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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강은 영혼이 육체에 깃들 때에만 건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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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정선 목민심서』 ,  다산연구회


 

『정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금 징수는 흔들리지 않아야 하니 이는 세금을 징수하면서도 어루만지고 돌보는 것이며, 형벌은 착오가 없어야 하니 이는 형벌하면서도 교화하는 것이다. 봄에 궁한 백성 구제는 마치 자식처럼 하고, 가을에 거두어들이기는 마치 원수처럼 해야 한다. 한 이익을 일으키는 것은 한 폐해를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일을 만드는 것은 한 일을 감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위엄은 청렴함에서 생기고 정사는 부지런함에서 이루어진다.” p. 106


아전의 횡포

  “넉넉한 백성의 기름진 토지는 모두 아전의 전대 속으로 들어가고, 조운선에 세곡을 실어 보내는 것은 해마다 기한을 어겨, 체포되어 문초당하고 파면되어 갈리는 수령이 줄줄이 뒤를 잇고 있으나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p. 107

  “마땅히 호조에 납부해야 할 것이 4천석이라면 자기 고을에서 백성으로부터 징수한 것은 1만 석도 훨씬 넘는다. 아침에 명령을 내려 저녁에 거둬들일 수 있는 넉넉한 집의 윤기 있는 입쌀은 아전이 모두 횡령한다.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은 은결로 거두고, 혹은 궁결이라 하여 수세장부에서 빼버리고, 혹은 저가로 거두고, 혹은 거짓 재결로 수세장부에서 빼버리고, 혹은 돈으로 받고, 혹은 쌀로 받는다. 이미 초가을부터 구름이 몰려가듯이 냇물이 흘러가듯이 끝내버려 속여 훔쳐 먹은 액수는 모두 아전의 전대 속으로 들어간다.” p. 107

  “늘 보면 조사관이나 검시관이 미리 몰래 조사시키지도 않고 데리고 간 아전을 시켜 은밀히 여론을 묻지만, 아전이 뇌물을 받고 청탁을 받아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경우는 첫 번째 조사나 검시에서는 잘못 판결하지 않았는데, 두 번째 조사나 검시에서 이유 없이 판결이 뒤엎어지고 옥사의 진상이 의심스러워지며 억울하게 걸린 자가 벗어날 수 없게 된다.” p. 113.

  “섬사람들은 본래 호소할 길이 없는 사람들인데, 조사하는 일에 따라간 아전들이 조사관의 접대를 빙자해 침탈을 마음대로 해 솥과 항아리까지도 남기지 않는다. …… 그러므로 표류선을 조사하는 관리들은 마땅히 눈을 밝게 뜨고 엄하게 살펴서 아전들의 침학을 금지시켜야 한다.” p. 115.


아전 단속

-  백성은 토지를 논밭으로 삼지만, 아전들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을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어 당연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p. 141.

-  최숙생이 ‘다른 고을의 수령이 비록 교활하다고 하나 다만 한 사람의 도적일 뿐이라 qro성들이 오히려 견딜 수 있지만, 청양현감은 비록 청렴하도 여섯 도적(6방의 아전)이 아래에 있으니 백성들이 견딜 수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비록 학문이 깊고 넓다 하더라도 아전을 단속할 줄 모르는 자는 백성의 수령이 될 수 없다. p. 145.

- 이노익이 전라감사가 되었는데, 감영의 아전 최치봉이란 자가 간사하고 교활하며 악독한 아전 무리의 괴수였다. …… 그들 모두가 최치봉과 결탁하여 그를 우두머리로 삼고 지냈다. 최치봉이 해마다 수십만 냥의 돈을 각 읍의 교활한 아전들에게 나눠주어 창고의 곡식을 교묘하게 빼돌려 돈으로 바꾸어 고리대의 밑천을 삼으니, 만민에게 해가 돌아갔다. 감사가 아전과 군교들을 보내어 각 읍 수령의 잘잘못을 탐문하게 하면 반드시 먼저 최치봉의 지시를 받아 나가고, 돌아와서도 탐문해 적어온 보고서를 반드시 먼저 최치봉에게 보이니, 청렴 근실하여 법을 지키는 수령은 중상하고, 탐학 비루하며 불법한 수령과 간악한 향임과 교활한 아전으로 보고서 속에 기록된 자들은 최치봉이 모두 빼내주고, 그 기록된 글을 본인에게 보내어 자기의 위덕을 세우니 온 도가 눈을 흘겨온 지 오래되었다. p. 146.

