤에서 은밀히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과 함께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통일유럽으로부터 자신이 뒤지거나 배제되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2-163쪽.


  그[제임스 토빈James Tobin, 1970년대]의 주장에 따르면 탈규제된 자본 흐름은 그 방향 선회를 매우 급속히, 또 매우 자주 하게 되고, 나아가 환율 결정을 제멋대로 하기 때문에 실물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 “모든 외환거래에 1%의 세금을 거뒁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토빈세). 이 세율은 다소 낮아보이긴 하지만 엄청난 영향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금리차액을 노려서 세계 각국이나 각 시장을 대량으로 돌아다니는 행위는 단지 예외적인 경우에만 이득이 되는 것으로, 즉 별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토빈세’를 실시하게 되면 실물경제에도 또한 많은 효익을 안겨다 준다. 즉 중앙은행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자국의 금융시장에 통용될 금리 수준을 즉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금리수준을 자국의 경제상황에 맞추어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거래에 대해 부과되는 ‘토빈세’를 통한 국가 재정 수입의 증대는 요즘같이 재정적자가 큰 시대에 매우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166-167쪽.



  가장 큰 단점은 환투기꾼 등 당사자들이 반대한다는 점이며, 그리고 ... 세계 각국이 자기 나라에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세율을 낮추는 등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 그리고 설사 선진 7개국이 ‘토빈세’를 공동으로 도입한다손 치더라고 각국의 금융기관들은 그 거래를 형식상으로나마 저 유명한 케이맨 군도로부터 싱가포르레 이르기까지의  ‘먼 바다 금융기지’로 이전시킴으로써 아무런 통제효과도 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우려도 있다. 168쪽.



  이러한 저항세력에 대해 지금가지는 어떤 정부도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모든 개혁 정치가들도 언제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지구적인 금융 무정부주의가 끝장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곧 자본시장은 또다시 엄격한 국가감독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금융계의 무정부주의적인 자체 동력이 환투기꾼들한테조차 위협적으로 다가올 정도로 무진장 커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백만 개의 컴퓨터가 긴밀히 연결되어 돌아가고 있는 가상공간에서는 마치 핵폭탄과도 맞먹을 수 있는 정도의 위험성이 나날이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171쪽.


  [1994년] 이에 경기가 과열될 것을 우려하여, 그리고 인플레가 고조될 것이 두려워 그린스펀 의장하의 미 연방준비은행은 그해 2월 둘째 주에 금융시장에 매우 조심스런 조치를 취하게 된다. 즉 당시까지만 해도 낮게 유지되던 선도금리를 4분의 1%만큼 올렸던 것이다. ... 그러나 환투기꾼들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세계경제를 완전히 마비시키는 극악무도한 조치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하루가 무섭게 워싱턴의 국공채 시장으로부터의 대탈주극이 줄을 이었다. 그 시세는 자그마치 석 달 연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172쪽.



  국공채(‘본드’) 시장에서 일어난 파국 사태의 핵심 열쇠는 바로 부동산 저당권 설정이 전제된 금융거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부동산 저당물을 잡히고 신용대출을 해온 사람은, 만일 다른 시장에서 더 낮은 금리로 돈을 빌 수가 있다면 즉시 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변동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저당물을 잡고 신용대부를 해준 기관(은행)은 특정의 유가 증권을 발매함으로써 그 불확실성을 감소시킨다. 이 특수 유가증권이란 미래의 특정한 시점에 가서 이자를 붙여 돈을 돌려준다는 것이다. 만일 금리가 떨어진 상태에서 건물 소유주가 해약하거나 빚을 갚게 된다면, 이 유가증권의 상승하는 시세는 해약된 저당권으로 인한 수익의 상실을 보충하게 되는 것이다. 금리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던 시기에는 이러한 빚의 차환 그 자체가 엄청난 사업으로 발전되었다. 저당 채권은 단지 단기투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판 사람도 단지 단기적인 유가증권 옵션을 통해 미래의 위험에 대한 예방을 했던 것이다. 173쪽.



  이렇게 해서 1994의 국공채 위기는, 금융시장이 예기치 못한 조그마한 사고나 연쇄 반응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사상 유례 없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현대의 첨단기술을 이용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은 결정적으로 파생상품의 거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 1990년대의 파생상품 거래는 이러한 탈국경화를 극단으로까지 몰아가고 있다. 174쪽.



  금융거래꾼들은 자기 거래액의 가치를 더 이상 스스로도 계산해 낼 수 없다. 175쪽.



  개별시장들 사이의 관련성이 복잡해질수록, 그만큼 더 많은 요인들이 동시적으로 시세의 상승과 하락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시세변동이 그만큼 더 엉망진창으로 될 위험성이 높아진다. ...

  ... 파생상품의 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는 금융업에 엄청난 위험 및 불확실성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십 년 간에 걸쳐 구축된 금융업의 안전장치들이 온통 뒤범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175-176쪽.



  만일 큰 은행이나 투자신탁회사가 이로 인해 부도가 나게 되면 이는 매우 위험한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되면 전체 시스템이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금융기관이 파산하게 되면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연결된 기관들도 넘어가게 되고 그리하여 범지구적인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176-177쪽.



  이러한 맥락에서 1992년 이래로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금융가에서는 다음의 기본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 즉 모든 은행은 총대출금의 최소 8%를 자기 자본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한 대출금이 제대로 회수가 되지 않는 경우에는 이 자기자본으로 그 구멍을 메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생상품 거래가 이러한 예방책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177쪽.



  “만일 이런 연결고리들이 한번 터지게 되면 엄청난 폭발력으로 온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비하기 위해선 세계적으로 연결된 ‘중앙감독원’이 필요하다고 자니오는 요구한다. ... 금융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조차도 비슷한 경고를 할 지경이다. ... 그러한 그가, 1995년 1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각국의 정치가와 최고경영자들(3천 명의 청중들 앞에서) “세계 금융계는 대형 위기에 대해 무방비 상태”라고 털어 놓았다. 사태가 이대로 심각히 진행된다면 대파국도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178-179쪽.



  바로 이러한 경고들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국가의 통치 영역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 금융계의 가상공간에서 일종의 대파국이 도래할 가능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183쪽.



  그러나 페소화 위기는 무소불위의 기세로 투기를 해대는 금융시장에 대한 국가의 연약성을 폭로시켰을 뿐만 아니라, 금융시장 자체의 취약점에 대한 투기꾼들 자신의 무기력성까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거의 무정부주의적이고 반국가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자본 운동의 조타수들은, 만일 그들 자신에 의해 저질러진 대형 금융사건들이 도저히 수습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면 언제나 강력한 국가에 의존하여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시장은 지배자가 되고자 하되, 단지 유한 책임만 갖는 독재자로서 군림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국제적인 국가공동체는 단지 위기가 닥쳤을 때에 뒤처리만 담당하라는 식이다. 186쪽.



