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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강정인, 안선재 역, 한길사, 2003.




제 1 권


제 1 장 도시 일반의 기원, 특히 로마의 기원에 관해


  로마라는 도시의 기원과 그 입법자 및 기본적인 정치제도에 관한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도시에서 그토록 위대한 덕이 그토록 오랜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공화국이 나중에 제국으로 발전하여 존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p. 69)


  나는 우선 모든 도시는 도시가 세워진 곳에 살고 있던 토착인 또는 다른 곳에서 온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진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는 주민들이 다수의 작은 공동체로 흩어져 살기 때문에 안전을 향유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는 어느 한 공동체도 지형이나 적은 인구로 인해 침략자의 공격에 저항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적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방어를 위해 뭉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p. 70)


  이와 같은 사례는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우선 베네치아를 들 수 있다. (p. 70)


  두 번째 사례는 도시가 이방의 종족들에 의해 건설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들은 자유인이거나 아니면 타국에 예속된 인민들인데, 후자의 경우에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이 자국의 인구를 줄이거나 새로이 획득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보낸 식민이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제국 전역에 걸쳐 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또 어떤 도시들은 군주에 의해 건설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군주가 그곳에 정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처럼 군주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p. 71)


  이러한 [자유로운] 도시들은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정복한 나라에서 기존의 도시를 발견하여 정주하게 된 경우이거나, 아니면 아이네아스처럼 아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경우이다. (p. 72)


  인간의 안전은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시는 황량한 곳을 피해 매우 비옥한 곳에 자리잡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도시는 토지의 풍요함에 근거하여 팽창하게 되었을 때, 공격으로부터 능히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고 나아가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조장할 법한 게으름에 대해서는 그 상황이 강제하지 않는 근면의 필요성을 법률에 의해 강제하는 것으로 대비해야 할 것이다. (p. 73)


  그러므로 나는 도시를 비옥한 땅에 건설하는 것이, 법률에 의해 그 비옥함의 [부정적] 효과를 적절한 한계 내로 억제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라면, 보다 현명한 처사라고 주장하겠다. (p. 74)


  아이네아스가 최최의 건국자라고 믿는 자들에게 로마는 이방인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일 것이다. 그러나 로물루스를 건국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로마는 그곳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편이 사실이든, 양자 모두 로마가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도시로 출발했다는 점은 인정할 것이다. (p. 75)




제 2 장 얼마나 많은 종류의 국가가 있는가, 그리고 로마는 어떤 종류의 국가에 속하는가


  어떤 종류의 대외적인 종속이든 그것과 상관없이 출발한, 곧 공화국이든 군주국이든 처음부터 자신들의 뜻에 따라 통치된 도시들을 논의하고자 한다. (p. 76)


  어떤 도시들의 경우에는 창설 당시 또는 그 직후, 어떤 한 인물에 의해 법률이 단 한 번에 제정되었는데, 예를 들어 스파르타에서는 리쿠르고스에 의해 법률이 제정되었다. 반면에 다른 도시들은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연히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법률을 정비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로마의 경우이다. 신중한 지도자를 배출하여 그가 제정한 법률을 개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 법률 아래서 백성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국가는 진정 행복할지어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는 건국 당시의 법률을 훼손시키지 않고, 또 어떠한 위험스러운 분란도 없이 800년 이상이나 그 법률을 준수했다. (p. 77)


 [좋은 정부의] 각각은 그것과 연관된[나쁜 정부 형태]과 너무 유사해서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쉽게 변형된다. 곧 군주정은 참주정으로 쉽게 변하고, 귀족정에서 과두정으로의 이행은 손쉬우며, 민주정은 어렵지 않게 무정부상태로 변질된다. (p. 78)


  그 과정에서[우두머리를 정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정직하고 선량한 것을 유해하고 사악한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자에게 해악을 가는 자를 목격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부정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증오와 [은혜를 베푼 자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결과 동일한 해악이 자신들에게 가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은혜를 모르는 자들을 비난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자들을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해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법률을 제정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에게 처벌을 부과했다. 정의의 관념은 이렇게 발생했던 것이다.


  그[타락의] 결과 군주는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러한 미움을 두려워하고 겁에 질려 당장 폭력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 즉각적인 결과가 참주정치였다.

  이로부터 파멸, 즉 군주에 대한 음모와 반란의 원인이 발생하게 되었다. 음모와 반란은 …… 다른 사람들보다 가문, 기백, 부 및 계급에서 우월하기 때문에 군주의 수치스러운 생활태도를 참들 수 없는 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 해방자들은 단일한 인물이 통치하는 체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스스로 정부를 구성하였고, 처음에는 이전의 폭정을 생각하고 그들이 제정한 법률에 따라 처신하고, 그들 자신의 이득을 공동선에 복종시키며, 아주 근면하게 공사(公私) 업무를 돌보고 처리했다. (pp. 79-80)


  그들[자식들]이 탐욕, 야심, 여성들의 겁탈에 탐닉함으로써 최선자들에 의한 통치는 소수에 의한 통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그 체제는 시민적인 권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참주에게 일어난 일이 그들에게도 일어나게 되었다. (p. 80)


  소수 지배체제를 전복시킨 자들은 군주정을 다시 수립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민중 정부에 주의를 돌려 유력한 소수나 1인의 군주가 통치권을 갖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를 조직했다. (p. 80)


  그러나 오래지 않아, 특히 그 정치체제[민중 정부]를 수립한 세대가 사라진 후, 그 체제는 자유의 남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공공의 권위도 타인에 대한 존중도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각 개인은 제멋대로 살게 되어 매일 온갖 악행들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필연에 강제되거나 어떤 훌륭한 사람의 제안에 다라, 또는 그러한 남용을 걷어치우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군주정으로 되돌아갔다. (p. 80)


  이것이 모든 국가가 통치하는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순환이다. (p. 81)


  그렇다면 지금까지 논의한 정부는 모두 병약한 형태라고 말하겠다. 세 형태의 좋은 정부는 단명하고, 세 형태의 나쁜 정부는 사악하기 때문이다. …… 처음의 세 가지 좋은 정체가 갖는 성격을 모두 다 포함한 하나의 정체를 택하여, 그것을 가장 견실하고 안정된 것이라 판정하였다. 그 이유는 동일한 도시 안에 군주정, 귀족정, 민중 정부의 여러 요소들이 함께 있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기 때문이다. (p. 81)


  [로마의] 그 왕들은 내가 논의한 원인과 경위로 인해 왕위를 잃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몰아낸 자들은 왕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즉시 두 명의 집정관을 두었다. 그리하여 극들은 로마로부터 왕의 칭호를 박탈했지만, 왕의 권력에 해당하는 제도는 유지했다. 그 결과 국가기구에 집정관과 원로원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세 요소 가운데 두 요소, 곧 군주정과 귀족정의 혼합이 형성되었다.

  이제 정부 내에 민중의 역할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일만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일은, 로마 귀족이 다음에 설명할 이유로 횡포를 부리게 되었을 때 민중들이 그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급기야 귀족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민중들에게 그들의 몫을 허용함으로써 달성되었다. …… 그리하여 호민관이라는 관직이 창설되었다. (p. 83)



제 3 장 로마에서 호민관을 창설하게 된 경위―국가를 더욱 완벽하게 만든 사건

  국가를 창설하고 법률을 제정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인간은 사악하고, 따라서 자유로운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나 자신들의 사악한 정신에 따라 행동하려 한다는 점이다. (p. 84)


  사람들은 필연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는 한 결코 좋은 일을 하려 하지 않으며, 많은 선택이 있고 과도한 자유가 허용되면 만사가 순식간에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굶주림과 빈곤은 사람들을 근면하게 만들고, 법률은 사람들을 선량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다. …… 평민과 귀족 간의 불화로부터 초래된 많은 혼란, 소동 및 내전의 위험을 거친 후에 사람들은 인민의 안전을 위해 호민관을 창설하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이 호민관에게 높은 권위와 명예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 후 호민관은 항상 평민과 원로원을 중재하고, 귀족들의 거만함을 억제할 수 있었다. (p. 85)




제 4 장 평민과 원로원의 대립이 로마 공화국을 자유롭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나는 운명과 군사제도야말로 로마가 강성해진 원천이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의견이 상반된 자들은 좋은 군대가 있는 곳에는 으레 좋은 정부가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도시가 행운을 갖지 못하는 경우란 좀처럼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p. 86)


  귀족과 평민 간의 내분을 비난하는 자들은 로마를 자유롭게 만든 일차적 원인을 비난하고 그러한 내분이 초래한 좋은 결과보다는 그것들로부터 유래하는 분란과 소동만을 고려하는 것처럼 내게 보인다. 그들은 모든 공화국에는 두 개의 대립된 파벌, 곧 평민의 파벌과 부자의 파벌이 있다는 점 그리고 로마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도록 제정된 모든 법률은 그들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p. 86)


  [타르퀴니우스로부터 그라쿠스 형제에 이르는 300여 년 간] 이토록 좋은 모범적 처신은 좋은 교육에, 좋은 교육은 좋은 법률에, 좋은 법률은 많은 이들이 무분별하게 규탄하던 그러한 대립과 불화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결과를 엄밀히 검토한 자라면 누구나 그러한 대립이 공동선에 유해한 추방이나 폭력보다는 공공의 자유에 도움이 되는 법률과 제도를 생산해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 87)


  모든 도시는 인민에게 그들의 야심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 자유를 희구하는 평민의 열망이 자유에 해로운 경우란 것의 없다. 왜냐하면 그 열망은 억압으로부터 도는 억압이 발생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일 때는 언제나 집회라는 치유책이 있다. 그 집회에서 유력한 어떤 인물이 나서서 인민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pp. 87-88)


  만약 이러한 내분이 호민관의 설립을 초래했다면, 그것은 최대한의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호민관이라는 관직이 통치에 인민의 몫을 부여한 것 이외에도, 다음 장에서 보듯이, 로마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제 5 장 인민과 귀족 어느 편이 더 확실하게 자유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새로이 권력을 얻고자 하는 자와 기존의 권력을 보유하고자 하는 자 가운데 어느 편이 분란의 원인인가


  공화국을 현명하게 설립한 자들이 배려한 가장 필요한 사항들 중 하나는 자유의 수호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p. 88)


  옛날에는 라케다이몬인들이, 오늘날에는 베네치아인들이 자유를 귀족의 손에 맡겼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것을 평민의 수중에 맡겼다. …… 그 결과를 검토한다면, 귀족의 편을 들고 싶기도 하다. 스파르타와 베네치아는 로마보다 오랫동안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p. 89)


  [로마의 편을 들어 이유를 검토해본다면] 귀족과 귀족이 아닌 자들의 목적을 검토해보면, 전자에게는 지배하려고 하는 강한 갈망이 있고, 후자에게는 단지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갈망, 다시 말해 귀족들보다 지배권을 장악할 전망이 적기 때문에 자유 속에서 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즉 평민이 자유를 보호하는 직책을 담당하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인들이 그것을 독점하지 않도록 훨씬 잘 지킬 것이다. (p. 89)


  반면에 스파르타와 베네치아의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은 자유의 수호를 강력한 자들의 수중에 맡기는 것이 두 가지 점에서 좋다고 말한다. 첫재, 그 제도는 귀족들의 야망을 더욱 잘 충족시키는다는 점이다. …… 둘째, 그 제도는 인민들의 변덕스러운 심성에 권위를 내맡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사례로서 로마 자체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로마에서는 호민관들이 이러한 권력을 그들의 손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민들은 평민 출신의 집정관 1인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2인의 집정관 모두가 평민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그들은 감찰관, 사법관 그리고 정부의 다른 모든 관직을 원했다는 것이다. (pp. 89-90)


  그것[자유를 어느 편에 맡겨야 하는가]은 로마와 같이 제국을 건설하기를 원하는 공화국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공화국인가에 달려 있다. 다음 장들에서 그 이유와 방법을 논할 예정인데, 전자의 경우에는 로마가 한 대로 모든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다음 장에서 논의할 베네치아와 스파르타를 모방할 필요가 있다. (p. 90)


  여하튼, 분란은 대부분 이미 가진 자에 의해 초래된다. 무언가 잃을 것 같다는 그들의 두려움은 무언가 얻고자 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도 일반적으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으면 그가 가진 것도 확실히 지키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p. 92)




제 6 장 로마에서 인민과 원로원 간의 대립을 소멸시킬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로마가 위에서 언급한 공화국들[베네치아와 스파르타]처럼 평온히 남아 있기를 원했다면, 그 입법자들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엇다는 점을 납득하게 된다. 즉 베네치아인들처럼 전쟁에 인민들을 동원하지 않거나, 아니면 스파르타인들처럼 외래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거나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 두 가지 일을 다 했다. 그들은 인민들에게 권력을 허용하고 인구증대를 초래하여 소동을 일으킬 수 있는 많은 소지를 야기했다. 따라서 로마가 계속 평온만을 유지했더라면, 다음과 같은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즉 로마가 위대함에 이르는 길이 차단됨으로써 로마는 훨씬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즉, 만약 로마가 분란의 원인을 제거하기로 계획했더라면, 그것은 동시에 성장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p. 95)


  누구든 새로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자는 그 국가의 영토와 권력이 로마처럼 팽창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 국가를 협소한 영토 내에 묶어둘 것인지를 미리 결정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경우라면, 국가를 로마처럼 조직하여 가능한 한 주민들간에 분란과 불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 …… 두 번째 경우라면, 스파르타나 베네치아처럼 건설해야 한다. (p. 96)


  오랫동안 지속될 국가를 만드는 방책은 국가를 내부적으로 스파르타나 베네치아와 같이 조직하고, 누구도 손쉽게 정복할 수 없는 천연적인 요새로 삼을 만한 곳에 터를 잡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런 국가는 너무 커서 이웃 나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그 국가는 오랫동안 독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p. 97)


  나는 다른 국가가 아니라 로마의 방책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절충책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민과 원로원 사이에 발생한 그러한 반복들을 감당해야 하며 로마와 같은 위대함을 성취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호민관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제도라는 이유 외에도, 공화국이 탄핵을 할 수 있는 권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 (p. 98)




제 7 장 공화국에서 탄핵권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국가의 자유를 수호할 임무를 부여받는 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국가의 자유를 위협한 시민을 민회나 일정한 행정관 또는 위원회에 탄핵할 수 있는 권능을 보유하도록 하는 것만큼 유용하거나 필요한 것을 달리 또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조치는 공화국에 매우 귀중한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온다. 첫째는 시민들이 고발당할까 두려워서 국가에 반역을 꾀하지 않는 것이다. …… 다른 효과는 국가가 다양한 시민들 사이에 잡다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 당파적 증오를 해소할 수 있는 배출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p. 99)


  이러한 사례[리비우스의 코리올리누스 이야기]는, 내가 위에서 발한 바, 곧 공화국은 법률을 통해 대중이 특정한 시민에게 품게 된 노여움에 대하여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배출구를 제공하는 것이 유용하고 필요하다는 점을 예시한다. 왜냐하면 아무런 합법적인 방법이 없으면 불법적인 방법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p. 100)




제 8 장 탄핵이 소중한 반면, 중상은 해롭다


  자유로운 도시와 그 밖의 다른 모든 체제에서 중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결과를 낳는가를 알 수 있다. …… 이러한 중상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발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열어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상이 국가를 해치는 것만큼이나 합법적인 고발은 공화국에 커다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양자 사이에는 이 같은 차이가 있다. 중상은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증인 또는 그 밖의 다른 특별한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 다른 사람을 중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발은 그 비난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진정한 정보와 정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고발당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 이러한 식으로 이루어지는 중상은 합법적인 고발이 별로 사용되지 않거나, 고발을 처리하는 도시의 제도가 잘 정비되지 않은 경우에 빈번히 사용된다. 그런즉 공화국을 건설하는 자는 고발이 그 공화국 내의 어떤 시민을 상대로 해서든 아무런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제기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pp. 104-105)


  그들[로마인들]은 법에 따라 고발을 할 의무가 있었다. 만약 고발이 사실로 판명되면 그들은 보상을 받았고, 적어도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발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그들은 만리우스가 그랬듯이 처벌받았다. (p. 107)





제 9 장 새롭게 공화국을 창건하거나, 구제도를 철저히 혁파하여 공화국을 쇄신하는 일은 한 사람이 단독으로 해야 한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로물루스와 같은 건국의 시조가 먼저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그 다음에는 자신과 권위를 공유한 인물인 사비니 가(家)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의 살해에 가담한 것은 나쁜 선례라고 생각하지 않나 싶다. 이로부터 그들은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과 소망을 품은 시민들이 그들의 군주[로물루스]의 선레를 따라 그들의 지배에 반대하는 자들을 공격하게 되었다고 추론한다. 이러한 견해는 로물루스로 하여금 그러한 살인행위를 저지르게 한 목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타당할 것이다. (p. 108)


  한 인물에 의해 조직되지 않는다면, 어떤 공화국이나 왕국도 처음부터 잘 조직되거나 예전의 제도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철저히 개혁되는 경우란 거의 없거나 결코 없다는 점이다. …… 무릇 공화국의 신중한 건설자로서 그 의도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일반적인 선(善)을 추구하고자 하고, 자기 자손이 아니라 공동의 조국을 염두에 둔 자는 모든 권위를 자기 소중에 넣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러므로 신중한 지성인이라면 어떤 사람이 왕국을 조직하거나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사용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 책망하지 않는다. 비록 그 행위가 비난받을 많나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용서받을 만한 것이라면 여하튼 적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로물루스의 경우처럼 그 결과가 좋다면, 그 결과는 항상 그를 용서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원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한 자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자가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p. 108)


  더욱이 건국자는 신중하고도 고결한 인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그가 장악한 권한을 유산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 게다가 국가의 건국에는 단지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를 많은 사람들이 보살피게 될 때, 즉 그 유지가 많은 사람의 책임에 내맡겨질 때, 그것은 실로 오래 지속된다. 그 이유는 많은 수의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으로 인해 정부에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건국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일단 좋은 정부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포기하는 데에는 쉽게 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pp. 108-109) [공화국 건국의 상황과 공화국 유지의 상황이 다르다.]


  그[로물루스]가 한 일이 그 자신의 야심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행해진 일이었다는 점은, 그가 즉각적으로 원로원을 창설한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 그리고 로물루스가 자신을 위해 남겨 놓은 권한을 잘 관찰한 사람은, 전시에 갖는 군대통수권과 원로원을 소집할 권한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그에게 남겨져 있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 109)


  건국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모든 권한을 장악할 수 필요가 있으며, 로물루스가 레무스와 티투스 타티우스를 살해한 행위는 비난이 아니라 용서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p. 111)




제 10 장 공화국이나 왕국의 창설자는 명성을 누려야 하는 한편, 참주정치의 시조는 응당 비난을 받아야 한다.


  어느 누구든 카이사르가 특히 역사가들에 의해 찬양을 받는 것을 보고 카이사르의 영광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칭송하는 자들은 그의 재력에 매수되었거나 로마제국이 오래 지속된 것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 악행을 저지르려고 의도한 자보다 실제 저지른 자가 더 비난을 받아야 하는 만큼, 카이사르는 훨씬 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독자는 또한 역사가들이 브루투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칭송을 바치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위세에 눌려 그를 비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그의 적을 찬양한다. (p. 113)


  제국이 다시 세습으로 돌아갔을 대, 로마는 다시 혼란에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p. 114)


  훌륭한 황제에 의해 통치된 시대에 그는 안전한 시민들 사이에서, 평화와 정의로 충만된 세계에서 군주가 안전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는 원로원이 권위를 가지고, 행정관이 명예를 누리며, 부유한 시민들이 그들의 부를 향유하고, 귀족과 덕이 찬양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최상의 평온과 최상의 선을 볼 것이다. (p. 114)


  참으로 어떤 군주가 세상에서 영관을 얻고자 한다면 그는 부패한 도시를 갖기를 소망해야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처럼 전적으로 파멸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물루스처럼 개혁하기 위해서 말이다. (p. 116)




제 11장 로마의 종교


  누마[로물루스의 후계자]는 인민이 대단히 거칠다는 점을 발견하고 나서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그들이 법률에 복종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여기서 그는 질서정연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전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 종교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종교를 기초로 국가를 확립한 결과, 오랜 시대 동안 신에 대한 외경이 로마 공화국만큼 강한 나라가 없게 되었다. (p. 116)


  그러므로 로마의 역사를 잘 검토한 자는 종교가 군대를 통솔하고, 인민에게 영감을 주며, 사람들을 선량하게 만들고 사악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데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p. 118)


  그렇다면 모든 것을 고려해볼 대, 나는 누마가 도입한 종교야말로 로마가 누리게 된 번영의 주된 이유라고 결론짓겠다. 종교는 좋은 법을 가져왔고, 좋은 법은 행운을 가져왔으며, 행운으로부터 도시가 노력한 모든 사업이 행복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종교적 가르침의 준수가 국가의 위대함을 초래하듯이, 종교에 대한 경멸은 국가의 파멸을 가져온다.




제 16 장 군주정에 익숙한 인민은 우연한 사태로 인해 자유를 회복하더라도 자유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한 군주 아래 사는 데 익숙한 인민이, 타르퀴니우스를 추방한 이후에 자유를 얻은 로마 인민처럼 우연한 사건에 의해 자유를 얻는다 하더라도, 나중에 그 자유를 보존하는 데 얼마나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가는 고대사의 숱한 실례들에 의해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p. 133)


  그들[인민들]은 타인의 명령하에 사는 데 익숙해서 국가로서 어떻게 방어를 하고 공격을 해야 하는지 생각할 줄 모르고 군주를 이해하지도 못하며 그들에 의해 이해되지도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바로 조금 전에 벗어 던진 멍에보다 통상 훨씬 더 가혹한 멍에에 순식간에 걸려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곤경도 아직 완전히 부패하지 않은 인민에게만 일어난다. 왜냐하면 완전히 부패한 인민은, 이하에서 곧 설명하듯이, 잠시라도, 아니 실상 전혀, 자유롭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pp. 133-134)


  새롭게 자유를 얻은 국가는 열렬한 적(敵)은 있지만 열렬한 동맹은 없다는 점이다. 군주의 재부(財富)로부터 양분을 빨아먹음으로써 혜택을 누리던 모든 이들은 열렬한 적이 된다. …… 그런 국가는 열렬한 동맹을 얻을 수 없다. (p. 134)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 소유물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권능, 자기 부인이나 자녀의 명예가 유린되지 않으리라는 믿음, 자신의 명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등에 대해서는 정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정부에 대해 의무감을 느끼는 일이란 없는 법이다. (p. 134)


  진정으로 다중이 그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좌를 장악하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는 군주는 불운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단지 소수를 적으로 둔 자는 쉽게 그리고 폭력에 자주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보전할 수 있지만, 인민을 적으로 둔 자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135)


  만약 군주가 자기에게 적대적인 인민의 환심을 사고자 한다면(나는 자기 조국에서 참주가 된 군주를 말하고 있다), 나는 그가 우선 인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겠다. 그는 항상 인민이 두 가지를 원한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을 노예로 만든 장본인에게 복수를 하고자 한다. 둘째, 그들은 다시 자유를 찾고자 갈구한다. (p. 136)


  인민들이 자유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한다. 거기서 그는 그들 중 소수는 통치에 참여하고 싶어 자유를 원하지만, 그 밖의 인민 대다수는 삶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원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단지 안전하게 사는 것으로 충분한 나머지 사람들은 일반적인 안전과 군주의 권한을 동시에 확보하는 명령과 법률에 쉽게 만족할 것이다. 군주가 이러한 조치를 취하고 어떠한 상황하에서 군주가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민이 깨닫게 되면, 단시일 내에 그들은 안심하고 만족을 느낄 것이다. (pp. 136-137)




제 17 장 부패한 인민은 자유를 얻더라도 자유를 유지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오직 인덕과 역량을 겸비한 군주만이 그 국가를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도 단지 그의 수명이 지속되는 한 연장될 뿐이다. (p. 138)


  타르퀴니우스 가문을 몰아냈을 때 로마는 즉각적으로 자유를 회복해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죽고 카이우스 칼리굴라가 죽고 네로가 죽은 후 카이사르의 혈통은 끊어졌는데, 로마는 자유를 유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생시킬 수도 없었다. …… 타르퀴니우스 시대에 로마 인민은 아직 타락하지 않았지만, 후대에는 그들이 매우 부패했다는 점이다. (p. 139)


  나는 아무리 격렬하고 가혹한 어떠한 우발적인 사태도 밀라노나 나폴리에 자유를 회복시킬 수 없다고 말하겠다. 그 구성원들이 이미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p. 140)


  질료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에서 봉기나 기타 소요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질료가 부패한 상태에서는 잘 계획된 법도, 실로 한 인물이 그 법을 제정하고 능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그 준수를 강제함으로써 인민을 선량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p. 140)


  그러한 부패나 자유로운 삶에 대한 자질의 결여는 도시에 존재하는 불평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 평등을 되살리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전적으로 초법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p. 141)




제 18 장 부패한 도시에 자유로운 정부가 이미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립할 수 있는가


  좋은 도덕은 그것이 유지되려면 좋은 법률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법률은 그것이 준수되기 위해서는 좋은 도덕을 필요로 한다. (p. 142)


  부패한 상태의 로마가 자유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역사의 도정에서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듯이, 새로운 기본적 제도를 창조하는 작업 역시 필수적이었다. (p. 144)


  이러한 기본적 제도를 일거에 개혁하는 경우 …… 합법적인 조치의 사용은 잘 듣지 않으므로 충분하지 않고, 폭력이나 무력과 같은 비합법적인 수단에 호소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도시의 지배자가 되어 자신의 뜻대로 도시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p. 145)


  좋은 정부하에서 살 수 있도록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고결한 인물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폭력에 의해 국가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악한 인물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고결한 인물은 비록 그의 목적이 좋다고 할지라도 좀처럼 사악한 방법을 통해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사악한 인간은 그가 마침내 지배자가 되었을 때, 올바른 일을 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악한 방법으로 획득한 권한을 올바르게 사용하려는 생각이 결코 그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 145)


  이상 논의된 모든 것으로부터 부패한 도시에 정부를 유지하거나 그곳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일은 지극히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p. 145)




제 19 장 유약한 군주라도 강력한 군주의 뒤를 이은 경우에는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유약한 군주가 연달아 즉위하게 되면 그 왕국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로마 건국 이후 연달아 즉위한 3인의 최초의 국왕, 곧 로물루스, 누마, 툴루스의 출중한 능력과 수완을 고찰하면, 로마가 커다란 행운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 146)


  이로부터 선황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지지 않은 후계자는 선황이 이룩한 업적의 결과로 정부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러한 노고의 결실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 147)




제 20 장 두 명의 유능한 군주가 연이어 즉위하면 위대한 업적을 산출한다; 잘 조직된 공화국은 필연적으로 유능한 지배자가 잇따라 출현하게 되며 그 결과 국력이 크게 신장된다


  로마는 왕을 추방하고부터 …… 유약하거나 사악한 왕이 권좌에 오를 경우 발생하게 마련인 위험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권위의 무게가 집정관에게 실리게 되었으며, 집정관은 세습이나 기만 또는 격렬한 야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투표에 의해 통치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항상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p. 149)


  공화국의 경우에는 선거라는 방법이 단순히 연이은 두 명의 지도자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유능한 지도자가 잇따라 집권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이는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아진다. (pp. 149-150)





제 21 장 자신의 군대를 갖지 못한 군주나 공화국은 크게 비난받아 마땅하다


  현존하는 군주나 오늘날의 공화국이 방어와 공격을 위해 자국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이를 크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p. 150)


  평화시에도 영국은 [헨리 8세 통치시] 전쟁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 151)




제 24 장 잘 조직된 공화국은 시민에 대한 상벌제도가 분명하며, 공을 세웠다 하여 잘못을 묵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잘 정비된 공화국은 어떤 시민이 공을 세웠다고 해서 그의 잘못을 묵인하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공화국에서는 훌륭한 일을 해낸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는 일이 분명히 정해져 있다. 다라서 훌륭한 일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상을 내리고, 동일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그의 공적과 상관없이 벌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이 잘 준수될 때, 도시는 오랫동안 자유를 누리면서 살게 된다. (p. 156)




제 25 장 자유로운 국가에서 오래 유지된 정부를 개혁하고자 하는 자는 적어도 구제도의 외양만은 남겨두어야 한다


  도시의 정부를 개혁하되 그 개혁된 정부가 잘 유지되고 모든 사람에게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의도하거나 소망하는 자는 적어도 구제도의 외양을 존속시킬 필요가 있다. 이는 새로운 형태가 실제로 과거의 제도와 전적으로 다를지라도, 인민들에게는 정부가 그 형태를 바꾸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p. 158)




제 26 장 신생 군주는 그가 정복한 도시나 지역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


  도시나 국가의 군주가 된 자로서 누구든, 특히 그의 기초가 취약하기 때문에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입헌적 정부를 건설할 수 없다면, 그가 군주국(만약 그가 신생 군주라면)을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할 최선의 수단은 그 국가의 모든 것을 새롭게 개편하는 것이다. (p. 159)


  합법적인 정부라는 처음의 좋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는 이처럼 사악한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중간한 조치를 취하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하다. (p. 160)




제 28 장 로마인들이 아테네인들보다 자국민에 대해 배은망덕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완정 폐지 이후부터 술라나 마리우스 시대까지의 로마를 본다면, 로마의 자유는 그 어떤 시민들에 의해 단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었다. 따라서 로마는 시민들을 의심할 만한 뚜렷한 이유를 갖지 않았으며, 그 결과 시민을 경솔하게 박해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이와 정반대였다. 왜냐하면 번영의 절정에 있던 당시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선의의 외양을 가장한 채 아테네의 자유를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 도편추방(ostracism)이라는 제도가 성립된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다. 나아가 아테네에서 훌륭한 귀족들에 대해 가해진 온갖 폭력적 행위들은 아테네의 매시대에 걸쳐 수행되었다.

  따라서 정치 이론에 관한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민은 자유를 잃지 않고 지속할 때보다도 오히려 일단 잃었던 자유를 되찾앗을 대 더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법이다. (pp. 152-163)




제 29 장 인민과 군주 어느 편이 더 배은망덕한가


  나는 배은망덕이라는 이러한 악덕이 탐욕이나 의심 섞인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p. 164)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사람들은 은혜를 받은 것에 보답하기보다는 상처를 입은 것에 복수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보은은 손해로 여겨지는 반면, 복수는 이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p. 165)


  두려움은 장군이 적을 정복함으로써 군주에게 영토를 바치고 자신에게는 영광을, 부하들에게는 많은 부를 안겼을 때 일어났다. 즉 두려움은 부하들은 물론이고 적들과 군주의 신민들 사이에서 너무나 큰 명성을 떨쳐서 장군을 파견한 군주가 승리를 함께 즐길 수 없을 때 불가피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허영심이 많아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고, 자기의 이익 추구에 대해서는 끝이 없기 때문에, 군주의 마음속에 승리한 장군에 대한 시의심이 갑자기 싹트게 되며 그것은 장군의 교만하고 방자한 언행과 태도에 의해 더욱 커져갈 따름이다. 그런데 군주는 일신의 안위를 바라는 것 외에는 어느 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p. 165)


  의심 섞인 두려움이란 군주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군주들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군주는 자신의 깃발 아래서 승리를 거두어 주군에게 광대한 영토를 바친 사람들의 공훈에 대해서도 은혜를 베풀지 않는 법이다. (p. 167)


  따라서 군주가 배은망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공화국의 인민들이 배은망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크게 놀라거나 특별히 주목할 필요는 없다. 자유를 누리고 있는 국가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는데, 첫째는 자국을 강대하게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자국의 자유를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p. 167)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인민들이 배은망덕을 통해 거부하려 했던 것[곧 권력]을 혼자의 힘으로 강제로 장악하였던 것이다. (p. 168)


  스키피오에 대해 인민이 배은망덕한 소행을 저지른 것은 그들이 다른 인물들에게는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는 두려움을 스키피오에게서 느꼈기 때문이다. (p. 168)


  스키피오가 겸비하고 있던 이 역량은, 전혀 비할 데가 없을 만큼 위대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마의 행정관들조차도 그의 권위에 겁을 먹었다. …… 게다가 그의 처신 역시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에 고결한 인격으로 찬양받던 대(大) 카토 프리스쿠스는 행정관조차 두려워하는 시민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도시라면 자유로운 도시라고 불릴 수 없다고 하면서 스키피오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경우에 로마의 인민이 카토의 의견에 따랐다 해도 그들의 행위는 용서될 만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민이건 군주이건 두려움에 사로잡혀 배은망덕하게 되었을 때에는 어느 정도 용서될 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p. 169)


  나는 배은망덕이라는 이러한 악덕이 탐욕이나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명백히 인민은 결코 탐욕 때문에 배은망덕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두려움 때문에 배은망덕한 행위를 하는데, 그것도 군주에 비하면 빈도가 적다. (p. 169)




제 30 장 군주나 공화국이 배은망덕이라는 악덕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또 시민이나 장군이 배은망덕한 행위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군주는 두려움이나 배은망덕 속에서 살아야 할 필연성을 피하기 위해 본인이 친히 원정에 나서야 한다. …… 왜냐하면 군주가 정복에 성공한다면, 영광과 이득이 다 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p. 170)


  나는 군주의 부하 장군이 배은망덕이라는 해악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장군에게 두 가지 중 한 가지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그 하나는 승리를 거두자마자 장군이 곧바로 전열에서 떠나 자기 군주 가까이 몸을 두고 교만한 태도나 공명심에 사로잡힌 언동을 삼가는 것이다. ……

  그런데 장군이 그러한 처신을 꺼린다면 그는 과감하게 정반대의 처신을 택해야 한다. 즉 정복에 의해 획득한 것 일체를 군주에게 넘겨주지 않고 자기 자신의 손에 확보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pp. 170-171)




제 31 장 로마 장군들은 그들의 과오에 대해 과도하게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의 무능이나 잘못된 계획이 로마에 손해를 끼쳤다


  로마인들은 패전의 오명만으로 당사자인 장군들에게는 충분한 벌이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에 덧붙여 다른 중벌을 부과하면서까지 장군들을 겁줄 피룡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 173)




제 32 장 공화국 또는 군주는 인민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을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때가지 지체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 이런 선례에 근거해서 위급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인민의 호감을 사는 것을 연기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일반 민중은 자신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는 것이 위정자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정자가 적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p. 175-176)


  로마 공화정의 조치가 좋은 결과를 낳았던 이유는 정부가 아직 새롭고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으며, 처음부터 로마 인민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법률이 제정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p. 176)




제 33 장 국가의 내부 또는 외부로부터 커다란 위험이 엄습했을 경우, 그것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그것을 다루면서 지연시키는 정책이 훨씬 더 안전하다


  이 제도[임시 독재 집정관 제도(기원전 501년 또는 498년 창설)]는 한 시민에게 최고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시민은 심의를 거치지 않고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그가 일단 결정한 것을 실행할 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당시에 유용했고, 도 로마에 닥친 숱한 위기를 타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p. 177)


  그러한 위험이 심각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경우, 가장 안전한 계획은 그것을 기어이 제거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적당히 대처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 그러한 비상사태는 외부적인 원인보다는 오히려 내부적인 원인에 의해 야기되는 경우가 더 많다. 빈번히 한 시민에게 필요 이상의 권력이 허용되거나 자유로운 제도의 신경이자 생명인 법률이 부패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pp. 177-178)


  로마에서는 이와 똑같은 일[코시모 디 메디치의 일]이 카이사르의 경우에 일어났다. 즉 폼페이우스와 다른 시민들도 처음에는 카이사르의 역량을 찬양했지만, 얼마 안 있어 그 찬양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이에 관해 “폼페이우스가 이제 와서 카이사르에게 두려움을 느껴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라는 키케로의 말은 그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런 공포에 사로잡혀 그들은 타개책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타개책은 오히려 공화국의 파멸을 촉진시키는 데 지나지 않았다. (p. 180)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해악이 발견되더라도 그것을 덮어놓고 없애려 하지 말고 적당히 다루면서 시간을 버는 편이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p. 180)


  로마 인근의 여러 부족들간의 동맹은 도리어 로마 시민들을 더 단결시키고 강력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새로운 제도를 고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p. 181)




제 34 장 임시 독재 집정관의 권한은 로마 공화국에 유익하면 유익했지 유해하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투표에 의해 주어진 권력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강탈한 권력이 시민정부를 파괴했다.