- 무릇 한 가지 명령과 한 가지 지시서를 내릴 때라도 마땅히 수리(首吏)와 해당 아전에게 그 일의 근본을 캐어보고 지엽을 밝혀내어 밑바닥까지 궁구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난 뒤에 결재를 한다면, 수십일이 지나지 않아 사무에 밝아져 모르는 것이 없게 된다. p. 150.

- 조선왕조 초기에는 아전의 횡포가 심하지 않았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사대부의 녹봉이 박하여 집이 가난해지고, …… 이에 따라 탐학하는 풍조가 점차 커지고 아전들또한 날로 타락하여 오늘날에는 그 정도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민간에 있으면서 그 폐단의 근원을 탐구해보니, 조정의 권귀들이 뇌물을 받고, 감사가 축재하며 수영이 이익을 나누기 때문이다. pp. 150-151.


관솔의 구성: 아전, 군교, 노비

        관노: 시중드는 노비, 물자 구입하는 노비, 물품 제작하는 노비, 말 키우고 일         산 드는 노비, 방을 덥히고 뒷간 치우는 노비. 보수받는 관노는 푸줏간과 주방의         노비, 그리고 창고지기

        관비: 기생과 비자(수급비) (pp. 153-154)


수령을 보좌하는 직책

향소: 좌수 - 향청의 우두머리, 이방과 병방의 사무를 관장

      별감 - 좌별감은 호방과 예방의 사무를 관장, 우별감은 형방과 공방의 사무를 관장         (pp. 156-157)


- 아전들의 간사하고 교활함이 저절로 행사되지 못하게 되고, 힘있는 백성의 횡포가 저절로 자행되지 못하게 되면, 드러나지 않ㅇ는 하찮은 잘못은 그냥 덮어두어 만물이 푸근히 안락하도록 하는 게 옳다. 그래도 여전히 아전과 향청직원, 군교들이 몰래 수령의 동정을 엿보고 이를 빙자해 멋대로 농간질하는것을 염려해야 하고, 관의 노비와 병졸들이 몰래 민간에 나가 토색질하고 행패부리는 것을 살펴야 하며, 또 불효불공하고 장터에서 횡탈을 일삼는 자를 금해야 하며, 향촌에서 무단행위를 하는 자와 강한 힘을 믿고 약한 이를 업신여기는 자를 통제해야 하니 별도로 염탐하고 조사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pp. 163-164.

- 우두머리 아전인 이방의 시루건이 무거워 수령의 총명을 가려 실정이 위로 보고되지 않으니, 별도의 염문을 그만둘 수가 없다. p. 169.


수령의 신뢰 쌓기

  평소에는 큰 해가 없다 하더라도 만약 나라에 외환이 있을 경우에 믿음이 아랫사람들에게 서 있지 않으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명령의 시행을 충실히 하여 백성들의 시노리를 얻는것이 수령의 급선무이다. p. 173.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의 모순: pp. 180-181.


세금 걷기

-  세미를 거두는 마감에 아전과 군교를 풀어 민가를 수색하여 긁어내는 것을 검독이라 한다. 검독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승냥이나 범과 같은 것이다. p. 185

-  환곡은 사창(社倉)이 변한 것으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줬다가 추수기에 거둬들이는 조적(糶糴)도 아니면서 백성의 뼈를 깎는 병폐가 되었으니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일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 p. 186.