  이렇게 해서 해마다 금융시장의 위험도는 고조되고 있는데, 그 위험이란 시장자유주의의 신념하에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는 금융기관들이 범지구적인 금융대란을 초래할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질서 있게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국가를 불러들여 뒷수습을 하라고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로, 이제는 이미 때가 늦은 감이 있다. 왜냐하면 국제금융계의 거물급 인사나 기관들이 금융위기와 같은 유사시에 긴급사태 수습을 기대할 수도 있었던 장치들을 끊임없이 파괴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여기서 파괴는 것이란 여러 민족국가들 및 그 국제기관들의 합리적인 행위 능력이다.

  물론 이러한 파괴의 배후에는 금융업계만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뒤에는 이른바 ‘세계화’ 시대의, 자칭 ‘새로운 세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두 번째 집단이 마찬가지로 숨어 있다. 그것은 모든 유형의 다국적 독점체를 이끌고 있는 기업가들이다. 187-188쪽.


 

 

 

 

        제 4 장 늑대의 법칙


  

  공장의 이전이나 외부 하청화, 조직 축소, 인원 감축, 그리고 해고 등등의 방식을 모두 동원한 고능률, 고도기술의 경제는 서구 복지사회에서조차 노동을 ‘소멸’시키고 소비자를 경제적으로 무능하게 만든다. 경제적, 사회적 변동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생산물이나 서비스가 국경 없이 유통되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고용은 결과적으로 가치하락과 ‘합리화’의 끝없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198쪽.



  그러나 이러한 실업률의 등귀는 실제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 사라지는 정규 일자리는 예견하건대 시간제 노동이나, 필요할 때만 고용되는 임시노동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규고용직에서 임시계약직으로 이동한 수백만 임시직 노동자의 임금수입은 지금까지의 임금수입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20 대 80의 사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격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일자리가 아직 안전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없고, 이는 전 사회적으로는 사회적 통합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199-200쪽.



  이 국경 없는 시장경제에서 혜택을 보는 자들은 이 위기를 즐거이 ‘자연법칙적’ 과정이라 설명한다. ... 그러나 모든 경제를 뛰어넘는 경제의 통합은 결코 ‘자연법칙’이나 대안 없이 돌출되는 ‘기술진보’에서 자동적으로 결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십 년 간 의도적으로 관철된,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서방 선진국 정부의 경제전략적 정책의 결과이다. 200쪽.



  점증하는 무역자유화의 결과는 가히 위압적이다. 40년 전부터 상품과 서비스의 전세계적 교역은 생산력의 발전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하고 있다. 205쪽.



  그때[1970년대]까지 대부분의 선진산업국들은,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양차대전 사이의 경제 파국―세계공황―에 대한 돌파구로써 개발한 새로운 경제 원리들을 따르고 있었다. 케인스는 국가를 국민경제의 핵심 투자자의 지위로 고양시켰으며, 시장이 과소고용과 디플레이션을 야기시킬 경우에 국가가 공공재정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개입,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경기침체시에는 정부가 투자를 증대시킴으로써 추가수요를 창출하고, 이를 통하여 경제위기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호경기시에 정부는 늘어난 조세수입을 가지고 그 전에 생겨난 공공재정 부채를 청산함으로써  경기폭발과 인플레이션을 예방해야 했다. 여기에 덧붙여 많은 국가들은 의도적으로 신속한 경제성장과 노동수요―일자리― 창출을 기대할 수 있는 산업들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1973년과 1979년의 유류파동과 더불어 이러한 구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선진산업국 정부들은 국가부채와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통화의 안정적인 환율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9년 영국의 대처 및 1980년 미국의 레이건이 각기 선거에서 승리한 뒤, 보수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정책 교리를 자신들의 정치노선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레이건 대통령의 자문이었던 밀턴 프리드먼이나 대수 수상의 고문이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예크와 같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인데, 화폐정책에 있어서는 또한 통화주의라고도 불리고 있다. 프리드먼과 하이예크는 단지 국가의 질서유지 역할만 인정했다. 그들은, 민간기업들이 투장와 고용에 있어서 자유로울수록 경제성장도 커지고, 이에 따라 만인의 복지도 늘어난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주로 자유경제주의 색채를 띠었던 정부들은 80년대에, 말하자면, ‘자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넓은 전선에 걸쳐서 국가통제와 국가개입 권한을 철폐했으며, 이를 원하지 않고 있던 교역상대국들에 대해서는 무역봉쇄 및 다른 압력수단을 동원하여 이 노선을 따르도록 강제했다. 205-206쪽.



  많은 경우에 노동집약적인 대량생산으로부터 첨단기술생산과 서비스 사회로의 발전이 국제경쟁 및 자동화가 만들어낸 상처를 치료해줄 것이라고 이야기되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전혀 달성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제외한 모든 OECD 국가들에서는 적정소득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7-208쪽.



  교수들과 정치가들이 들이대는 것은 언제나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가 고안한 ‘상대적 비용우위 이론’이다. 당시 리카도는, 어떻게 해서 국제교역이, 교역상대국에 비하여 생산성이 떨어지는 나라들한테도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는 이것을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면직물과 포도주 산업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재 이 두 가지 상품은 두 나라 모두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때 영국사람들은 이 두 가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더 많은 노동력을 지출해야만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생산적이고, 따라서 그들이 생산한 상품들이 상대국에 수출되기에는 너무 비싼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포도주를 영국으로 수출하고 그 판매대금으로 영국제 면직물을 구입함으로써 이익을 볼 수 있다. 거꾸로 영국도 면직물을 포르투갈로 수출하고 포르투갈 포도주를 수입함으로써 이익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상품이 두 나라 안에서 각각 형성하고 있는 가격비율 때문이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1시간을 들여 면직물을 짤 경우 1.2시간을 들여 포도주를 담는 것과 동일한 가치가 생산된다. 이에 반하여 포르투갈에서는 이 비율이 1대 0.8이다. 다시 말해 포르투갈은 면직물을 짜려면 한 시간 투자해야 하지만, 포도주 만드는 데는 0.8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에서는 면직물에 비교한 포도주의 가치가 영국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양국 사이에는 상대적인 비용우위가 생겨난다. 포르투갈로서는 더 많은 노동력을 포도주 생산에 투입하는 대신에 면직물을 생산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 된다. 영국은 자신을 거꾸로 특화시키는 것이 이득이 된다. 그리고 교역을 통하여 양국 국민들은 결과적으로 더 많이 노동하지 않고도 더 많은 포도주와 면직물을 소비할 수 있게 된다.