  로마를 노예화한 것은 임시 독재 집정관이라는 칭호나 관직이 아니라 바로 일부 시민들이 군대 통수권을 연장하여 갖게 된 권력이었다. …… 무력만 가지고 있으면 어떤 명칭이 붙은 관직이라도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지만, 관직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해서 꼭 권력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82)


  로마의 긴 역사적 행로를 훑어보면, 국가에 공헌하지 않은 임시 독재 집정관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p. 182)


  첫째, 어떤 시민이 해를 가하고 스스로 불법적인 권한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부패하지 않은 국가에서는 결코 갖출 수 없는 여러 가지 조건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

  게다가 임시 독재 집정관은 종신제가 아니라 임기가 한정되어 있으며, 그가 그 때문에 임명된 비상 사태에 관련된 안건을 처리하는 권한만을 보유할 뿐이다. 그의 권한은 긴급한 위기상황에 대한 타개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력, 그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아무런 협의를 거치지 않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력, 상소 절차를 인정함이 없이 누구든 유죄로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을 포함한다. 하지만 원로원이나 민회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구래의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수립하는 것과 같이 현행의 통치 형태 자체에 영향을 주는 일은 일절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마에서는 임시 독재 집정관의 임기가 매우 짧았다는 점, 그 행사하는 권력이 제한적이라는 점, 로마 민중들이 아직 타락해 있지 않았다는 점, 이 세 가지 조건이 한데 작용하고 있었다. (pp. 182-183)


  확실히 로마의 모든 법률들 가운데 이 제도[임시 독재 집정관]는 그토록 강력한 제국의 위대함을 가져온 요인들 중 가장 고려할 만한 것이다. …… 공화국에서 통상적으로 시행되는 법적 절차는 그 진행이 더디게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인한 절차의 지연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대처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는 위험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p. 183)


  베네치아 공화국은 실로 근래의 공화국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국가이다. 그 공화국은 비상시에는 소수의 시민들에게 다른 심의를 거치지 않고 전원일치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는 현명한 관행이다. (pp. 183-184)


  초법적인 조치는 당시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그러한 선례 자체가 악ㅇ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p. 184)


  임시 독재 집관의 선출은 [현직] 집정관에게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도시의 통치자였던 집정관 역시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임시 독재 집정관의 권한에 복종해야 했기 때문이다. …… 로마인들은 임시 독재 집정관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집정관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p. 184)




제 35 장 로마의 10인회는 인민의 자유로운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공화국의 자유에 유해한 존재가 되고 말았는가


  10인회의 권위와 임시 독재 집정관의 권위를 비교해서 고찰해보면, 10인회의 권위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임시 독재 집정관이 창설되었을 대는 각각의 권한을 가진 호민관이나 집정관이나 원로원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임시 독재 집정관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권한을 박탈할 수는 없었다. 또한 임시 독재 집정관이 집정관이나 원로원의 한 사람을 파면시킬 권한은 가지고 있었으나, 원로원이라는 제도 자체를 말살하거나 새 법률을 선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원로원•집정관•호민관은 각각의 권한을 보유하면서 임시 독재 집정관이 본래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0인회가 창설되었을 때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즉 집정관과 호민관이 폐지되고 10회는 마치 그들이 로마 인민 전체인 양 법률을 제정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집정관과 호민관도 없이, 심지어 인민의 심의원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다시 말해 아무런 감시와 견제를 당하지 않으면서 그들은 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으며, 2년째 되는 해에는 이미 아피우스의 권력 야욕에 휘말려 온갖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

  이는 내가 자유로운 투표에 의해 주어진 권한이 결코 어떤 공화국에도 유해하지 않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인민들이 그 권한을 위임함에 있어서 적용 범위를 제한하고 또 일정한 기간으로 한정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말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pp. 186-187)


  스파르타와 베네치아에서는 지배자들이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감독관이 임명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권한이 실재한다면 질료가 전혀 부패되어 있지 않다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권한은 단시일 내에 질료를 타락시키고, 자신의 지지자와 당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p. 187)




제 36 장 고위직에 있는 시민들은 하급직에 있는 시민들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비록 로마인들이 영예를 추구하는 데 열중했다고는 하지만 과거에 자기 부하였던 인물에게 지금 명령을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거나, 나아가 이전에 자기가 지휘관이었던 군대에 백의종군하여 싸우게 되더라도 이를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p. 188)




제 37 장 농지법이 로마에 어떠한 불화를 초래했는가; 먼 과거까지 소급하는 효과를 가진 법률을 고래의 관습에 반하여 제정하는 것은 공화국에 불화를 야기한다


  야망이란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매우 강력한 충동이기 때문에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도 야망이 충족되는 경우란 결코 없는 법이다. 그 원인은 자연이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갈구하도록 만들어놓고도, 모든 것을 얻지는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p. 189)


  이[운명의 부침]는 어떤 사람은 더 많이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은 이미 얻는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이 서로 불화나 전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pp. 189-190)


  그들[평민들]은 그것[호민관 제도]을 성취하자마자 곧 명예 및 부―인간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를 귀족들과 공유하겠다는 야망과 기대감으로 인해 투쟁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무질서가 초래되었으며, 그것은 농지법에 대한 투쟁을 야기하였고 마침내 그 투쟁은 공화국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잘 정비된 공화국은 그들의 국고를 넉넉하게 하고 시민은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p. 190)


  이 법에는 두 개의 조항이 있었다. 하나는 어떤 시민도 정해진 일정한 양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했고, 다른 하나는 적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는 로마 인민들에게 분배된다고 규정했다. (p. 190)


  그 법에 의해 불리하게 영향을 받는 자들은 주로 유력자들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그 법에 반대하는 것이 공공선에 봉사한다고 믿었다. (p. 191)


  이 법은 그라쿠스 형제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잠복해 있었다. 그리하여 그라쿠스 형제에 의해 농지법 문제가 제기되자, 로마의 자유는 송두리째 끝장나고 말았다. ……

  평민들은 이 혼란의 와중에 마리우스를 지지함으로써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 귀족들은 술라를 지지하여, 그를 그들 당파의 우두머리로 삼아 내전에 돌입했다. 이론 인해 많은 유혈사태와 운명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귀족들이 승자가 되었다. 이러한 분쟁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시대에 다시 발생했는데, 카이사르는 마리우스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폼페이우스는 술라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후 발발한 전쟁에서 승자는 카이사르가 되었는데, 그는 로마 최초의 참주가 되었고, 그 결과 그 도시는 영영 자유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p. 192)


  이 농지법의 결과는 그러한 나의 믿음[원로원과 평민의 대결이 자유를 지탱하는 법을 산출하여 로마의 자유를 보존했다는 믿음]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의견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겠다. 만약 도시가 다양한 수단과 방식으로 부자들의 야망을 억누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즉시 그 도시를 파멸에 빠뜨릴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 만약 평민들이 이 법과 그 밖의 다른 요구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귀족들의 야망을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로마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더 일찍 노예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또한 이는 사람들이 명예로운 직위보다 재산을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는가를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러한 직위에 관해서는 로마의 귀족들이 커다란 소동 없이 항상 평민들에게 양보했지만, 재산문제에 관한 한 그들의 저항은 매우 완강했기 때문이다. (p. 193)


  [그라쿠스 형제가] 공화국에서 심각한 지경에 이른 부조리를 제거하고자 한 것은 좋았지만, 이를 위해 먼 과거에까지 그 효력이 소급되는 법률을 제정하고자 한 것은 신중하지 못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p. 193)




제 39 장 같은 일이 종종 다른 인민들간에 일어난다


  현재사나 과거사를 즐겨 고찰하는 자는 모든 도시와 모든 인민들이 동일한 욕망이나 동일한 기질을 가지고 있고, 항상 간직해왔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사건들을 부지런히 검토하는 쉽게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미래의 사건들을 예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고대인들이 사용한 치유책을 미래의 일들에 적용할 수 있고, 만약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없으면 사건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새로운 치유책을 고안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식자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이해된 경우에도 통치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어느 시대건 동일한 분쟁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p. 198)




제 40 장 로마에서 10인회의 창설 그리고 그로부터 배워야 할 점;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어떻게 그러한 사건이 공화정을 구원하거나 공화정을 참주정으로 몰아넣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함


  우리는 로마에서도 이러한 참주정을 수립하려는 악폐가 다른 대부분의 도시와 동일한 원인, 곧 자유에 대한 인민의 지나친 욕망과 귀족들의 지나친 지배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당파가 자유를 위한 법률을 제정할 수 없어서 그 중 어느 한 당파가 어느 한 인물을 성급하게 지지하게 되면, 참주정이 재빨리 출현하게 된다는 것도 관찰할 수 있다. (p. 204)




제 45 장 특히 법률을 제정한 자가 그 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자가 매일 새로운 비행을 저러 인민을 괴롭히는 것은 그 자신에게 대단히 위험하다


  법률을 위반하는 것은 자유의 적절한 존중과 상치되는 것이었으며, 이제 막 만들어진 법을 위반하는 것은 특히 그러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공화국에서 법률을 제정하고 위반하는 것만큼 나쁜 선례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률을 제정한 당사자가 무시할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pp. 211-212)


  우리는 백성들의 마으을 지속적인 처벌과 공격으로 불확실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이 공화국이나 군주에게 얼마나 해로운가를 알 수 있다. (p. 213)





제 46 장 인간은 하나의 야심에서 다른 야심으로 뛰어오른다; 처음엔 공격을 받지 않고자 하지만, 나중엔 공격을 가하고자 한다


  로마 인민이 그들의 자유를 되찾고 본래의 위상을 회복했을 대, 그들의 권력을 확인하는 많은 법의 제정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을 대, 이제는 로마가 평온한 시대를 향유해도 합당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매일 새로운 분쟁과 불화가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그와 반대로 전개되었다. …… [티투스 리비우스] “자신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일방의 소망은 상대방에 대해 억압을 가할 만큼 강력해진다. 이러한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은 인간이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대, 대신 타인을 두려움에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해를 가하거나 아니면 해를 입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이 필연적인 것처럼, 그들은 스스로 피하고자 하는 상처를 타인에게 가하고 만다.” (p. 214)


  공화국은 이러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즉 시민들이 선의라는 허울을 쓰고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법률, 시민들이 자유를 증진시킴에 다라 인기를 얻되 자유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p. 216)




제 47 장 인간이란 일반적인 것에는 잘 속을지 모르지만, 구체적인 것에는 잘 속지 않는다


  그들[로마 인민들]은 집정관의 권력을 가진 네 명의 호민관을 두되, 귀족은 물론 평민들도 그 직위에 선출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

  그런데 이로부터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호민관을 선출함에 있어서 로마 인민들은 4명 전원을 평민 출신에서 뽑을 수 있었는데 정작 그들은 4명 다 귀족들을 선택했던 것이다. ……

  이에 대한 이유를 검토해볼 때, 나는 그 이유가 인간이란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곧잘 자기 기만에 빠지지만, 개별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그리 잘 속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인민들은 그들의 집정관직을 차지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

  그러나 정작 그들의 그들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자,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그들 개개인들 중 어느 누구도 전체로서는 당연히 자격이 있는 자리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p. 217)




제 49 장 로마와 같이 자유상태에서 출발한 도시들이 자신들을 보존할 수 있는 법률을 매우 어렵게 제정한다면, 방금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출발한 도시들이 그럴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 그 도시에 자유를 보존할 수 있는 법률을 마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로마 공화국이 겪어온 역정이 매우 잘 보여준다. …… 그리하여 감찰관 제도를 신설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법률을 고안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관직은 로마에서 자유가 존속하던 시대에는 로마에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들 중 하나였다. 로마의 풍속을 단속하던 감찰관직은 로마에서 부패의 성장을 지연시킨 강력한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p. 222)


  잘 정비된 공화국에서 한 시민이 단지 자유로운 정치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을 공포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당한 후 이에 대해 아무런 호소를 할 수 없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p. 222)


  이제 막 예속상태에서 벗어난 도시가 법률에 따라 평온하게 살기 위해 조직하는 과업은 단순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p. 223)




제 50 장 어떤 위원회나 관직이라도 국가의 통치업무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호민관 제도의 가치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제도가 평민들에 대한 귀족들의 횡포를 견제하는 데에는 물론 귀족들 사이에 일어나는 횡포를 견제하는 데에도 유용했기 때문이다. 둘째, 소수의 인물들이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해 법률상 필요한 사항에 관한 결정을 합법적으로 가로막는 일이 발생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pp. 225-226)




제 53 장 인민은 표면상의 훌륭함에 현혹되어 빈번히 자신들의 파멸을 초래하는 일을 명한다; 그리고 그들은 커다란 희망과 강한 약속에 쉽게 움직인다


  인민은 좋은 것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에 현혹되어 자주 그들 자신의 파멸을 스스로 초래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뢰하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들의 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며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납득시키지 않는다면, 무수히 많은 위험과 손실이 공화국에 닥치게 마련이다. (p. 232)


  인민 앞에 제시된 계획에 외견상 이득이 명백하면, 비록 배후에 손실이 숨어 있다 해도, 그리고 그 계획이 용기 있게 보이면, 비록 공화국의 파멸이 숨어 있더라도 다중은 항상 쉽게 설득되어 그런 계획을 승인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제안이 비록 그 배후에 안전과 이득을 품고 있더라도 비겁하게 보이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이면 그러한 제안을 다중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노릇이다. (p. 233)


  그러므로 나는 권력을 인민이 가진 공화국의 멸망을 초래함에 있어 그 나라를 거창한 작전으로 몰아넣는 것보다 쉬운 길은 없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인민이 영향력을 지닌 곳에서 그러한 작전은 항상 승인될 것이며, 그들에 대항해서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은 아무런 호소력이 없기 때문이다. (p. 236)




제 54 장 흥분한 군중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의 강한 위력


  흥분한 군중을 억누르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은 바로 그들의 존경을 받는, 영향력과 위상을 지닌 인물이 의연히 그들을 제지하는 것이다. (p. 236)


  흥분한 군중을 제지하는 데는 존경을 받을 만한 풍모와 지위를 지닌 인물이 군중 앞에 나타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믿을 만한 방법이란 없다는 것이다. (p. 237)




제 55 장 인민이 타락하지 않은 도시에서 공공사는 쉽게 처리된다; 평등이 있는 곳에서는 군주국이 수립될 수 없고, 평등이 없는 곳에서는 공화국이 수립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는 …… 인민들이 얼마나 많은 선량함과 신앙심을 갖추고 있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선량함을 그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p. 239)


  오늘날 특히 이탈리아처럼 명백히 부패한 지역에서는 어떠한 선행도 기대할 수 없다. (p. 239)

  

  독일에서는 이러한 선량함과 종교심이 인민들 사이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품성으로 인해 거기서는 많은 공화국들이 저마다 자유를 누리면서 공존하고 있으며, 또한 법률을 너무나 잘 준수한다. (p. 239)


  이런 사실은 두 가지 이유로부터 유래한다.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인접국들과 많은 교류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 교류의 이유가 없었고, 이와 함께 부패의 씨앗도 애당초 제거되었다. ……

  또 다른 이유는 이들 공화국들에서는 그 정부가 잘 정비되어 부패되지 않은 채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시민이 신사가 되거나 신사 행세를 하며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또 그들 사이에서 완전한 평등이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 (p. 240)


  신사라는 이 호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나는 토지소유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인해 일하지 않고도 사치스럽게 사는 자를 신사라고 부르겠다. 그들은 농업이나 생계를 영위하는 데 필요한 다른 직업에 대해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모든 공화국은 물론 모든 나라에 위험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더더욱 위험한 인물들은 그러한 재산 이외에도 성곽을 가지고 있고 그들에게 복종하는 신민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모든 종류의 자유로운 정부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p. 241)


  질료가 너무 부패해서 법률로도 억제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법률 외에 보다 강력한 권력이 반드시 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절대적이고 강력한 권력과 함께 귀족들의 과도한 야망과 부패를 억제할 수 있는 제왕적 권력이 필요불가결하다. (p. 241)


  많은 귀족들이 있는 지역에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시도하는 자는 먼저 귀족들을 모두 일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등에 대한 믿음이 폭넓게 퍼져 있는 곳에서 왕국이나 군주국을 수립하기를 원하는 자는, 그처럼 평등한 사회로부터 야심 많고 지칠 줄 모르는 정신을 가진 자들을 발탁하여 그들을 단순히 이름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신사로 만들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다. ……

  다른 한편 그들은 지배자의 힘을 빌려 자기네 야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자들에게는 오직 무력을 사용하여 예속상태를 부과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러므로 왕국에 적합한 지역을 공화국으로 만들거나 공화국에 적합한 지역을 왕국으로 만드는 것은 두뇌와 권위를 겸비한 매우 드문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p. 242)


  그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신사는 이름뿐이지 실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토지소유로부터 커다란 수입이 없다. 그들의 거대한 부는 무역과 동산에 근거하고 있다. 더욱이 어느 누구도 성곽을 가지고 있거나 시종을 가지고 있지 않다. ……

  …… 베네치아 역시 신사와 인민으로 구분된다. 거기서 원칙은 전자가 모든 관직을 차지하거나 차지할 자격이 있는 반면, 후자는 그로부터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도시에 분규를 초래하지 않는다. (p. 243)


  그러므로 자칭 현명한 건국자라면 커다란 평등이 존재하거나 존속되어온 곳에는 공화국을 건설할 것이다. 다른 한편 커다란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는 군주국을 세울 것이다. (p. 243)




제 57 장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면 대담하지만 개인으로서는 소심하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함께 있을 때는 대담했지만, 각자의 개별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은 순순히 굴복했다.” 이 문제에 관련하여 다중의 속성이 참으로 이 구절처럼 잘 표현될 수는 없다. 다중은 종종 지배자의 결정을 비난하는 데 대담하고 노골적인 언사를 사용하지만, 정작 처벌이 닥치게 되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복종을 서두른다. (p. 245)


  한편으로는 지도자가 없어 걷잡을 수 없는 다중보다 더 무서운 것도 없겠지만, 다른 한편 그보다 더 연약한 존재도 없는 것이다. …… 그런 식으로 자극된 다중이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의 지도에 따라 단결을 유지하면서 방어책을 강구해야 한다. (p. 246)




제 58 장 다중은 군주보다 더 현명하고 더 안정되어 있다


  다중만큼 경박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다는 점을 다른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티투스 리비우스 역시 긍정한다. (p. 247)


  그[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비굴하게 굴종하든가 아니면 거만하게 군림하든가 이것이 바로 다중의 속성이다.” (p. 247)


  사태가 여하튼 어떤 의견을 귄위나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논변으로 옹호하는 것이 죄라고 판단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pp. 247-248)


  이 점[다중을 비난한 점]은 특히 군주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법률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자는 통제되지 않는 다중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과오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p. 248)


  내가 여기서 군주라고 일컫는 자들은 자신들을 구속하는 굴레로부터 벗어난 자들을 가리킨다. (p. 248)


  공화국이 아직 부패하지 않는 채 지속되는 동안 비굴하게 복종하지도 않고 거만하게 군림하지도 않은 로마 인민이 바로 그러한 [다중이 법에 의해 규제되어 선량함을 가진] 예이다. (p. 249)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들이 다중의 성격을 놓고 운운할 때, 그들은 로마 인민처럼 법률에 의해 규제되는 인민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라쿠사의 인민들처럼 규제받지 않는 인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다중의 성격을 군주의 성격보다 더 비난해서는 안 된다. 시비를 고려함이 없이 제멋대로 과오를 저지를 때에는 모두들 동등하게 과오를 범하기 때문이다. (pp. 249-250)


  그렇다면 나는 인민이 권력을 잡으면 동요하기 쉽고, 변덕이 심하며 배은망덕하다는 통상적인 의견과 다른 결론을 내리고 싶다. …… 잘 정비된 제도를 통해 명령을 내리는 인민은 군주만큼이나 침착하고 신중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은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군주보다 더 많이 그러한 장점을 갖고 있다. 다른 한편 법률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난 군주는 인민보다 더 배은망덕하고 동요하기 쉽고 더 경솔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상의 차이는 상이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그 본성은 인간에게 동일한 것이고 우월성이 있다면 오히려 인민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에―복종해야 하는 법률을 양자가 얼마나 많이 존중하는가에서 비롯된다. (p. 250)


  신중함과 침착성에 대해 나는 인민이 군주보다 더 신중하고, 더 침착하며, 더 우월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겠다. (p. 251)


  사물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예컨대 능력이 비슷한 두 인물이 정반대되는 주장을 내세울 때 인민이 보다 나은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다든지, 들으면서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든지 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

  관리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인민은 군주보다 훨씬 나은 선택을 하는 편이다. …… 인민은 어떤 것을 일단 혐오하기 시작하면 오랜 세월에 걸쳐 동일한 의견을 고수하는데, 군주의 겨우 이런 일은 좀처럼 없다. (p. 251)


  로마 인민은 왕이라는 칭호를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어떤 로마 시민의 공적이 제 아무리 클지라도 그 칭호를 얻고자 했던 시도 그 자체만으로도 그는 거기에 합당한 벌을 모면할 수 없었다. (p. 252)


  인민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도시는 단시일 내에 엄청나게 성장하며, 군주가 계속 통치하는 도시보다 훨씬 많이 성장한다. …… 이는 인민에 의한 정부가 군주에 의한 정부보다 낫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p. 252)


  만약 군주가 법률을 제정하거나, 법률에 따라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새로운 법제도를 설립하는 데 우월하다면, 인민은 이미 조직된 사물을 보존하는 데 우월하여 의심할 여지 없이 공동체를 창업한 사람들만큼이나 영광스런 업적을 성취한다. (p. 252)


  우리는 법률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군주와 법률에 구속되는 인민을 다루는 셈인데, 그 경우 우리는 군주보다는 인민에게서 보다 많은 장점을 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법률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인민이나 군주를 논하게 되면, 군주보다는 인민의 경우 결함이 적으며 그 결함 역시 비교적 사소하고 치유하기 쉽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 인민의 병폐를 치유하는 데에는 말로써 충분한 데 반해, 군주의 병폐에 대해서는 칼이 필요하다. (pp. 252-253)


  다중의 잔인함은 모든 다중의 재산을 탈취할 것이라고 염려되는 한 사람에게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의 잔인함은 군주가 자신의 개인 재산을 탈취할 것이라 염려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지르는 것이다. (p. 253)




제 60 장 로마에서는 집정관을 비롯한 그 밖의 다른 관직을 임명함에 있어 연령에 구애받지 않았다


  역사의 도정을 살펴보면 로마 공화국은 집정관의 직위를 인민들에게 개방하자마자, 그 직위를 나이나 가문을 고려하지 않고 부여했다. 따라서 실로 로마에서 연령은 필요조건이 아니었고 젊은 사람이건 늙은 사람이건 능력을 항상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p. 257)


  영광스러운 업적을 위해 인민을 활용하지 않는 도시는 …… 원하는 대로 그들을 대우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만약 로마가 이룩한 것을 얻고자 한다면, 인민을 차별할 수는 없다. (p. 258)


  출신가문을 고려하지 않는 점이 허용된다면, 연령에 관한 관행도 반대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p. 258)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천병희 역)




제1권 국가 공동체의 본질


        제1장 공동체로서의 국가

 

  모든 국가(polis)는 분명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어떤 선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 무릇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선(善, agathon)이라고 생각되는 바를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공동체가 어떤 선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모든 공동체 중에서도 으뜸가며 다른 공동체를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야말로 분명 으뜸가는 선을 가장 훌륭하게 추구할 것인데, 이것이 이른바 국가 또는 국가 공동체다. (1252a1)


  타고난 치자와 피치자도 자기 보존을 위해 결합해야 한다. 지성에 의해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자는 타고난 치자이자 주인이지만, 남이 계획한 것을 체력으로 실현할 뿐인 자는 피치자요 타고난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는 상호 보완적이어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1252a 30)



        제2장 국가는 본성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두 가지 결합[남녀의 결합과 주인과 노예의 결합]에서 맨 먼저 생겨난 것이 가정(oikos)이다. 따라서 헤시오도스가 “먼저 집과 여자 그리고 밭갈이할 소”라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소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사 노예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이렇듯 가정인데, 그 구성원을 카론다스는 ‘식탁 동료들’이라고 부르고, 크레테의 에피메니데스는 ‘식구’라고 부른다. (1252b9)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 이상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가정으로 구성된 최초의 공동체가 마을(kome)이다. …… 모든 가정은 최고 연장자가 왕처럼 지배했고, 분가해 나간 가정들도 한 핏줄인지라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1252b15)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인데, 국가는 이미 완전한 자급자족(autarkeia)이라는 최고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국가는 단순한 생존을 위해 형성되지만 훌륭한 삶을 위해 존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 공동체들이 자연스런 것이라면 모든 국가도 자연스런 것이다. 국가는 이전 공동체들의 최종 목표(telos)고, 어떤 사물의 본성(physis)은 그 사물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 사물의 최종 원인과 최종 목표는 최선의 것이며, 자급자족은 최종 목표이자 최선의 것이다. (1252b27)


  이로 미루어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사고가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거나 인 간 이상이다. 그런 자를 호메로스는 “친족도 없고 법률도 없고 가정도 없는 자”라고 비난한다. (1253a1)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 언어는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히는 데 쓰인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점은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공유에서 가정과 국가가 생성되는 것이다. (1253a7)


  국가는 본성상 가정과 개인에 우선한다. 전체는 필연적으로 부분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몸 전체가 파괴되면 손이나 발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며, 석상의 손에 관하여 말할 때처럼 이름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죽은 손은 석상의 손보다 나을 게 없기 때문이다. 사물은 그 기능(ergon)과 능력(dynamis)에 의해 규정된다. (1253a18)


  국가는 분명 자연의 산물이고 개인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고립되어 자급자족하지 못하면 개인은 전체에 대해 다른 경우 부분이 전체에 대해 갖는 관계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1253a25)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e)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 …… 탁월함(arete)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불경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색욕과 식욕을 가장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특징 중 하나다.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주고, 정의감은 무엇인 옳은지 판별해주기 때문이다. (1253a29)



        제3장 가정과 노예


  완전한 가정은 노예와 자유민으로 구성된다. …… 가정의 가장 주된 최소 요소는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이다.



        제4장 도구로서의 노예


  재산은 가정의 일부이고, 재산 획득 기술은 가사 관리의 일부다. …… 도구 가운데 어떤 것은 생명이 없고, 어떤 것은 생명이 있다. 예컨대 배의 선장에게 노는 생명 없는 도구지만, 망보는 선원은 생명 있는 도구다. 기술에 관한 한 조수(助手)는 도구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물은 살기 위한 도구이고, 재산은 도구들의 집합이다. 또한 노에는 일종의 살아 있는 재물이고, 조수는 다른 도구들에 우선하는 도구이다. (1253b23)


  통상적인 의미의 도구는 생산을 위한 도구인 반면, 재산은 활동을 위한(praktikon) 도구다. 예컨대 베틀의 북을 사용하면 다른 것이 생산되지만, 침대나 옷은 사용할 뿐이다. 그리고 생산과 활동(praxis)은 서로 종류가 다르고, 이들은 둘다 도구를 요하므로, 이들이 사용하는 도구들도 필연적으로 종류가 다르다. 그런데 삶은 활동이지 생산이 아니다. 따라서 노예는 활동을 위해 쓰이는 도구다.



        제5장 노예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명 있는 것은 혼(psyche)과 몸(soma)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전자는 본성적으로 치자이고 후자는 피치자이다. (1254a28)


  아무튼 우리는 앞서 말했듯이 우선 생명 있는 것들 속에서 주인이 노예에게 행사하는 것과 같은 지배와 정치가가 동료 시민들에게 행사하는 것과 같은 지배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배를 볼 수 있다. 몸에 대한 혼의 지배는 주인의 지배와 같고, 욕망에 대한 지성(nous)의 지배는 정치가나 왕의 지배와 같기에 하는 말이다. …… 수컷이 본성적으로 더 우월하고, 암컷은 열등하다. 그래서 수컷이 지배하고, 암컷은 지배받는다. 그리고 이런 원칙은 인간관계 전반에 적용되어야 한다. (1254b2)


  몸을 사용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되 그럴 경우 최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노예이며, 이들은 모두 앞서 말한 원칙에 따라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더 낫다. 남에게 속할 수 있고 그래서 실제로 남에게 속하는 자는, 그리고 이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성을 갖지 못하는 자는 본성적으로 노예이기 때문이다. …… 노예와 길들인 동물의 용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둘 다 생필품을 조달하도록 주인에게 몸으로 봉사하기 때문이다. (1254b16)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상(神像)이 사람보다 훌륭한 만큼 어떤 사람들의 몸이 남들보다 훌륭하다면, 열등한 자들은 마땅히 그들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데 모두들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몸에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일진대 혼에도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더 당연하지 않겠는가! (1254b32)


  이렇듯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민이고 어떤 사람들은 노예인데, 후자에게는 노예제도가 유익하고 정당함이 분명하다. (1254b39)



        제7장 법적 노예 지배의 특성


  정치가는 타고난 자유민을, 주인은 타고난 노예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지배는 독재(monarchia)적이다. 각각의 집을 한 사람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가는 자유민과 동등한 자들을 지배한다. (1255b16)


  주인이 주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습득한 지식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탁월함 때문이다. (1255b20)


  한 편 주인을 위한 지식도 있는데, 그것은 노예를 부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주인은 노예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를 부림으로써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를 부리는 것은 위대하거나 고상한 지식이 아니다. 주인은 노예가 반드시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시킬 줄만 알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번거로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살림이 넉넉한 주인들은 노예의 관리를 집사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정치와 철학에 전념하는 것이다. (1255b30)



        제8장 재산 획득 기술에 관하여


  가사 관리는 재산 획득 기술과 같은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후자는 재료를 제공하고, 전자는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1256a10)


  이런 재산 획득 기술은 본성적으로 가사 관리 기술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국가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에 유익한 재물들 가운데 비축될 수 있는 것들은 넉넉히 비축되어 있거나, 아니면 가사 관리 기술이 그런 것들을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1256b26)



        제9장 재산 획득의 자연스런 방법과 부자연스런 방법


  샌들은 신는 데도 사용되고 교환하는 데도 사용된다. 샌들은 두 가지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돈이나 음식을 받고 샌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샌들을 주는 사람은 샌들을 샌들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샌들의 고유한 용도는 아니다. 샌들은 교환하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른 재물도 마찬가지다. 물물교환은 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너무 적게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돈 버는 기술이 상업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아님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쌍방의 욕구가 충족될 때가지만 교환 행위가 필요할 것이다. (1256b40)


  바로 이 물물교환에서 돈 버는 기술이 생겨났다. 한 나라 주민들이 다른 나라 주민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어 필요한 것은 수입하고 남는 것은 수출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화폐가 사용된다. ……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거래할 때 무쇠, 은 등등 갑이 나가고 교환하기 편리한 것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1257a28)


  일단 화폐가 도입되자 생필품의 물물교환은 재산 획득의 또 다른 형태, 즉 상업으로 발전했다. …… 화폐가 도입되면서 재산 획득 기술은 주로 화폐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리고 어디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 알아내는 기술로 간주된다. 그래서 재산 획득 기술과 상업이 화폐와 관계가 있는 만큼, 부는 흔히 다량의 화폐와 동일시되곤 한다. (1257a41)


  자연스런 부와 자연스런 재산 획득 기술이란 그와는 다른 것으로서 가사 관리에 속하지만, 상업은 진정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교역을 통해서만 재산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업은 오직 화폐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폐가 상업의 필수 성분이자 목적이기 때문이다. (1257b17)


  또 이런 종류의 재산 획득 기술에서 생겨나는 부에는 한계가 없다. …… 이런 종류의 재산 획득 기술의 목표에도 한계가 없다.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는 화폐 형태의 부와 오직 화폐의 획득이기 대무이다. 반면 가사 관리에 속하는 재산 획득 기술에는 한계가 있다. 부의 무한한 획득이 가사 관리의 기능은 아니기 때문이다. (1257b23)

  이러한 사고방식[증식이 가사 관리의 기능이라고 믿고는 가지고 있는 화폐를 그대로 간직하거나 무한히 증식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이 훌륭한 삶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을 추구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들의 욕망이 무한하듯,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단도 무한하기를 원한다. …… 그들의 향락은 과잉에 있으므로, 그들은 향락의 과잉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재산 증식]을 찾게 된다. (1257b40)


  이상으로 우리는 재산 획득 기술의 불필요한 형태에 관해 그것이 무엇인지, 왜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는지 논의했다. 우리는 또 필요한 형태의 재산 획득 기술에 관해 논하면서, 그것이 전자와는 다른 것이고 가사 관리 기술의 자연스런 일부로서 식량 조달과 관계가 있으며 전자처럼 무한하지 않고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 (1258a14)



        제10장 가사 관리의 적절한 한계: 대부(貸付)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재산 획득 기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가사 관리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업과 관련된 것이다. 전자는 필요하고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교역에 의존하는 후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남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고리대금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지당한 일이다. 그것은 화폐의 본래 기능인 교역 과정이 아니라, 화폐 자에서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화폐는 교역에 쓰라고 만들어진 것이지 이자를 낳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58a38)



        제12장 남편의 권위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간단한 고찰


  아내에 대한 그의 지배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정치가의 지배와 같고, 자식에 대한 그의 지배는 피치자들에 대한 왕의 지배와 같기에 하는 말이다. 자연에 배치되는 예외적인 경우 말고는, 남성이 여성보다 본성적으로 지배하는 데 더 적합하며, 연장자와 성인이 연소자와 미성년보다 지배하는 데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가 지배하는 겨우 대개 치자와 피치자는 교대를 하며 국가는 차별 없는 평등을 지향한다. (1259a37)



        제13장 가정에서의 도덕성과 효율성


  치자와 피치자는 둘 다 탁월함을 지니되 그 종류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본성적 피치자들 사이에서도 부류에 따라 탁월함의 종류가 다른 것과 같다. 이는 혼의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혼에는 본성적으로 지배적인 부분과 피지배적인 부분이 있고, 이들의 탁월함을 서로 다른데, 그중 하나는 이성을 가진 부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이성적인 부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은 분명 다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어, 본성적 치자와 본성적 피치자가 존재하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의 종류는 서로 다르다. 노예에 대한 자유민의 지배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나 아이에 대한 어른의 지배와는 종류가 다른 것이다. …… 노예는 기획 능력이 전혀 없고, 여자는 기획 능력이 있긴 하지만 권위가 없고, 아이는 기획 능력이 있지만 아직은 그것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260a2)


  도덕적 탁월함의 경우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모두들 도덕적 탁월함을 지니되, 똑같은 정도가 아니라 각자 제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지는 것이다. 그래서 치자는 완전한 형태의 도덕적 탁월함을 지녀야 하는데, 그것은 그의 기능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두머리 장인의 기능이고, 이성이야말로 우두머리 장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구성원도 각자 필요한 만큼 도덕적 탁월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앞서 말한 구성원이 모두 도덕적 탁월함을 지니는 것은 분명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절제 E는 남자와 여자의 용기와 정의는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것처럼 같은 것이 아니다. 남자의 용기는 치자의 용기이고, 여자의 용기는 섬기는 자의 용기다. 이 점은 다른 탁월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260a14)






제 2 권 이상 국가


        제1장 국가 구성원의 재산 공유


  국가는 공동체인 만큼 그들은 최소한 영토는 공유해야 한다. 한 국가의 영토는 하나고, 시민들은 다름 아니라 한 국가를 공유하는 자들이다. (1260b36)



        제2장 플라톤의 『국가』에서의 극단적 통일성에 대한 비판


  분명 국가는 계속해서 점점 더 하나의 통일체가 되어가면 결국 국가이기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국가는 본성적으로 하나의 복합체다. 따라서 국가는 복합체에서 점점 더 통일체가 되어갈수록 국가 대신 가정이 되고, 가정 대신 개인이 될 것이다. (1261a10)


  국가는 다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 이 요소들이 서로 받은 만큼 준다는 원칙이 국가를 유지해준다. 자유민들과 동등한 자들 사이에서도 이 원칙은 고수되어야 한다. 그들은 한꺼번에 공직에 취임할 수 없고, 1년 임기로 또는 다른 어떤 순서나 임기에 따라 취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1261a22)


  모든 시민은 날 때부터 평등하기 때문에, 그리고 공직이라는 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간에 모두 공직에 참여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하다면,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들이 교대로 공직에서 물러나고, 공직을 떠나서는 모두 같은 지위를 가짐으로써 그런 원칙이 모방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마치 다른 사람들이 되기라도 한 양 교대로 일부는 지배하고 일부는 지배받는 것을 뜻한다. (1261a37)


  국가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주민들이 자족할 수 있을 만큼 많고 다양해야 비로소 국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61b6)



        제3장 지나친 통일성은 비현실적이다


  설사 최대한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 최선이라 하더라도, 이 통일성은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동시에 “내 것이오.” “내 것이 아니오.”라고 말한다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국가의 완전한 통일성의 지표로 보고 있다. …… ‘모두’가 같은 것을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문구가 ‘저마다’ 그렇게 한다는 뜻이라면 바람직하긴 하지만 실현 불가능하고, ‘다 함께’ 그렇게 한다는 뜻이라면 화합을 저해한다. (1261b16)


  그러한 발상에는 불리한 점이 또 한 가지 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일수록 보살핌을 덜 받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공유재산보다 사유재산에 더 관심이 많으며, 공유재산은 개인적으로 관련 있는 범위에서만 보살핀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살필 것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다 소홀히 하게 마련이다. (1261b32)


  같은 소년이 ‘내 아들’도 되고 ‘아무개의 아들’도 되어, 천 명 또는 실수의 시민들 각자의 아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과연 1000분의 1만큼은 아버지인지 확신이 서지 못할 것이다. 시민들 가운데 대체 누가 아이를 낳았는지, 누구의 아이가 살아남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1262a1)


  플라톤의 구상대로 된다 해도 사람들이 더러 자신의 형제와 아들과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아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12262a14)



        제4장 처자 공유제에 대한 비판(속편)


  부부를 공유하는 공동체에는 그런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아무리 조심해도 피하기 어려운 또 다른 폐해들이 있는데, 학대, 고의적 또는 우발적 살인, 말다툼, 비방 등이 그것이다. (1262a25)


  또 놀라운 것은, 플라톤이 모든 젊은이들을 만인의 아들로 만든 다음 연인 관계인 연장자들에게 젊은이들과의 육체적 관계만 금할 뿐 연애를 하거나 애정 표시를 하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1262a32)


  그 밖에도 처자 공유제는 치자들인 수호자들보다는 피치자들인 농민들에게 더 쓸모가 있는 것 같다. 처자를 공유하는 곳에서는 우애(philia)가 약해져 피치자들이 고분고분하고 변혁을 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 처자를 공유하는 국가에서는 우애가 묽어져, 아버지는 틀림없이 아들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들은 ‘내 아버지’락 부르지 않게 될 것이다. …… 인간으로 하여금 배려와 애정의 감정을 품게 하는 것은 주로 ‘내 것’과 ‘소중한 것’의 두 가지인데, 플라톤식의 그런 국가에서는 그중 어는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91262a40)


  또 한 가지 난점은 플라톤의 구상에서 계층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과 관련된 것으로, 그에 따르면 농민이나 기술자 등 하위 계층의 분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라도 탁월함에서 뛰어난 것으로 인정되면 수호자들이라는 상위 계층으로 이동하고, 반대로 상위 계층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라도 탁월함에서 열등한 것으로 인정되면 하위 계층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계층이동이 어떻게 실행될 수 있을지 난감하다. (1262b24)



        제5장 플라톤의 『국가』에서의 재산 공유제에 대한 비판


  땅의 경작자가 노예처럼 땅임자와 다른 경우, 사정은 달라져 쉽게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땅임자들이 자기 땅을 경작할 경우, 소유권 문제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야기될 것이다. 노동과 수익이 공평하지 않을 경우, 많이 일하고 적게 받는 자들은 틀림없이 적게 일하고 많이 받는 자들을 원망하게 될 테니 말이다. (1262b37)


  두 가지 제도, 즉 재산의 공유제와 사유제의 장점을 다 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재산은 한 가지 점[재산의 사용]에서는 공유이어야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기 재산을 돌보면 불평할 일이 없을 것이고, 각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느낄 테니 더 잘 보살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의 재산은 모두의 공유물이다.’라는 속담의 정신에 따라 개인의 재산이 모두를 위해 사용되도록 보장해주는 것은 도덕적 탁월함이지 법적 강제가 아니다. (1263a21)


  이상에서 밝혀졌듯이 재산은 개인이 소유하되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품성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입법자의 본연의 임무다. (1263a30)


  그 밖에도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쾌감을 안겨준다. ……자기 자신, 재산, 돈 같은 것에 대한 애착은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친구나 손님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도움과 호의를 베푸는 것은 가장 큰 쾌감을 주는데 그것은 사유재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1263a40)


  그러나 지나치게 국가의 통일성을 추구할 경우 이런 쾌감들은 맛볼 수 없다. 그런 국가에서는 그 밖에도 두 가지 탁월함이 실현되는 것을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중 한 가지는 성관계를 절제하는 것이다. (절제를 위해 남의 아내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가상한 일이기에 하는 말이다.) 두 번째는 재산과 관련하여 선심을 쓰는 것이다. 모든 것을 공유하면 어는 누구도 선심을 쓴다고 과시할 수도 없고, 실제로 선심을 쓸 수도 엇ㅂ다. 선심은 사유재산을 써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1263b7)


  소크라테스가 오류를 저지른 이유는 그의 논의의 출발점인 통일성에 대한 가정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가정에도 국가에도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총체적 통일성이어서는 안 된다. 통일성에도 어떤 선이 있어 그것을 넘어서면 국가가 국가이기를 멈추거나, 아니면 국가이기를 멈추지 않더라도 열등한 국가가 된다. …… 하나의 복합체인 국가는 교육에 의해 공동체가 되고 통일체가 되어야 한다. (1263b29)


  또한 그런[플라톤이 제안한] 공동체에서 국가가 전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소크라테스는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하기가 쉽지도 않을 것이다. 국가 구성원은 대부분 수호자들이 아닌 일반 대중인데 그들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규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1264a11)


  끝으로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에게는 행복을 거부하면서 국가 전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입법자의 임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나 대부분이나 일부가 행복하지 않고서는 전체가 행복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6장 플라톤의 『법률』에 대한 비판


  『법률』은 대부분 입법과 관련이 있고, 정체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리고 플라톤은 정체를 실재하는 국가들에 더 맞추려고 하지만 점점 이전의 정체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는 아내와 재산의 공유를 제외하고는 두 국가가 모든 점에서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법률』에서는 공동 식사 제도가 여자들에게까지 확대되었고, 전사들의 수가 5,000명인데 『국가』에서는 1,000명이라는 것이다. (1265a1)


  플라톤은 사람은 절제 있게 살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절제 있게 산다.”는 말을 그는 “훌륭하게 산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너무 포괄적인 표현이다. …… 선심과 절제는 재산 사용과 관련하여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탁월함이다. …… 따라서 재산의 사용에는 절제와 선심이라는 두 가지 탁월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1265a28)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플라톤이 재산은 균등하게 배분하면서도 시민들의 수에 대해서는 무슨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인구수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1265a38)


  『법률』에서는 도 치자가 피치자와 어떻게 다른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1265b18)


  플라톤이 『법률』에서 기술하고 있는 정체는 전체적으로 민주정체도 아니고 과두정체도 아닌 이 양자의 중간 형태로 흔히 ‘혼합정체’(politeia)라고 불리는데, 여기서는 자비로 중무장한 시민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체로서 이런 정체를 구성하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체야말로 으뜸가는 정체에 버금가는 훌륭한 정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 아무튼 『법률』에서는 민주정체와 참주정체의 혼합이 최선의 정체로 언급되고 있다. (1265b26)


  그 밖에 『법률』의 정체는 분명 군주정체의 요소는 없고 과두정체와 민주정체의 요소만 있는데, 과두정체의 경향이 더 강하다. …… 부자들은 의회에 참석하고 공직자 선출 투표와 다른 국정에 참가할 의무가 있는 데 반해, 빈민은 그렇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것은 과두정체의 특징이다. 또 다수의 공직자를 부자들 중에서 선출하고, 최고의 공직자를 최고의 재산등급에 속하는 자들에게서 선출하려는 노력도 역시 과두정체의 특징이다. (1266a5)





제 3 권 시민과 정체에 관한 이론


        제1장 시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국가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다른 전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복합체다. 따라서 분명 우리는 먼저 시민이 무엇인지부터 고찰해야 하는데, 국가는 시민들로 구성된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1274b32)


  일정한 장소에 거주한다고 해서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재류외인(在留外人, metoikos)과 노예들도 시민이 아니지만 시민과 같은 장소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고소하거나 재판받을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다고 해서 시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권리는 양국 간의 조약에 의해 보호받는 이방인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75a5)


  완전 시민의 가장 큰 특징은 재판 업무와 공직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어떤 공직은 연임이 불가능한데, 같은 사람이 두 번 다시 취임할 수 없거나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야 취임할 수 있다. 다른 공직, 이를테면 배심원이나 시민 전체가 참가하는 민회 회원직은 임기 제한이 없다. ……  구별하기 위해서 그것을 [배심원과 민회 회원을] ‘임기 제한이 없는 공직’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그런 공직에 참여하는 시민을 공직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1275a22)


  필연적으로 정체가 다르면 시민도 다른데, 우리가 정의한 시민은 민주정체에 가장 잘 맞지만, 다른 정체들에도 꼭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1275a33)


  의결권과 재판권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의 시민인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간단히 말해 자족한 삶을 영위하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수의 시민들로 구성된 단체다. (1275b13)



        제3장 국가의 연속성과 정체성


  국가는 공동체, 그것도 하나의 정체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공동체인 만큼, 정체가 바뀌어 다른 종류의 것이 되면 국가도 필연적으로 더 이상 같은 국가일 수 없다. …… 국가의 동질성을 판단할 때는 주로 정체의 동질성이 기준이 되어야 함이 분명하다. 그러니 같은 사람들이 거주하느냐 다른 사람들이 거주하느냐와 상관없이 우리는 정체의 동질성을 기준으로 한 국가를 같은 국가 또는 다른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1276a30)


  시민들도 서로 다르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공동체의 안정이라는 공통된 과제가 있는데, 여기서 공동체란 다름 아닌 정체다. 따라서 시민의 탁월함은 반드시 정체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 또한 정체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인 만큼, 훌륭한 시민의 탁월함도 한 가지만 완벽한 것일 수 없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은 한 가지 완벽한 탁월함을 지닌 사람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의 탁월함을 지니지 않아도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음이 명백하다. (1276b16)


  국가가 전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로 구성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개개의 시민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훌륭히 수행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탁월함을 지녀야 한다면, 모든 시민이 똑같을 수 없는 만큼 시민의 탁월함과 훌륭한 사람의 탁월함은 동일할 수 없다. 훌륭한 시민의 탁월함은 모든 시민이 지녀야 하지만―그래야만 국가가 최선의 국가가 될 테니까―훌륭한 국가의 시민들이라고 해서 모두 훌륭한 사람일 수 없는 만큼 모든 시민이 훌륭한 사람의 탁월함을 지닌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276b35)


  우리는 훌륭한 치자는 훌륭하고 선견지명(phronimos)이 있어야 한지만, 시민은 굳이 선견지명이 없어도 된다고 말한다. …… 치자의 탁월함과 시민의 탁월함을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1277a5)


  반면 사람들은 지배할 줄도 알고 복종할 줄도 아는 능력을 찬양하며, 두 가지에 일에 능한 사람을 탁월한 시민으로 간주한다. (1277a25)


  주인의 지배라는 것이 있는데, 생활에 꼭 필요한 노예 노동에 관계된다. 주인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는지 알 필요는 없고 남들에게 시키기만 하면 된다. …… 이런 종류의 피치자들의 노동은 훌륭한 정치가나 훌륭한 시민이 개인적으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배울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과 노예의 구분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1277a33)


  그 밖에 동등한 자들과 자유민들에 대한 지배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정치가의 지배라고 한다. 이런 지배는 치자가 지배받고 복종함으로써 배워야 한다. …… 치자와 피치자의 탁월함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훌륭한 시민은 이 두 가지에 다 능해야 한다. 말하자면 훌륭한 시민은 자유민답게 지배할 줄도 알고 자유민답게 복종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시민의 탁월함이다. (1277b7)


  치자의 절제와 정의가 피치자의 그것과 다르다 해도, 훌륭한 사람의 탁월함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지배받지만 자유민인 훌륭한 사람의 탁월함, 예컨대 그의 정의는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니라, 그가 지배하느냐, 지배받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1277b18)


  치자 고유의 탁월함은 선견지명(phronesis)뿐이다. 다른 탁월함은 치자와 피치자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다. 대신 피치자의 탁월함은 선견지명이 아니라 올바른 의견일 것이다. (1277b25)



        제5장 직공도 시민이 되어야 하는가?


  국가 존립에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시민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예컨대 미성년자는 성인과 같은 의미에서 시민이 아니다. 성인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시민이지만, 미성년자는 조건부 시민이다. (1277b39)

 

  최선의 국가라면 직공을 시민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직공을 시민으로 받아들인 국가라면 우리가 앞서 말한 시민의 탁월함은 모든 시민이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이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278a6)


  이상에서 두 가지가 밝혀졌는데, 그중 하나는 시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공직에 참여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시민이라는 것이다. (1278a34)



        제6장 바른 정체와 그른 정체


  정체란 여러 공직, 특히 모든 일에 최고 결정권을 가진 기구에 관한 국가의 편제(編制, taxis)다. 어느 국가에서나 정부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만큼, 정부가 실제로는 정체인 것이다. 예컨대 민주정체에서는 민중(demos)이 최고 권력을 가지며, 과두정체에서는 소수자(oligoi)가 최고 권력을 가진다. (1278b6)


  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등과 동등의 원칙에 입각한 국가에서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교대로 관직을 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당연한 일이지만 전에는 교대로 국가를 위해 봉사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자신이 공직에 있을 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보살폈듯이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보살펴주리라 기대하곤 했다. (1279a8)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체는 절대 정의의 기준으로 판단하건대 올바른 정체고, 치자들의 개인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정체는 모두 잘못된 것이고 올바른 정체가 왜곡된 것이다. (1279a16)



제7장 올바른 정체와 왜곡된 정체의 구분


  정체와 정부는 사실상 같은 뜻이다. 정부는 국가의 최고 권력기구인데, 최고 권력기구는 필연적으로 한 사람, 소수자 또는 다수자에 의해 대표된다. ……  국가가 제공하는 이익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시민이라고 불리지 말든지, 시민이라고 불리면 당연히 이익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1279a25) [공정성 논변과 유사. 혜택 받았으면 정치적 복종의 의무를 져야 한다.]


  한 사람이 통치하는 정부들 가운데 공동의 이익을 고려하는 정부를 우리는 보통 왕정이라고 칭하며, 한 사람 이상의 소수자가 통치하는 정부를 귀족정체라고 칭한다. …… 다수자가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할 경우, 정부는 모든 정체에 공통된 명칭인 ‘정체’ 또는 ‘혼합 정체’라고 불린다. (1279a32)


  앞서 말한 정체들 중 왕정이 왜곡된 것이 참주정체, 귀족정체가 왜곡된 것이 과두정체, ‘혼합 정체’가 왜곡된 것이 민주정체다. (1279b4)


<최고 권력기구의 대표자 수에 따른 정체의 분류>

 

올바른 정체

(공공의 이익 추구)

왜곡된 정체

(치자들의 개인적 이익 추구)

1인

왕정

참주정체

소수

귀족정체

과두정체

다수

혼합정체(정체)

민주정체



        제8장 경제를 기준으로 한 정체의 구분


  참주정체는 국가 공동체를 마치 주인이 노예를 지배하듯 통치하는 1인 지배 정체다. 재산을 가진 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과두정체이고, 반면 재산을 갖지 못한 무산대중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정체다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이런 정의와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부유한 다수자가 정권을 잡더라도 다수자가 지배하는 만큼 민주정체라 해야 하고, 반대로 부자들보다 수는 적어도 힘이 더 센 민중이 정권을 잡는다면 소수자가 지배하는 만큼 과두정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정체를 구분하는 방법은 더 이상 옳아 보이지 않는다. (1279b16)


  이렇게 볼 때 최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소수냐 다수냐 하는 것은, 다시 말해 과두정체에서는 소수이고, 민주정체에서는 다수라는 것은 순전히 우발적인 현상임이 분명하다. 어디서나 부자는 소수이고, 빈민은 다수이니 말이다. 따라서 소수냐 다수냐 하는 앞서 말한 이유들로 과두정체와 민주정체가 구분되지 않는다. 민주정체와 과두정체의 진정한 차이점은 가난과 부(富)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들이 수가 많건 적건 재산이 많기 때문에 지배하면 과두정체이고, 빈민이 지배하면 민주정체다. (1279b34)



        제9장 정치권력의 올바른 배분


  민주정체의 지지자들에게 정의는 평등을 뜻한다. 정의가 평등을 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만인이 아닌 평등한 자들만을 위한 평등이다. 한편 과두정체의 지지자들은 공직 배분에서 불평등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옳은 것은 사실이지만, 만인이 아닌 불평등한 자들에게만 옳은 것이다. 이렇듯 ‘누구에게’를 빼버린 채 정의를 판단하면 잘못 판단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에 관해 판단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가 걸려 있을 d때는 잘못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다. 그리고 올바른 배분이란 주어진 사물들이 상대적 가치가 받는 사람들의 상대적 가치에 상응하는 배분이다. …… 과두정체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한 가지 점에서, 예컨대 부에서 불평등하면 모든 점에서 불평등하다고 믿는다. 민주정체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한 가지 점에서, 예컨대 자유민의 신분에서 평등하면 모든 점에서 평등하다고 믿는다. (1280a7)


  좋은 질서를 가진 국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시민의 좋은 탁월함과 나쁜 탁월함에 관심이 있다. 따라서 이름만 국가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국가라면 시민들의 탁월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1280b6)


  국가는 같은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공동체가 아니며, 상호 간에 부당 행위를 방지하고 교역을 촉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국가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들이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이 다 충족된다 해도 국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란 그 구성원의 가족들과 씨족들이 훌륭하게 살 수 있게 해주기 위한 공동체이며, 그 목적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이다. 그런 공동체는 같은 곳에 살며 서로 혼인하는 자들 사이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그래서 국가에는 친인척 관계와 씨족 연맹과 축제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오락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애(philia)의 산물이다. 함께 살겠다는 의지야말로 다름 아닌 우애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목적은 훌륭한 삶이며, 앞서 말한 것들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국가는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을 위한 씨족들과 마을들의 공동체다. 그리고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이란 행복하고 훌륭하게 사는 것을 뜻한다. (1280b23)



        제10장 국가의 최고 권력


  유능한 자들이 통치도 하고 모든 일에 최고 권력을 가져야 하는가? 이 경우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공직에서 배제되어 시민으로서의 명예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공직(arche)을 명예(time)라고 부르는데, 만약 같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통치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민으로서의 명예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81a28)



        제11장 집단의 판단은 현명하다


  소수자인 가장 훌륭한 자들보다 대중이 최고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만하고, 다소 문제점이 있기는 해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 것 같다. 다수자는 비록 그중 한 명 한 명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였을 때는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소수자인 가장 훌륭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다수고, 각자는 나름대로 탁월함과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사람은 이 부분을, 저 사람은 저 부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1281a39) [꽁도르세의 배심원 정리와 유사]


  ‘자유민 또는 시민 대중은 어떤 업무에서 최고 권력을 가져야 하느냐’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들은 부자도 아니고 탁월함에 근거해 무엇을 요구할 처지도 못 되는 자들이다. 이들이 최고 공직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들의 불의한 기준은 필연적으로 불의를 저지르게 하고, 이들의 어리석음은 실수를 저지르게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참여하지 못하고 배제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빈민이 공직에서 배제되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적들로 가득찰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이들이 심의와 재판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 이들이 한데 모이면 충분한 지각을 갖게 되고, 더 나은 자들과 섞이면 국가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1281b21)


  첫째, 우리의 조금 전 주장에 따르면, 대중이 지나치게 저질스럽지 않은 한 그들 개개인은 전문가들보다 못한 판단을 내릴지 몰라도 집단으로서는 더 나은 또는 못지않은 판단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몇몇 분야에서는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제품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데, 이 경우 제작자가 유일하게 도는 가장 훌륭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282a14)


  권력을 갖는 것은 배심법정이나 평의회나 민회의 개별 구성원이 아니라 법정과 평의회와 민회 전체이며, 앞서 말한 개별 구성원, 즉 평의회 회원과 민회 회원과 배심원은 이것들의 부분 또는 구성원에 지나지 않는다. 다라서 대중이 더 중요한 업무들에서 최고 권력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 (1282a32)


  첫 번째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분명히 밝혀진 것은, 올바르게 제정된 법(nomos)이 최고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통치자는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모든 경우에 보편타당한 규정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법이 정확한 지침을 제공할 수 없는 업무들만 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1282b1)



        제12장 정의와 평등


  모든 학문과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善, agathon)이다. 이 점은 모든 학문과 기술의 으뜸인 정치에 특히 가장 많이 적용되는데, 정치의 선은 정의이며, 그것은 곧 공동의 이익이다. 다들 정의는 일종의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 말하자면 그들은 정의는 특정한 사물들을 특정한 사람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조정하며, 평등한 사람들에게는 평등해야 한다고 말한다. (1282b14)


  공직을 요구하는 자들은 국가 존립에 필요한 부문들에서 서로 경쟁해야 한다. 따라서 명문자제들이나 자유민이나 부자들이 공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이리다. 공직자들은 자유민이어야 하고 납세자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국가는 부와 자유민의 신분 없이는 존립할 수 없고, 정의감과 전사로서의 탁월함 없이는 잘 다스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1283a9)



        제13장 공직에 대한 요구


  훌륭한 삶을 고려한다면, 앞서 말했듯이 교육과 탁월함이 공직을 요구하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평등한 자들이 모든 점에서 평등해서도 안 되고, 한 가지 점에서 불평등한 자들이 모든 점에서 불평등해서도 안 되므로, 이런 주장들을 인정하는 정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된 정체다. (1283a23)


  우리는 ‘올바른’이라는 말은 ‘평등하게 올바른’의 듯이며, ‘평등하게 올바른’ 것이란 국가 전체의 이익과 시민들의 공동 이익에 연관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이란 일반적으로 번갈아가며 지배하고 지배받는 사람이다. 시민은 정체의 형태에 다라 달라지지만, 최선의 국가에서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 자진하여 지배하고 지배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1283b27)



        제15장 왕정과 법의 관계 1


  법조문에 얽매인 정체는 최선의 정체가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치자들은 분명 보편적인 원칙도 갖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감정에서 자유로운 것이 감정을 타고난 것보다 나은데, 법은 감정이 없는 반면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감정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 따라서 최선의 한 사람은 분명 입법을 하고 법을 제정해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 법들은 다른 경우에는 최고 권력을 유지하되 적절치 못할 때는 최고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 ((1286a7)


  모두가 훌륭한 다수자의 통치를 귀족정체라 하고, 한 사람의 통치를 왕정이라 한다면, 왕이 친위대를 거느리든 말든 왕정보다는 귀족정체가 국가를 위해서는 더 바람직하다. 똑같이 훌륭한 다수를 구할 수만 있다면. (1286b1)



        제16장 왕정과 법의 관계 2


  우리가 논의하는 절대왕정은 왕이 모든 일을 자의적으로 처리하는 왕정을 뜻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동등한 자들로 구성된 국가에서 한 사람이 모든 시민을 통제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인즉 자연적으로 동등한 자들에게는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는 만큼, …… 그래서 동등한 자들 사이에서는 각자가 지배받기도 하고 지배하기도 하는 것이, 그리하여 모두가 공직을 번갈아 맡는 것이 옳은 것이다. (1287a1)


  여기서 우리는 법과 마주치게 된다. 공직을 번갈아 맡는 것과 같은 제도는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들 가운데 한 명이 지배하는 것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리고 같은 논리에 따르면, 여러 명이 통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해도 그 여러 명은 법의 수호자 겸 하인으로 임명되어야 한다. …… 법의 지배를 요구하는 자는 다름 아닌 신과 이성이 지배하기를 요구하는 것이고, 인간의 지배를 요구하는 자는 거기에 야수적인 요소를 덧붙이는 것이다. 욕망은 야수와 같은 것이고, 분노는 통치자들과 가장 훌륭한 인간마저도 오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은 욕구에서 해방된 이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287a18)


  정의(dikaion)를 구하려면 중용(meson)을 구해야 함이 분명한데, 법이 바로 중용이다. (1287a33)


  법의 지배를 옹호하는 자들도 그런 업무[법이 포함할 수 없는 없는 업무]는 인간이 결정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다만 한 사람보다는 여러 사람이 결정하기를 요구할 뿐이다. (1287b15)



        제17장 왕권의 최선의 형태


  정치적 탁월함에서 걸출한 가문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잘 참고 견디는 주민들은 왕정에 맞고, 정치적 탁월함에서 걸출하여 통치할 능력이 있는 자들에 의해 자유민으로서 지배받는 것을 본성적으로 잘 참고 견디는 주민들은 귀족정체에 맞고, 재산 있는 자들에게 가치에 따라 공직을 배분하는 법에 의해 지배받기도 하고 지배할 수 도 있는 주민들은 ‘혼합 정체’에 맞다. (1288a6)






제 4 권 실제 정체와 그 변형들


        제1장 정치학의 과제와 대상


  정체에 법을 맞춰야지 법에 정체를 맞춰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체는 공직들이 어떻게 배분되며 국가의 최고 권력은 누가 가지며 각각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국가의 제도인 반면, 법은 정체의 이런 규정과는 달리 치자들이 거기에 따라 통치하고 위반자를 감시하고 제지하는 규칙들이기 때문이다. (1289a11)



        제2장 정체들의 질적 순위


  이 중 귀족정체와 왕정에 관해서는 이미 논했다. 최선의 정체를 고찰하는 것은 이들 두 정체를 고찰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1289a26)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정과 귀족정체를 최선의 정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왕정보다는 훌륭한 여러 사람이 다스리는 귀족정체를 더 나은 것이라 보는 것 같다.]


  참주정체가 최악이고, 올바른 정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과두정체는 귀족정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그다음으로 나쁘고, 민주정체가 가장 견딜 만하다. (1289a38)



        제3장 정체는 왜 여러 가지인가?


  정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여러 종류인 만큼, 정체도 분명 여러 종류일 수밖에 없다. …… 따라서 부분들의 우월성과 차이에 따른 조합만큼이나 많은 정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290a3)



        제4장 국가의 여러 부분과 민주정체의 여러 종류


  자유민이 최고 권력을 가지면 민주정체고, 부자들이 최고 권력을 가지면 과두정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쪽이 많고 한쪽이 적은 것은 우연이지만, 실제로는 자유민은 많고 부자들은 적기에 하는 말이다. (1290a30)


  하지만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는 가난과 부라는 판단 기준만으로는 충분히 구별되지 않는다. ……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정체를 적절히 구별하기 위해서는 다른 판단 기준을 사용해야 한다. …… 다수자인 가난한 자유민이 최고 권력을 잡을 때는 민주정체고, 소수자인 부유한 귀족들이 최고 권력을 잡을 때는 과두정체다. (1290b7)


  법이 지배하는 민주정체에서는 민중선동가가 나타나지 않고,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이 최고 권력을 갖지 못하는 국가에서는 민중선동가들이 나타난다. 이것은 민중이 다수로 구성된 독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1292a7)


  법이 최고 권력을 갖지 않는 곳에는 정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이 모든 보편적인 것에 대해 최고 권력을 가져야 하고, 공직자들은 개별적인 경우들을 조정하면 된다. …… 따라서 민주정체가 정체 가운데 하나라면, 모든 것이 민중의 결의에 따라 결정되는 이런 체계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체가 아님이 명백하다. 민중의 결의에는 보편타당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1292a31)



        제7장 귀족정체의 여러 변형


  네 가지 주요 정체란 독재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그리고 이른바 귀족정체다. 그 밖에도 다섯 번째 종류의 정체가 있는데, 정체(politeia)라는 포괄적인 이름으로 불린다. (1293a35)


  우리가 앞서 논의한 정체만이 귀족정체라고 불리어 마땅하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기준에 의해 훌륭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가장 훌륭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정체만이 진정한 의미의 귀족정체라고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귀족정체에서만 훌륭한 사람과 훌륭한 시민은 무조건 일치하고, 다른 정체에서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의 기준에 따라서만 훌륭하다. (1293b1)



        제8장 '혼합 정체'와 귀족정체의 차이


  ‘혼합 정체’는 간단히 말해 과두정체와 민주정체의 혼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민주정체 쪽으로 기우는 혼합만 ‘혼합 정체’라 부르곤 한다. 과두정체 쪽으로 더 기우는 혼합은 귀족정체라 부르곤 하는데, 교양과 좋은 가문은 일반적으로 부유층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1293b22)


  법의 지배는 첫째, 사람들이 기존의 법을 지킬 때 가능하고, 둘째, 사람들이 지키는 법이 좋을 때 가능하다. (1293b42)


  탁월함에 따라 공직을 배분하는 것이 귀족정체의 주된 특징이다. 귀족정체의 원칙은 탁월함이고, 과두정체의 원칙은 부이며, 민주정체의 원칙은 자유민 신분이니 말이다. 물론 다수결의 원칙은 이 모두에서 발견된다. …… ‘혼합 정체’에서 동등한 몫을 요구할 수 있는 요소는 사실은 세 가지, 즉 자유민 신분, 부, 탁월함이다. (1294a9)



        제9장 과두정체와 민주정체의 혼합으로서의 ‘혼합 정체’



  제대로 혼합된 ‘혼합 정체’는 민주정체의 요소와 과두정체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그중 어느 쪽 요소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1294b34)



        제11장 대부분의 국가를 위한 가능한 최선의 정체


  행복한 삶이란 방해받지 않고 탁월함에 따라 사는 삶이며, 탁월함은 중용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중도적인 삶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중용의 삶이 최선의 삶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이런 판단 기준은 국가에도 정체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정체는 말하자면 국가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1295a34)


  중도와 중용이 최선이라는 것이 인정된 만큼, 행운의 선물을 소유하는 데서도 중간 상태가 최선임이 명백하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이성(logos)에 가장 잘 복종하기 때문이다. (1295b1)

 

  공동체는 우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애 대신 적대감을 품게 되면 사람들은 적과는 같은 길을 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국가는 가능한 한 동등하고 대등한 자들로 구성되려고 하는데, 이런 조건은 주로 그 구성원이 중산계급일 때 충족된다. 따라서 우리가 말한 국가의 자연스런 구성 성분들로 구성된 국가가 필연적으로 가장 훌륭한 정체를 갖는다. (1295b13)


  그리고 한 국가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 중산계급이다. 그들은 빈민들처럼 남의 재물을 탐하지도 않거니와, 빈들이 부자의 재물을 탐하듯, 아무도 그들의 재물을 탐하지 않기 때문이다. 91295b28)


  따라서 중산계급으로 구성된 정체가 최선의 국가 공동체고, 중산계급이 많아 가능하다면 다른 두 계층을 합한 것보다, 아니면 적어도 어느 한쪽보다 더 강한 국가는 훌륭한 겆엧를 가질 것이 분명하다. (1295b34)


  따라서 중간 형태의 정체가 최선임이 분명하다. 거기에는 파쟁이 없기 때문이다. (1296a7)


  민주정체가 과두정체보다 더 안정되고 더 오래 존속하는 것은 중산계급 덕분이다. 중산계급은 수가 많은 데다 과두정체에서보다는 공직에 더 많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1296a13)



        제12장 정체에서 질과 양의 균형


   우선 모든 정체에 적용될 만한 보편적인 원칙 하나를 가정하겠는데, 정체가 존속되기를 원하는 국가의 부분이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 더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1296b13)


  모든 국가는 질과 양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질이란 자유, 부, 교육, 좋은 가문을, 양이란 대중의 수적 우위를 뜻한다. …… 질과 양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1296b17)


  입법자는 언제난 정치적 결정권을 가진 계층에 중산계급을 포함시켜야 한다. (1296b34)


  중산계급이 다른 두 계층을 합한 것보다, 또는 둘 중 어느 한쪽보다 수가 많은 곳에서는 ‘혼합 정체’가 지속될 수 있다. (1296b38)


  정체는 더 잘 혼합될수록 그만큼 오래 존속된다. (1297a6)



        제13장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올바른 전략과 그릇된 전략


  양쪽을 제대로 혼합하려면 양쪽의 술수를 한데 섞어 빈민이 참석하면 수당을 지급하고, 부자가 참석하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 (1297a35)


  '혼합 정체‘는 중무기를 가진 자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1297b1)


  국가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고 중무장보병들이 더 득세하면서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의 수도 늘어났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혼합 정체’라고 부르는 정체는 전에는 민주정체라고 불렀던 것이다. (1297b12)



        제14장 정체와 심의권


  이 세 부분 중 첫 번째는 공부에 관해 심의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는 공직에 관한 부분이다. …… 세 번째는 재판에 관한 부분이다. (1297b35)