  리카도의 이론은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가히 천재적이다. 그의 이론은 왜 예로부터, 각국이 자신한테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국제적인 교역이 번창해 왔는지를 해명해 준다. 단지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현재의 세계에는 거의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카도의 무역이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타당하지 않게 되어버린 한 가지 전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적 가격우위는, 오직 자본과 민간기업들이 이동하지 못하고 자기 나라 국경선 안에 머물 경우에만 국제무역을 추동한다. 208-209쪽



  그러나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리카도의 근본전제는 완전히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자본보다 더 이동력이 뛰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현재 국제투자가 무역의 흐름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있으며, 광속도로 급속히 진행되는 수십억 달러의 자본 이전이 특정한 나라와 그 나라 화폐의 환시세 및 국제적 구매력을 결정하고 있다. 상대적 비용우위는 이제 더 이상 사업의 추진력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시장, 모든 국가들에 동시에 적용되는 절대적 우위이다. 초국적 기업들은 임금이 가장 헐하고 사회보장 지출이나 환경보호 비용을 전혀 물지 않는 곳에서 상품을 생산하도록 조직함으로써 그때마다 상품비용의 절대적인 크기를 줄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게 상품가격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가격도 떨어지게 된다. 209-210쪽.



  절대적 우위의 추구는 세계경제가 발전하고 있는 메카니즘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과 자본이 더 무제한적으로 국경선을 넘어 이동가능하게 될수록 저 거대한 조직, 초국적 콘체른(거대한 기업연합체)들은 더욱 강력해졌고 통제불가능해졌다. 오늘날 초국적 콘체른들은 각국 정부들과 유권자들을 모두 다 위협하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박탈하고 있다. ... 이제 개별 국가들 및 일국기업들은, 세계무역에 있어서 상품을 공급하는 주체가 아니며, 무역 결과 획득된 이윤을 국가의 경계선 내에서 분배하는 것을 둘러싸고 협상 및 투쟁하는 주체도 아니다. 그 대신 이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전세계적으로 조직된 생산과정 속에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일자리를 두고 피눈물나게 경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이전에 민족국가 단위로 구성되었던 국민경제의 틀을 일거에 폭파시켜버리고 있다. 첫째로, ... 생산성은 전체 경제출력보다 더 빨리 증가하고 있다. ... 둘째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세력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210-211쪽.



  유럽단일시장은 유럽 기업들한테 진정한 ‘경제채찍(<<디 차이트>>지)으로 되었으며, 전대륙을 가로질러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영합리화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실업자 수는 우기의 강물처럼 불어났으며, 국가재정적자도 늘어났다. 이에 반하여 경제성장 속도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212쪽.



  생산성ㅇ르 높이고 비용을 낮추기 위해 기업들은 단지 하나의 전략만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경영합리화’와 임금인하이다. 이것말고도, 조직축소, 외부하청, 구조조정도 모든 미국 경영자들이 금방 차용하게 될 방법들이었다. 218쪽.



  참으로 미국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시민들은 고통스럽게 이를 위해 희생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부유한 이 나라가 동시에 세계경제에서 가장 싼 임금의 나라로 변했기 때문이다. 218쪽.



  비록 1973년에서 1994년 사이에 미국민의 1인당 총국민소득은 3분의 1이 올랐지만 전 노동인구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모든 노동자의 평균총액임금은 오히려 19%나 떨어져서 단지 주당 258달러에 머물렀다. 이것 역시 단지 통계적으로 추정된 평균치이다. 소득 피라미드의 하위 3분의 1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하락은 더욱 극심하게 일어났다. 수백만에 달하는 하층의 미국민은 심지어 20년 전보다 25%나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

  그러나 미구 사회 전체는 결코 전보다 가난하지 않다. 사실상 미국민이 지금보다 더 많은 재화와 용역을 소유한 적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통계상의 성장은 단지 상위의 5분의 1(2천만 가구)한테만 혜택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집단 내에서도 이익은 다시 한번 극단적으로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최부유층은 1980년 이래 자신들의 수입을 두 배로 늘였고 그래서 오늘날 미국에선 약 1만 명의 최부유층이 미국 내 전체 사유재산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219쪽.



  대부분의 고급경영자들은, 노동비용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떨어뜨렸기 때문에 천문학적 액수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219쪽.



  관리와 생산, 이 두 부분을 가능한 한 분리해 내는 것이 이러한 신경영전략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

  또 다른 유형은 사무직 노동자를 독립자영업으로까지 전환시키는 것이다. ... 그 결과 고용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사립고용주는 더 이상 GM이나 미국전신전화회사AT&T, IBM이 아니라 시간제 또는 일당제 노동자의 파견 및 용역회사이다.

  ... 3분의 2의 경우에 이 새로운 일들은 보다 낮은 임금과 보다 나쁜 노종 조건하에서 제공되었다. 220-222쪽.


  과거에는 기업이 잘 되면 이는 역시 그곳의 노동자를 위해서도 좋았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 그러나 탈중심화된 재무구조는 이 같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강점을 경영적 측면에서의 약점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 그들은 빚을 내서 주식회사를 매입하고 이어서 모든 과잉되고 비효율적인 노동력을 제거한 뒤 다시금 이익을 붙여 시장에 팔아치웠다. ...

  이러한 적대적 기업합병에 대응하기 위해 대부분의 경영자는 스스로 경영혁신, 조직혁신에 나섰고 이제 여기서는 아무도 보호되지 않는다. ... 단지 주주이익만이 회사의 성공을 위한 기준이다. 222-223쪽.



  이 세 집단이 함께 계산되면 실제로 노동가능인구의 14%가 정규직에 종사하고 있지 않다. ... 이에 따라 소득분배의 사회적 불균등 문제가 발생한다. 224쪽.



  <<뉴스위크>>는 이같은 미국의 새로운 경쟁력이 ‘킬러-자본주의’의 성격을 가졌다고 진단한다. 225쪽.



  이 극단적 부의 불균등 분배는 점점 더 정치적 안정을 위협하고, 사회 전체에 파괴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00년 전에 주장했던 것, 그리고 이전에는 오나전히 틀렸다고 보던 것이 이제는 사실로 나타났다. 자본가는 더욱 더 부유해지고 반면에 노동자들은 더욱 더 가난해진다. 세계화된 경쟁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협동을 파괴한다. 225-226쪽.