  심의하는 부분은 전쟁과 평화, 조약의 체결과 폐기, 입법, 사형, 추방형, 재산 몰수형, 공직자 임명, 임기 만료 시 공직자들에 대한 감사에 관해 최고 권력을 갖는다. (1298a3)


  시민 전체가 모든 공무를 결정하는 것은 민주정체의 특징이다. 민중이 추구하는 평등은 그런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1298a9)


  한편 시민 몇 명이 모든 안건을 심의하는 것은 과두정체의 특징이다. (1298a34)



        제15장 정체와 집행권

  일반적으로 말해 특정 안건에 대한 심의권과 결정권과 명령권, 그중에서도 특히 명령권을 위임받은 공직을 공직이라고 불러야 하 frjt이다. 명령하는 것이야말로 공직자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1299a14)






제 5 권 혁명과 정체 변혁의 원인들


        제1장 정체 변혁의 일반적 원인 1


  우리가 asjwj 논의의 출발점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은, 여러 정체가 생겨난 것은 정의가 비례적 평등에 있다는 데에는 다들 동의하면서도, 앞서 말했듯이 그것을 성취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정체는 어떤 한 가지 점에서 평등한 자들은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생각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모두가 자유민인 만큼 모두가 절대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한편 과두정체는, 어떤 특정한 점에서 불평등한 자들은 모든 점에서 불평등하다는 생각에서 생겨났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재산에서 불평등한 만큼 모든 점에서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주정체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평등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에 동등한 몫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과두정체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불평등하다는 이유로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데, ‘더 많은 것’은 불평등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는 둘 다 일종의 정의에 근거하고 있긴 하지만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작이다. 그래서 둘 중 어느 쪽이든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 파쟁을 일으킨다. (1301a25)

  

  대체로 이런 것들이 파쟁의 근원이자 원천이며, 이로 인해 파쟁이 발생한다. 그렇게 보면 정체의 변혁이 왜 두 가지 방법으로 일어나는지 설명이 된다. 한 가지 방법은 변혁이 기존의 정체를 반대하여 정체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다. …… 그런가 하면 변혁이 기존 정체를 반대하지 않고, 과두정체나 독재정체 같은 기존의 정체가 그대로 존속되기를 원하면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때도 있다. (1301b4)


  어디서나 불평등이 파쟁의 원인이다. 그러나 불평등한 자들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비례하는 대우를 받으면 불평등이 아니다. (1301b26)


  평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수에 따른 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axia)에 따른 평등이다. ‘수에 따른 평등’이란 양이나 크기에서 동일하고 평등한 것을 의미하고, ‘가치에 따른 평등’이란 비례에서 동등한 것을 의미한다. (1301b29)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적 정의는 가치에 따른 정의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앞서 말했듯이, 실제로는 의견을 달리한다.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한 가지 점에서 평등하면 모든 점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한 가지 점에서 불평등하면 모든 점에서 불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로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라는 두 가지 정체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1031b35)


  어떤 경우에는 수적 평등을, 다른 경우에는 비례적 평등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1302a2)


  하지만 민주정체는 과두정체보다 더 안정되어 있고 파쟁에 덜 노출되어 있다. 과두정체에는 과두정파끼리의 파쟁과 민중과의 파쟁이라는 두 가지 파쟁이 일어나지만, 민주정체는 과두정파와의 파쟁에만 노출되어 있고, 민중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파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에 중산계급으로 구성된 정체는 과두정체보다는 민주정체에 더 가깝고, 이상적인 정체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정체 중에서 가장 안정성이 있다. (1302a8)



        제2장 정체 변혁의 일반적 원인 2


  이렇듯 덜 가진 자들은 똑같이 갖기 위해, 똑같이 가진 자들은 더 갖기 위해 들고일어난다. 이것이 파쟁을 일으키는 자들의 심적 상태다. (1302a22)


  파쟁을 일으키는 동기는 이익과 명예에 대한 욕구거나, 불명예와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1302a31)



        제3장 정체 변혁의 개별적 원인


  이 가운데 교만과 이익 추구가 어떤 영향력이 있으며, 어떻게 해서 파쟁의 원인이 되는지는 명백하다. (1302b5) [공직자들의 교만과 탐욕]


  명예가 어떤 영향력이 있으며, 어떻게 해서 파쟁의 원인이 되는지도 분명하다. (1302b10)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국가나 국가의 지배계층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권력을 행사할 경우 우월성도 파쟁의 원인이 된다. (1302b15)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도 파쟁을 일으키는데,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처벌받을까 두려워하는 자들과 부당한 일을 당할까 두려워 미리 선수를 쓰는 자들의 경우가 그렇다. (1302b21)


  경멸도 파쟁과 봉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1302b25)


  국가의 한 부분의 불균형한 성장도 정체 변혁의 원인이 될 수 있다. (1302b33)



        제5장 민주정체가 전복되는 이유


  민주정체에서 변혁이 일어나는 것은 주로 민중선동가들의 무절제 때문이다. 민중선동가들은 때로는 부자들을 개별적으로 무고함으로써 부자들이 단결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가장 사이 나쁜 적들도 공동의 위험 앞에서는 결속하기 마련이니까.), 때로는 부자들을 공격하도록 대중을 공공연하게 부추긴다. (1304b19)



        제6장 과두정체가 전복되는 이유


  과두정체에서 변혁이 일어나는 이유 중에는 두 가지가 특히 두드러진다. 한 가지는 정부가 대중을 부당하게 억압할 때다. 그 경우 누구라도 대중의 선봉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305a36)


  그러나 지배계급 바깥에서 시작되는 파쟁은 여러 이유로 세분화될 수 있다. (1305b1)



        제7장 귀족정체가 전복되는 이유


  귀족정체에서 파쟁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수만이 공직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과두정체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도 글러 것이 귀족정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과두정체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두 정체에서는 비록 그 이유는 달라도 소수자가 지배계층이다. 그래서 귀족정체는 과두정체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파쟁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특히 대중의 일부가 자신들도 지배계층 못지 않은 탁월함을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때다. (1306b22)


  ‘혼합 정체’와 귀족정체가 해체되는 것은 대개는 정체 자체가 정의에서 이탈하기 때문이다. ‘혼합 정체’가 해체되는 것은 민주정체의 요소와 과두정체의 요소를 적절히 혼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며, 귀족정체가 해체되는 것은 이 두 가지 요소와 탁월함을, 특히 이 두가지 요소, 즉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를 적절히 혼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합 정체’와 대부분의 이른바 귀족정체가 혼합하려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요소이니 말이다. 귀족정체와 이른바 ‘혼합 정체’의 유일한 차이는 이 두 가지 요소를 혼합하는 방법에 있으며, 이것은 또 전자가 덜 안정되어 있고, 후자가 더 안정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두정체 쪽으로 기우는 정체는 귀족정체라 불리고, 대중 쪽으로 기우는 정체는 ‘혼합 정체’라고 불린다. 그래서 ‘혼합 정체’가 귀족정체보다 더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수가 많을수록 힘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1307A5)






제 6 권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는

어떻게 구성해야 가장 안정성이 있는가


        제2장 민주정체의 구성 방법 2


  민주정체의 토대는 자유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자유는 민주정체에서만 누릴 수 있으며, 모든 민주정체가 추구하는 목표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자유의 한 가지 원칙은 모두가 번갈아가며 지배하고 지배받는다는 것이다. 민주정체의 정의는 가치에 따른 비례적 평등이 아니라 수에 따른 산술적 평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라면, 필연적으로 다수가 최고 권력을 갖고, 다수가 결의한 것이 최종적인 것이며 정의로운 것이다. (1317a40)


  전형적인 민주정체와 민중은 모두가 수적으로 평등하다는, 민주정체의 특징으로 인정된 정의관에서 생겨난다. 평등이란, 이를테면 빈민이 부자보다 국정에 더 많이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빈민이 정권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그 수에 따라 평등하게 국정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니 말이다. 그래야만 국가에 평등과 자유가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1318a3)



        제3장 평등을 확보하는 방법들


  양측이 모두 동의하는 평등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양측이 제시하는 정의의 개념부터 검토해봐야 한다. 그런데 양측 모두 다수 시민의 결정이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조건 그래서는 안 된다. 국가는 부자와 빈민이라는 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양 집단 모두나 각 집단의 다수가 결정한 것은 최종 결정권을 가지게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두 집단이 상반된 결정을 내릴 때는 다수자의 결정이, 다시 말해 평가 재산의 총액이 더 많은 집단의 결정이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1318a27)



        제4장 최선의 민주정체


  이런 이유에서 앞서 말한 민주정체에서는 전 시민이 공직자를 선출하고 감사하고 법정의 배심원이 도지만 고위 공직자들은 재산 자격 요건에 근거하여 선출하거나―고위 공직일수록 더 높은 재산 자격 요건을 요구해야 한다―아니면 공직 취임에 재산 자격 요건이 필요하지 않을 경우 능력 있는 자들에게 공직을 배분하는 것이 유익하기도 하거니와 관행이기도 하다. (1318b27)



        제5장 민주정체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입법자와 그런 정체를 수립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그런 정체를 수립하는 것보다는 그런 정체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또는 유일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1319a33)


  극단적 민주정체에는 대개 인구가 많은데, 시민들은 수당을 지급받지 않으면 민회에 참석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은 세수가 넉넉하지 못할 경우 귀족에게 불리할 수 있다. 필요한 기금을 재산세와 재산 몰수와 불공정한 재판으로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행으로 인해 지난날 수많은 민주정체가 전복되었다. (1320a17)


  진정한 민주정체 옹호자라면 대중이 너무 가난해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지나친 가난이 민주정체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1320a29)



        제6장 과두정체의 구성


  가장 잘 혼합된 첫 번째 과두정체는 이른바 ‘혼합 정체’에 가깝다. 이 과두정체에서는 높고 낮은 두 가지 재산 자격 요건을 도입해야 하는데, 낮은 재산 자격 요건은 꼭 필요한 공직자를, 높은 재산 자격 요건은 고위 공직자를 충원하는 데 써야 한다. 재산 자격 요건을 취득한 자는 누구든지 국정 운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1320b21)






제7권 이상국가와 교육의 원리


        제1장 국가와 개인의 행복


  우리는 먼저 어떤 삶이 말하자면 만인에게 가장 바람직한지 확인하고, 이어서 공동체와 개인에게 같은 삶이 가장 바람직한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1323a14)


  선은 외적인 선, 몸의 선, 혼의 선으로 삼분되며, 행복한 삶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1323a21)


  보다시피 탁월함은 외적인 선에 의해 획득되고 보존되지 않지만, 외적인 선은 탁월함에 의해 획득되고 보존되며 인간에게 행복한 삶이 쾌락에 있든 탁월함에 있든 이 양자 모두에 있든, 외적인 선은 필요 이상으로 갖고 있지만 성격과 이서에서는 부족한 데가 많은 사람들보다는 성격과 이성은 아주 잘 계발되어 있지만 외적인 선은 적당한 한도 내에서 가진 사람들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1323a34)


  외적인 선은 다른 도구가 다 그러하듯 한도가 있고, 유용한 것은 모두 어떤 목적에 유용하다. 그리고 외적인 선이 너무 많으면 그것을 가진 자에게 해롭거나, 적어도 전혀 이롭지 못하다. 그와는 달리 혼의 선은 무엇이나 많을수록 더 유용하다. 여기에도 ‘훌륭하다’는 표현뿐만 아니라 ‘유용하다’는 표현을 덧붙여야 한다면 말이다. (1323b6)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지는 행복의 양은 각자가 가진 탁월함과 지혜와 그에 다른 행위의 양에 비례한다는 데 동의해도 좋을 것이다. …… 행운은 필연적으로 행복과 다른 것이다. (1323b21)


  최선의 국가는 행복하고 잘나가는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잘나갈 수 없다. 그리고 개인이건 국가건 탁월함과 지혜 없이는 훌륭한 행위를 하 ft ndjqt다. 국가의 용기, 정의, 지혜, 절제는 개인이 용감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고, 절제 있다고 불릴 때 분유하는 탁월함과 같은 효력, 같은 성격을 갖는다. (1323b21)


  지금으로서는 개인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나 최선의 삶은 탁월함이 요구하는 행위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외적인 선을 충분히 갖춘 탁월함의 삶이라고 가정해두자. (1323b36)



        제2장 정치적 삶과 철학적 삶 1


  국가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이 같은 것이냐 아니냐는 문제를 논의하는 일이 남았다. 대답은 명백하다.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는 데 다들 동의할 테니 말이다. (1324a5)


  여기서 검토해야 할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른 시민들과 연대하여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삶과 정치 공동체를 초탈하여 이방인처럼 사는 삶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 시민이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든 아니면 다수자만이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든, 어떤 정체가 국가의 어떤 상태가 최선인가 하는 것이다. (1324a13)


  최선의 정체는 분명 누구나 가장 훌륭하게 행동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도여야 한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삶은 탁월함의 삶이라는 데 동의하는 자들도 정치적•실천적 삶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모든 외적인 사물을 초탈한 삶, 이를테면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삶이라고들 하는 관조적인 삶이 더 바람직한가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1324a23)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인처럼 지배하는 것을 정치로 혼동하고 있는 듯하며, 자신에게는 옳지도 유익하지도 않다고 여기는 것을 남들에는 거리낌 없이 행한다. (1324b22)


  어떤 국가가 잘 다스려질 경우 혼자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1324b41)


  훌륭한 입법자가 할 일은 국가나 민족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훌륭한 삶과 그들에게 가능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는지 고찰하는 것이다. (1325a7)



        제3장 정치적 삶과 철학적 삶 2


  활동보다 활동하지 않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행복은 활동이고, 게다가 정의롭고 절제 있는 사람들의 활동은 훌륭한 일을 많이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25a31)


  서로 대등한 자들끼리는 공직을 번갈아 맡는 것이 바람직하고 옳다. 그것이 동등이고 평등이기 때문이다. 동등한 자들에게 동등하지 않은 것이 주어지고, 평등한 자들에게 평등하지 않는 것이 주어지는 것은 자연에 배치되며, 자연에 배치되는 것은 무엇이든 아름답지 못하다. 따라서 누군가 탁월함과, 최선의 행위를 실현할 능력에서 걸출하다면, 그를 따르는 것은 바람직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는 탁월함뿐만 아니라 행동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 (1325b7)


  우리의 이런 주장이 옳다면, 그리고 행복이란 잘나가는 것이라고 규정해야 한다면, 국가 전체를 위해서난 개인을 위해서나 활동적인 삶이 최선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삶이라고 해서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듯 곡 타인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삶일 필요는 없다. 또한 행위에서 결과를 얻기 위한 우리의 생각만이 활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고 그 자체가 목적인 관조와 사색이 더 활동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사색의 목적은 훌륭한 행위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활동(praxis)이기 때문이다. (1325b7)



        제4장 이상 국가의 규모


  최선의 정체는 적절한 물질적 토대 없이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하는 대로 상정하되, 불가능한 것을 상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전제에는 시민의 수와 영토가 포함된다. (1325b23)


  국가를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의 수와 질이고, 그 다음이 영토의 크기와 생김새다. (1326a5)


  경험이 말해주는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구가 너무 많은 국가는 잘 다스려지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어렵다는 것이다. …… 법(nomos)은 질서(taxis)이며, 좋은 법은 따라서 좋은 질서여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다수는 질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26a25)


  법정에서 재판하고 공적에 따라 공직을 배분하려면 시민드른 서로의 탁월함을 잘 알아야 한다. (1326b11)


  한 국ㄱ가의 최적 인구수는 자급자족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되 전체를 쉽게 개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 다수임이 분명하다. (1326b22)



        제5장 이상 국가의 영토

  

  영토의 질에 관해 말하자면, 누구나 다 최대한 자급자족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토를 선호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있고 아무것도 부족한 점이 없는 것이 자급자족이기 때문에 그런 영토는 반드시 온갖 곡물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1326b26)


  범위와 크기에 관해 말하자면, 영토는 주민들이 절제를 지키며 자유롭게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커야 한다. (1326b30)




  




 

Richard J. Arneson, “The Principle of Fairness and Free-Rider Problem,” Ethics, Vol. 92, No. 4 (July, 1982).



H. L. A. Hart: 상호 규제의 원칙(a principle of mutual restriction) - 수많은 사람들이 규칙에 따라 공동의 기획을 수행할 때, 따라서 자신들의 자유를 규제할 때, 필요한 경우 이 규제에 submit 해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submission으로 이익(benefits)을 얻은 사람들로부터 유사한 submission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Are There Any Natural Rights?” (1955), p. 185). (p. 616)

John Rawls: 공정성 원칙(the principle of fairness) - 수많은 사람들이 규칙에 따라 정의롭고 상호 이익이 되는 협력적 기획에 참여할 때 따라서 모두를 위한 이익을 산출하는 데 필요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규제할 때, 이런 규제에 submitted 해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submission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들 편에 유사한 묵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A Theory of Justice, pp. 108-114). (p. 616)

⇔ Robert Nozick의 비판: “공정성 원칙은 반대할 만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Anarchy, State, and Utopia, p. 93). (p. 616)

⇒ Arneson의 주장: Nozick의 비판은 공정성 원칙의 포기라기보다는 수정하게 만든다.




I

공정성 원칙에 대한 주요 반론: 공정성 원칙은

i) 협력의 이익보다 비용이 클 때에도 협력을 해야 하게 만든다.

ii) 이익이 불평등하게 분배된 개인에게 동등한 기여를 하도록 만든다.

iii) 특정 scheme에 반대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도 협력의 의무를 지운다.

iv) 어떤 사람에게 이익을 주었다는 사실 만으로 강제할 권리를 허용하게 된다. (p. 617)

i)~iii)은 공정성 원칙의 핵심을 공격하는 것 같지 않다. 반면 iv)는 공정성 원칙의 조건 만족이 어떤 사람에게 의무를 지울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iv)를 중심으로 논의한다. (p. 618)


공공선 (공공재?) (public goods)의 특징 세 가지: 상호 규제 개념이 적용되는 benefits

i) jointness: 한 사람이 the good을 소비해도 다른 사람에게 여전히 available하다.

ii) 배제 불가능성(nonexcludability): 어느 누가 the good을 소비해도 다른 사람이 the good을 소비하지 못하게 하지 못한다.

iii) 동등한 양 소비: 그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일한 양을 소비해야 한다.

집합적 선 (집합재?) (a collective good): 배제 불가능성

순수 공공 선 (공공재?) (pure public good): 동등한 양 소비 (pp. 618-619)

⇒ 순순 공공재: 순수 공공재가 일단 한 집단에 공급되면 개인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향유할 수 없다. 개인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없다. (국방의 경우 개인이 피할 수 없다.) (p. 619)

공정성 원칙에 대한 Hart와 Rawls의 형식화는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benefits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면서 협력적 기획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롤즈는 이익을 얻는 것을 자발적으로 이익을 얻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는 “의무(obligation)”이라는 용어를 도덕적 요구사항만을 가리키는 데 제한하고 있다. (p. 619) political obligation에 적용되는지 고찰해야 한다.


자발적 이익 수용과 의무 발생 사이의 연관을 보여주는 예들

i) 배제가 가능한 예: 선물 주는 연합체(association) - 배제가능성(excludability)가 문제된다. 즉, 이런 상황에서 구성원들은 비기여자(noncontributor)를 이익으로부터 배제할 자유가 있다.

ii) 배제 불가능하지만 자발적 수용이 의무를 발생시키지 못하는 예: collective good - 비행기로 하늘에 글씨를 써서 주민을 즐겁게 하는 예. (맨큐의 불꽃놀이 예와 유사) 잘못된 정보를 받았거나 불공정하게 공급되는 경우 (p. 620)

⇒ 배제 불가능한 경우, scheme이 비용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경우, 부담의 분배가 공정한 경우, good이 pure public good이 아닌 경우, 이익의 자발적 수용은 의무 발생에 충분하다. (p. 620)


⇒⇒⇒ Arneson의 결론:

i) 순수 공공재(pure public goods)의 경우: 이익의 자발적 수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정성 원칙에 따른 이익 발생이 불필요하다. “Mere receipt of benefits may suffice to obligate.”

ii) 집합재(collective goods)의 경우: scheme이 공정하고 지각없는(ill-advised) 것이 아니라는 조건 하에, 이익의 자발적 수용은 의무 발생에 충분하다.(pp. 620-621)

∴ 이로부터 Nozick의 반대, 즉, 누군가에게 이익을 주었다는 것이 그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반대에 대답된다.


Arneson은 순수한 공공재(pure public good)의 경우 자발적 수용 및 거부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부터 의무가 발생한다는 주장을 끌어내는 것 같다. 집합재(collective good)의 경우, 배제 불가능성, 비용보다 이익이 큼, 부담의 공정성이 충족될 때 자발적 수용이 의무를 발생시킨다고 주장한다.


무임승차자(free-rider)의 추론: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협력하거나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나는 기여하지 않을 때 더 나은 상황에 있게 된다. 이에 따라 협력하지 않게 되면 무임승차자로 간주된다. (p. 622)

무임승차자와 구별되는 두 유형의 협력자

i) 불안한 협력자(nervous cooperator) -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협력한다면 자신도 협력하길 원하는 사람. 자신의 협력과 상관없이 타인들이 협력하지 않아 scheme이 붕괴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협력을 거부한다.

ii) 꺼리는 협력자(reluctant cooperator) - 거의 모든 다른 사람들이 협력한다면 자신도 협력하길 원하는 사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정하게 협력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함. 자신이 타인에게 이용당할까봐 걱정해서 협력을 거부함.

⇒ 이 두 협력자가 무임승차자와 구별되는 점은, 무임승차자는 협력하지 않고 이익만 챙기려 하지만, 이 두 협력자는 협력할 의도는 있음. (pp. 622-623)


Arneson의 수정된 공정성 원칙:

i) 이익 > 비용: 각 수혜자가 비용을 지불할 만한 집합적 이익을 제공하는 협력 체계가 확립되는 곳에서

ii) 공정한 부담: 협력의 부담이 공정하게 분배되는 곳에서

iii) 사적 이익 배제: 추가적인 사적 이익을 통한 자발적 복종 유인이 불가능한 곳에서

iv) public goods: 집합적 이익이 자발적으로 수용되거나 또는 자발적 수용이 불가능한 곳에서

⇒ 자신에게 공정하게 할당된 비용을 치루는 사람들은 나머지 수혜자들에 대해 그들의 공정한 몫을 지불하도록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p. 623)




II


사적 소유권(private ownership)을 강제할 권리와 협력을 강제할 권리의 비교 예

- Smith: 울타리를 치고 자신의 땅이라 주장. 땅에 대한 배타적 권리 주장하며 땅을 침범하지 타인들에게 강요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함.

- 집단: 이웃들이 집단을 만들어 경찰 순찰을 하겠다 함. 이러한 scheme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며, 이 scheme을 보장하기 위해 강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함. 동의하지 않았는데 비용을 공유하도록 강제되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Smith가 땅을 사적 소유하는 것에 실제로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땅의 전유에 필요한 강제에도 동의하지 않았음을 지적함. (p. 624)

⇒ 사적 소유권을 지지하는 강제는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만하지만, 상호 이익의 권리를 지지하는 강제는 받아들일 만하지 않음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pp. 624-625)

⇒ 소유권 보호를 위한 강제는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사적 소유권이 상호 이익보다 더 우선적이라고 주장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사실상 소유권의 정당화 자체도 문제가 되는데, 소유권 보호는 일정한 제도 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제 3의 인물 Jones의 의무:

ⓐ Smith의 사적 소유화된 땅을 침범하지 않을 의무

ⓑ 협력 체계의 비용에 기여할 의무

⇒ ⓐ와 ⓑ의 차이는? ⓐ는 소극적(부정적), ⓑ는 적극적? 의심스러운 설명. ⓐ 의무를 수행하는 불편(inconvenience)이 ⓑ 의무를 수행하는 불편과 동일하다면? 따라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강제와 받아들일 수 없는 강제 사이에 Nozick이 요구하는 기준선을 그을 수 없다. (p. 625)

→ Smith가 한 뙈기의 땅을 자신의 소유로 주장할 때 Smith는 암묵적으로 Jones에게 비슷한 뙈기의 땅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상호 이이 체계의 집단이 협력 체계를 만들어 수혜자들에게 기여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때에는 Jones에게 다른 사람들과 집단을 결성할 권리를 부여한다. 이 두 경우 중 어떤 경우에도, 타인들에게 인정하길 꺼리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두 경우 모두 권리의 첫 번째 주장자의 행위는 나중의 유사한 행위의 가능성을 선취하는 것이다. (p. 625)


자기 이익 원칙(self-benefit principle)

i) Lockean style의 소유권 선택을 정당화 (자유 사용 체계, 반소유권 등에 대해), 즉, Locke의 소유권 규칙 뒤에 숨은 규칙

ii) 의미: 도덕 규칙들이 준수된다면, 자신의 행위의 이익을 부여하거나 교환하길 스스로가 선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행위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이익을 주거나 해를 준다.

iii) 제한: 엄격한 요구사항이라기보다는 완전성에 대한 권고. 왜냐하면, 한 사람이 땅을 사적 소유로 전유하는 행위는, ⓐ 그 땅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 그 땅을 전유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다라서 Lockean 사적 소유는 대략 자기 이익 원칙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자기 이익 원칙이 Lockean 사적 소유 원칙을 정당화하는 한, 그것은 동일하게 수정된 공정성 원칙을 정당화한다. how?

i) 협력 체계는 비협력자에게 싫든 좋든 이익을 부여하게 되는 경우, 이익을 얻는 비협력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이익의 비자발적 부여는 더 커진다. 이것은 자기 이익 원칙 위반한다.

ii) 이익의 비자발적 양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에 대한 반론

아무도 협력자들이 scheme을 만들어 집합적 이익을 모두에게 부여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자유 사용 체계에서 Smith에게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아무도 Smith가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수확을 거두고 마음대로 짓밟을 작물을 재배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자유 사용 하에서 Smith는 작물 재배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작물을 재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그의 노동 이익으로부터 재배할 선택권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협력 체계를 만들 수도 있고, 만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집합재의 본성으로 인해 협력자들에게만 이익을 주겠다고 마음대로 제한할 수 없다.

iii) 수정된 공정성 원칙을 채택하면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다. 이 원칙이 채택되어 강제된다면, 타인에게 그들의 의지에 반해 이익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원칙은 무임 승차자에 대한 강제를 정당화한다. 무임승차자는 사실 Smith의 작물을 마음대로 짓밟는 사람이나 같다. (pp. 626-627)

위에서 Smith가 타인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다고 하는 것과 협력 체계가 비자발적 이익 수혜자에게 이익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수정된 공정성 원칙에 의해 교정되는가? 그런 것 같지 않다. 위의 두 가지 사례 비교는 맞는 것 같지만, 수정된 공정성 원칙을 채택한다 해도 여전히 타인의 의지에 반하여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기 때문이다. 협력 체계로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즉, Arneson의 논변은 Nozick의 반론을 효과적으로 반박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정치적 의무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의지에 반해 이익을 주는 것은 공정성 원칙 자체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forced to voluntarily accept?의 전략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iv) Lockean 소유권 규칙은 타인의 수고로 인한 결실을 공짜로 얻으려는 욕구를 좌절시키고 자신의 노동의 결실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수정된 공정성 원칙은 타인의 수고에 의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구를 좌절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도덕적 확신을 담고 있다. (p. 628)

개인들이 good을 소비하는 것이 타인들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면 왜 그런 소비를 규제해야 하는가?

대답: 타인의 수고에 의한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p. 628)


요약적 결론: Nozick이 공정성 원칙의 강제 집행에 반대한 것은 그대로 사적 소유권의 강제 집행에 대한 반대에 적용된다. 당신이 나의 자유를 제한하여 내가 한 뙈기의 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의 전유가 나에게 간접적으로 이익을 준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운다면, 나는 나의 자유의 규제를 수반하는 그런 이익을 요구하지도 그에 동의하지도 않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p. 629)




III

착한 사마리아인 의무와 보다 형편 좋은 사람의 의무는 자기이익 원칙에 불일치한다는 반론

(착한 사라리아인(Good Samaritan) obligation): 약간의 노력과 위험으로 타인을 위협하는 커다란 악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p. 629))


대답: 수정된 자기이익의 원칙 - 도덕 규칙들에 복종한다면, 각자의 행위는 ⓐ 그 행위의 이익을 부여하거나 교환할 것을 선택한 경우, 또는 ⓑ그가 엄격한 자선의 의무 수행에서 행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만 이익을 주거나 해를 끼친다.

⇒ 능력 없는 사람들의 권리가 능력 있는 사람들의 의무에 대응한다. 따라서 타인의 수고로 인한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자선의 의무가 제한된다면(극도로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자유주의적 자기 이익의 원칙은 Lockean 규칙이 완화되지만 녹아 사라지지 않는 타협점을 찾게 된다. 그리고 자선의 요구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면 이 타협점은 공정성 원칙을 지지하게 된다.

i) 방법 첫 번째: 자선의 요구가 문제되지 않는 상황에 공정성 원칙 적용하는 방법

ii) 부담과 이익의 공정한 분배가 자선의 요구를 포함하게 하는 방법 (pp. 630-631)


Hart와 Rawls: 상호 규제의 상황에서 규칙에 복종할 도덕적 의무는 협력 구성원들에게 지고 있는 것이고, 그들은 상관적인 복종시킬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 공정성 원칙은 우리가 협력을 식별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그리고 의무를 지고 있는 수혜자들이 mere receipt가 아니라 이익을 수용해야(accept) 하는 경우에만 적용됨을 의미한다.

⇔ Miller and Sartorius: 공정성 원칙 적용을 위해서는 자발적 수용이 요구된다. 자유롭게 선택되지 않은 이익을 강제로 부여하거나 강제로 참여시켜 의무를 떠맡긴다면, 그 원칙은 수용될 수 없다.

Simmons의 이익 수용(acceptance of benefits)의 의미: ⑴얻으려고 애쓰거나, ⑵이익을 willingly and knowingly 취하거나 하는 것.

대답: 순수한 공공재의 경우 모두가 얻으려 애쓰므로 문제될 게 없고, 결국 ⑵를 다루어야 한다.

Simmons가 말하는, 이익을 willingly and knowingly 취하는 것이란?

⑴ 우리의 의지에 반해서 우리에게 강요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⑵ 이익이 대가보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

⑶ 이익을 knowingly 취하는 것은 이익을 제공하는 당사자에 상대적인 이익의 지위를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런 엄격한 주관적 요구사하을 이용해 공정성 원칙 하에 의무가 발생하는 일이 대단히 드묾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쉽다. (pp. 631-632)


Arneson의 반론: 위의 조건 세 가지는 너무 엄격하다. 개인들은 이익을 얻는 자신의 상황에 도덕적으로 적합한 사실을 알 의무가 있다. 누군가의 무지가 변명 거리가 된다면, 협력의 이익에 대한 bill이 제시되는 시점에 사실에 대한 기술을 들을 권한이 있다. 그가 사실과 대단히 불일치하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태만과 비난할 만한 무지라면, 그의 의무는 성립한다. (p. 632)

Simmons는 공정성 원칙이 의무를 발생시키기 전에 협력 정신이 상호 이익 체계에 퍼져야 한다고 잘못 가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참여가 요구되는 기획의 협력적 본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협력 정신은 채울 수 없다. Hart가 의무는 협력하는 구성원들에게 의무가 있다고 말할 때의 요점은 체계의 지속적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체계의 지속적 성격에 의해 규칙 준수 및 이익 제공 행동은 지속적으로 타인에게 상호 의무를 발생시킨다. 협력 하에서 개인은 스스로를 배제시킬 방법이 없는 집합적 이익을 공유한다. 이 이익이 논쟁의 여지없이 모두를 위한 이익이라면, 그 비용 분배가 공정하다면, 지속적인 체계의 개별 수혜자는 자신의 몫을 지불할 것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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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L. A. Hart, “Are there Any Natural Rights?”, Theories of Rights, ed. by Jeremy Waldr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pp. 77-90.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LXIV, No. 2 (April, 1955), pp. 175-191)



Thesis


도덕적 권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하나의 자연권, 즉,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는 평등한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권리가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

권리가 평등한 권리라는 것과 일관된(consistent) 일정한 특수한 조건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선택할 능력이 있는 어떤 성인도

i) 강제(coercion)나 제재(restraint)를 막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강제나 제재를 모든 타인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권리를 갖는다.

ii) 타인에게 강제하거나 제제하거나 또는 그들을 해할 목적이 아닌 어떤 행위도 할 자유가 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는 평등한 권리를 자연권(natural right)으로 기술하는 두 가지 이유

i) 이 권리는 모든 사람들이 선택할 능력이 있다면 갖는 권리이다. 모든 인간은 이 권리를 인간으로서(qua men) 갖는다.

ii) 이 권리는 사람들의 자발적 행위에 의해 창출되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도덕적 권리들은 자발적 행위에 의해 창출되고 부여된다.)


부연: 이 thesis는 어떤 도덕적 권리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하나의 자연권이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조건적 주장이다.



I

(A) 도덕적 권리와 법적 권리의 밀접한 관계

  권리 개념은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을 때를 결정하는 것에, 그래서 어떤 행위가 강제적 법 규칙들의 주제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에 관계되는 도덕의 영역에 속한다.

  정의, 공정성, 권리와 의무(obligation)와 같은 도덕 개념들의 특징은 정의로운 것, 공정한 것이 행해질 것을 보장하기 위한 강제력(force)의 사용에 특수한 일치(congruity)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congruity의 상황에서만 타인의 강제력이 정당하다.


Kant:

officia juris - duty에 대한 존중이 그 자체로 의지의 규정적 원칙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 도덕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의무

officia virtutis 도덕 원칙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도덕적 가치(worth)가 없는 의무

⇒ Hart의 해석: 인간의 자유의 적절한 분배를 규제하는 원칙들, 이것만이 인간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냐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유의 분배를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만든다.


Hart가 제시하는 도덕적 권리의 중요한 특징

i) 도덕적 권리의 소유자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도덕적 정당화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ii) 그러한 정당화를 가지는 것은 그가 타인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그 행위가 어떤 도덕적 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위할 것인지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하도록 허용된다면, 인간 자유의 일정한 분배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B) 도덕적 권리가 ‘duties’와 상관적(correlative)인지의 문제를 검토하자.

‘X가 -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Y가 -할 (하지 말아야 할) duty가 있다’를 함축하고, 그것에 의해 함축된다.

        ‘X가 -에 대한 권리가 있다’ ⇔ ‘Y가 -할 (하지 말아야 할) duty가 있다’

그런데 X가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X나 다른 사람이 어떤 duty를 지닌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는 의미가 있다. 이런 종류의 권리를 법학자들은 ‘자유들’이라 부르며 상관자로 ‘duty'를 갖는 권리들과 구별했다.