  그[모르간 스탠리의 수석경제학자 스테판 로취]는 이렇게 썼다. “수년간 나는 생산성 향상의 신화를 믿어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것이 실제로 우리를 축복의 나라로 이끌지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경제의 재구조화는, 단지 단기적 이익을 위해 그가 기반한 토지를 파괴하는 원시농부의 ‘화전 원리’와 같다고, 그는 그의 아연실색한 독자들에게 진지한 어조로 설명했다. 다운사이징과 군 살배기 생산방식의 전략이 이에 해당한다. ...노동력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는 대신 재평가하는 길로 나가지 않으면, 세계시장에서 버틸 수 있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소중한 자원을 잃어버릴 것이다. 로취는 말한다. “노동력은 영원히 계속해서 쥐어짜지지 않는다. 끝없는 노동과 임금의 황폐화는 결국 우리 산업의 전멸을 초래하는, 우리 스스로 파놓은 함정이다.” 226-227쪽.



  이 국제적 결속, 즉 생산의 세계화를 통한 일자리 축소는 매우 위협적이다. 그러나 더욱 어렵게 보이는 것은 국가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전통적인 대항전략이 이미 그 효과를 상실했다는 데 있다. 230쪽.



  소유가 공동의 복지에 기여해야 하는 것을 의무화한 독일헌법 14조는 더 이상 지켜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이런 식으로 낡은 독일주식회사의 개념은 깨지고 새로운, 하지만 사실상 오래 된 경영문화가 등장한다. 그것은 ‘주주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 이는 역사적으로 믿어져온 ‘주주에 유리한 이윤 극대화의 원칙’에 다른 아니다. 233쪽.



  기업과 최고 경영자들을 압박하는 것은 세계화의 핵심적 추동력인 국제금융시장이다. 국경 없는 주식거래는 생산의 국제화보다도 더욱 근본적으로 각 나라의 경계선을 해체시키고 있다. 234쪽.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기금관리인과 기업경영자들만이 일자리와 임금의 하락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제3의 추진집단이 있는데 이는 국가이다. ... 정부도 우편, 전화, 전기, 상수도, 항공, 철도를 민영화하고, 이 서비스 산업을 세계시장에 개방, 자유화하고, 나아가 기술혁신에서부터 노동보호에 이르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고용위기’를 악화시켰다. 238-239쪽.



  이 [브뤼셀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들은 각 산업의 경영자문회사들이나 대정부 로비 조직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유럽연합 차원의 각종 입법을 상당 부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240쪽.



  유럽의 정치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밥먹듯이 반복해서 말하듯, ‘실업이 그들의 큰 근심거리’라는 확인이 진실한 것이라면, 그들의 이같은 근심의 해결 방법은 미친 짓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 244쪽.



  이처럼 탈규제화 전략은 광신적으로 효율성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어, 마침내 ‘자기파괴’의 지경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246쪽.






        제 5장 속편한 거짓말


  이 아시아의 경제기적은 가난과 저발전으로부터의 탈출이 시장경제적인 방법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전세계 경제학자와 기업가들에 의해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OECD 나라들의 자유경쟁 자본주의와 아시아적 급성장 사이에는 공통점이 적다. 예외 없이 새롭게 떠오르는 호랑이와 용들의 경제성장은 서구에서 금기시된 전략, 즉 경제활동의 모든 영역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의 개입에 기초하고 있다. 257쪽.



  모든 아시아의 성장 국가들은 외국에 경제를 개방하는 방법에 관한 한, 일본이 개발한 ‘항공모함의 원칙’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경제계획자들은 자신의 기업들이 국제경쟁에서 너무 취약하다고 보고 높은 수입관세와 기술적인 규정과 같은 장치를 통해, 고용이 보호되어야 하는 산업부문에서는 수입을 막고 있다. 반대로 관청이나 정부는 수출산업에 세금혜택을 주거나 무료로 사회간접자본을 이요하게 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출생산을 촉진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략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율을 조작하는 것이다. ...

  또 금융시장에서는 단기성 자본의 흐름에 아시아의 경제성장 기술자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뿐만 아니라, 다국적기업의 직접투자를 명백한 행정 조치들 아래로 정속시키고 있다. ... 거기에 더하여 국가는 국민의 전반적 숙련도와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재정의 엄청난 부분을 교육체계의 확대에 투자한다.

  그것이 충분하지 못한 곳에서는 기술 사용권과 특허권에 관한 추가적 계약을 통해서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을 용이하게 만든다. 이에 덧붙여 세계시장을 위한 생산에 자국 내 생산업자들의 할당량을 규정함으로써, 수출을 통해 나온 이윤이 자국에 부분적으로나마 남게 하고 자국기업들의 확대를 위해 투자되도록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257-258쪽.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볼 때, 우리는 경제의 ‘세계화 물결’이 결코 유일한 보편적인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59쪽.



  바로 이러한 ‘세계화’를 향한 변화가 사실상 고용위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독일은 물론 일본과 프랑스 기업들의 대부분은 세계화나 세계경영의 과정에서 돈을 매우 잘 벌었다.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부분은 단지 그들 선진국의 기업들이 노동력에 대해 지불하는 부분이었다. 전체의 부가 적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임금부분, 즉 경제적 성과물 중에서 차지하는 임금부분, 또는 노동자가 가져가는 부분이 줄거나 사라졌다. ... 동시에 전체 임금의 직업군에 따른 분배의 불균등성도 상당한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

  그러나 이 과정은 아주 미약한 정도만이 아시아와 중부유럽의 신흥공업국가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노동시장에서의 이 커다란 변화는 무엇보다도 OECD 국가들의 급격한 상호결합, 상호투자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쉬운 예로, 1990년대에 들어 이들 나라 해외투자의 3분의 2 이상이 서로서로 이 국가들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록 선진국 기업의 개발도상국으로의 투자가 늘긴 했지만 이 투자의 절반 이상이 원료의 채취나 호텔, 은행 같은 서비스 산업을 육성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는 노동의 이전, 즉 일자리 수출과는 별 관계가 없다. 269쪽.



  선진국 간의 치열한 경쟁은 수년 전부터 무엇보다도 생산성 지표가 다른 경제지표보다 빨리 성장하게 했다. 다시 말해 경쟁의 압력에 의해 기술혁신이 강제되어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달리 말하자면, 아시아와 동유럽의 싼노동이 실업과 임금압박의 원인이 아닌 것이다. 270쪽.



  그러므로 선진국의 부를 빼앗아 가는 것은 결코 가난한 나라가 아닌 것이다.

  ... 오히려 이것은 완전히 거꾸로 보는 것이 옳다.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서 나머지 국민들의 희생하에 세계적으로 증대된 부를 획득하는 사람들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모든 특권층 즉 자본가, 부자, 고급의 전문인력들이다. 271쪽.



  이렇게 이해한다면 세계적 차원의 경제적 통합, 즉 세계화 과정이 동반하는 이 갈등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자본주의의 역사만큼 오래된 분배갈등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271쪽.