  자유라 칭해지는 권리들은 사회적 삶의 영역, 즉 경쟁이 최소한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하지 않은 것으로 기능하는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길에 떨어진 돈을 타자가 줍도록 허락하기 위해 어느 누구도 ‘duty’ 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제적 경쟁의 도덕적 적절성(propriety)은 ‘X가 -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단지 X가 -하지 않을 어떤 ‘의무’ 하에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최소한의 의미에서의 ‘하나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C) 모든 도덕적 ‘duties’에 대해 상광적인 도덕적 권리들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

모든 duties에 상관적인 도덕적 권리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이 ‘duty’의 수행으로 인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권리를 가짐에 대한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상관적이라 생각한다면) 따라서 우리가 잘못 대우하지 말아야 할 ‘duty’를 수행하여 이익을 얻는 동물이나 아기들은 적절한 대우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런 추론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약속으로부터 발생하는 도덕적 상황: 권리를 갖는다는 개념과 ‘duty’의 수행에 의해 이익을 얻는다는 개념은 동일하지 않다. X가 Y에게 그간의 호의에 대해 Y가 없을 때 Y의 어머니를 돌보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거래에서 권리들이 발생하지만,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Y에게이지 권리를 갖고 있는 어머니에게가 아니다. 확실히 어머니는 X가 가진 obligation과 관련된 당사자이고, obligation의 수행으로 이익을 얻을 당사자이다. 그러나 Y의 어머니를 돌볼 X의 obligation은 Y에 대해서이다. 따라서 X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X가 무시하고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은 Y이지 Y의 어머니가 아니다. X에 대한 도덕적 주장을 하는 사람도 Y이다. Y는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게 할 권리가 부여된(entitled) 것이고, 그 주장을 철회하고 그 obligation으로부터 X(본문에는 Y이나 X가 맞는 듯)를 해방시켜 주는 것은 Y이다. X가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를 선택에 의해 결정할, 그리고 X의 선택의 자유를 이런 방식으로 제한할 위치에 도덕적으로 놓인 것은 Y인 것이다. 그래서 Y가 하나의 권리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을 적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이익을 얻을 것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위와 같은 사실이다. 약속 받은 사람과 이익을 얻는 사람이 동일하다고 해서 ‘권리를 가짐’과 ‘duty의 수행으로 인한 이익을 얻음’이 동일함을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권리를 갖는 사람은 ‘duty’가 발생하게 되는 거래, 이전 상황 또는 당사자들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서 발견된다.


(D) 권리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무엇이 행해져야 할지를 명령하는 행동 codes

자연법 사상가들: 자연권이 아니라, 준수하면 인간을 이롭게 할 자연적 duties들이 있다고 생각(인간의 자연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 이런 codes들이 권리들을 창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런 행동 codes를 권리들을 창출하는 게임 규칙들과 대조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도덕적 code조차도 권리들을 정립할 필요가 없다. 십계명이 가장 중요한 예이다. 십계명이 권리들을 부여하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놀라운 해석일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십계명에 대한 복종은 단지 신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due 또는 owed된 것으로 간주되고, 불복종은 단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개인들에 대한 하나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면 십계명은 일정한 행동 유형을 배제하기 위해서만 고안된 gudq법으로 읽히기를 그만두고 개인들이 타자들로부터 일정한 행동을 요구할 수 있는 정도를 규제하는 규칙으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권리들은 전형적으로 개인들에 의해 소유되거나 개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표현들은 도덕 규칙들을 단지 행동을 명령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개인들의 도덕적 적절성(propriety)을 형성한다는 이해를 반영한다. 규칙들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될 때에만, 우리는 옳고 그른 행위들뿐만 아니라 권리들과 잘못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II

‘내가 -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두 유형의 상황

(A) 권리 주장자가 다른 사람의 자유의 간섭에 대한 정당화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정당화를 갖지 못한다.) 예) ‘나는 내 서비스에 대해 당신이 약속한 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

(B) 권리 주장자가 타인에 의한 어떤 간섭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반대하는 경우. 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다.’


(A) 특수한 권리들(Special rights)

  권리들이 개인들 사이에 특수한 거래로부터 발생할 때 권리를 가진 사람과 obligation을 가진 사람은 특수한 거래 당사자들에 제한된다. 이런 권리들을 특수한 권리들이라 부를 것이다. 이 권리들은 모두에게 obligation을 지우는 권리들로 생각되는 도덕적 권리들과 구별된다.

(i) 약속으로부터 발생하는 특수한 권리들

약속에 의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obligations를 발생시키고 약속을 한 사람에게 권리를 창출하거나 부여한다. 이 경우 우리는 어떤 행위와 관련된 당사자의 선택의 자유의 도덕적 독립성을 변경시키고 새로운 도덕적 관계를 창출한다. 그래서 약속을 받은 사람이 약속해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만든다.


약속으로부터 파악되는 모든 특수한 권리들의 특징 두 가지

i) 권리와 obligation이 발생하는 이유는 약속된 행위가 그 자체로 특정한 도덕적 질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당사자들 간의 자발적 거래 때문이다.

ii) 당사자들의 동일성(identity)이 핵심적이다.


(ii) 동의에 의한 권리 부여: 권리의 양도

  당신이 내 이익을 돌보도록 동의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했지만, 당신이 간섭한다고 불평할 수 없는 그런 권리를 당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권리의 양도이다. 이 경우에도 권리를 양도 받은 사람만이 이런 [간섭할 수 있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특징으로 확인된다.


(iii) 제한의 상호성(mutuality of restrictions)

  제한의 상호성을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정치적 의무(political obligations)를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이 동의나 약속과 같은 권리-창출 거래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규칙에 따라 어떤 공동의 기획을 수행하고 따라서 그들의 자유를 제한할 때, 이러 재한에 복종해온 사람들은 그들의 복종에 의해 이익을 얻어온 사람들로부터 유사한 복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규칙에 복종할 moral obligation은 사회의 협력적 구성원들 때문이고, 그들은 복종에 대한 상관적인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사회 계약론은 법에 대한 복종의 의무(obligations)가 benevolence의 특수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의 구성원들이 상호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의 실수는 약속과 같은 패러다임 사례를 권리를 창출하는 상호 제한의 상황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iv) 부모와 자식과 같이 특수한 자연적 관계의 경우 권리와 obligation이 창출된다.


(v)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속되어 있는 obligation에서 한 사람이 면제되지만, 상관적인 obligation이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아닌 경우 특수한 자유들이 특수한 권리들과 구별된다. 타인에게 간섭할 자유가 아니라 권리가 주어진 경우들은 licence가 그 권리를 부여한 사람에 의해 마음대로 철회될 수 있지 않은 경우들이다.



(B) 일반적 권리들(General rights)

  일반적 권리들은 정당화되지 않은 간섭이 예견될 때 그 간섭이 정당화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 주장되는 권리들이다.

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다.’, ‘나는 os 마음대로 숭배할 권리가 있다.’


일반적 권리와 특수한 권리의 공통점

i) 이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타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즉, 그가 간섭해서는 안 됨을 결정하기 위한 도덕적 정당화를 갖는다.

ii) 권리 주장자가 행위의 수행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는, 그 행위의 성격으로부터 도덕적 정당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권리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의 예시라는 점이다.


일반적 권리와 특수한 권리의 차이점

i) 일반적 권리는 특수한 관계나 거래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ii) 일반적 권리는 특정한 사람이 갖는 권리가 아니라 선택할 능력이 있는 모든 인간이 갖는 권리이다. (특수한 권리를 발생시키는 특수한 조건들이 없는 상황에서)

iii) 일반적 권리는 간섭하지 말아야할 상관물로서 obligations를 갖는데, 모든 이들은 이 obligations에 종속된다.


일반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수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특수한 조건들에 의해 구성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일반적 권리의 주장은 직접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울 권리를 평등하게 갖는다는 원칙에 호소하는(invoke) 것이다.

특수한 권리의 주장은 그 원칙에 간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III


타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이 도덕적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권리 개념은 도덕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런 정당화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권리’를 사용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도덕적 정당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이것이 도덕적 권리들의 인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짐에 대한 인정이 함축됨을 정립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리를 구성시킬 수 있는 간섭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의 유형과 관련하여 ‘하나의 권리’의 의미에 내재하는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그 원칙은 전적으로 공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간섭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는 일정한 특수한 조건들에 제한되어 있음이 분명하고, 이것은 ‘하나의 권리’의 의미에 내재해 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우리가 도덕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근거에 따라 간섭을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사실 간접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우리의 정당화로 호소하고 있다.


 

제 3 장 동물에게도 평등을


제 1 절 인종주의와 종족주의


1.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 모든 인간의 평등을 보장해 줄 평등의 근본적인 원칙

우리가 도덕적 사고를 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들에 대하여 동등한 비중을 둔다는 것. (p. 43, 제 2 장)


2. 인간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로 확장

①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이 인간 종족 내에서 타자 관계에 대한 도덕적 근거로 타당하다면, 인간이 아닌 동물들과의 관계에도 타당한 도덕적 근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② 논거: 고통을 겪는 능력, 고통을 받거나 기쁨을 얻는 능력은 이익일반을 갖기 위한 전제이다. 따라서 타자의 이익을 고려할 때 감각(sentience)이 유일한 경계선이다.

  (고통에서 벗어나야 할 궁극적인 도덕적 이유는 고통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 p. 43)

③ 함축: 당사자의 이익 고려에서 당사자가 누구를 닮았느냐, 어떤 능력을 가지느냐와는 무관하다. 단순히 다르다는 사실로 다른 종의 존재들을 착취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④ 예: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은 유럽계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같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종족의 차이로 고통의 가치평가를 할 수는 없다.


3. 반론과 재반론

① 반론 i):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과 실험실 쥐의 고통은 다르다.

⇔ 재반론: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이 암으로 죽는 인간 아닌 것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한 이익의 평등 고려를 확장하지 못하게 하지 못한다.

-같은 양의 고통: 아기를 한 대 칠 때의 고통의 양은 말의 경우 큰 매로 두들겨 팰  때의 고통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에게 마땅한 이유 없이 그만한 고통을 가하 는 것이 잘못이라면 마땅한 이유 없이 말에게 같은 양의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 마찬가지로 쥐에게 마땅한 이유 없이 고통을 가하는 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

- 인간은 예기적 두려움을 갖지만 동물은 그런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반론?

→답변: 실험에서 정상적인 성인보다는 동물을 이용해야 할 종족주의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답변은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어린이들 등을 실험에 사용할 이유를 제공할 것이다.

② 반론 ii): 여러 종족들의 고통 비교 불가능하다.

⇔ 재반론: 인간들의 고통 역시 정확히 비교될 수 없다.

⇨ 결론: 고통은 나쁜 것이며, 고통을 겪고 있는 존재는 인종, 성, 종족에 관계없이 방지되거나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이 얼마나 나쁘냐 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 그것이 얼마나 지속적인가에 달려 있다.



제 2 절 종족주의의 실제

1. 음식으로서의 동물

① 주장: 동물 고기가 필수품이기보다 사치품일 때 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다.② 근거: 동물의 고기는 사람들이 그 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먹는 사치품이다.

i) 동물의 고기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적합한 음식을 쉽게 얻을 수 있다.

ii) 동물의 고기가 양호한 건강상태나 장수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의학적)

iii) 동물 고기는 동물 사육에 사용된 곡물의 영양가의 10% 정도만 인간에게 소비된다.

⇒ 동물 고기를 먹는 인간의 이익은 먹혀지는 동물의 생명과 복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에 따를 때 작은 이익 때문에 큰 이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예외: 에스키모들은 육식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 환경에 살고 있으므로, 생존이라는 이익이 그들이 죽이는 동물의 생존이라는 이익을 능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2. 동물 실험

(1) 동물 실험 옹호 주장의 모순점: 동물 실험은 인간에 대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주장이 동물 실험의 정당화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이 경우, 동물 실험 옹호자는 인간과 동물이 중요한 점에서 비슷하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2) 예에 의한 반대

① 생산품 안정성 시험을 위한 동물 실험. 이것들은 인간의 고통을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 제약회사의 샴푸와 화장품 시험을 위한 드레이즈 테스트(Draize test), 인공색소나 방부제와 같은 식품 첨가물에 대한 LD50 시험.)

② 핵공격을 받은 후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군인들의 능력 알기 위한 붉은털 원숭이 실험

③ 대학의 여러 실험

⇒ 이러한 동물 실험에서 인간의 이익이란 없거나 매우 불확실하다. 반면에 다른 종의 구성원들이 잃게 되는 것은 확실하고 실제적이다.


(3) 동물실험 찬성론자들의 [공리주의적] 반론: 동물실험 반대론자들은 한 마리의 동물 실험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동물 한 마리 < 인간 수천 명)

① 싱어의 답변: 하나 혹은 한 다스의 동물이 수천을 구하기 위하여 실험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옳고, 이익에 대한 평등한 고려와도 일치한다.

② 동물 실험 반대론자들의 반론: 그렇다면, 회복불가능한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고아에게 그 실험을 하려고 하는가? 동물과 뇌손상자들을 도덕적으로 구별하는 특징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그런 인간에게 실험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면, 동물 실험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3. 종족주의의 다른 형태들

모피무역, 여러 종류의 사냥, 서커스, 로데오, 동물원, 애완동물 사업 등.



제 3 절 몇 가지 반론들


1.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동물이 고통을 당할 때의 행동으로 알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① 모든 척추동물, 특히 새나 포유동물의 신경체계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것과 유사하다.

②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을 수 있게 하는 어떤 근거도 식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식물은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된 신경체계가 없다.


2. 동물들은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가?

(1) 동물은 동물을 먹는다.

①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반대: 생선의 위 속에 더 작은 생선이 들어 있었다. 생선들이 서로 먹는다면 인간이 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② 싱어의 반론

i) 동물이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음식 확보를 위한 것이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동물 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다.

ii) 동물들로부터 도덕적 지침을 구해야만 한다는 논변을 사용하는 것은 기이하다.

iii) 동물은 여러 대안을 고려할 능력이나 식사의 윤리성을 반성할 능력이 없다. 동물들에게 그들의 일에 책임을 지우거나 그들이 다른 동물을 죽인다고 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대접 받아야 한다고 판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한 육식

①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한 진화론적 육식 옹호론: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강한 놈이 약한 놈을 먹고 산다. 동물은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는 왜 먹지 말아야 하는가?

② 반론

i) 사실상의 잘못: 동물을 먹는 것이 자연적인 진화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가정이 잘못이다. 생존을 위해 사냥하는 소수의 원시문화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공장식 농장의 대규모 가축 사육은 생존과 상관이 없다.

ii) 추론상의 잘못: 동물이 동물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그러한 육식 과정에 간섭하는 것이 그릇도니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2년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아이를 낳지 않도록 간섭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3. 인간과 동물의 차이들

(1) 도구나 언어 사용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구별 경계인가

①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 → 갈라파고 섬의 딱따구리는 선인장 가시 이용

② 인간만이 도구를 유일하게 만든다? → 탄자니아 정글의 침팬지가 나뭇잎을 씹어 스펀지를 만들고, 벌레를 잡을 도구를 만들기 위해 가지에서 잎을 훑는다.

③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은 미국식 수화를 배웠다. 고래와 돌고래는 그들 나름의 복잡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존재의 고통을 무시할 이유는 될 수 없다.


(2) 생각이나 추론, 자의식, 자율성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경계인가?

자의식적 존재가 우선적 고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자의식적인 존재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그의 이익에 반할 것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자의식적이지 못한 존재의 이익에는 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도라면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과 양립가능하다. 그러나,

① 반박 1: 자의식적인 존재의 고통이 단순히 감각적인 존재의 고통보다 더 크지 않을 경우,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로운 존재이므로 전자의 고통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즉, 자의식의 유무가 이익의 비교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 자의식은 고려될 필요가 없다.

② 반박 2: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인간은 다른 많은 동물들보다 더 자의식적이지도 않고 더 자율적이지도 않다. 자의식과 자율성의 간격이 도덕적 위치의 차이를 결정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동물로서의 도덕적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3) 자율성과 자의식을 구별 기준으로 삼아도 문제 없다는 주장 세 가지

① 주장 1: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정상적인 인간의 종에 속하는 구성원이기 때문에 마치 정상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진 듯이 다루어야 한다.

⇔ 반론: 사람들을 개인으로 다루어야지 집단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민족 집단간 IQ의 차이). 특정한 인종이나 성에 속하는 사람들을 더 잘 대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듯이 우리 종족의 구성원을 다른 종족의 구성원보다 더 잘 대해서는 안 된다.

② 주장 2: 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인간이며, 우리는 다른 동물과 가지지 못하는 특별한 관계를 그들과 갖는다.

⇔ 반론: 애정에 의존하는 이 입장은 도덕적 의무를 감정에 호소하는 문제가 있다.

③ 주장 3: 미끄러운 경사길 논변 - 예를 들어, 일단 우리가 정신적 장애를 가지는 사람이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허용하면, 우리는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해서, 사회적 부적응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등의 전체주의로 나아간다. 따라서 음식으로 사용되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의 구분 기준으로 종족을 제시할 수 있다.

⇔ 반론: 위의 위험으로 감각 있는 존재들이 익을 무시하는 상황을 교정하려는 시도를 단념할 필요는 없다.


4. 윤리와 호혜성

① 계약론적 주장: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동물은 윤리적 계약의 경계 밖에 있다.

② 반론: 윤리적 판단의 기원에 대한 설명(explanation)과 판단의 정당화(justification)를 구분해야 한다. 윤리학의 기원을 상호 이익을 위한 묵시적인 계약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럴듯하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윤리체계의 옳음이나 그름에 대한 견해를 무엇이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계약론적 윤리관은 상호 이익의 묵시적 계약에 대한 보편화 과정을 인간 공동체라는 경계에서 정지시킨다.

③ 계약론의 문제점:

i) 윤리의 영역에서 동물,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나 유아 등을 배제

ii) 계약의 궁극적 이유는 자기이익이다. 윤리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면 윤리적으로 대우할 이유가 사라진다.

iii) 노예들은 계약 주체가 아니게 된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은 아무런 의무가 없다. 후손들에 대한 의무가 없다.

④ 느슨한 계약론의 대안: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실제 상호작용의 능력과 무관하게, 그런 능력의 소유 시점과 무관하게 상호 협약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도덕적 공동체 내에 있는데, 이들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실제로 그들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느냐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들이 언제 이러한 능력을 가지느냐와 무관하게, 상호적인 협약에 참여할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가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 반론: 더 이상 상호성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다.

제 5 장 살생: 동물


제 1 절 동물도 인격체일 수 있는가?


어떤 동물이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1) 동물이 자의식적이란는 증거들

침팬지 와슈와 저지 원숭이 코코와 미카엘의 수신호 조작, 오랑우탄 찬텍의 수화 학습: 원숭이들은 과거나 미래의 사건을 가리키는 데 수신호를 사용한다.

⇒ 수신호를 하는 원숭이들이 자의식적이라 가정해 보자. 그들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자의식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닌 동물 중 그들이 예외적임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이러한 동물들과 다른 동물들이 자의식적이라는 점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것인가?

(2) 반론: 스튜어트 햄프셔(Stuart Hampshire)와 리히(Michael Leahy) - 사유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동물은 언어가 없으므로 반성할 수단과 미래의 행위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단이 없다. 따라서 이런 동물에게 의도를 부여할 수 없다.

(3) 싱어의 재반론: 언어가 없는 동물도 의도를 가지고 있다. 동물이 개념적으로 생각한다고 가정해야 설명되는 예들이 있다. 열쇠로 상자를 열어 바나나를 얻는 침팬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나뭇잎을 먹는 침팬지, 암컷 유인 시 지배적 수컷을 기만하는 침팬지, 바나나를 얻기 위해 어른 침팬지가 떠날 때가지 기다리는 어린 침팬지 ⇒ 침팬지도 의도를 갖고 추리.



제 2 절 인간 아닌 인격체를 죽이는 것


인간 생명의 신성성 이론

① 주장: 인격체의 생명은 신성하다는 주장. 인간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 특별한 가치를 가지거나 보호되어야 한다.

② 이 주장의 확장: 인간이 아닌 어떤 동물이 인격체라면 이 동물의 생명도 특별한 가치를 갖거나 보호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우리 종족의 생명을 다른 종족의 생명보다 중요시하는 이론을 배격해야만 한다.

→ 파생되는 결과: 다른 종족의 어떤 구성원은 인격체이며, 우리 종족의 어떤 구성원은 인격체가 아니다. [인격체가 생명의 가치 평가에서 중요한 기준이라면,] 인격체인 다른 종족의 구성원보다 인격체가 아닌 우리 종족의 구성원을 죽이는 것이 언제나 더 나쁜 것은 아니다. 즉, 인격체인 침팬지를 죽이는 것은 인격체가 아니고 될 수도 없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고래, 돌고래, 개 또는 고양이도 자의식적이고 미래감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인격체일 가능성이 있다.

④ 의심의 이득: 만약 인격체를 죽이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을 죽이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죽이려는 어떤 존재가 인격체인지 아닌지 의심이 간다면 죽이지 말아야 한다. (사슴 사냥꾼들의 규칙) 이에 따라 동물 살생은 그릇된 일이다.


제 3 절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


1. 동물 살생에 반대하는 공리주의적인 간접적 이유들

① 동물을 죽이는 많은 방식들이 즉각적 죽음을 주지 않는다.

② 한 동물의 죽음이 그 짝이나 그 무리의 다른 구성원에게 주는 영향도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살생이 일으킬 수도 있는 고통이나 아픔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는 살생을 반대할 이유가 될 수 없다.


2. 살생이 고통 주지 않고 다른 것들에 손해를 주지 않을 때 공리주의적 판단

(1) 사전 존재적 견해(prior existence view): 고통보다 많은 쾌락이 있을 것 같은 삶을 살 존재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 육식을 위한 동물 살생은 일반적으로 그릇된 일이다. 육식을 통해 갖게 되는 우리의 이익은 그들이 누릴 쾌락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전체적 견해(total view): 육식의 정당화에 사용됨- 대체가능성 논변

① 주장: 감각 있는 존재가 쾌락과 같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경험을 하는 한, 그러한 존재는 가치 있는 존재이다. 감각 있는 존재는 가치로운 것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며, 내용물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을 수 있듯이 감각 있는 존재는 대체 가능하다. 따라서 육식가들은 일부 동물을 먹음으로써 쾌락의 상실을 야기하지만, 더 많은 동물의 출생을 야기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다른 동물에 부여하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육식을 정당화할 수 있다.

② 대체가능성 논변에 대한 반론

  i) 현대의 공장식 농장에서 고통스럽게 사육되는 동물의 육식을 정당화할 수 없다.

  ii) 육식옹호자들은 왜 가능한 최대다수의 행복한 존재들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더 좋은지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인간을 제거하는 것이 행복을 증진시킨다면?)

③ 솔트의 반론: 존재와 비존재의 비교를 시도하는 것은 혼동된 사고에 기인한다.


(3) 파피트(Derek Parfit)의 가설적 상황: 대체 가능성 논변을 강화하는 상황이다.

 

첫 번째 여인

두 번째 여인

상황

임신 3개월. 태아는 미래의 삶의 질을 낮출 결함을 가짐. 부작용이 전형 없는 약을 먹으면 결함 완치 가능

3개월 내 임신하면 아이는 아이의 삶의 질을 상당히 낮출 수 있는 치료불가능한 결함 가짐. 3개월 후 임신 시 결함 없음.

선택

약을 먹지 않았음

기다리지 않고 임신함

판단

여인은 잘못했음

여인은 잘못하지 않았음

근거

아이에게 해를 끼쳤음. 약을 먹었다면 결함 치료 가능

여인의 대응: 3개월 후 임신했으면 이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임.

① 두 번째 여인이 잘못했다고 믿는다면,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3개월 후 임신했을 때 태어났을 아이를 존재하지 못하게 한 것이 잘못이라고 대답하려면, 다른 사정이 같다면 장애 없는 아이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② 낳을 수 있었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덜 만족스러운 삶의 질을 가진 아이를 낳은 것이 잘못이라고 대답하는 것. 즉,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 그러나 이 대답 역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 파피트의 가설적 상황으로부터 본 대체 가능성의 문제에 대한 대답

① 핵심 문제: 대체 불가능성의 기준 - 가능적인 사람으로부터 실재적인 사람으로 가는 과정의 어떤 단계에서 대체가능성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② 대체 불가능성의 기준: 자신을 일정한 시기에 걸쳐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그래서 더 오래 살기를 갈망할 수 있는 자의식적인 능력이 대체 불가능성의 구별 기준이다.

③ 선호공리주의로부터의 지지: 선호공리주의는 고통이나 행복보다는 선호의 만족에 관심을 갖는다.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는 개별자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의미로도 어떤 양의 행복을 담고 있는 용기로 간주될 수 없다. 자의식적인 존재들의 경우 계속 살기를 욕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존재들의 죽임은 다른 존재들의 태어남으로 보완될 수 없는 손실을 가하는 것이다. 반면, 의식적이지만 자의식을 결여한 존재들은 쾌락과 고통과 같은 경험들의 그릇들이라는 그림에 거의 일치하여 살고 있다. 이런 비자의식적인 존재들의 경우 태어나게 함과 죽임이 서로를 상쇄한다.

④ 보편화 가능성의 시험으로부터의 지지: 내가 자의식적인 존재가 되었다가 의식적이지만 비자의식적인 존재가 된다고 할 때, 오직 전자의 경우에만 미래지향적 욕구를 갖는다. 이 경우에만 죽음은 일시적인 의식의 상실보다도 큰 상실이며 다른 존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보완될 수 없다.


(5) H. L. A. Hart의 비판에 대한 고려

① 하트: 공리주의자에게는 자의식적 존재도 비자의식적 존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체 가능해야만 한다. 선호공리주의자냐 고전적 공리주의자냐 하는 것은 아무 차이가 없다. 즉, 선호 공리주의 역시 극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어떤 선호들이 다른 존재의 선호에 의해 능가될 수 있다면, 왜 그들을 대체한 존재들의 새로운 선호에 의해서는 능가될 수 없는가?

② 반론: 현존 선호의 만족은 좋은 일이지만, 새로운 선호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일괄거래는 현존 선호의 만족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선호를 만들고 충족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③ 선호를 도덕장부 상의 부채로 생각하는 방법

i) 선호를 만드는 것은 도덕장부 상의 부채로 생각될 수 있다. 충족되지 않는 선호를 만들면 부채를 지는 것이고, 이것은 그릇된 일이다. 한 아이를 태어나게 하여 그의 선호가 충족될 수 있다면 상쇄할 수 있는 부채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다.

ii) 파피트의 두 여인에 대한 판단: 둘 모두 잘못이다. 두 여인은 모두 그들이 낳을 수 있었던 아이보다 장부에 보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아이를 쓸데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iii) 이 견해의 문제점: 최선의 삶도 장부에는 조그만 부채를 남기게 된다. 우리들 중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선호를 만들고 충족시키는 것에 대한 도덕장부 모델은 성립하지 않는다.

④ 여행 모델:

i) 한 유아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결정하는 것을 진행 중인 여행을 금지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는 심각하게 나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항해자는 아무런 계획도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ii) 점차 잠정적으로라도 목적지가 정해지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연성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이 행해짐에 따라, 그 여행을 끝내게 하는 것이 점점 더 그릇된 일이 된다.

iii) 이 모델에 따르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 존재들은 교체 불가능하다.

iv) 이 모델에 따르면 비참한 존재를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존재를 실망과 좌절에 빠지도록 되어 있는 여행으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파피트의 두 여인은 모두 같은 정도로 그릇된 일을 했다.



제 4 절 맺는 말


① 동물 중 자신을 과거와 미래를 가지는 개별적 존재로 생각하는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② 이성과 자의식이 없는 동물을 죽이는 경우에는 살생에 반대하는 주장이 약하다. 이런 동물을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그릇되었다면 그것은 이 존재가 담고 있는 쾌락의 감소 때문이다. 이런 동물들이 전체적으로 보아 즐거운 삶을 살지 못했을 것 같은 때에는 직접적으로 그릇된 것이 없다. 또 이들이 상실한 이익은 존재하게 될 다른 동물의 이익에 의해 대체 가능하기도 하다. 한 동물이 즐거운 삶을 살고 있고 고통 없이 죽음을 당하며 그 동물의 죽음이 다른 동물에게 고통을 일으키지 않고 그 동물이 죽지 않았더라면 태어나 살 수 없었을 다른 동물의 삶에 의해 대체 가능한 경우에는, 자의식이 없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 그릇되지 않을 수 도 있다.

③ 그러나 이런 관점의 적용은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 관점은 공장식 농장도 정당화할 수 없고(고통 가함), 야생동물의 살생도 정당화할 수 없다(대체되지 않음).

④ 실천적 도덕원칙의 수준에서,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음식을 얻기 위한 동물 살생은 전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플라톤의『국가•정체』, 박종현 역, 서광사, 1997 

 


1.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


  “저로서는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자의 편익(이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 주장합니다.” 338b (p. 82)

  “적어도 법률(nomoi)을 제정함에 있어서 각 정권(arche)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하여서 합니다. 민주 정체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주 정체는 참주 체제의 법률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정치 체제들도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를, 즉 자기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올바른 것으로서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 및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자로서 처벌하죠.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게 바로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 즉 수립된 정권의 편익이 올바른 것이지요. 확실히 이 정권이 힘을 행사(지배)하기에, 바르게 추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올바른 것은 동일한 것으로, 즉 더 강한 자의 편익으로 귀결합니다.”  338d-339a (pp. 83-84)


소크라테스의 반론: 트라시마코스는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통치자들도 실수를 한다. 어떤 법률은 옳게 제정하지만 어떤 법률은 옳게 제정하지 못한다. 이때 옳게 제정한 것은 자신들에게 편익이 되도록 제정한 법률이고, 옳지 못하게 제정한 것은 통치자들 자신들에게 편익이 되지 못하게 제정한 법률이다. 따라서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통치자들에게 편익이 되지 못하는 것을 따르는 것도 올바른 것이 된다. 따라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자기논박적이다. 339b-339d (pp. 84-85)


트라시마코스의 재반론: 전문가가 실수를 하는 때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한에서만 전문가이다. 그래서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 실수하지 않으며, 실수를 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정하게” 된다. 341a, (p. 88)


소크라테스: 어떤 기술은 그 기술들이 관여하는 대상의 편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 어떤 전문적지식(episteme)도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를 받는 자의 편익을 생각하며 지시”한다. 342d, (p. 92)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 밖의 다른 어떤 통솔(다스림, arche)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또한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342e, (pp. 92-93)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양이나 소를 치는 이들이 양이나 소에게 좋은 것을 생각하며 이들에게 좋은 것을 해주는 것이 사실은 양이나 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양이나 소를 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통치술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래서 “올바름 및 올바른 것이란실은 ‘남에게 좋은 것’, 즉 더 강한 자 및 통치자의 편익이되, 복종하며 섬기는 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인 반면에, ‘올바르지 못함’은 그 반대의 것이어서, 참으로 순진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조종하거니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저 강한 자에게 편익되는 것을 행하여, 그를 섬기며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결코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343b-d (pp. 93-94)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목자 논변에 반박한다. 그는 “모든 다스림(통솔)은 ,그것이 다스림인 한은, 나라의 다스림이든 또는 사사로운 다스림이든 간에, 다름 아닌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돌봄을 받는 쪽을 위한 최선의 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345d-e (p. 98).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도 자진해서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밖의 다른 다스림에서도 자진해서 다스리려 하지 않으며 보수를 요구한다는 경험적 사실 때문이다. 345e, p. 98.


소크라테스는 이어, “각각의 기술이 제공해 주는 이득은 그 특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346c (p. 99) 그래서 전문가가 얻는 보수와 같은 이득은 부수적 이득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통치자들이 얻는 이득은 부수적 이득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기술(techne)이나 다스림(통치: arche)도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줄곧 말해 왔듯, 그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며 지시를 내린다는 것, 다시 말해서 더 약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오. 보시오, 트라시마코스 선생! 바론 그런 까닭으로 해서 방금도 내가 말했던 것이오. 아무도 자진해서 다스리는 일(통치)을 맡아 남의 나쁜 일들을 바로잡는 일을 하려 들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보수를 요구하는데, 이는 자신의 기술로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을 하지도 않으며, 또한 자신의 기술에 다라 지시를 내릴 경우에도, 그런 것을 지시하는 일도 없고, 오히려 그 다스림을 받는 쪽을 위한 최선의 것을 하고 지시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오. 다스리는 일(관직)을 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인 것 같소. 그럿이 돈이든 명예이든 간에, e는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게 벌이 되는 간에 말이오.”라고 말한다. 346e-347a (p. 100)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보다 더 행복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347e (p. 102)

우선, 소크라테스는 “나라나 군대,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 또는 어떤 집단이 올바르지 못하게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에, 만약에 그들이 자기네기리 서로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다면, 그 일을 그들이 조금인들 수행해 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351c (p. 112) 그래서 “올바르지 못함의 기능(ergon)이 이런 것이라면, 즉 그것이 깃들인 곳에는 증오를 생기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자유민들 사이에서건 도는 노예들 사이에서건 간에 일단 생기게 되면, 그것은 서로들 미워하고 대립하게끔 만들고, 다라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351d-e (p. 112) 소크라테스는 이를 한 개인 차원에도 적용한다. 그래서 “올바르지 못함은 한 개인 안에 깃들이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이 본성상 하게 되어 있는 바로 그런 작용들을 하게 될 것으로 나는 생각하오. 첫째로, 그것은 당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갈등이 생기게 하고 한 마음이 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들 것이며,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이 되게끔 만들고 말 것이오.” 352a (p. 113)

소크라테스는 이를 기능, 특히 혼의 기능으로부터 논증하고자 한다.

“어떤 기능이 부여되어 있기도 한 각각의 것에는 ‘훌륭한 상태’(훌륭함: arete) 또한 있다”고 한다. 353b (p. 116). 그래서 “‘그 특유의 훌륭한 상태’에 의해서는 그 기능이 제 할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되지만, ‘나쁜 상태’에 의해서는 나쁘게 수행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353c (p. 117) 이를 혼에 적용하여 “나쁜 상태의 혼으로서는 ‘잘못’ 다스리고(통솔하고) 보살피겠지만, 훌륭한(좋은) 상태의 혼으로서는 이 모든 일을 ‘훌륭하게(잘) 해내게’ 될 게 필연적”이라 주장하며 353e (p. 118), “우리는 앞서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은 혼의 ‘훌륭한 상태’(훌륭함, 덕)이지만, ‘올바르지 못함’은 그것의 ‘나쁜 상태’ (나쁨, 악덕)라는 데 동의”했음을 상기시키면서 353e (p. 118), “올바른 혼과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게(잘) 살게 되겠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353e (p. 118). 결과적으로 “훌륭하게(잘) 사는 사람은 어쨌든 복받고 행복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이는 그 반대일 것”이며 354a (p. 118), “올바른 사람은 행복하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54a (p. 119)






2.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국가』 2권에서 올바름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이론적으로(in theory; 말로) 세워 보는 국가


“어쩌면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아내기도 더 쉬울 걸세. 자네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도록 하세나.” 368e-369a (p. 146)

“만약에 우리가 이론상으로 수립되고 있는 한 나라를 관찰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나라의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 역시 생겨나고 있는 걸 보게 되겠지?” 369a (p. 146)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라가 생기는 것은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일세.” 369b (p. 146)

“나라를 수립시키는 것은 우리의 ‘필요’가 하는 일인 것 같으이.” 369c (p. 147)

“여러 가지 필요 중에서도 첫째이며 가장 중대한 것은 생존을 위한 음식물의 마련일세.”  369d (p. 147)

“그리고 둘째 것은 주거의 마련일 것이며, 셋째 것은 의복 및 그와 같은 유의 것들의 마련일세.” 369d (p. 147)


공동선(common good)을 지향하는 국가

소크라테스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의 일(ergon)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koinon)으로 제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369e(pp. 147-148). 그래서 “각 부류의 사람들이 생산하게 되는 물건들을 이 나라 자체 안에서는 서로들 어떻게 나누게 되겠는가?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협력(공동) 관계’(koinonia)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었지.”라고 말한다. 371b (p. 151. 즉,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나라는 협력 공동체이다. 노동분업에 의해 각장의 필요를 서로서로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함에 있어서 유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어느 한 집단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행복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 내서 이들을 이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이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를 행복하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네.” 420b-c (p. 258)


“나라 전체를 염두에 두고서, 나라에 그런 행복이 생기도록 지켜보는 한편, 이들 보조자와 수호자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일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일꾼들로 되게끔 만들고 설득해야 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강대해지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히게 되었을 때에야, 각각의 집단으로 하여금 제 각각의 성향이 제공하는 대로 행복에 관여하도록 허용해야만 하는 것일지를 우리는 검토해야만 하네.” 421b-c (p. 260)






3.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국가의 세 계급


“각각의 것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kata physin) 적기에 하되,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에 있어서이네.” 370c (p. 149)


수호자

“수호자들의 일(기능: ergon)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만큼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를 요구하는 반면에,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도한 요하는 것일세.” 374d-e (p. 159)

“장차 우리 나라의 ‘훌륭하고도 훌륭한’ 수호자로 될 사람은 의당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 격정적이고 날래며 굳셀 걸세.” 376c (pp. 163-164)

수호자들에게 시가와 체육 등을 교육한 다음에 할 일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야 바로 이들(수호자들) 중에서 누가 ‘다스리고’, 또 누가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하는게 아니겠는가?” 412b (p. 243) 그래서 “통치자들은 수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어야만 되니까, 이들은 나라를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412c (p. 243)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자신을 단정하고 조화로운 사람으로 드러내 보인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가장 유용한 사람일 걸세.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나 청연들 사이에서 그리고 어른들 사이에서 언제나 그런 시험을 거쳐 더럽혀지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을 우리는 나라의 통치자 및 수호자로 임명해야 하네.” 413e-414a (p. 246)

“그러니까 이들이야말로 외부의 적들에 대하여서도 그리고 내부의 동료들에 대하여서도 참으로 ‘완벽한 수호자들’이라 불러 지당할 것인즉, 이들은 내부의 동료들이 나라를 해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한편으로, 외부의 l적들이 그럴 수도 없도록 하겠지? 하지만, 이제껏 우리가 수호자들이라 불러 왔던 그 젊은이들은 통치자들의 신념을 위한 보조자들 및 협력자들이라 불러 마땅할 테고?” 414b (p. 247)

이 대목에서 보듯이 수호자에서 통치자와 보조자가 나타난다.

(신이 통치자는 황금, 보조자는 은, 생산자(농부와 장인들)에게는 청동을 섞어서 태어나게 했다는 설화. 415a-c (pp. 249-250).


따라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국가는 통치자로서의 수호자, 보조자로서의 수호자, 생산자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보조자인 수호자들이 시민들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를 제안한다.

“첫째로, 아무도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어떤 사유 자산도 가져서는 아니 되네. 그 다음으로는, 누구든 원하는 자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그런 집이나 곳간은 이들 중의 누구에게도 있어서는 아니 되네. 그리고 생활 필수품은, 절제할 줄 알고 용감한 전사들이 필요한 정도만큼의 것을 다른 시민들한테서 이들의 수호에 대한 보수로서 일정하게 정하여 받되, 이는 이들의 연간 소요량을 초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의 것이어야만 하네. 또한 이들은 공동 식사를 하면서, 마치 야영하는 군인들처럼, 공동으로 생활해야만 하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들에게 일러 주어야 할 것이니, 이들은 자신의 혼 안에 신들이 준 신성한 금은을 언제나 지니고 있어서, 이에 더하여 속인의 금은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도한 신에게서 받은 그 소유물을 사멸하는 인간의 소유물과 섞음으로써 더럽히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짓인데, 이는 다중의 화폐와 관련해서는 하고많은 불경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들의 것은 오염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일세.”416d-417a (p. 252)






4. 플라톤의 4주덕, 특히 올바름에 대하여


“물론 이 나라가 지혜롭고 용기 있으며 절제(절도) 있고 또한 올바를 것이라는 건 아주 분명하이.” 427e (p. 274)


1. 지혜(sophia):

“우리가 자세히 말한 이 나라는 정말로 지혜로운 나라일 것으로 내게는 생각되네. 그건 이 나라가 분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428b (p. 274)

“그렇지만 바로 이것, 즉 분별은 일종의 앎(episteme)인 것이 분명하이. 사람들이 분별 있게 되는 것은 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게 확실하겠기 때문일세.” 428b (p. 274)

“이제 막 우리에 의해서 수립된 이 나라에 사는 시민들 중의 어떤 사람들에겐 이런 어떤 지식이 있는가? 즉 이 나라의 부분적인 것들 중의 어떤 것에 관련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전체와 관련해서 어떤 방식으로 이 나라가 대내적으로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가장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를 숙의 결정해 주게 될 그런 지식 말일세.” 428c-d (p. 275) (이것이 수호술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지혜로운 것은 수호자들이 수호술이라는 지혜를 갖고 때문이라 본다.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그 작은 부분, 즉 각자 안에서 지배를 하며 이것들을 지시한 그런 부분에 의해서이니, 이 부분은 그 나름으로 이들 세 부분의 각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들 셋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유익한 것에 대한 지식을 그 자신 속에 지니고 있네.” (개인의 혼의 지혜와 관련하여)


2. 용기(andreia)

“내 말은 용기란 일종의 보전이란 뜻일세.” 429c (p. 277)

“법에 의한 교육을 통해, 두려워할 것들이 무엇무엇이며 또 어떠한 것들인지, 이와 관련해서 생기게 된 소신(판단)의 보전일세.” 429c (p. 277)

“두려워할 것들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관한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판단)’의 지속적인 보전과 그런 능력을 나로서는 용기라 부르며 도한 그렇게 간주하네.” 430b (pp. 278-279)

“나라를 위해 전쟁을 하고 군인으로 복무하는 이 부류 이외의 다른 어떤 걸 보고서 그 나라를 비겁한 나라니 또는 용기 있는 나라니 하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429b (pp. 276-277)

즉, 소크라테스는 한 국가가 용기 있는 것은 수호자들이 용기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절제

“절제란 어쩌면 일종의 질서요, 어떤 쾌락과 욕망의 억제일 걸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이긴다’(자기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표현을 써서 ... 말하듯이 말일세. 430e. (pp. 280-281)

“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한결 나은 것과 한결 못한 것이 있어서, 성향상 한결 나은 부분(면)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할 경우, 이를 가리켜 ‘자기 자신을 이긴다’고 말하는데, 이는 어쨌거나 칭찬하는 것일세.” 431a (p. 281)

“단순하며 절도 있는 욕구는, 지성(nous)과 바른 판단을 아울러 갖춘 헤아림(추론)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어서, 소수의 사람에게서, 성향에 있어서도 가장 훌륭하지만 교육도 가장 훌륭하게 받은 사람들에게서 만나 보게 될 걸세.” 431c (p. 282)

“이곳에서는 다수의 미천한 사람들의 욕구가 소수의 한결 더 공정한 사람들의 욕구와 슬기에 의해 제압되고 있”다. 431c-d (p. 282) 그래서 욕구가 제압되는 것을 절제라 주장한다.

“그건 용기나 지혜는 그 각각이 그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만 있어도, 뒤엣것은 그 나라를 곧 지혜로운 나라로, 반면에 앞엣것은 그걸 용기 있는 나라고 되게 하지만, 절제는 그러질 못하기 때문일세. 절제는 정말로 나라 전역에 걸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협화음처럼, 가장 약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가장 강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 그리고 중간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같은 노래를 합창함으로써 전음정을 통하여 마련되는 것일 세. ... 이 ‘한마음 한뜻’이, 즉 나라에 있어서나 한 개인에 있어서 성향상 한결 나은 쪽과 한결 못한 쪽 사이에 어느 쪽이 지배를 해야만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절제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옳을 걸세.” 431e-432b (pp. 283-284)

절제는 시민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피지배자는 복종을, 지배자는 지배를 하는 것이다.


4. 올바름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하기 시작할 당초부터 언제나 준수해야만 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게, 또는 그것의 일종이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일세. ... 각자는 자기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에서 자기의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에 종사해야 된다는 것이었네.” 433a (p. 285)

“또한 더 나아가서는 ‘제 일을 하고 참견하지 않는 것’이 올바름(올바른 상태)이”다. 433a (p. 285)

“이것이, 즉 ‘제 일을 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게 ‘올바른 상태’(올바름)인 것 같으이.” 433b. (p. 286)

“‘제 것의 소유’와 ‘제 일을 함’이 올바름(올바른 상태)이라는 데 합의를 보았네그려.” 433e-434a (p. 288)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국가에서의 올바름을 개인에게서의 올바름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한다.

“‘올바름’의 개념(형상) 자체의 관점에서는 올바른 사람은 올바른 나라와 아무런 차이도 없고, 닮은 것일 걸세.”  435b (p. 290)

“실은 한 나라가 올바른 나라인 것으로 생각된 것은 이 나라 안에 있는 성향(physis)이 다른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했을 때이며, 그리고 또한 이 나라가 절제 있고 용기 있으며, 또한 지혜로운 나라인 것도 바로 이들 세 부류가 처한 상이한 처지(감정 상태: pathos)와 상이한 습성(성격 상태: hexis)으로 인하여서였네.” 435b (pp. 290-291)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종류들을 자신의 혼 안에 지니고 있어서, 나라에 있어서의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로 인해서 나라의 경우와 똑같은 이름들로 불릴 자격이 당연히 있다고 우리는 판단할 걸세.” 435b-c (p. 291)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혼이 헤아리게(추론하게)되는 부분을 혼의 헤아리는(추론적, 이성적) 부분이라 부르는 반면, 그것으로써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 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헤아릴 줄 모르는)이며 욕구적인 부분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는 않을 걸세.” 439d (p. 300)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격정(기개: thymos)이 욕구도 아니고 이성적인 부분도 아니라는 논의를 펼친다. 439e-440c (pp. 300-303)

“나라 안에 있는 것들과 똑같은 부류의 것들이 개개인의 혼 안에도 있고, 그 수도 똑같다는 데 대해서 우리가 훌륭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네.” 441c (p. 303).

즉, 나라에 통치자, 보조자, 생산자가 있듯이 이에 대응하여, 인간의 영혼에도 이성적인 부분, 격정(기개), 욕구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복합성을 본 사람이다.


“사람이 올바르게 되는 것도 나라가 올바르게 된 것과 똑같은 방식에 의해서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걸로 나는 생각하네.” 441d (p. 304)

“실상 이 나라가 올발랐던 것이 그 안에 있는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함’에 의해서였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잊지 않고 있을 게 확실하이.” 441d (p. 304)

“우리 각자의 경우에도, 자신 안에 있는 부분들의 각각이 제 일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올바른 사람으로, 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도리 것이라는 점일세.” 441d-e (p. 304)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들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443d (p. 308)

“이와는 달리 ‘올바르지 못함’은 이들 세 부분간의 일종의 내분이며, 참견과 간섭, 그리고 혼 전체에 대한 어떤 일부의 모반임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444b (p. 309)






5. 플라톤의 이상 국가: 최선자 정체 - 철인왕(philosopher-king)이 통치하는 국가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도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과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다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껏 우리가 논의를 통해서 자세히 말해 온 그 정체가 결코 가능한 한도까지 성장하여 햇빛을 보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473c-e (p. 365)

“우리는 철학자도 지혜(sophia)를 욕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지혜는 욕구하되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자라고 주장하지 않겠는가?” 475b (p. 369)

“[참된 철학자들이란] 진리(alegheia)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하네.” 475e (p. 370)

“있는 것(실재: to on)에는 인식(앎: genosis)이, ‘있지 않은 것’(비실재)에는 필연적으로 무지가 상관할진대, 그것들 ‘사이의 것’에 상관하는 것으로는 무지와 인식(앎: episteme) ‘사이의 어떤 것’을 찾아야만 되지 않겠는가?” 477a-b (p. 374)

“그런데 우리가 의견(판단: doxa)이라고 말하는 게 있겠지?” 477b (p. 374)

“인식은 ‘있는 것’(실재)에 관계하며,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겠지?” 478a(p. 376)

“반면에 ‘판단’(의견)은 ‘의견을 갖게 됨’이겠지? 478a (p. 376)

“각각의 그 자체의 것들을, 따라서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들’을 보는 사람들의 겨우는 어떤가? 그러니까 이들은 인식을 하지, ‘의견을 갖는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479e (p. 381)

“‘각각의 실재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들)로 불러야지 의견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불러서는 아니 되겠지?” 480a (p. 382)

“‘좋음의 이데아’가 ‘가장 중요한(최고의) 배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 이데아 덕분에 올바른 것들도 그 밖의 다른 것들도 유용하고 유익한 것들로 된다는 것을 자네는 여러 차례 들었을 테니까 말일세.” 505a (p. 428)


태양에의 비유(507e-509b)(pp. 435-439)

“그러니까 ‘보는’(‘봄’의) 감각과 ‘보이는’(‘보임’의) 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종류의 것에 의해, 즉 서로를 연결해 주는 다른 어떤 멍에들보다도 더 귀한 멍에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네. 빛이 정녕 귀하지 않은 게 아니라면 말일세.”

“그러니까 원래 시각은 이 신(태양)에 대하여 이런 관계에 있겠지?”

“시각 자체도, 그리고 시각이 그 속에 있게 되는 것, 즉 우리가 눈이라 일컫는 바로 그것도 태양은 아닐세.”

“그러나 눈은 감각과 관련되는 기관들 중에서는 어쨌든 태양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일세.”

“그런데 눈은 자기가 갖는 이 힘 또한 태양에서, 마치 넘쳐 흐르는 것을 받듯, 분배받아 갖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태양도 시각이 아니고, 이(시각)의 원인이 되는 것이어서, 시각 자체에 의해 보이게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태양을 ‘좋음’의 소산(소생)으로, 즉 ‘좋음’이 이것을 자기와 ‘유비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생기게 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나. 다시 말해, ‘좋음’이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지성에나 알려질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지성(정신: nous)과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에 대해서 갖는 바로 그런 관계를 태양은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 ‘시각’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갖는다고 말일세.”

“혼의 경우도 이렇게 생각해 보게. 진리(aletheia)와 실재가 비추는 곳, 이곳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이를 지성에 의해 대뜸 알게 되고 인식하게 되어,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h보이네. 그러나 어둠과 섞인 것에, 즉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의견’(판단: doxa)을 갖게 되고, 이 의견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가짐으로써 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이번에는 지성을 지니지 못한 이처럼 보인다네.”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dynamis)을 주는 것은 ‘좋음의 이데아’라고 선언하게. 이 이데아는 인식(episteme)과 진리의 원인(aitia)이지만, ‘인식되는 것’이라 생각하게나. 반면에 이 둘이, 즉 인식(앎: gnois)과 진리가 마찬가지로 훌륭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이 이데아는 이것들과도 다르며 이것들보다 한결 더 훌륭한 것이라 믿는다면, 자넨 옳게 믿게 되는 걸세. 그러나 인식과 진리를, 마치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의 빛과 시각을 태양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만, 태양으로 믿는 것은 옳지 않듯,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이들 둘을 ‘좋음’을 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으나, 어느 쪽 것도 [바로] ‘좋음’이라 믿는 것은 옳지 않다네. 오히려 ‘좋음’의 처지(상태: hexis)를 한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네.”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의 ‘인식됨’이 가능하게 되는 것도 ‘좋음’으로 인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ousia)을 갖게 되는 것도 그것에 의해서요, ‘좋음’은 [단순한] ‘존재’(ousia)가 아니라, 지위와 힘에 있어서 ‘존재’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나.



  7권은 동굴의 비유로 시작한다. 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것을 설명하는데, 사실 이것은 계몽(enlightenment)과 다름없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것이 계몽인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계몽된 자로서의 철학자가 계몽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다른 죄수들(사람들)로 하여금 좋음의 이데아를 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계몽이 아니라 인간 전체로서의 계몽을 말한 것과 유사하게 읽힌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통치자가 되어야 할 철학자가 좋음의 이데아를 관조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에 머무르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한다.

“나라의 수립자들인 우리의 할 일은 가장 훌륭한 성향(자질)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앞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최고의) 것이라고 말한 배움에 이르도록, 그래서 ‘좋음’을 보게끔 그 오르막을 오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되, 이들이 일단 이 길을 올라, 그것을 충분히 보게 되면, 이제 이들이 허용받고 있는 걸 이들에게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일세.” 519c-d (p. 458)

“바로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할 분, 저들 죄수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서 저들과 함께 노고와 명예를, 이게 다소 하찮은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간에,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일세.” 519d (p. 458)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며, 이들로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로 하여금 더 못한 삶을 살도록 만들게 될 텐데요?” 그가 말했네. 519d (p. 458)

“여보게 자넨 또 잊었네. 법(nomos)은 이런 것에, 즉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각별하게 잘 지내도록(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걸 말일세.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에 의해서 화합하게 하고 각자가 공동체에 이롭도록 해 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그런다네. 또한 법은 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생기도록 하는데, 이는 각자가 내키는 대로 향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나라의 단합을 위해 이 사람들을 십분 이용하기 위해서일세.” 519e-520a (p. 458)

“글라우콘, 더 나아가 이 점에 유의하게나. 즉 우리의 이 나라에서 철학자들로 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지켜주도록 우리가 강요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들에게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올바른 걸 이들한테 말해 주게 된다는 걸 말일세. 우리는 이렇게 말할 걸세. ‘...하지만 우리느니 여러분 자신들과 함께 여느 시민들을 위해, 마치 벌떼 사이에 있어서 지도자들 및 왕들처럼 여러분을 탄생시켜서는, 여느 시민들보다도 더 훌륭하고 완벽하게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또한 양쪽 생활 다에 더 잘 관여할 수 있도록 했소.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느 시민들과의 동거를 위해 각자가 번갈아 내려가서는,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오.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그곳 사람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보게도 될 것이며, 각각의 상들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들의 상들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여러분이 아름다운 것들과 올바른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 진실된 것을 이미 본 탓이오. 또한 이렇게 해서 우리와 여러분의 이 나라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경영될 것이니, 결코 꿈 속에서 경영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 520a-c (pp. 458-460)



정체(Politeia)의 종류와 변혁: 정체의 변화의 원인은 관직 장악 집단의 내분

  8권 이하에서는 정체의 유형에 대해서 논의한다. 그래서 ‘최선자 정체 > 명예 지상 정체 > 과두 정체 > 민주 정체 > 참주 정체’의 도식을 설명한다. 이 각 정체에 대응하는 혼의 상태도 함께 다루는데, 결국 어떤 상태의 혼이 지배적이냐에 따라 각 정체 유형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위의 도식은 좋음의 상태에 따른 도식이면서도 정체가 나쁜 상태로 변화해 가는 순서를 나타낸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한 마디로 내분이라 할 수 있다.


① 최선자 정체: 철인왕이 통치하는 정체, 아내 공유, 아이들에 대한 공동 육아와 교육

② 명예지상정체: 승리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 잘못된 동숙으로 인해 철과 동의 성분이 든 사람들 등장하여 재화의 사유화와 노예제 수립. 이 정체의 통치자는 평화보다는 전쟁 취향인 사람들이며 재물에 대해 욕심을 낸다. 기개(격정)의 덕이 우세하여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정체이다.

③ 과두정체(oligarchia): 평가 재산에 근거한 정체. 부자들이 통치하고 가난한 사람은 통치에 관여하지 못한다. 명예지상정체는 재화의 사유화로 인해 부를 찬양하게 됨으로써 과두정체로 변화한다.

④ 민주정체(demokratia): 가난한 사람들이 내란을 일으켜 승리하게 되면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시민권과 관직을 배정하고, 관직은 추첨에 의해 할당된다. 자유 시민인 까닭에 이들은'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자유가 개개인과 각 가정에까지 스며들어 무정부상태가 된다.

⑤ 참주정체(tyrannis): 부의 분배를 미끼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선동하여 참주가 된 자는 적을 숙청한다.





Immanuel Kant, 『윤리 형이상학 정초(Grundlegun zur Metaphysik der Sitten)』, 백종현 역, 아카넷, 2005.




머리말




(1) 이성인식의 구별

① 질료적 이성인식: 어느 객관의 고찰. 특정한 대상들과 그 대상들이 종속되는 법칙들을 다루는 질료적 철학

ⓐ 물리학 - 자연의 법칙을 다룸, 자연이론. 경험 대상인 자연에 법칙들 규정함.

ⓑ 윤리학 - 자유의 법칙을 다룸, 윤리학. 자연에 의해 촉발되는 의지에 법칙들 규정함.

② 형식적 이성인식: 객관들의 구별 없이, 순전히 지성과 이성 자신의 형식 및 사고 일반의 보편적 규칙들 다룸

ⓒ 논리학: 형식적 철학. 사고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은 경험에서 취한 근거들에 의존할 수 없으므로 어떤 경험적 부분도 가질 수 없다.


(2) 순수 철학: 이론들을 오로지 선험적 원리들로부터 개진하는 철학, 경험적 부분 배제

① 논리학: 순전히 형식적인 것

② 형이상학: 지성의 특정한 대상들에 제한된 순수 철학

ⓐ 자연 형이상학: (경험적인) 물리학에 앞에 있음

ⓑ 윤리 형이상학: 실천적 인간학 앞에 있음


(3) 선험 법칙으로서의 도덕 법칙(『윤리형이상학 정초』, pp. 68-69)

① 단지 경험적인 인간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서 독립적인 순수 도덕철학의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의무와 윤리적 법칙들의 통상적인 이념으로부터 그러한 도덕철학이 있어야 함이 저절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② 만약 법칙이 도덕적으로, 즉, 책무의 근거로서 타당해야 한다면, 그 법칙은 절대적 필연성을 동반해야만 한다. (예: ‘너는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책무의 근거는 인간의 자연본성이나 세계 내의 정황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오로지 순수 이성의 개념들 안에서만 선험적으로 찾아야 한다.

③ 한낱 경험의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는 훈계는 경험적 근거들에 의지하고 있는 한, 실천적 규칙일 수는 없지만 도덕 법칙일 수는 없다.

④ 도덕 법칙은 경험적인 것을 품고 있는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며, 모든 도덕철학은 전적으로 순수한 부분에 의거하고,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선험적 법칙들을 수립해 준다.


(4)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윤리형이상학 정초』, pp. 69-72)

① 선험적으로 우리 이성 안에 놓여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원천들을 탐구하기 위해, 그리고 윤리들 자체를 올바르게 반정할 실마리와 최상의 규범이 필요하기 때문에, 윤리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②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윤리 법칙에 알맞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윤리 법칙을 위하여(때문에) 일어난 것이어야 한다.

③ 윤리 법칙에 알맞은 것은 단지 우연적일 수 있는데, 비윤리적 근거는 때때로 합법칙적인  행위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④ 윤리 법칙은 순수성과 진정성에 있어 순수 철학이 아닌 곳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순수 철학(형이상학)이 선행해야만 한다.

⑤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의 의욕 일반의 작용들과 조건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5) 『윤리 형이상학 정초』 저술에 대한 변(『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2-74)

① 형이상학을 위해 순수 사변 이성 비판 저술, 윤리 형이상학의 기초로는 순수 실천 이성 비판. 그러나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전자만큼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이성은 도덕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가장 평범한 지성에서조차도 쉽게 매우 정확하고 세밀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동일한 단 하나의 이성만이 있을 수 있고, 순전히 그 적용에서만 구별된다. 따라서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과의 통일은 어떤 공동의 원리에서 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완벽함을 성취할 수 없기에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라는 명칭 대신 ‘윤리 형이상학 정초’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③ 윤리 형이상학은 토대적인 예비 작업으로 대중적이고 또한 평범한 지성에도 걸맞을 수 있다.


(6) 정초의 목적과 집필 방식(『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4-76)

①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는 도덕성의 최상 원리의 탐색과 확립이다.

② 저술 방식:  만약 사람들이 보통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인식의 최상 원리를 규정하는 데에 이르는 분석적인 길을 취하고, 다시금 거꾸로 이 원리의 검토 및 이 원리의 원천들에서 출발하여, 그 원리가 사용되고 있는 보통의 인식에 이르는 종합적인 길을 취한다.



제 1 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 이행




(1) 선의지(『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7-80)

① 선의지: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

② 선의지가 없으면 지성, 기지, 판단력, 그밖의 정신의 재능들, 용기, 결단성, 초지일관성 같은 기질상의 성질들은 극도로 악하고 해가 될 수 있다.

③ 권력, 부, 명예, 건강, 행복도 마음 및 마음의 전체 원리에 미치는 영향을 올바르게 하고, 보편적이며 합목적적으로 만들어 주는 선의지가 없으면 악해진다.

④ 선의지는 행복을 누릴 품격[자격] 있음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을 이룬다.

⑤ 여러 성질들은 내적인 무조건적인 가치는 갖지 못하는 것으로 선의지를 전제한다.

선의지는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결과는 성취 또는 목적에 대한 유용성으로 선한 것이 아니다.

⑦ 선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킬 능력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이 의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해 오직 선의지만 남더라도, 선의지는 그 자신 안에 온전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으로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2) 본능: 행복이 목적이 아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0-82)

① 이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자에게 보존과 번영, 즉 행복이 자연의 본래 목적이라면, 본능에 의해 규칙이 정확하게 지시될 수 있을 것이고, 행복이라는 목적도 더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② 행복이 목적이라면, 자연은 이성이 실천적 사용에서 이성 스스로 행복과 그 수단을 구상해 내는 오만불손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방지했을 것이다. 즉, 자연은 목적과 수단의 선택을 본능에 믿고 맡겼을 것이다.

③ 이성이 행복에 집착할수록 인간은 참된 만족에서 멀어진다. 게다가 사람들은 행동거지에 대한 이성의 영향을 허락하지 않는 세속적인 부류의 인간을 오히려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④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은 본래 행복이 아니라 훨씬 더 품격 있는 실존의 의도에 맞춰져 있고, 인간의 사적 의도는 최상의 조건인 이 의도 뒤에 있어야 한다.


(3) 이성: 인간 실존의 의도에 대한 이념이 존재한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2-84)

이성은 의지에 영향을 미쳐야 할 실천 능력으로서 품수[선천적으로 타고남]되어 있고,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다른 의도를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를 낳는 것이어야 한다.

② 그러므로 이 의지는 유일한 선, 전체 선일 수는 없으나 최고선이어야만 하고, 행복을 포함하여 여타의 모든 선을 위한 조건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성의 개발은 행복의 달성을 갖가지 방식으로 제한한다.

③ 이성은 선의지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최고의 실천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성만이 규정하는 목적을 실현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다.


(4) 의무에 대한 명제 세 가지

더 이상의 의도가 없는 선의지라는 개념은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는 없으며 단지 계발될 필요만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 개념은 행위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언제나 상위에 있어 여타 모든 가치의 조건을 이룬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 84)


제 1 명제: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4-89)

ⓐ 의무에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된 모든 행위는 배제한다.

ⓑ 의무에 맞기는 하지만 의무에 대한 경향성 없이 다른 경향성으로 인해 한 행위들도 배제한다.

ⓒ 의무에 맞으며 주관이 그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는 행위도 배제(예: 가게 주인이 어리숙한 고객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것. 이익이 그런 정직을 요구했을 수도 있으므로)

ⓓ 예

ⅰ) 생명 보전은 의무이며 누구나 생명 보존에 대한 직접적인 경향성을 가진다. 그러나 생명 보전이 의무에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도덕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ⅱ) 선행(동정심)은 의무이고 매우 사랑받을 만한 일이지만, 이것은 명예에 대한 경향성 같은 것이어서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존중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ⅲ)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의무이다. 경향성이 아니라 의무에서 자신의 행복을 촉진할 때에야 그 태도에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ⅳ) 사랑도 의무이다. 그러나 의무로부터 하는 선행은 실천적 사랑이지 정념적 사랑이 아니다. 경향성은 지시명령할 수 없는 반면, 실천적 사랑만이 지시명령될 수 있다.

제 2 명제: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의욕의 원리에 의존한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9-90)

ⓐ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그 도덕적 가치를 행위 대상의 현실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욕구능력의 모든 대상과는 무관하게 행위를 일어나게 한 의욕의 원리에 의존한다.

ⓑ 만약 행위가 의무로부터 말미암아 일어난다면, 의지에서 모든 질료적 원리는 제거된 것이므로, 의지는 의욕 일반의 형식적 원리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제 3 명제: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1-92)

ⓐ 결과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경향성에 대해서는 존경을 가질 수 없다. 경향성을 시인하고 좋아할 수 있을 뿐이다.

ⓑ 결과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근거로서 나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이, 경향성을 압도하는 것, 선택에서 경향성을 배제하는 것, 즉, 순전한 법칙 그 자체만이 존경의 대상일 수 있고, 그와 함께 명령일 수 있다.

ⓒ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경향성의 영향과 의지의 일체 대상을 전적으로 격리해야 한다.

ⓓ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법칙, 주관적으로는 이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이다. 따라서 나의 모든 경향성을 단절하고, 그러한 법칙을 준수한다는 준칙만이 남는다.

(참고 1: 준칙은 의욕의 주관적 원리이고, 객관적 원리는 실천 법칙이다.)

(참고 2: 법칙에 의한 의지의 직접적 규정 및 그 규정에 대한 의식이 존경이다.)


(5) 법칙(『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2-97)

법칙의 표상이 의지의 동인이며 윤리적이다: 최고의 무조건적인 선은 오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서만 마주칠 수 있다. 의지의 동인이 예상되는 결과가 아니라 법칙의 표상인 한에서, 이성적 존재자에게서만 생기는 이 법칙의 표상 자체만이 윤리적이라 불릴 수 있는 탁월한 선을 이룰 수 있다. 이 탁월한 선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하는 인격 자체 안에 이미 현전한다.

② 의지를 단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의지를 규정해야 한다. 의지에서 모든 충동을 제거했으므로, 남는 것은 행위 일반의 보편적 합법칙성뿐이고, 이것이 의지의 원리로 쓰여야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합법칙 일반이 의지의 원리이다: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어야만 할 것을 내가 의욕할 수 있도록 오로지 그렇게만 처신해야 한다.

ⓐ 거짓 약속의 예: 내가 궁지에 빠졌을 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의도에서 어떤 약속을 해서는 안 되는가?

i) 영리한 거짓 약속[영리의 준칙]: 거짓말로 이 곤경을 벗어나더라도 거짓말로 인한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신용의 훼손으로 인해 나중에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음을 숙고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점을 숙고하더라도 이것은 의무로부터가 아니라 걱정스런 결과에 대한 숙고일 뿐이다.

ii) 의무의 원리: 내가 만약 의무의 원리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악하다. 거짓 약속이 의무에 맞는지 알기 위해 보편화 테스트를 한다. 나의 준칙[곤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리함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에 정말로 만족할 것인가? 이에 대해, 비록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의욕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법칙에 따르게 되면 약속이라는 것이 아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거짓말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거짓말은 허사이고, 설사 그들이 믿는다 해도 그들은 나에게 똑같은 화폐[거짓말]로 되갚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리함의 준칙은 법칙이 되자마자 자기파괴적이다.

④ 보편화 테스트: 나의 의욕이 윤리적으로 선하기 위해 내가 행해야만 할 것을 판별하는 방법

ⓐ 보편화 테스트: ‘너 또한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그 준칙은 버려야 한다.

ⓑ 보편적 법칙 수립에 대한 존경: 이성은 나에게 이런 보편적 법칙 수립을 존경하도록 강요한다.

ⓒ 존경과 의무: 존경은 경향성에 의해 칭찬받는 것의 모든 가치를 훨씬 능가하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다. 그리고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나의 행위들의 필연성이 의무를 형성한다. 의무는 그 가치가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 자체로 선한 의지의 조건이므로, 여타의 모든 동인은 이 의무에게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6) 평범한 인간이성의 도덕 인식에서 도덕의 원리에 도달(『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7-101)

① 평범한 이성은 도덕 원리를 가치판단의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성에게 자신의 원리에 주목하도록 하기만 하면 선악과 의무의 구별을 쉽게 할 수 있다.

② 평범한 인간지성에서 그 실천적 가치판단능력이 이론적 가치판단능력보다 월등히 앞선다. 평범한 이성이 경험법칙들과 감관의 지각들에서 이탈한다면, 이성은 순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실천적인 것에 있어서 가치판단력은, 평범한 지성이 실천 법칙들로부터 모든 감성적인 동기들을 배제할 때, 그 자체가 제대로 장점을 드러낸다. 즉, 평범한 지성은 사태에 잘 적중할 것이다.

③ 자연적 변증학: 의무의 엄격한 법칙들에 반대하여 궤변을 늘어놓고, 그 법칙들의 타당성을 우리의 소망이나 경향성들에 더 맞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짓은 평범한 실천 이성조차도 인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인간 이성은 자신의 권역에서 벗어 나와 실천 철학의 분야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따라서 실천적인 평범한 이성도 이론 이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대한 완벽한 비판을 필요로 한다.



제 2 절 대중적 윤리 세계지혜에서 윤리 형이상학으로 이행



(1) 의무 개념을 경험적 실례에서 도출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

① 실천 이성의 평범한 사용에서 의무 개념을 도출한 것은 우리가 의무 개념을 경험개념으로 취급한 것은 아니다. 경험에 주목한다면 순수한 의무로부터 행위하는 마음씨에 관한 확실한 실례를 들 수 없다.

② 의무에 맞는 행위의 준칙이 오로지 도덕적 근거들과 의무의 표상에만 의거한 경우는 단 하나라도 경험을 통해서 결정하기는 단적으로 불가능하다.

③ 인간애 때문에 우리 행위들이 대부분 의무에 맞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위들의 의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자기이지, 번번이 자기부정을 요구할, 의무의 엄격한 지시명령이 아니다. 의무에 대한 우리의 이념들의 함몰을 막아주고, 의무의 법칙에 대한 공고한 존경을 영혼 중에 보존하는 것은 오로지 이성이 현상과 독립적으로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지시명령한다는 명확한 확신뿐이다.

④ 윤리성의 개념에서 진리성 또는 어떤 가능한 객관과의 관계를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윤리성의 법칙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 일반에게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어떠한 경험도 명증적 법칙들의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지 못한다.

⑤ 모든 실례는 근원적인 실례가 될 만한 것인지 도덕성의 원리에 따라 평가되어야만 한다. 즉, 어떤 실례도 도덕성의 개념을 맨 위에서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윤리적인 것에서 모방이란 없으며, 실레들은 단지 격려하는 데 쓰일 뿐이다.


(2) 대중적 실천 철학이 아닌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

① 윤리 이론을 형이상학 위에 세우고, 그 뒤에 대중성을 통해 유포시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첫 단계의 연구에서부터 대중성을 좇는 것은 불합리하다.