  다른 것은 몰라도 사회복지 국가가 더욱 비싸졌다는 주장은 결코 옳지 않다. 1995년에는 사회복지 부문에 거의 10억 마르크가 지불되었고 이는 1960년도 사회복지 예산의 11배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국민소득도 역시 똑같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1995년에 독일은 총생산의 약 33%에 해당하는 비용을 사회복지비용으로 지출했다. 통계에 따르면 20년 전인 1975년에도 마찬가지로 국민소득의 33%가 사회복지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그나마 1990년 10월 들어 통일된 이후 동독 시민들을 위한 복지비용 지출이 없었더라면, 이 비율은 심지어 약 3% 낮아졌을 것이다. 그만큼 서독 시민들한테 주어진 사회복지비는 줄어든 셈이다. 따라서 사회복지 비용이 더욱 많이 들고 있다는 주장은 분명히 근거가 빈약한, 기각된 가설에 불과하다.

  반대로 심하게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비용을 위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는가의 문제이다. ... 그래서 독일 복지제도의 위기는 거의 전적으로 ‘고용위기’의 결과이지, 복수적인 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이 주장하듯이 노동자의 게으름이나 국민들의 주제넘은 복지제도 남용의 결과는 아니다. 만일 사회복지 국가들에서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정책을 펴기를 원한다면, 나라의 부는 생산성 향상과 함께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노동자들한테 부담을 전가하는 형태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사회보장 기금의 마련을 위해 별로 자기 몫을 지불하지 않던 이들 즉 공무원, 자영업자, 재산가들이 떳떳하게 세금지불을 통해 이에 참가하도록 만드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275-276쪽.



  결과적으로 독일은 거의 7만 개의 일자리를 수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이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수 년 넘게 무역흑자를 기록한 나라는 자본과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불가피하게도 해외 자본을 수입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본을 수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일본의 대기업들은 이 기간에 독일보다 1천억 마르크나 더 많은 돈을 해외 자회사에 투자했다. 이 투자의 대다수는 저임금 국가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선진 산업국가들에게로 이루어졌다. ...

  그러나 특히 앞에서 언급된 해외에서의 추가 일자리 창출은 완전히 근거없는 것이다. ... 독일 연방은행의 통계가 정확히 보여주는 것처럼 해외에서의 독일 기업 노동자 수는 확실히 1989년부터 1993년 사이에 약 19만 명이 늘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독일 투자가들은 전체적으로 자그마치 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고용된 외국기업을 사들였다. 다시 말해 ‘수출된 일자리들’은 해외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오히려 이 통계만 보면 4년 사이에 해외의 독일 기업은 1만 명의 일자리를 줄여놓은 셈이다. 279쪽.



  상당히 많은 회사들에 대한 해외구매가 시장독점을 위해 이루어졌고 매입 뒤 곧 그 회사들은 문을 닫았다. 결과적으로 독일 기업들은 해외에서도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일자리 창출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280쪽.



  살아 있는 ‘인간 노동’에 대한 재평가가 그 새로운 대응전략의 중심에 놓여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주의적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조차 ‘환경세’의 도입을 진전시킬 수 있는 굉장한 개혁에 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282쪽.



  정치적 행동력의 재획득,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재확립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심적인 과제이다. 284쪽.






        제 7 장 범죄자냐 희생자냐?


  그[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는 말한다. “한 가지 종류의 세계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종류의 세계화가 있습니다. 예컨대 정보의 세계화도 있고, 마약의 세계화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염병의 세계화도 있고, 환경의 세계화도 있지요. 그리고 물론 무엇보다도 금융의 세계화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세계화 분야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세계화는 대단히 복잡한 모습으로 진행됩니다.” 324쪽.



  [독일 환경부 장관을 지냈고 독일 통일 당시 건설부 장관인 클라우스 퇴퍼는 말하길,] “과연 우리가 모든 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너무도 어렵게 다가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마도 잠재의식적으로 이미 문제 자체를 제대로 느끼지도 않으려 한다.” 326쪽.



  [수십억짜리 투기를 하고 있는 스티브 트렌트가 말하길,] “... 미국의 금융기관이 아니라, 바로 각 나라의 개별적 행위자들이 각기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우리더러, 비록 우리가 범지구적인 투기 회사를 이끌고는 있지만, 각 나라에서 발생하는 환율 위기나 대규모의 자본 유출 등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모두 있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커다란 나라의 금융시장에서 영업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중요한 화폐만을 취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333쪽.



  여러 측면에서 ‘증대하는 스트레스’를 동반하고 있는 세계화, 지구화의 물결은 각 나라의 국민주권을 심각할 정도로 훼손시키고 있다고 라치나는 솔직히 말한다. 335쪽.



  그들은 각국의 조세 체계 차이를 조직적으로 이용하여, 조세 부담을 국제적으로 적정하게 조절, 관리할 수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용어인 조세계획의 가장 간결한 수단은 ‘이전가격transfer pricing’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은 국경을 뛰어넘어 해외의 자회사나 지점과 교묘히 결합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호간에 원재료의 가격이나, 임금 또는 특허료까지도 자의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회사는 거의 원하는 수치대로 가격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제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의 지출은, 과세표준액이 가장 높은 곳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항상 기록된다. 역으로 세금 천국이나 세금이 매우 낮은 곳에 있는 자회사들은 항상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장부처리된다. 350쪽.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이루어지는 세무당국의 탈세조사 같은 작은 노력으로는 조직적인 기업들의 탈세 행위를 제대로 분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이전가격’을 더 이상 충분히 써먹기 어려운 곳에서는 다른 수법들이 동원되고 있는데, ‘이중 리스double-dip leasing’ 제도가 그 대표적인 방식이다. 이 ‘이중 리스’를 통해 기업들은 임대된 기계에 대한 감가상각이 국가별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십분 이용하여, 일반기계, 동력기계나 수송기계 또는 비행기의 임대 비용을 절묘하게 배합시켜, 두 나라에서 동시에 세금이 가능한 한 낮아지도록 만든다. 그 외에도 ‘네덜란드식 샌드위치’라는 방법이 널리 쓰여지고 있다. 이 방법은 원래 네덜란드에 있는 자회사와, 네덜란드령 서인도 제도나 스위스와 같이 세금 천국에 있는 사업소를 교묘히 연결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두 지역의 세법을 잘만 이용하면, 기업 수익의 10분의 9에 대하여 단지 5%의 세금만을 납부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351쪽.



  그렇지 않아도 합법적인 탈세를 일일이 막아내기도 어려운 판국에, 개별 국가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투자자본을 적극 끌어들이기 위해 국제적으로 경쟁하기 때문에, 자꾸만 낮은 수준으로 세율을 조정하게 된다. 352쪽.



  국경 없는 ‘세금 관광’의 결과가 어떠한지는 분명하지만, 각 나라별로 이것이 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은 별로 없다. 경제의 세계화 이후 화폐정책이나 금리 조정, 환율 조정과 같은 분야 이외에도 바로 이 세금 제도, 즉 조세권과 같은 민족국가적 주권의 여러 영역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353쪽.



  세금 줄이기 경쟁의 과정이 범세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기업에 대한 과세비율은 개별 국가 안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감소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기업의 세금 부담은 낮아지고 있다는 말이다. 354쪽.



  이런 식으로, 이제는 더 이상 그 어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조차도 기업에 대한 과세 액수를 단호하게 결정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본의 흐름이나 상품의 과세 액수를 단호하게 결정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본의 흐름이나 상품의 흐름을 통제하는 자들이 국가적인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얼마나 낼지를 자기들 멋대로 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354쪽.



  그러나 탈국경 경제 아래에서의 국가재정이 말라붙는 것은 수입의 측면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감세나 탈세를 교묘하게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지출 중에서 갈수록 많은 부분을 자기들 주머니 속으로 속속 챙기고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가장 낮은 과세를 위한 국가간 경쟁은, 가장 푸짐한 국고보조금 선물 경쟁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는 사업에 필요한 토지를 아무런 비용 없이 빌려주는 것과, 사업상 필요한 모든 도로, 철도, 전기, 물 등을 세게에서 가장 낮은 가격으로 제공하는 것이 포함된다. 355쪽.



  세계적으로 보조금의 흐름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국제경쟁이라는 압력이 각 나라의 정부로 하여금 별로 공정하지도 않은 기준에 따라 거액의 보조금을 기업에게 지불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확인하였다. ... 그러나 각 나라의 정치가들은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얻기 위해, 실업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 같이 보이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라도 기업에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하며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애원할 수박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각국 정부는 자기 나라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고와 재정을 고갈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개별기업 차원의 경쟁력 강화 논리가 전체 국민경제의 폐허를 초래하고 있다. ...

  이런 식으로 엄청난 재산이 국가로부터 기업으로 이전되거 나가게 되면, 국가구조 자체가 변화된다. ... 이 연구소의 한 보고서에서는, 국가가 이제는 세계화된 경제계를 위하여 단지 ‘숙주’ 같은 역할만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뒤집어보면, 이제 무한 국경의 시대에 서로 얽히고 설켜 활동하는 기업들은 점점 더 기생충 같은 성격을 띠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 다시 말해 노동자의 피와 땀이 결국에는 국가를 매개로 하여 기업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국제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차 떨어지고 있고, 또한 노동자들이 더 이상 국가가 추진하는 사회복지 감축을 좌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진 각국은 갈수록 구조적인 재정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또 국가 재정 수입은 노동자들의 수입이 줄어들면서 그에 따라 줄어들 수밖에 없다. ... 바로 이 과정에서 국가가 이제는 사회 전체의 소득 재분배를 아래로부터 위로(위로부터 아래로가 아니라) 진행시키고 있다. 361-363쪽.



  여기서 우리는 자유시장경제를 위해 진행되는 이러한 국가의 역할 축소 및 재정 hrrkf이 과연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 심각한 한 결과는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절대 부족하다는 점이다. 363쪽.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서 기업의 국제경쟁력 향상이라는 구호가 난무하고, 그 속에서 각종 예산 항목이 본의 아니게 줄어들고 있어, 이것이 선진 각국의 정치가들로 하여금 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맡지 못하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민족주의 국가의 본질적 기초를 허무는 것이다. ... 화폐권과 조세권 이외에도 국민국가의 또 하나의 기둥인 ‘공권력’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왜냐하면 은행이나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국제 범죄조직들도 세계화되는 경제를 위해 진행되는 각종 법적 제약의 철폐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364-365쪽.



  이러한 범죄자 집다니 다루는 돈의 규모가 아주 커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범죄 카르텔이 형성되어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보통의 기업이나 국가 관청을 매수하거나 부정 거래를 하게 되며, 나아가 아예 이들이 재계나 정계를 휘어잡게 되는 경우도 있다. 국가의 공권력이 약해질수록 이러한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367-368쪽.



  이점은 환경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각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각국 정부는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오로지 기업만을 위해서, 올바른 생태계 정책을 포기하기 일쑤이다. 369쪽.



  지금가지 열거한 여러 문제들은 세계시장이 거의 무정부적 상태로까지 활개를 치면서부터, 사실상 각 나라의 정부나 국가기관들이 마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 한마디로 정리하면, 상품과 자본의 흐름은 범지구적으로 자유로운데 반해, 그 조절과 통제는 개별 민족국가 차원에 국한되어 있다. 요컨대 경제가 정치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370쪽.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 기구들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일본의 오마에 겐이치가 얘기하듯 ‘민족국가의 종말’이 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나 그 정부는, 그래도 시민들이 정의와 책임, 혁신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최고의 사회적 심급이기 대무이다. ... 관료주의적 통제 메커니즘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는 징조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370쪽.



  이런 식으로 감시와 통제제도가 강화, 확대되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세계시장 속으로 모든 것이 통합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세계화 물결인데 이 물결은 각 나라, 각 민족에게 거의 무정부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행정 당국은 그 뿌리는 제거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도리어 시민들에 대해 온갖 멍에만 덮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가 경제에 대해 무능하게 되면 국가는 그 대안으로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갈수록 권위주의적으로 흐르게 된다.

  생각건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대책은 오로지 원만한 국제적 협력밖에 없다. 371-372쪽.



  세계으 l여러 나라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조화로운 세계 통째를 하자는 것은, 로비력이 강한 개별 이해관계자와 힘 있는 정부한테 거부권 같은 권력만 주는 꼴이 된다. 만일 이들 중 하나라도 훼방을 놓게 된다면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동시에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 앞에 많은 정부들은 자신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로비세력들이나 괴상한 나라들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374-375쪽.



  세계 차원의 조약이 제대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미국이 솔선수범하여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 최소한 미국이 복지부동한다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이 모두 다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자발적 동참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375쪽.



  세계화, 지구화라는 말은 대체로 세계시장의 거대한 힘이 범지구적으로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각 민족국가들이 자국의 경제적 주권을 더 이상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376쪽.



  유엔 안저보장이사회에서 미국 대표들은 언제나 평화유지군의 파견이나 난민구제활동 등에 대한 제안은 잘 하지만, 막상 미국 정부는 일종의 시민권적 의무까지 저버리면서 유엔 회비 납부를 하지 않는다. ...