②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 윤리성의 원리들은 온전히 선험적으로, 일체의 경험적인 것에서 자유롭게, 단적으로 순수한 이성개념들 중에서만 만날 수 있다면, 이 연구를 순수한 실천적 세계지혜[철학] 또는 윤리 형이상학으로 따로 떼어내어 완벽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③ 윤리 형이상학은 의무들에 대한 훈계들을 실제로 수행하기 위해 최고로 중요한 숙원 사항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의무 표상과 윤리 법칙의 표상은 오직 이성의 길을 통해서만 경험적인 다른 동기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④ 모든 윤리적 개념들은 선험적 이성 안에 자신들의 자리와 근원을 가지며, 이것들은 어떤 경험적인 우연적 인식으로부터 추상될 수 없다. 바로 윤리적 개념들의 근원의 순수성에 최상의 실천 원리들로 쓰이기 위한 존엄성이 놓여 있다.

⑤ 순수한 실천 이성의 전체 능력을 규정하는 일은, 이론적인 의도에서 순전이 사변이 문제될 때에, 최대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최대로 중요하다. 즉, 도덕 법칙들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 타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도덕 법칙들을 이성 존재자 일반의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하고,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인간학을 필요로 하는 모든 도덕을 인간학과는 독립적으로 순수한 철학으로서, 즉, 형이상학으로서 완벽하게 진술해야 한다.

⑥ 우리는 실천적인 이성 능력을, 이 이성 능력을 규정하는 규칙들로부터, 의무 개념이 생겨나는 곳에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명료하게 서술해야만 한다.


(3) 의지와 명령

① 의지(『윤리형이상학 정초』, p. 115)

ⓐ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즉, 원리들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또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법칙들로부터 행위들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이성이 요구되므로, 의지가 실천 이성이다.

ⓒ 의지: 의지는 이성이 경향성에 독립해서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즉,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② 명령(『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16-118)

ⓐ 강요: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들이 주관적으로는 우연적이고, 그러한 의지를 객관적인 법칙들에 맞게 결정하는 것은 강요이다. (의지가 주관적인 조건들인 동기들에도 종속되는 경우)

ⓑ 객관적인 원리의 표상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서 (이성의) 지시명령(Gebot)이라 부르며, 이 지시명령의 정식을 명령(Imperativ)이라 부른다.

ⓒ 모든 명령은 당위[‘해야 한다’]로 표현되며, 그에 의해, 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주관적 성질상 필연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의지에 대한 관계(강요)를 고지한다.

ⓓ 명령들이 주어지는 상대는 제시된 선을 언제나 행하는 것은 아닌 의지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선한 것은 이성의 표상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타당한, 즉,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 자체로서 타당한 근거들에서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쾌적과는 다르다)

(칸트의 주석

경향성: 욕구능력의 감각에 대한 의존성. 따라서 경향성은 항상 필요를 실증한다.

[이해]관심: 우연히 결정될 수 있는 의지의 이성 원리에 대한 의존성.)

ⓔ 완전한 선의지는 객관적인 법칙들 아래에 있지만, 그것이 법칙에 맞는 행위를 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선의지는 그것의 주관적인 성질상 스스로 오로지 선의 표상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적 의지에 대해서는 어떤 명령도 타당하지 않다.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욕이 이미 법칙과 필연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4) 명령의 구분(『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18-124)

① 가언 명령: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 행위가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즉 수단으로서 선한다면, 가언적 명령. 행위가 가능한 또는 현실적인 의도를 위해 좋다[선하다]는 것을 말한다. 가능한 의도의 경우 명령은 미정적-실천 원리, 현실적 의도의 명령은 확정적-실천 원리이다.

ⓐ 미정적-실천 원리: 행위가 가능한 의도를 위해 좋은 경우의 명령. 이성적 존재자임과는 무관하게, 그래서 목적의 합리성과 선함과는 무관하게, 임의적인 목적들을 위한 수단들의 사용에서 숙련에 마음을 쓰게 하는 명령. 숙련의 규칙들. 기술적 명령

ⓑ 행위가 현실적인 의도를 위해 좋은 경우의 명령.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서 현실적인 것으로 전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 필연성에 따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전제할 수 있는 의도인 행복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표상하는 가언 명령은 확정적이다. 영리함의 충고들. 실용적 명령.

② 정언 명령: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명령. 행위가 그 자체로 선 한 것으로 표상된다면, 즉, 그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으로,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정언 명령.

ⓐ 명증적-실천 원리: 어떤 의도와도 관계없이, 어떤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단언하는 정언 명령. 어떤 처신을 의도를 조건으로 두지 않고 직접적으로 지시명령하는 명령. 질료나 행위 결과와는 상관없이, 형식 및 형식으로부터 행위 자체가 나오는 원리에 관여한다. 윤리성의 명령(법칙). 도덕적 명령

 

판단의 양태

목적-수단의 관계

관계 영역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언 

명령

미정적-실천 원리

숙련의 규칙들-목적 설정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수단들 가능

(기술에 속하는)

기술적 명령

분석적-목적을 의욕하는자는 수단 또한 의욕

확정적-실천 원리

영리함의 충고들-이성적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을 간주하는 목적에 대한 수단(행복에 대한 수단)

(복지를 위한) 실용적 명령

분석적-목적이 주어졌고, 이를 위한 수단 또한 의욕

정언 

명령

명증적-실천 원리

윤리성의 명령들(법칙들)

- 행위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지시명령

(윤리에 속하는) 도덕적 명령

선험적 종합적-실천 명제


*** 법칙만이 무조건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필연성을 개념을 동반하며, 명령이란 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시 말해 경향성에 반하여서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다.


(5) 윤리성의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pp. 128-131)

① 정언 명령의 가능성은 선험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② 정언 명령은 선험적 종합적-실천 명제이다.

③ 명령은 법칙 외에 오로지 이 법칙에 적합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함유하지만, 법칙은 그것을 제한했던 아무런 조건도 함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행위의 준칙이 법칙에 적합해야 할, 이 법칙 일반의 보편성만 남는다. 이 적합성만이 명령을 본래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pp. 131-132)

⇒ 정언 명령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제1정식: 보편 법칙의 정식) (pp. 132-133)

④ 의무의 사례들에 대한 고려: 도덕적 평가 규준은 우리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pp. 133-137)

ⓐ 자살 금지의 의무: 자살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기사랑의 원리가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 자기 사랑의 사명이 생의 촉진을 추동하는 것인 바로 그 감각이 생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자연은 자기 자신과 모순을 일으킨다.

ⓑ 거짓 약속 금지 의무: 자기사랑의 원리에 입각해 거짓 약속을 하는 경우도 자기모순적이다. 왜냐하면 거짓 약속은 약속 및 목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재능 개발의 의무: 재능을 내버려 두고 생을 안일과 향락에 바치는 것은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능력은 온갖 가능한 의도들을 위해 쓰이도록 주어져 있으므로,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능력이 발전될 것을 필연적으로 의욕하기 때문이다.

ⓓ 타인을 도울 의무(사랑과 동정의 의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보편적 자연법칙이 잘 존속할 수 있음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원리가 어디서나 타당하기를 의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라면 자신이 기대하는 모든 희망을 스스로 앗아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⑤ 만약 의무가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 의미를 갖고, 실제적인 법칙수립을 가져야만 한다면, 이 의무는 오로지 정언 명령들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p.139)

⑥ 인간의 특수한 자연소질로부터, 어떤 감정이나 성벽으로부터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 타당하지는 못한 특수한 성향으로부터 도출된 것은 우리에게 준칙은 제공할 수 있어도, 법칙은 제공할 수 없다. 도덕감 같은 천성적 감각이나 착한 본성과 같은 후견자적인 자연본성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지만, 결코 이성이 명하는 원칙들을 제공할 수는 없다. 윤리에 있어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고유한 행위의 원리가 오직 경험이 제공할 수 있는 우연적인 근거들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 있다. (pp. 140-142)


(6) 정언 명령의 도출

① 실천 철학은 윤리 형이상학으로 나아간다. 비록 결코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일어나야만 할 것의 법칙들, 객관적-실천적 법칙들을 납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의지가 순전히 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의지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가 문제이다. 따라서 경험적인 것과 관계를 갖는 모든 것은 제외된다. 이성이 독자적으로 태도를 결정한다면, 이성은 이 일을 반드시 선험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pp. 143-144)

의지: 의지란 어떤 법칙의 표상에 맞게 행위하게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이다. 의지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들에게서만 만날 수 있다. (p. 144)

목적: 의지의 자기 규정에서 객관적 근거로 쓰이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이 순전한 이성에 의해 주어진다면, 이 목적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똑같이 타당하다. 그 결과가 목적인 행위의 가능 근거만을 함유하는 것은 수단이라 불린다. (pp. 144-145)

ⓐ 욕구의 주관적 근거는 동기이며 의욕의 객관적 근거는 동인이다. 주관적 목적은 동기의 의거하는 반면, 객관적 목적은 동인들에 의존한다.

ⓑ 실천적 원리들이 모든 주관적 목적들을 도외시한다면, 그 원리들은 형식적이다. 반면 주관적 목적들을, 즉, 모종의 동기들을 기초로 한다면 그것들은 질료적[실질적]이다. 이 질료적 목적들은 행위의 결과로서 임의로 설정되는 것으로 단지 상대적이다. 그래서 이 상대적인 목적들은 단지 가언적인 명령들의 근거일 뿐이다. 목적의 현존재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목적 그 자체로서 일정한 법칙들의 근거일 수 있는 것은 정언적 명령의 근거이다.

④ 인격(pp. 1145-148)

ⓐ 인간과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하며, 수단으로서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 이성이 없는 존재자들은 단지 수단으로서 상대적 가치만을 가지며, 그래서 물건들이라 불린다. 반면 이성적 존재자들은 인격들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자들의 본성이 그들을 이미 목적들 그 자체로 표시하고, 그런 한에서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들은 주관적 목적들이 아니라 객관적 목적들이다. 즉, 인격들의 현존 그 자체가 목적인, 그것 대신 다른 어떤 목적도 두어질 수 없는 것들로, 다른 것들은 한낱 수단으로서 이에 봉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서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을 우리는 만날 수 없다.

제 2 정식 - 인격의 정식: “무릇 최상의 실천 원리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인간의 의지에 관련한 정언 명령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구에게나 목적인 것의 표상으로부터 의지의 객관적 원리를 형성하고, 그러니까 보편적 실천 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이 원리의 근거인즉, 이성적 자연 본성은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현존을 이렇게 표상한다. 그런 한에서 이 원리는 그러므로 인간 행위들의 주관적 원리이다. 그러나 또한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자도, 나에게도 타당한 바로 그 동일한 이성 근거를 좇아, 그의 현존재를 그러한 것으로 표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객관적 원리로서, 최상의 실천 근거인 이 원리로부터 의지의 모든 법칙이 도출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실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제 2 정식: 인격의 정식)(pp. 147-148)

ⓓ 실례 (pp. 148-151)

i)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ii) 거짓 약속은 다른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iii) 인간성의 완성을 향한 소질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인간의 보존과는 양립할 수 있으나 목적의 촉진과는 양립할 수 없다.

iv) 타인의 행복에서 아무것도 고의로 빼앗지 않는다면, 인간성은 성립할 수 있지만, 목적 그 자체인 인간성에 단지 소극적으로 합치할 뿐 적극적으로 합치하지는 않는다.

⑤ 제 3 정식: 자율의 정식 - 경험과는 무관한 원리: 인간성과 목적 그 자체로서의 모든 이성적 자연[존재자] 일반의 원리는 경험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 아니다.(pp. 151-156)

ⓐ 보편성 요구: 경험으로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 적용되는 것을 규정할 수 없다.

ⓑ 객관적 목적: 모든 주관적 목적들을 제한하는 최상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객관적 목적이고, 이것은 순수한 이성으로부터 생겨난다. 모든 실천적 법칙 수립의 근거는 객관적으로는 규칙에 있고, 이 규칙을 법칙일 수 있도록 만드는 보편성의 형식에 있으나, 주관적으로는 목적에 있다. 모든 목적들의 주체는 목적 자체인 이성적 존재자이다. 이로부터 세 번째 실천 원리, 즉, 보편적 법칙 수립의 의지는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이 나온다.

의지는 자기 법칙수립적인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법칙에 종속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종속된다. (p. 152)

ⓒ 이성적 존재자들에 대한 보편적 명령들은, 사람들이 의무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할 때,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언적인 것으로 상정된 것이다. 정언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실천적 명제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무로부터의 의욕에서 모든 관심의 포기는 정언적 명령과 가언적 명령의 구별 표지로서, 그 명령 자신 안에 그 명령이 함유하고 있는 어떤 규정에 의해, 함께 암시되어 있다. 이 원리는 셋째 정식에서, 즉, 보편적-법칙수립적 의지로서의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에서 증명된다.

ⓓ 셋째 원리, 모든 준칙을 통해 보편적으로 법칙을 수립하는 의지라는 개개 인간 의지의 원리가 정언 명령이 되기에 적합하다: 보편적 법칙 수립의 이념 때문에 어떤 이해 관심에도 기초하지 않고, 모든 가능한 명령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무조건적일 수 있다. 또는 거꾸로 말하면, 하나의 정언 명령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하는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동시에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인 자기 의지의 준칙에서 모든 것을 행하라고 지시명령할 것이다. 이 경우에만 실천 원리, 그리고 의지가 복종하는 그 명령은 무조건적일 것이다.

ⓔ 의지의 자율의 원리: 무조건적인 이 원리를 의지의 자율이라 한다. 반면 조건적인 명령은 이해관심으로 인한 행위의 필연성으로 타율이라 불린다.

― 의지의 실천 원리 세 가지, 즉, 정언 명령의 세 가지 정식 ―

 

1.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2.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3. 보편적-법칙수립적 의지는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이다. (의지의 자율의 원리)


(7) 목적의 나라(『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56-161)

① 목적의 나라: ‘나라’는 공동의 법칙들에 의한 서로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을 뜻한다. 그래서 이성적 존재자들의 개성적 차이와 사적 목적을 배제하고,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이성적 존재자들과 그들이 세우는 고유한 목적들이 체계적으로 연결된 전체, 그래서 앞에서 말한 원리들에 따라 가능한 목적들의 나라가 생각될 수 있다.

② 이성적 존재자들 모두는 모두를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만 한다는 법칙 아래에 종속되어 있다. 이로부터 공동의 객관적 법칙들에 의한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이 생긴다.

③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수립자로서 타자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이 나라에서 원수(元首)로서 속해 있는 것이다.

④ 도덕성은 이성적 존재자에 의해서만 목적들의 나라가 가능해지는, 그러한 법칙 수립에 대한 모든 행위의 관계에서만 존립한다. 이 법칙 수립은 개개 이성적 존재자 자신에서 만날 수 있고, 그의 의지로부터 생겨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지의 원리인즉, 준칙이 보편적 법칙임이 그 준칙과 양립할 수 있는, 그러므로 오로지,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하는 자로 볼 수 있는, 그런 준칙 이외의 것에 따라서는 행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준칙들이 이 객관적 원리와 이미 필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원리에 따르는 행위의 필연성은 실천적 강요, 즉, 의무라 불린다.

⑤ 객관적 원리에 따라 행위해야 하는 실천적 필연성인 의무는 감정이나 충동 그리고 경향성에 의거해 있지 않고, 순전히 이성적 존재자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거한다. 이 관계 안에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항상 동시에 법칙수립자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의지의 각 준칙을 보편적으로 법칙수립하는 것으로 모든 타자의 의지에 관계시키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행위에도 관계시킨다. 이성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세우는 법칙 이외의 어떤 것에도 복종하지 않는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의 이념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⑥ 목적들의 나라에서 모든 것은 가격을 갖거나 존엄성을 갖는다.

ⓐ 시장 가격: 보편적 인간의 경향성과 필요들에 관련되어 있는 것은 시장가격을 가짐.

ⓑ 애호 가격: 필요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무목적적인 유의에서 마음 능력의 흡족함에 따르는 것은 애호가격을 갖는다.

ⓒ 존엄성: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은 내적 가치, 즉, 존엄성을 갖는다.

⑦ 도덕성이 이성적 존재자가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도덕성을 통해서만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수립적인 성원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성과, 윤리적일 수 있는 한에서의 인간성만이 존엄성을 갖는다.

⑧ 윤리적으로 선한 마음씨 또는 덕으로 하여금 그토록 높은 요구를 할 권리를 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선한 마음씨 또는 덕이 보편적 법칙 수립에 있어 이성적 존재자에게 가져다주고, 그로써 이성적 존재자로 하여금 목적들의 가능한 나라의 성원이 될 수 있게끔 해주는 몫(持分)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을 수립하는 자로, 모든 자연법칙들에 대해 자유롭게, 오직 자신이 세운 법칙들에만 복종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리고 모든 가치를 규정하는 법칙수립 자신은 바로 이 때문에 존엄성을 가지며 이에 대해 이성적 존재자는 존경이라는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율은 인간과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의 근거이다.


(8) 윤리성의 원리를 표상하는 세 가지 정식의 통일

① 형식: 보편성 - 준칙들은 보편적 자연법칙들 같이 타당해야 하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② 질료: 목적 -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서 준칙에 대해 목적들을 제한하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

③ 완벽한 규정: ‘모든 준칙은 자신의 법칙 수립에 의해 자연의 나라로서의 목적들이 가능한 나라와 조화로워야 한다.’


(9) 무조건적으로 선한 의지

①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때에도 자신과 결코 상충할 수 없는, 악할 수 없는 의지는 단적으로 선하다.

② ‘그것의 보편성을 법칙으로서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 항상 행위하라’가 선의지의 최상 원칙이다.

③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보편적 법칙으로서의 의지의 타당성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에 따른 사물들의 보편적 연결과 유사함을 갖는다. 따라서 선한 의지의 정식, 즉, 정언 명령은 ‘그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자연법칙들로서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준칙들에 따라 행위하라’로 표현될 수 있다.

④ 이성적 자연존재자가 자신에게 세우는 목적이 선의지의 질료가 된다. 그러나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이념에서는 목적은 산출되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립적 목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즉 그 목적에 결코 반해서 행위해서는 안 되며, 한낱 수단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개개 의욕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이 목적은 모든 가능한 목적들의 주체 이외의 것일 수 없고,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주체이기도 하다.

⑤ 결론: 개개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서 그가 언제든 종속해 있을 모든 법칙들에 대해,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자로 간주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와 함께 나오는 결론은,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이 법칙수립자로서 자신 및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준칙들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성적 존재자들의 세계(예지적 세계)가 목적들의 나라로 가능하며, 그것도 성원인 모든 인격들의 고유한 법칙 수립에 의해 가능하다.



윤리성의 최상 원리로서의 의지의 자율(pp. 169-170)


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방식만을 선택한다. 이 실천 규칙은 종합 명제이다. 명증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이 종합 명제는 온전히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순수 실천 이성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율의 원리만이 도덕의 유일한 원리라는 점은 윤리성의 개념들을 순전히 분해만 해보아도 충분히 밝혀진다.



윤리성의 모든 사이비 원리들의 원천으로서 의지의 타율(pp. 170-171)


만약 의지가 자기 자신을 넘어 나가서 객관들 중 어느 하나의 성질에서, 자기를 결정하는 법칙을 구한다면, 언제나 타율이 나타난다. 이때에는 객관이 의지와의 관계를 통해 의지에게 법칙을 준다. 이 법칙들은 가언적이다. 이에 반해 도덕적인, 즉 정언 명령은 내가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러그러하게 행위해야 함을 말한다.



타율의 가정된 기본개념들로부터 가능한 윤리성의 모든 원리들의 구분


(1) 의지의 타율의 원리로서 경험적 원리와 이성적 원리

① 경험적 원리: 행복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 자연적 감정 또는 도덕적 감정 위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경험적 원리들은 도덕 법칙들을 세우기 위한 기초로 사용될 수 없다. 보편성이나 무조건적인 실천적 필연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행복의 원리가 윤리성의 기초로 놓는 동기들은 윤리성을 매장시키고 윤리성의 전체적인 숭고함을 파괴한다. 도덕 감정 윤리성 및 윤리성의 존엄성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러나 도덕 감정이라는 느낌에 호소하여 보편적 법칙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천박한 짓이다. 항상 차이가 있는 감정들은 선악에 대한 동일한 척도를 제공하지 못한다.

② 이성적 원리: 완전성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 우리의 의지의 가능한 결과로서 완전성이라는 이성 개념 위에 세워져 있거나,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원인으로서 자립적인 완전성(신의 의지)이라는 개념 위에 세워져 있다. 윤리성의 이성적 근거들, 또는 이성적 근거들 가운데서도 완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은 신의 최고로 완전한 의지로부터 윤리성을 도출해내는 신학적 개념보다는 더 좋다.


(2) 의지의 타율

① 타율: 의지를 규정하는 규칙을 위해 의지의 객관이 근저에 놓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 규칙은 의지에 대해 타율일 따름이다.

② 타율의 명령은 조건적이다: 객관을 의욕한다면, 또는 객관을 의욕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하게 행위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무릇 객관이 의지를 규정하는 것은, 행복의 원리에서처럼 경향성에 의한 것이든, 완전성의 원리에서처럼 우리의 가능한 의욕 일반의 대상들에 지향되어 있는 이성에 의한 것이든, 의지가 결코 직접적으로 스스로 행위의 표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견되는 행위 결과가 동기들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즉, 나는 다른 어떤 것을 의욕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행해야 한다.

③ 가언 명령의 법칙을 주는 것은 자연이다. 이 법칙은 단지 경험에 의해 인식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즉, 우연적인 것으로 명증적인 실천 규칙이기에는 부적당할 뿐 아니라 언제나 의지의 타율일 뿐이다. 이런 의지는 충동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주관의 자연 본성을 매개로, 외부의 충동이 의지에게 법칙을 제공한다.


(3) 단적으로 선한 의지

①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원리는 정언 명령이어야 한다.

②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모든 객관에 대해서는 무규정적인 채, 한낱 의욕의 형식 일반만을 보유할 것이며, 그것도 자율로서 보유할 것이다.

③ 즉, 개개 선의지의 준칙이 그 자신을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 수 있기에 적합함 그 자체가 유일한 법칙이다.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어떤 동기를 기초로 두지 않고 이 법칙을 자신에게 부과한다.


(4) 과제

① 어떻게 선험적인 종합적 실천 명제가 가능한가, 그리고 그 명제가 왜 필연적인가라는 과제에 대해 우리는 이 명제가 참이라고, 또 증명이 가능하다고 내세운 적이 없다.

② 우리가 한 작업은 일단 보편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윤리성 개념을 발전시켜, 의지의 자율이 이 윤리성 개념에 부착해 있다는 것, 즉, 윤리성 개념 근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③ 윤리성은 환영이 아니라는 주장(정언 명령과 의지의 자율이 진실하고 선험적 원리로서 단적으로 필연적이라면 나오는 주장)은 순수 실천 이성의 가능한 종합적 사용을 요구한다. 이런 사용을 위해서는 이 이성능력 자체에 대한 비판을 선행시켜야 한다.

제 3 절 윤리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 이성 비판으로 이행




자유 개념은 의지의 자율을 설명하는 열쇠이다


(1) 자유와 자연 필연성

① 의지는 생물이 이성적인 한에서 갖는 일종의 원인성이다. 자유는 이런 원인성의 특성이며, 자유는 그것을 규정하는 외래의 원인들에 독립해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자연필연성은, 외래 원인들의 영향에 의해 활동하게끔 규정받는, 모든 이성 없는 존재자들의 원인성의 특성이다.

③ 자유는 자연법칙들에 따르는 의지의 성질은 아니지만, 전혀 무법칙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변적인 법칙들에 따르는 특수한 종류의 원인성이다.


(2) 자율과 타율

① 자연 필연성은 작용하는 원인들의 타율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작용결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작용하는 원인을 원인성으로 규정한 법칙에 따라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② 의지의 자유가 자율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이 자율인 것이다.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이다’라는 명제는, 자기 자신을 보편적 법칙으로서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준칙 이외의 다른 어떤 준칙에 따라서도 행위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표시한다. 이것이 정언 명령의 정식이자 윤리성의 원리이다. 따라서 자유 의지와 윤리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는 한 가지이다.


(3) 윤리성의 원리는 종합 명제

자유 의지가 전제된다면, 윤리성 및 윤리성의 원리는 자유 의지의 개념을 분해하기만 하면 나온다. 그럼에도 윤리성의 원리는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그것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법칙으로 보인, 자지 자신을 자기 안에 함유할 수 있는, 그런 의지이다’라는 종합 명제이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개념의 분해에 의해 준칙의 보편성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종합 명제는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인식과 준칙의 보편 법칙성이라는 인식이 자유의 적극적 개념에 의해 결합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자유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속성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① 윤리성은 이성적 존재자들에게만 법칙으로 쓰이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타당해야 하며, 윤리성은 오로지 자유의 속성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하며, 자유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의 의지의 속성으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유를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부가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② 자유의 이념 아래서밖에는 행위할 수 없는 모든 존재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인 관점에서, 실제로 자유롭다. 즉, 자유와 불가분 결합되어 있는 모든 법칙들은 그 같은 존재자에게 타당하다.

③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가 그 아래서만 행위할 수 있는 자유의 이념을 또한 필연적으로 수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존재자에서는 실천적인, 다시 말해 그의 객관에 대해서 원인성을 갖는 이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외부의 영향에서 독립적으로 그 자신을 그의 원리들의 창시자로 간주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성은 실천 이성으로서, 또는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로서, 그 자신에 의해 자유롭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오로지 자유의 이념 아래서만 자신의 의지일 수 있고, 그러므로 그런 의지는 실천적 의도에서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부여되어야만 한다.



윤리성의 이념에 부착되어 있는 관심에 대하여


(1) 요약

① 만약 우리가 어떤 존재자를 이성적이고, 행위들에 대한 자기의 원인성을 의식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자 하면, 자유의 이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근거에서 이성과 의지를 갖춘 모든 존재자에게는 자신의 자유의 이념 아래서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속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② 자유의 이념에 대한 전제로부터 준칙이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박에 없읆을, 즉, 우리 자신의 보편적인 법칙 수립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의식도 나왔다.


(2) 위의 원리에 대한 관심

① 이성적 원리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이해관심 때문이 아니다. 이해관심은 정언 명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② 이성이 실천적이라면, ‘해야만 함’[당위]는 모든 이성적존재자에게 타당한 ‘하고자 함’[의욕]이기 때문에, 원리에 대한 관심의 발생을 고찰해야 한다.

③ 자유의 이념에서 도덕 법칙을, 곧 의지의 자율의 원리를 전제할 뿐이고, 이 원리의 실재성 및 객관적 필연성은 그 자체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리를 정확하게 규정한다 해도 이 원리의 타당성 및 복종해야 할 실천적 필연성에 관해서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법칙으로서 우리 준칙의 타당성은 왜 우리 행위들을 제한하는 조건이어야 하며, 이런 종류의 행위에 부여하는 가치를 무엇에 기초지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④ 우리가 행위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보종의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즉, 무엇으로부터 도덕 법칙은 구속력을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종의 순환론이다. 우리가 목적들의 질서 안에서 윤리 법칙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작용하는 원인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롭다고 상정하며,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의지의 자유를 부가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유와 의지의 자기 법칙수립은 둘 다 자율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중 하나가 다른 것을 설명하고 그것의 근거를 대는 데 사용될 수 없다.

(3) 순환론을 피하기 위한 방책: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①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우리에게 나타나는 표상들(감관의 표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들을 대상들이 우리를 촉발하는 대로만 인식하게끔 하고, 그때 대상들이 그 자체로 무엇일 수 있는가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다. 즉, 이런 종류의 표상들에 관해서는 우리가, 지성은 한낱 현상들의 인식에 이를 뿐, 결코 사물들 그 자체에는 이를 수 없다. 이런 구별로부터, 우리는 현상들 배후에 현상이 아닌 어떤 다른 것, 곧 사물들 자체를 용인하고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감성세계와 오성세계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② 자기 인식에서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어는 것이고, 내감에 의해 의식이 촉발되는 방식대로만 자기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순전히 현상들에서 합성된 그 자신의 주관의 성질을 넘어서 그것의 근저에 놓여 있는 다른 어떤 것, 곧 그의 자아를 그 자체로 상정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를 순전한 지각과 감각들의 수용성의 관점에서는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이지만, 인간에게서 순수 활동성임 직한 것(감관의 촉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의식에 이른 것)과 관련해서는 지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용어 설명(백종현 주):

① ‘Verstand’는 일반적으로 ‘지성’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지만, 이 경우에만은 ‘오성(悟性)’으로 옮겨 ‘예지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낫다. ‘Verstandwelt’가 ‘예지세계(intelligibele Welt)’ 또는 ‘이성세계(Vernunftwelt)’와 똑같은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말이다.

② 지성세계는 intellektuelle Welt. 칸트가 ‘Verstand’ 곧 ‘intellecuts’(‘지성’, 때로는 ‘오성’)에서 파생한 형용사 ‘intelletuell(지성적)’과 ‘intelligibel(예지적)’을 구별해서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지성적’은 인식을, ‘예지적’은 대상을 수식해 주는 말이라고 규정한 뜻에 따른다면, ‘intellektuelle Welt’는 ‘intelligibele Welt’라고 표현했어야 할 것이다.

이성(Vernunft; reason): 인간은 모든 사물들과, 그리고 인간이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한에서는 그 자신과도 구별되는 하나의 능력인 이성(Vernunft; reason)을 발견한다. 순수한 자기활동성으로서의 이성은 지성(Verstand; understanding)도 뛰어넘는다.

ⓐ 지성도 자기활동성이지만, 이 활동성으로부터, 감성적 표상들을 규칙들 아래로 보내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감성적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에서 통합하기 위해 쓰일 뿐인 개념들 외에는 아무런 개념도 산출할 수가 없다.

ⓑ 이성은 이념들 아래에서 순수한 자발성을 내보인다. 이성은 감성이 자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 훨씬 멀리까지 나아가며, 감성세계와 오성세계를 서로 구별한다. 이런 구별을 통해 지성 자신에게 그 경계를 지정해 주기도 한다. 이로 인해 이성적 존재자는 예지자로서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 이성적 존재자는 감성세계에 속해 있는 한에서 자연 법칙들(타율) 아래에 있으면서, 예지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이성에 기초하고 있는 경험적이지 않은 법칙들 아래에 있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그 자신의 의지의 원인성을 자유의 이념 아래서 말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감성세계의 원인들로부터의 독립성이 자유이므로) 자유의 이념에는 자율의 개념이 결합되어 있고, 자율의 개념과는 윤리성의 보편적 원리가 결합되어 있다. 이 윤리성의 원리가 이성적 존재자들의 모든 행위들의 근저에 놓인다.

ⓓ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오성세계의 성원으로 놓고, 의지의 자율을 이 자율의 결과인 도덕성과 함께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무지워져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감성세계에 속하면서 또한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정언적 명령은 가능한가?


① 오성세계와 감성세계의 성원: 이성적 존재자는 오성세계의 성원으로서 그의 모든 행위들은 순수 의지의 자율의 원리에 완전히 적합할 것이다.(윤리성의 최상 원칙에 의거한다)이성적 존재자는 감성세계의 일부로서 그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욕구들과 경향성들의 자연법칙에, 즉, 자연의 타율에 알맞게 취해진다.(행복의 최상 원칙에 의거한다)

② 오성세계의 법칙이 명령이며 여기에서 의무가 나온다: 오성세계는 감성세계의 근거를, 즉, 감성세계의 법칙들의 근거를 함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예지자로서 스스로를 오성세계의 법칙에 즉, 자유의 이념 중에 오성세계의 법칙을 함유하는 이성에, 따라서 의지의 자율에 복종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오성세계의 법칙들을 나에 대한 명령들로 보고, 이 원리에 알맞은 행위들을 의무들로 볼 수밖에 없다.

③ 따라서 자유의 이념이 나를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 만듦으로써 정언 명령들은 가능하다. 그리고 예지 세계의 성원이자 동시에 감성세계의 성원이므로 나의 행위가 항상 의지의 자율에 맞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행위들은 의지의 자율에 알맞아야만 하는 것이다.

④ 선험적 종합 명제: 정언적 당위는 선험적 종합 명제를 표상한다. 왜냐하면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나의 의지 위에 오성세계에 속하는 실천적 의지의 이념이 덧붙여지고, 이 의지는 전자의 의지가 이성에 따르는 최상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성세계에 대한 직관들에 법칙적 형식 일반으로서의 지성의 개념들이 덧붙여짐으로써 자연에 대한 모든 인식이 의거하는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⑤ 평범한 인간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이 연역의 옳음을 확증한다. 그는 경향성들과 충동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소망한다. 자유의 이념, 즉 감성세계의 규정하는 원인들로부터 독립함의 이념이 오성세계의 성원의 입장으로 그가 옮겨간다면, 그는 보다 좋은 인격일 것으로 믿는다. 그는 그런 입장 안에서 선의지를 의식한다. 이 선의지는 감성세계의 성원으로서 법칙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당위는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서 자신의 필연적인 의욕이고, 그가 자신을 동시에 감성세계의 성원으로 보는 한에서만 당위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모든 실천 철학의 최종 한계에 대하여



① 자유는 경험 개념이 아니며 경험 개념일 수도 없다. 필연성 역시 경험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험적 인식 개념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필연성 개념은 경험에 의해 확증되며, 경험, 즉 감관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야 한다면 불가피하게 전제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는 단지 이성의 이념일 따름이고, 객관적 실재성 자체는 의심스러우나, 자연은 그 실재성을 경험의 실례들에서 증명하고 또 필연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지성개념이다.

② 철학은 인간 행위들에서 자유와 자연필연성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자유 개념과 자연 개념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자유가 자연필연성과 모순된다면, 자유가 포기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③ 우리가 인간을 자유롭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자연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와 다른 관계로 생각한다. 자유로운 인간과 자연 필연성에 종속된 인간은 공존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주고나 안에서 필연적으로 합일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유의 이념으로 이성을 괴롭혀야 하는가의 근거를 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분쟁은 사변 철학의 소관사이다.

④ 의지의 자유에 대한 권리주장은 이성이 독립적이라는 의식 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예지자로 보는 인간은 자신을 의지를 가진, 즉, 원인성을 갖춘 예지자로 생각할 때, 자신을 자연법칙에 종속시킬 때와는 다른 질서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전혀 다른 종류의 규정 근거들과의 관계 속에 놓인다. 이로써 자신이 현상 중의 사물에 종속해 있고, 동시에 사물 그 자체로서는 자연 법칙들에서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즉 자신을 감관에 의해 촉발되는 대상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예지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욕구와 감각적 자극들을 배제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는 행위들이 자신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심지어는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 행위들의 원인성은 예지자로서 인간 안에 있으며, 예지 세계의 원리들에 따르는 작용과 행위들의 법칙들 안에 있다.

⑤ 인간이 예지 세계에 대해 아는 바는, 오직 이성만이 법칙을 수립한다는 것뿐이다. 또한 인간은 예지 세계에서 예지자로서만 본래적 자기이기 때문에, 그 법칙들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정언적으로 관계된다. 그래서 경향성과 충동들은 예지자로서 인간의 의욕의 법칙들을 훼손할 수 없다.