  미국이 이와 같이 우익대중주의나 대중선동주의(대중인기영합)를 바탕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 한, 우리는 미국이 세계 여러 나라한테 ‘세계화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378쪽.



  유럽 공동의 화폐는 대륙의 정치적 통합과 미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폐통합이 2001년에야 현실화되더라도, 통합은 유럽이 화폐, 재정, 조세정책의 영역에서 국민주권의 중요한 부분을 되찾을 가능성을 던져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유럽의 금리와 환율은 미국시장으로부터 현재보다는 훨씬 덜 종속도리 것이다. 370-380쪽.



  이 [유럽연합 집행] 위원회가 준칙이나 행정명령으로 공포한 것은 각 국가별 의회의 의사에 종속됨이 없이, 곧장 모든 15개 회원국가에서 구속력 있는 법이 된다. 각 국가별 의회는 법률의 개정에 있어서 단지 박수만 치는 기관에 지나지 않게 된다. 유럽연합의 각료들은 이러한 형태로 공개토론도 없이 법률을 제정하는데, 그 비중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

  브뤼셀에 있는 관료집단의 지배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하여 유럽 차원에서 권력의 민주적 분배를 사실상 폐지한 것은 유럽 통합에 대해 시민들이 불쾌하게 느끼도록 하였고, 나아가 저항하게 만들었다. 이제 유럽의회를 위한 선거는, 적어도 유럽 시민들의 눈에는, 국민주권에 대한 거대한 멸시나 경시로 비치고 있다. ...

  테크노그라트에 의한 민주주의는 관련 정부기구들한테는 편안한 것일 수 있으며, 공개적 토론으론 인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정부형태로서 그것은 유럽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다. ... 즉 민주적 정당성의 결여로 말미암아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도 다수의견을 집약해내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유럽연합 시스템은 세계정부와 동일한 약점에 부딪쳐 신음하고 있다. 그것은 회원국 정부들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 경우에는 항상 의사결정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범지구화된 경제적 관련성은 이제까지 통일된 유럽을 낳은 것이 아니라 ‘국경 없는 시장’만을 낳았는데, 여기에서는 정치가 스스로의 힘을 감소시켰으며, 결국 정치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은 갈등만을 낳고 말았다. 381-382쪽.



  대체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럽을 그 시민들에게 투명하게 열어젖힐 수 있는 열쇠는 최소한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에 놓여 있다. ...

... 유럽의회 의장인 클라우스 핸쉬는 아직도 유럽의회가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종속성과 수동성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유럽연합이 아직은 국가가 아니며 나아가 각종 정책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가에서만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384-385쪽.



  [영국은 유럽 통합의 훼방꾼. 387-389쪽.]



  영•미식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럽식의 대안은 ‘민주화된 유럽연합의 건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390쪽.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결코 모든 사람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이 두 축을 중심으로한 서구 산업국가의 핵심적 이상은, 차라리 서로 지속적인 모순관계에 있다. 392-393쪽.



  폴라니에 따르면 자유시장의 도입은 “결코 규제와 간섭의 철폐를 이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거대한 확산을 초래했다.” 순환적 위기에 따라 규제되지 않는 시장경제가 공황과 빈민폭동을 점점 자주 유발시키면 시킬수록, 점점 더 확실히 통치자들은 ‘힘의 자유경쟁’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노동자들의 정항운동만 탄압했다. 뒤에 그들은 거의 모든, 특히 외국으로부터의 경쟁에 대한 시장의 보호를 실행했다. 자유무역이 아니라 보호주의, 즉 보호무역주의 정책이, 빠르면 1900년대 그리고 정확히는 1920년대 이후 거의 모든 정부들의 일상 업무였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결국 무역전쟁과 통화전쟁을 통해 이미 세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던 세계경제를 1930년대 초 대공황으로 몰아갔다.

  ... 19세기 경제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사회가 스스로 조절되는 단일한 시장체계를 통해 유토피아―폴라니는 이를 ‘위험하다’고 간주했는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는 자유방임의 정책들이 사회의 안정성을 파괴했기 때문에 좌절했다.

  오늘날에도 역시 똑같이, 스스로 조절하는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는, 그들의 깃발에 복지국가 축소와 무조건적 탈규제화를 써넣는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확실히 “그들의 시장자유주의는 일종의 민주주의적 문맹이다.”라고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수요와 공급 법칙에 기반한 경제이념의 현대적 추종자들이 내세우는 역사망각적 주장들을 비판했다. ... 벡은 말한다. “집을 짓고 있고, 안정된 직업 그리고 그것으로 미래가 물질적으로 보장된 사람들만이 시민이다. 그들이 민주주의를 누리고 키워갈 수 있다. 단순한 진리는 한마디로, 물질적 보장없이는 정치적 자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새로운 그리고 낡은 전체주의 정권과 이념의 협박 속에는 결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394-395쪽.



  적절한 시간 내에 이를 저지하는 데 실패한다면 필연적으로 폴라니가 보여준 것 같은 사회적 거부반응(저항)을 일으킬 것이다. 397쪽.



  증가하는 세계적 노동분업이 전세계에서 어떻게 경제적 효율을 높이고 있는지는 언제나 증명된다. 경제적으로 세계시장 통합은 고도로 효율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부의 분배에서는 국가의 개입이 결여된 세계적 시장제도로는 그다지 효율적인 것 같지 않다. 398쪽.



  일국의 독자노선으로는 세계시장 파산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해결책을 찾고 이를 실행해야 한다. 경제적 민족주의로 파산하고 싶지 않다면, 새로운 복지국가적 체계로 국경 없는 시장을 조절해서, 이를 단지 높은 수익만 낳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이익을 분배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지금까지 존재하는 세계적으로 개방된 시장에 대한 합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399쪽.



  <20 대 80의 사회>로 가는 추세를 멈추게 할 계획과 전략은 도저히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마련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금융시장 세력가들의 정치적 힘을 제한하는 것이 될 것이다. ...

  필연적으로 이는 자원소비의 비용을 높이고 노동력의 가치를 높이는 환경세 개혁과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단지 이렇게 할 때만이, 모든 경제가 자연약탈적 성장을 계속함으로써 다가오는 세대한테서 모든 삶의 기회를 빼앗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더구나 교육제도의 효율과 범위를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폭넓은 공감이 존재한다. 400쪽.



  그러나 이 모든 제안은 공통적으로, 현재까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한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새로운 세계화’의 장을 여는 개혁을 자본의 해외탈출을 초래하지 않고도 실행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정부의 존재이다. 401쪽.