⑥ 자유가 의지라는 이성의 원인성과 결합된다는 점에서만 적극적이다. 자유의 적극적 측면이란 행위들의 원리가 이성원인의 본질적 성질에, 즉, 법칙으로서의 준칙의 보편타당성 조건에 알맞게, 그렇게 행위하는 능력이다. 실천 이성이 의지의 객관을 오성세계로부터 가져온다면, 그것은 실천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오성세계 개념은, 이성이 자신을 실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현상들 밖에서 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한 입장일 따름이다.

⑦ 순수 이성이 어떻게 실천적일 수 있는가를 이성이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성은 자신의 모든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과제와 같은 것이다. 자유는 순전한 이념으로서, 자유의 실재성은 자연법칙들에 따라, 또는 어떤 가능한 경험에서도 밝혀질 수도 없다. 유비의 의한 실례도 제시할 수 없고, 개념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다. 자유는 욕구 능력과는 구별되는 한 능력을 의식한다고 믿는 존재자에게 이성의 필연적인 저제일 뿐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을 현상으로만 보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것뿐이다.

⑧ 의지의 자유를 설명하는 일이 주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도덕 법칙들에 가질 수 있는 관심을 찾아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성이 실천적으로 되는 것은 관심에 의해서이다. 즉, 관심이 의지를 결정하는 원인인 것이다. 이성의 준칙의 보편적 타당성이 의지의 충분한 규정 근거일 때만, 이성은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순수 이성이 이념들에 의해 경험 안에 있는 어떤 결과의 원인이어야 하므로, 어떻게 그리고 왜 법칙으로서 준칙의 보편성이, 즉, 윤리성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가 하는 설명은 인간에게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윤리성이 관심을 끌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 아니라, 예지자인 인간의 의지로부터 윤리성이 생겨났기 때문에, 인간에게 타당하고 그 때문에 관심을 끈다.

⑨ ‘어떻게 정언 명령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은 우리가 자유의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한에서, 이 전제의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는 한에서만 대답될 수 있다. 즉, 예지자의 의지의 자유의 전제 아래서 의지의 자율은 의지가 결정될 수 있는 형식적 조건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인간 이성에 의해 통찰되지 않는다. 어떻게 법칙들로서 이성의 모든 준칙의 보편타당성의 순전한 원리가 그 자신만으로 동기를 제공하고, 순수하게 도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어떻게 순수 이성이 실천적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설명하는 데는 인간 이성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⑩ 감성의 분야로부터의 운동인들의 원리를 제한하는 것은, 감성의 분야에 한계를 긋고 그 분야가 모든 것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더 많은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맺음말


① 자연에 대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은 세계의 어떤 최상 원인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데에 이른다. 자유에 관한 이성의 실천적 사용 역시 행위들의 법칙들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데에 이른다. 인식을 필연성에 대한 의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이성의 모든 사용의 본질적 원리이다. 현존하는 것, 또는 일어나는 것, 일어나야만 할 것의 조건이 근저에 놓여 이지 않으면 이성은 어떤 필연성도 통찰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이성의 본질적인 제한이다. 그래서 이성은 무조건적으로-필연적인 것을 찾고 그것을 개념화하지 못하면서도 상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 전제와 화합하는 개념만 발견할 수 있으면 다행인 것이다.

② 우리는 비록 도덕적 명령의 실천적 무조건적 필연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필연성을 개념화하지 못함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바,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에까지 원리적으로 나아가려 하는 철학에 요구될 수 있는 전부이다.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경복, 고봉만 역, 책세상, 2003.




머리말


  이 논문의 주제를 철학이 제안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ㅇ지만 철학자들이 해결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문제의 하나로 본다. 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p. 35.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류의 모든 진보가 인간을 끊임없이 원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수록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p. 34.



  사람들을 구별하는 차이의 기원을 인간 구조의 변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서로 평등하다. p. 34.



  자연권droit naturel의 참된 정의가 그만큼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p. 36.



  사람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적절하게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규칙을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 이렇게 모여진 규칙들에다 자연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널리 실시해보니 결과가 좋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근거는 없다. 이것이 정의를 만들어내고 거의 터무니없는 일치에 의해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매우 편리한 방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p. 38.



  우리가 이 법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법의 강제를 받는 사람의 의지가 그 법을 의식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이기 위해서는 그 법이 자연의 소리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p. 38.



  거기에[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원리이다. 사회성의 원리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연법의 모든 규칙들은 우리의 정신이 이 두 가지 원리 사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일치와 조합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pp.  38-39.



  지식도 자유도 없는 동물들이 이 법칙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도 타고난 감성에 의해 어느 정도 우리의 본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도 자연법에 관여하며 인간은 그들에 대해 어떤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내가 동포에게 어떤 종류의 해도 입혀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동포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 같은 특질은 동물과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므로, 적어도 동물은 인간에 의해 불필요하게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p. 39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건강•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p. 45.



  대체 이 논문에서는 정확히 말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이 진보하는 가운데 폭력에 이어 권리가 생기고 자연이 법에 굴복한 시기를 지적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떠한 기적의 연쇄로 인해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 인민peuple이 현실의 행복을 대가로 하여 관념 속에서 안식을 찾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p. 46.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연 상태가 존재했다는 데 대해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성서를 읽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지식과 계율을 받은 최초의 인간은 이 같은 자연 상태에 있지 않았다. ...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기이한 사건에 의해 다시 자연 상태로 떨어진 셈이다. 이것은 변호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며 전혀 증명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므로 우선 이 모든 사실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 조금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추구할 수 있는 연구는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라 다만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p. 47.







        제 1 부


  인간의 자연 상태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인간을 그 기원을 통해, 이를테면 종의 최초의 발아를 통해 검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대신 인간은 어떤 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이 두 발로 걸어 다니고 현재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손을 사용했으며 자연 전체에 시선을 보내고 하늘의 광대한 넓이를 눈으로 가늠했으리라고 가정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성된 존재에게서 그가 받았을지 모를 종교 교육에 의한 신앙으로 축적된 지식과, 오랜 세월에 걸친 진보를 통해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인위적인 능력을 제거해버린다면, 요컨대 인간을 자연의 손에서 갓 나온 그대로의 상태에서 생각해보면, 아는 거기서 어떤 동물보다는 약하고 민첩하지 못하지만 결국 그 어떤 동물보다 유리하게 조직된 한 동물을 떠올리게 된다. pp. 50-51.




  자연은 그들에게 스파르타의 법률이 시민의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과 똑같이 행동한다. 즉 자연은 훌륭한 체격을 가진 자들은 더욱 강건하게 만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모두 도태시켜버리는 것이다. p. 52.



  동물의 힘에 있어서 뛰어난 이상으로 자신이 재주에 있어서는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p. 54.



  동물보다 더 무서운 적으로서 인간의 적절한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는 상대는 인간의 타고난 연약함, 유년기나 노화, 온갖 종류의 병들이다. 처음 두 가지는 모든 동물들에게 공통되지만 마지막 것은 주로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모두 우리가 약하다는 슬픈 증거들이다. pp. 54-55.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령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 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나는 감히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며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주저 없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 ... 인간의 질병사(疾病史)는 문명 사회의 역사를 더듬어봄으로써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 56.



  사회화하고 노예화한 인간은 연약하고 겁이 많아지며 비굴해진다. 게다가 나약하고 여성화된 생활 양식은 인간의 힘과 용기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든다. ... 인간과 동물은 자연에 의해 동등한 대우를 받으므로 인간 스스로가 그가 길들이는 동물보다 그 자신에게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을 더욱 타락시키는 특별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p. 58.



  우선 나는 모든 동물을 하나의 정밀한 기계로밖에 보지 않는다. ... 나는 인간이라는 기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동물의 활동에서는 자연만이 오로지 모든 것을 행하는 데 반해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연의 활동에 협력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즉 동물은 본능에 따라,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에 따라 취사 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동물은 자기에게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에게 아무리 유리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신에게 해로워도 종종 그 규칙을 벗어나 행동한다.  p. 60.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지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특질이다. 자연은 모든 동물에게 명령하고 동물은 이에 따른다. 인간도 같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복종하느냐 저항하느냐의 선택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자유로움을 인식한다. 인간 영혼의 정신성이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자유의 의식을 통해서였다. p. 61.



  ... 나는 양자를 이렇게 구별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또 하나의 매우 특수한 성질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개량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인간은 환경의 도움을 얻어 다른 모든 능력을 점차 발전시켜가는 이러한 가능성을 종의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차원에서도 소유하고 있다. ... 인간과 동물을 분명히 구별하는 거의 무제한적인 이 가능성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며, 평온하고 순진무구한 나날이 계속되는 저 원초적인 상태로부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을 이끌어낸 것도 바로 이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오류, 악덕과 미덕을 몇 세기 동안의 흐름 속에서 부화시켜 드디어 인간을 자기 자신과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이 가능성이다. p. 62.



  주석 70)에서 (저자 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처럼 불행하게 만드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방대한 학문 연구, 수많은 기술의 발명, 막대한 노력이 소요된 심연 매립과 산을 깎고 바위를 쪼개고 운하를 만드는 등의 큰 공사, 토지 개간, 인공호 건설, 소택지 간척, 거대한 건물의 축조, 거대한 배의 건조 등 인간의 막대한 사업들을 생각할 때, 또 한 편으로는 이모든 것이 인류의 행복에 미친 참된 이득을 조금이라도 깊이 연구해볼 때,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불균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의 무분별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사리 분별을 못하고 어리석은 교만과 그지없이 공허한 자기 예찬을 위해 자연이 호의적으로 막아주었던 모든 참상을 오히려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pp. 171-172.


  인간은 본래 선량하며 나는 그러한 사실을 증명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토록 타락하게 만든 것은 그의 체질 속에 일어난 변화와 진보 그리고 그가 획득한 지식이 아닐까? 우리는 인간 사회를 얼마든지 찬미할 수 있으나 그 사회는 결국 사람들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겉으로는 상부상조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가능한 모든 해를 끼치려고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파멸시켜야 하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적이 되어야 하며 이해 관계의 충돌로 말미암아 사기꾼이 되는 상태가 과연 어떨 것인가를 반성해보아야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회는 각자가 타인에게 봉사함으로써 이득을 보게끔 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해를 끼침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얻지 않으면 그야말로 다행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pp. 172-173.


  사회 속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에게는 우선 생활필수품을, 다음에는 사치품을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에는 환락에 이어 엄청난 부와 시종과 노예가 따른다. 그는 잠시도 쉴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욕망이 자연적이고 절박하지 않을수록 정념이 점점 고조된다는 사실이며,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을 만족시키는 힘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자는 한참 동안 많은 재물을 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것을 착취하여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인간 사회, 적어도 모든 문명화된 인간 심정의 은밀한 의도를 담고 있는 도덕적인 그림이다. pp. 173-174.


  말살, 독살, 납치 등의 범죄와 그에 대한 처벌 역시 명백히 사유 제도의 탓, 따라서 결국은 사회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p. 174.


  사치는 치료하고자 하는 악보다도 훨씬 나쁜 치료법이다. 사치는 오히려 그 자체가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어떤 국가에서나 모든 악 가운데서 최악의 형태다. 사치는 자신이 창출해낸 무수한 종복들이나 부랑자들을 기르기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파멸시킨다. p. 176.


  사회와 그 사회가 발전시킨 사치는 자유 학예, 수공예, 상업, 문예를 낳는다. 이것들은 산업을 발달시키고 풍요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국가를 망치는 무용지물이다. p. 176.


  그러한 것들이 급기야는 가장 부유한 나라들까지도 벗어날 수 없는 모든 불행의 민감한 원인들이다. 산업이나 기술이 널리 보급되고 발전함에 따라 농민은 더욱 천대를 받고 몇몇의 사치를 위한 세금을 부담하면서 노동과 굶주림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마련이다. p. 176.


  나는 누군가가 마지막에, 인간이 발명한 기술이나 법률 같은 이 모든 위대한 것이 페스트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까 봐 두렵다. 우리에게 거주 공간으로 제공된 이 세계가 너무 비좁아지지 않도록 종의 지나친 번식을 억제하는 유익한 페스트 말이다. p. 177.


  사회를 파괴하여 내 것과 네 것의 경계를 없애고 숲으로 돌아가 곰들과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나의 적대자들이 내리는 결론이지만, 나는 그와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는 것에 대해 그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그에 대한 예방책을 마련하고자 한다. ...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저 태고의 원시적인 순진성을 되찾아보자. ... 인류의 악덕을 버리기 위해 그 지식도 버림으로써 인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정념이 원시의 순수성을 영원히 파괴해버린 나와 같은 인간들은 이제는 풀이나 도토리로 살아갈 수 없고 법률이나 통치자 없이 살아갈 수 없다. pp. 177-178.



  인간성을 탐구하는 자들이 뭐라고 하든지 인간의 지성은 정념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으며 누구나 알다시피 정념도 지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우리의 이성이 완성되는 것은 바로 이 양자의 활동에 의해서다. p. 63.



  그들[미개인들]의 욕망은 육체적인 욕구를 초월하지 못한다. ... 죽음과 그 공포에 대한 지식이란 인간이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 중의 하나다. pp. 63-64.



  ... 정신의 진보는 국민이 자연으로부터 받았거나 상황에 따라 국민에게 강요된 필요에 정확하게 비례하며 따라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재촉하는 정념에 비례한다. p. 64.



  요컨대 토지가 그들 사이에 분배되어 있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자연 상태가 조금도 소멸되어 있지 않는 한, 어떻게 그 같은 상황에서 땅을 경작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p. 67.



  모여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쓰이기 전에 인간에게 필요했던 유일한 언어는 ‘자연 그대로의 외침’이었다. ... 그들은 음성 어조의 변화를 증가시켰고 거기에 몸짓까지 덧붙였다. ... 또한 몸짓은 주의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주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마침내 몸짓 대신에 음성을 분절하여 발음하는 것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 이와 같은 대치(代置)는 모두의 동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또한 아직 훈련을 전혀 거치지 않아 조잡한 기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방식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원 일치의 동의에는 적절한 동기가 있어야 하며, 말의 사용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pp. 71-72.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관념은 단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인식될 수 없으며, 특히 지적 능력은 절들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일반적인 관념을 파악할 수 없다. ... 모든 일반적인 관념은 순전히 지적인 것이다. ... 만약 당신이 거기서 모든 나무에 공통된 것만을 보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무라고 할 수 없다. 순전히 추상적인 존재들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마음속에 그려지거나, 혹은 언술에 의해서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삼각형의 정의만이 삼각형의 참된 관념을 준다. 여러분이 머릿속에 하나의 삼각형을 그리자마자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삼각형이지 이미 다른 삼각형은 아니다. ... 따라서 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며 말해야만 한다. pp. 73-74.



  언어가 제정되기 위해서는 이미 결합된 사회가 있어야 했는지, 도는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 이미 발명된 언어가 있어야 했는지,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필요했는가 하는 문제다. p. 76.



  나는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중에서 어는 것이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지를 묻고 있다. ... 미개인은 자연 상태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본능 속에 갖고 있었으며,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훈련된 이성 속에 갖고 있었다. pp. 77-78.



  우선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서로간에 도덕적인 관계도, 분명한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아서 선인(善人)일 수도 악일 수도 없었으며, 악덕도 미덕도 가지고 잇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p. 78.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나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발달이나 법의 구속 때문이 아니라, 정념이 평정을 유지하고 악덕을 모르기 때문이다. ... 홉스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원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있어 인간의 강렬한 자기애가 크게 완화되도록, 또는 이 자기애가 생기기 전에 자기 보존의 욕구가 완화되도록 인류에게 주어진 원리다. 이 원리로 말미암아 인간은 공포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선천적인 감정에서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하게 된다. ...나는 지금 연민pitié에 대해 마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처럼 약하고 온갖 불행에 빠지기 쉬운 존재들에게 걸맞은 성향이다. 연민은 인간의 반성하는 모든 습관에 앞서는 것이므로 더욱 보편적이고 인간에게 유익한 미덕이며,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때로는 동물들도 뚜렷한 징후를 보이곤 하는 미덕이다. ... 『꿀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저자가 인간을 동정심 많고 감수성이 에민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예로 한 비통한 죄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냉정하고 치밀한 문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기뻐한다. 그 죄수는 한 마리 야수가 어린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 날카로운 이빨로 그 아이의 손발을 물어뜯고 꿈틀거리는 내장을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이 목격자라도 어찌 마음에 끔찍한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광경을 보고도 기절한 어머니나 곧 숨이 넘어가려는 어린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뻗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찌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pp. 79-82.



  이것은 모든 반성에 앞서는 자연의 순수한 충동이며, 또 아무리 타락한 풍속이라 하더라도 파괴하기 어려운 자연적 연민의 힘이다. ... 사실 너그러움이나 관대함 도는 인간애란 약자나 죄인 또는 인류 일반에 적용된 연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잘 생각해보면 친절이나 우정까지도 특정한 대상에 쏠린 변함 없는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는가? 동정심이란 우리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놓는 감정일 뿐이다. ... 사실 동정은 고통을 목격하는 동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과 마음속으로 하나가 되면 될수록 더욱 강해질 것이다. ...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 이 반성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 미개인에게는 이와 같은 훌륭한 재능이 전혀 없다. 그리고 지혜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무턱대고 인류 최초의 감정에 몸을 맡긴다. pp. 82-83.



  그러므로 연민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하면서 종 전체의 상호적 보존에 기여함이 분명하다.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깊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도와주러 나서게 되는 것은 바로 연민 때문이다. 연민은 자연 상태에서 법과 풍속과 미덕을 대신하며, 아무도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저항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이점을 누린다. ... 요컨대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원칙과는 별 관계가 없더라도 인간이 악을 행했을 때 느끼는 혐오감의 원인은 교묘한 논거 속보다 오히려 자연의 감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pp. 83-84.



  그들은 서로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 따라서 허영심도 신중함도 존경도 경멸도 모르고 지냈다. p. 84.



  인간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여러 가지 정념들 중에는 이성을 필요로 하는 열렬하고 격렬한 정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장애를 물리치며, 본래는 인류를 보존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면 인류를 파멸시키기 십상일 만큼 무서운 정념이다. p. 85.



  우선 정념들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억제를 위한 법률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p. 85.



  미개인들에게 이 감정[사람의 감정]은 거의 무가치한 것임에 틀림없다. ... 미개인들은 자연이 심어준 성욕을 따랐을 뿐이며, 자기가 자연에서 얻지 못한 취향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개인들에게는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좋은 것이다. p. 86.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그토록 자주 인간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오게 만드는 저 격렬한 열정을 사회 속에서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p. 87.



  결론을 내려보자. 원시의 인간은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고, 싸움도 교제도 없으며, 타인을 해칠 욕구가 없듯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어쩌면 동류의 인간을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그저 숲속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정념의 지배를 받을 뿐 스스로 자족하면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감정과 지적 능력만을 갖고 있었다. 원시의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눈으로 보아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것만 쳐다보았다. 그의 지능은 그의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발달하지 못했다. 우연히 그가 어떤 발견을 한다 해도, 그는 자신의 자식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수할 수 없었다. 기술은 발명자와 더불어 소멸했다. 교육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진보도 없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대가 이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세대는 언제나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으므로, 최초 시대의 모든 조야함 속에서 수백 년이 되풀이되며 흘러갔다. 종은 이미 늙었으나 인간 개체는 항상 어린애로 머물러 있었다. p. 89.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사회 상태보다 자연 상태에서 훨씬 적으며 아울러 자연적 불평등이 인류에게는 제도의 불평등에 의해 한층 증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90.



  그러나 원시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굴종과 지배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 게다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속의 쇠사슬이 있을 수 있겠는가? p. 91.


  

  굴종의 끈은 인간 상호간의 의존과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 필요성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이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는 이와 같은 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p. 92.



  이제 나는 그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을 인간 정신의 지속적인 진보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 이제 나는 인간 종을 손상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완성하고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듦으로써 사악하게 하며 마침내는 인간과 세계를 까마득한 출발점에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연을 검토하고 비교해보려 한다.p. 92.






        제 2 부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 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 무렵에 사태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 관념은 순차적으로 발생한 그 이전의 많은 관념들에 의존하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 한순간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 95.



  인간이 가진 최초의 감정은 자기 생존에 대한 것이며, 최초의 관심은 자기 보존에 대한 것이다. 땅에서 나는 생산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으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게 되었다. 굶주림이나 그 밖의 다른 욕구들이 그에게 갖가지 생존 방식을 차례로 경험하게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자기의 종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방식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난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러한 맹목적인 경향은 순전히 동물적인 행위만을 낳았을 뿐이다. p. 96.



  갓 태어난 인간의 상태는 이와 같은 것이었다. 최초에는 순수한 감각에 국한되어, 자연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자연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동물처럼 생활했다. 그러나 이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나타났고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 그는 자연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동물들과 싸우기도 했으며, 먹이를 두고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강자에게 양보했던 것을 다른 데서 보충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p. 96.



  인구가 증가하고 확산되면서 어려운 점들도 늘어났다. p. 97.



  우리가 표현하는 관계는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어떤 성찰,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안전에 가장 필요한 경각심을 가르쳐준 반사적인 조심성을 낳았다.

  이 같은 발전의 결과로 얻은 새로운 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에 대한 우월성을 자각하고 과시하게 했다. ... 이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눈길을 보냄으로써 비로소 자존심이라는 것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존재의 서열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던 중에 인류라는 자기의 종이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일찍부터 개인으로서도 첫째라고 자부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pp. 97-98.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과 동족들 사이 또는 자신의 이성과 자기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이 아직 모르고 있었던 그들과의 공통점까지 알게 되었다. ... 그들의 사고 방식이나 감정이 자기와 일치한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정신 속에 확립된 이러한 중요한 진리 때문에 그는 철학적 추론만큼이나 신속하고 확실한 예감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그들과 함께 지켜야 할 최상의 행동 규칙들을 지키게 되었다. p. 98.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호간의 약속과 그로 인한 이득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p. 99.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어느 지방이든 그 언어의 성립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발음이 명확해지고 합의에 의한 몇 가지 음들이 첨가됨으로써 그 지방 특유의, 하지만 조잡하고 불완전한 언어가 생겨났다. 그 언어는 오늘날 여러 미개 민족이 사용하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pp. 99-100.



  이와 같은 초기의 진보 덕분에 인간은 더욱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정신이 계몽됨에 따라 솜씨도 점점 향상되었다. ... 이윽고 인간들은 ... 돌도끼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이 돌도끼는 나무를 자르고 흙을 파고 나뭇가지로 오두막을 짓는 데 쓸모가 있었다. 사람들은 곧진흙 같은 것으로 그 오두막의 벽을 바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가족이 형성되고 구별이 생겨나고 일종의 소유 개념이 도입된 최초의 혁명기이다. p. 100.



  인간의 마음에 최초의 변화가 생겨난 것은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이 공동의 거처에서 함께 사는 새로운 상황의 결과였다. 함께 생활하는 습관은 인간이 체험한 가장 감미로운 감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부애와 부성애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가정은 상호간의 애착과 자유가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긴밀하게 결합된 하나의 작은 사회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일했던 남녀의 생활 방식에 처음으로 차이가 생겨났다. p. 101.



  그러한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한 도구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었고, 그들의 선조들이 알지 못했던 편리함을 얻기 위해 이 여가를 활용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꿈꾸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에게 부과한 최초의 멍에였고, 그들의 자손에게는 불행의 단초였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정신을 유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p. 101.



  ... 점차 서로 가까워져 모리를 이루고 드디어 각 지방마다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규칙이나 법률이 아닌 풍습과 성격의 공통성에 따라, 즉 같은 생활 양식이나 음식에 따라, 도는 기후의 공통된 영향에 따라 결합되어 있다. ... 젊은 남녀들이 이웃이 되어 오두막에 사록, 자연이 요구하는 일시적 교류가 곧 거듭되는 왕래로 인해 즐겁고 영속적인 또 다른 교류를 낳는다. ... 무의식중에 가치와 미의 관념을 얻게 되고 그것이 다시 좋고 나쁨에 대한 감정을 낳게 된다. pp. 102-103.



  여러 가지 개념과 감정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정신과 마음이 훈련됨에 따라, 인류는 점차 유순해지고 관계가 확대되고 유대가 강화되었다. ...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러한 최초의 선호(選好)에서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태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부러움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효모에서 생긴 효소가 마침내 행복과 무구(無垢)에 치명적인 화합물을 생성시켰다. pp. 103-104.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하여 존경이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형성되자, 누구나 자기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의범절의 의무가 미개인들 사이에도 생기게 되었으며 고의적인 범행은 모두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그 범행으로 인해 초래되는 손해보다는 인격을 모욕당했다는 점 대문에 더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관념들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하고 또 이들 민족이 이미 최초의 자연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인간은 본래 사악하므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규제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p. 104.



  우리는 사회가 형성되고 사람 사이에 여러 가지 인간 관계가 성립되자 이미 그들 사이에는 애초의 구조에서 물려 받은 것과는 다른 성질이 요구되었으며 도덕이 인간의 행위 속에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 원시 상태의 무위(indolence)와 우리 이기심의 극성스러운 활동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인간 기능 발달의 이 시기가 가장 해복하고 안정된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 인간이 그 상태에서 벗어난 것은 공동의 유용성을 위해서는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어떤 불행한 우연 때문일 뿐이다. p. 105.



  요컨대 그들이 혼자 할 수 있는 작업과 다른 사람의 협력이 필요 없는 기술에 전념하는 동안, 그들의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건전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계속해서 상호간에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렸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순간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곳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p. 106.



  토지의 경작은 필연적으로 토지의 분배라는 문제를 낳았으며 일단 소유가 인정되자 정의에 관한 최초의 규칙이 생겼다. ... 이러한 기원은 이제 막 생겨난 소유의 관념이 육체 노동 이외의 것에서 유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큼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다. ... 오직 노동만이 경작자에게 자신이 경작한 토지의 산물에 대한 권리를 적어도 수확기까지 부여하며, 따라서 토지에 대한 권리를 해마다 보유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토지의 점유possession가 반복되면 그것은 쉽게 소유로 전환된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 자연법에서 생겨난 권리와는 다른 ‘소유’라는 권리를 낳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p. 109.



  이리하여 자연적 불평등이 새로운 원인의 결합에 따른 불평등과 더불어 조금씩 전개되었다. p. 110.



  다시 말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체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에서 위압적인 호사(豪奢)의 과시와 기만적인 책략, 이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 마침내 인간은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진정한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열망 때문에 서로를 해치려고 하는 옳지 못한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더욱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친절의 가면을 쓰기 일쑤이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 pp. 111-112.



  이렇게 해서 가장 강한 자 또는 가장 궁핍한 자가 그의 힘이나 욕구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일종의 권리―그들이 볼 때 소유의 권리와 동등한 권리―로 생각함에 따라 평등은 깨지고 뒤이어 가장 끔찍한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 가장 강한 자의 권리와 최초의 점유자의 권리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투쟁과 살인에 의해 종식될 수밖에 없었다. 갓 태어난 사회는 더없이 끔찍한 전쟁 상태로 변해버렸다. p. 113.



  부자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유효한 이유나 자신을 방어할 충분한 힘도 없고, 한 사람 정도는 쉽게 짓누른다 해도 강도 떼에게는 오히려 짓밟힐 수밖에 없고, 상호간의 질투심 대문에 약탈의 공통된 희망으로 결집된 적들에 대항하여 자기와 동료들과 결합할 수도 없어서 만인에서 홀로 맞서게 되었다. 마침내 부자는 절박한 필요에 따라 인간의 정신 속에 스며든 적이 없는 가장 교묘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의 세력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 자신의 적대자들을 자신의 방어자들로 만들고, 그 적대자들에게 다른 준칙을 불어넣어 자연법이 자신에게 불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유리한 다른 제도들을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pp. 114-115.



  그 후 부자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쉽사리 생각해냈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말했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를 제지하며 각자에게 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해 단결합시다.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규칙을 정합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며, 어느 쪽도 차별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를 평등하게 서로의 의무에 따르게 하는, 말하자면 운명의 변덕을 보상하려는 규칙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힘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의 최고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현명한 법률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성원을 보호하고 방위하며,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영원히 우리를 단합시키는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p. 115.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심산으로 자신의 쇠사슬을 향해 달려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 제도의 이점을 느낄 만한 이성은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내다볼 정도로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p. 116.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러하거나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이다. p. 116.



  사람들은 세상 어디를 가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며, 누구의 머리 위에나 매달려 있는 검이 잘못되어 떨어질 때 목을 움츠려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기가 벌써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시민법이 공동체 성원들의 공통된 규칙이 되었으므로, 자연법은 서로 다른 사회 사이에서만 유지되었다. 이로써 자연법은 국제법이라는 명칭으로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자연적 동정심을 대신하는 것으로 약화되었다. pp. 116-117.



  이렇게 해서 서로간에는 여전히 자연 상태에 머무르고 있던 다양한 정치체들도 곧 개인을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 바로 그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 이것이 인간이 여러 사회로 분할된 데서 엿볼 수 있는 최초의 결과다. pp. 117-118.



  몇몇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는 강자의 정복이나 약자의 단결에서 유래한다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 그러나 내가 방금 설명한 원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첫째, 앞에서 말한 강자의 정복이라는 경우에서 정복의 권리 그 자체는 아무 권리도 아니므로 다른 권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 상태로 다시 돌아간 국민이 자진하여 정복자를 자기의 우두머리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 정복자와 피정복자인 국민은 언제까지나 서로 전쟁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 둘째, 약자의 단결이라는 경우를 놓고 볼 때, 이 ‘강하고’ ‘약하다’는 말 자체가 애매하다. ... 셋째, 자유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가 교환으로 얻을 것이 전혀 없는데도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을 자진하여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부자는, 이를테면 자기 재산의 모든 부분에서 민감하므로 손해를 입기가 훨씬 쉬웠다. pp. 118-119.



  정치 상태란 거의 우연의 소산이며 출발부터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점이 발견되고 대책이 제시되긴 했지만 구조적인 결함 자체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p. 119.



  국민들이 애당초 아무런 조건이나 반대 급부 없이 절대적 지배자에게 몸을 내맡겼다거나, 자존심이 강하고 쉽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공동의 안전을 위해 생각해낸 최초의 수단이 노예 상태에 뛰어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다. ...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란 한쪽이 다른 쪽에 예속되는 것이므로, 통치자의 도움을 빌려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모두 통치자의 손에 맡겨버린 것은 양식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 국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가 그에게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모든 국법의 기본적인 준칙이다. pp. 120-121.



  나는 노예가 된 인민이 쇠사슬에 매인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예속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p. 122.



  몇몇 사람들은 전제적인 정치 체제와 모든 사회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

  ... 아버지를 존경할 의무는 있어도 아버지에게 복종할 의무는 없다. ... 시민 사회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이 시민 사회에서 주된 힘을 끌어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개인이 여럿의 아버지로 인정받은 것은, 그의 둘레에 여럿이 모여 있을 때뿐이었다. pp. 122-123.



   이와 같이 권리를 통해 사실을 검토해보면, 전제 정치의 자발적인 성립이라는 주장에는 확실성이나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의무를 지우고 다른 한쪽에는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무를 지는 쪽만 손해를 보는 이러한 계약의 유효성을 납득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하겠다. ... 다만 이렇게까지 자기의 품위를 떨어뜨려도 아무렇지 않는 자들이 무슨 권리로 자손을 똑같은 불명예에 복종시킬 수 있으며, 또한 자손들이 그들의 적선으로 얻게 된 것이 아닌 자유라는 재산―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을 무슨 권리로 자손들 대신 포기하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pp. 123-125.



  푸펜도르프는 “인간은 합의나 계약에 따라 재산을 남에게 양도하듯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첫째, 내가 양도하는 재산은 나와 전혀 무관하여 설령 남용되더라도 상관이 없으나, 남이 내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며, 억지로 강요되어 저지르는 악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범죄의 도구가 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유권은 사람 사이의 합의와 제도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나 자유 같은 자연의 본질적인 선물은 그렇지 않다. ... 자유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자연에서 받은 선물이므로, 어느 부모도 자식들에게서 이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pp. 125-126.



  여기서는 다만 세상의 통념에 따라 정치체의 성립을 인민과 그들이 선택한 통치자 사이의 참된 계약이라고 보는 데서 그치고자 한다. 이 계약에서 당사자 양측은 그 속에 명시된 법규들을 준수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쌍방의 결합은 확고해진다. 인민은 사회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그들 모두의 의지를 하나의 의지로 결합시켰다. 그러므로 이 의지가 표명되고 있는 모든 조항은 각각 기본적인 법률이 되어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예외 없이 의무를 부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는 법률의 집행을 감시하는 의무를 맡은 행정관의 선정과 그 권력을 규정하고 있다. 이 권력은 정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되지만 그것을 변경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법률과 그 집행자들을 종경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명예가 주어지고, 집행자 개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선정을 위해 기울인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여러 가지 특권이 부가된다. 대신 행정관은 자기에게 맡겨진 권력을 오직 맡긴 자의 의향에 따라 행사하고 각자가 자기의 소유물을 언제나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와 같은 정치 구조가 갖는 불가피한 폐해를 경험으로 알지 못하게 되거나 인간 마음에 대한 지식을 통해 예상하기 전에는 이 정치 구조의 유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 그 유지에 가장 큰 이해 관계를 갖는 만큼, 그 정치 구조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pp. 126-127.



  계약을 그것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취소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 어느 쪽이든 상대가 그 계약 조건을 어기거나 그 조건이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언제고 계약을 포기할 권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이 원칙을 근거로 구축될 수 있는 것 같다. pp. 128.



  정부의 여러 가지 형태는 그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이 수립되던 시기에 개개인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크고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 p. 129.



  인민은 이미 종속과 휴식이 생활의 안락에 길들여져 쇠사슬을 끊을 만한 힘도 없었으므로 자기들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예속 상태를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 p. 130.



  이러한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의 설정이 제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p. 130.



  정치상의 차별은 필연적으로 시민들 간의 차별을 가져온다. 인민과 통치자들 사이에 증가되어가는 불평등은 이윽고 개인들 사이에서도 느껴지게 되며, 정념이나 재능에 따라, 그리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바뀐다. p. 131.



  개인이 동일한 사회 속에 결합되어 서로 비교하고 끊임없이 이용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차별을 고려하게 되면, 곧 그들 사이에 신용과 권위의 불평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부, 신분이나 지위, 권력, 개인적인 장점이 주요한 구분 기준이 되며 여기에 따라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위치를 차지하므로, 나는 이들 서로 다른 세력의 조화나 충돌이 국가의 구성이 좋은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임을 증명할 수 있다. pp. 132-133.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여 애쓴 결과 오히려 내부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p. 134.



  신분과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하찮은 학문에서, 이성과 행복과 미덕에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p. 135.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를 갖게 된다. ... 전제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이미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 이 자연 상태와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자연 상태의 차이는 후자가 순수한 자연 상태인 반면 전자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두 상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정부의 계약은 전제군주제에 의해 너무 많이 파기되어 있으므로, 전제 군주는 자기가 최강자로 있는 동안만 지배자이다. pp. 135-136.



  미개인은 안식과 자유만을 추구하고 한가로이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스토아 학파의 아타락시아ataraxia도 미개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항상 활동하면서도 땀을 흘리고 불안해하며 더욱더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 사실상 이 모든 차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pp. 138-139.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 p.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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