  우리는 파괴적인 영•미식의 시장자유주의에 맞서 생명력 있고 활기찬 유럽식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 유럽은 앞으로 약 4억의 소비자로 이루어진 단일시장을 바탕으로 대내적으로는 물론이요, 대외적으로도 새로운 경제정책을 펼 수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경제정책이란 지나치게 시장의 힘에 기대는 밀턴 프리드먼이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예크 같은 사람들의 논리보다 존 케인스나 루드비히 에어하르트 같이 시장의 자유로운 힘에 일정한 사회적 규제를 가하는 논리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403쪽.



  진정 생명력 있는 유럽 단일의 국가 연맹체를 이루기 위한 필수조건은 모든 의사결정 과정을 철저히 민주화하는 것이다. ...

  ... 유럽 사회에서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다시 확보한다는 것은 다시는 어떠한 관료주의의 싹도 자라지 못하게 그 토양분 자체를 깡그리 없애버린다는 것을 뜻하게 될 것이다. 404쪽.



  우리의 희망은 바로 이 ‘시민 사회’에 있다. ... 냉정히 생각건대 사회정의란 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다. 406쪽.



 

저자들에 따르면, 세계화의 덫이란 민주주의의 정당성 위기를 말한다.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투명한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면서도 세계화는 이런 민주주의 과정을 와해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화가 보다 밝은 미래를 보장할 것이라는 희망을 배반한 역설인 셈이다.

  세계화의 역설은 다음과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첫 단계는 자본의 세계화이다. 자본이 국가 간의 장벽을 넘어 고수익을 찾아 움직인다. 이러한 자본의 세계화는 고정환율제의 폐지를 가져온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자율이 낮은 국가로부터 돈을 빌려 투자하는 기업이 증가하게 된다. 사실 이것이 자본의 세계화를 거대 기업들이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2단계는, 이러한 자본의 세계화와 더불어 기업들은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며 경영 합리화에 돌입하는 단계이다. 이것은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구조조정과 함께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억제한다. 한편 국가(정부)로부터는 각종 유무형의 혜택을 받는다. 사회간접자본의 이용에 대한 혜택을 받고, 법인세 등의 감면을 받거나 보조금을 받기도 한다. 이것은 이중으로 국가 재정의 적자를 야기하는데, 첫째,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 하락으로 인해 세금을 예전 수준으로 걷을 수 없다. 둘째, 정부의 법인세 인하나 감면으로 인해 세수가 줄어들면서도 기업에 제공하는 사회기반시설의 비용은 여전히 정부(또는 국민)가 부담하게 된다. 따라서 3단계는 중산층의 몰락과 국가의 재정 적자 확대이다. 정부의 재정 적자 증대와 함께 세수 감소는 복지 비용을 충당할 재원의 부재를 뜻한다. 정부는 경제의 세계화로 촉발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일자리 창출을 미끼로 기업에 끌려 다니는 정부는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상실한다. 이것이 4단계로 민주주의적 정당성 위기인 것이다.

 


찰스 P. 킨들버거의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경제사가인 찰스 킨들버거의 이 저서는 금융위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과정을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역사서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 책 역시 많은 사료들로 인해, 배경지식이 없을 때는 그 사료들에 압도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끝까지 읽다 보면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유사한 또는 동일한 사례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거품은 터지기 마련이다. 거품은 그 의미 자체로 지탱할 수 없는 가격변동이나 현금흐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23쪽

(1990년대 일본의 자산가격 거품 붕괴 이후 10년이 넘는 경제성장의 정체, 1990년대 후반 태국에서 비롯된 동아시아의 주가 폭락, 2000년 미국의 주식시장 거품 붕괴) 

  "이들 개별 통화의 시장환율 변동은 국가간 물가상승률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변동폭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 예사였다. 각국 통화의 외환거래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통화가치 상승, 즉 '오버슈팅(overshooting)'과 과도한 통화가치 하락, 즉 '언더슈팅(undershooting)'의 출렁거림은 이전 어는 시기보다도 그 폭이 훨씬 더 커졌고, 대상 통화의 범위도 더 넓어졌다." 25쪽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은행 파산 건수도 많았으며, 앞선 어느 시기보다도 훨씬 더 빈번했다." 25쪽. 

  "이들 금융위기와 은행 파산 사태는 자산가격 거품의 붕괴 혹은 외환시장에서의 통화가치 급락에 따른 결과였다; 어떤 경우는 외환위기가 은행의 위기를 촉발했고, 다른 경우에는 은행의 위기가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26쪽.

  "최근의 은행 파산 사태는 세 차례의 다른 파동으로 일어났다: 1980년대 초에 일어난 첫 번째 파동, 1990년대 초의 두 번째 파동, 그리고 1990년대 후반에 세 번째 파동이 있었다. 은행의 파산, 큰 폭의 환율 변동, 자산가격의 거품은 서로 체계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으며, 경제 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인해 발생했다." 27쪽

(1970년대는 가속적인 물가상승의 시대. 이때의 속설은 "금 1온스의 가격은 원유 20배럴의 가격과 거의 같다"는 것. 1970년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대외채무 총액 증가(1250억달러->8000억 달러. 이때의 속설은 "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는 것. 27-28쪽) 

  "이 책이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부동산 및 주식시장 거품과 이와 유사한 1990년대 중반 태국 방콕과 인근 아시아 국가들의 금융 중심지에서 형성된 거품, 그리고 1990년대 후반 미국 주식시장의 거품, 이들 세 가지 거품이 체계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거품이 붕괴하자 일본을 떠나는 자금의 이동 규모가 증가했다. 이 자금의 일부는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유입됐으며, 일부는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자금 유입의 증가에 따라 이들 나라의 통화가치가 상승했고, 또 이들 나라의 투자 가능한 부동산과 유가증권의 가격이 상승했다.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거품이 붕괴됐을 때, 이들 국가가 상환한 해외채무 자금의 일부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며 또 하나의 자금이동 물결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미 달러화 가치는 외환시장에서 상승했고, 미국의 연간 문역수지 적자는 추가로 1500달러나 증가해 5000억 달러로 늘어났다." 33쪽 

  "해외로부터 어느 나라로 자금  유입이 증가하면 거의 예외 없이 자금이 유입되는 나라에서 거래되는 유가증권의 가격이 상승했다. 왜냐하면 외국인에게 유가증권을 매도한 내국인들은 매도한 금액 중 많은 부분을 다른 내국인이 보유한 다른 유가증권을 매수하는 데 사용했고, 또 내국인에게 유가증권을 매도한 내국인도 마찬가지로 이 매도 금액 가운데 많은 부분을 다시 다른 유가증권을 매수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유가증권 거래는 더 높은 가격을 유발하며 계속 이루어졌다." 33쪽 (뜨거운 감자 이야기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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