-『주례』에 대체로 곡식을 봄에 나눠주고 가을에 거두었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환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나라와 위나라의 제도에서는 창고에 비축하는 것이 대부분 조적에 속하는 것으로, 혹 풍년에 곡식을 구입하여 저장했다가 흉년에 판매함으로써 곡식 가격을 안정시키는 상평(常平: 상시평준)으 l법을 쓰고, 혹 조세 대신 특산물을 내게 하여 다른 지방에서는 균수(均輸)의 법을 썼으니 모두 환곡의 자취는 없다. 수나라의 장손평이 홍수나 가뭄에 대비하여 곡식을 저장하는 의창(義倉)의 법을 만들었고, 주자가 그것을 다듬어서 시행하며 이름을 사창(社倉)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환곡을 사창의 유법(遺法)이라고 하지만, 사창은 곡식을 저장하고 나눠주는 일을 모두 마을 사람들이 직접 하고 관리는 관여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백성을 위하는 참된 마음이며 오늘의 환곡의 법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오늘날 환곡의 폐단을 논하는 사대부들은 기껏해야 “가을에 정미한 쌀을 말에 넘치게 받고, 봄에는 거친 쌀을 나눠주되 말에 부족하게 하니 백성에게는 몹시 억울한 일이다”라고 a할 뿐이다. pp. 186-187.

- 감사가 여러 고을에 물가를 보고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곡가의 높고 낮음을 상세히 알고서 장사치 노릇을 한다. …… 감사의 녹봉이 본래 박하지 않은데도 장사치 노릇을 하여 백성의 기름을 짜내고 나라의 명맥을 상하게 하니 딴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p. 187.

- 수령이 농간질하여 남긴 이익을 훔치니 아전의 농간질은 말할 것도 없다.

- 영리(營吏)의 농간은 그 구멍이 더욱 크다. 늘 보면 창고를 열어 보리 환곡을 나눠주거나 가을에 환곡을 나눠주는 날마다 여러 읍의 아전들이 돈 수백 냥을 가지고 감영에 가 아주 싼 값으로 환곡을 사들이고, 시골집에 저장해두었다가 외촌에서 바쳐야 할 대를 기다려 환곡을 팔아 먹는데, 때로는 그것이 4,500석에 이른다. 해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는데, 이는 곧 감사가 마땅히 살펴야할 일이지 수령의 죄는 아니다. 은결(隱結)이 매년 늘어나는 것은 영리가 팔아먹은 것이다.. p. 194.

- 양식이 떨어진 양반이 재해를 당했다고 거짓말하거나, 도랑을 파거나 제방을 쌓는다고 거짓말하여 사사로이 창고의 곡식을 구걸하여 별도로 수십 석을 받았다가 세월이 오래되어도 납부하지 않고 또다른 구실로 더욱 많이 받아낸다. 큰 기근이 들거나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서 구환을 탕감해주는 경우 수령은 사사로운 정으로 이 양반이 빌린 것을 탕감해 준다. pp. 196-197.


- 수십년 이래 수령 된 자가 전혀 일을 돌보지 않아 아전의 횡포와 농간이 끝간 데를 모르게 되었는데, 호적은 그중에서도 가장 심하다. …… 호적을 다시 작성하는 해마다 적리(籍吏)가 공문을 띄워 10호를 증가시키겠다고 위협한다. …… 그 호민은 그중의 20냥은 몰래 제 주머니에 넣고, 80냥은 적리에게 뇌물로 주어 그 일을 그만두게 한다. …… 그래서 마침내 5호를 줄여서 다른 다섯 마을에 한 가구씩 할당한다. 다섯 마을은 각기 크게 놀라, “동네가 망했구나. 예로부터 우리 동네는 세 가구가 서로 의지하여 한 가구의 역을 부담해왔어도 피가 마를 지경이었는데, 여기에 1호가 더 늘어난다면 누가 감당하겠는가?”한다. 이렇게 되니 부촌에서는 돈 1,200냥을 바치고, 그 다음 촌에서는 7, 80냥을 바치며, 차례로 내려가 비록 3호가 있는 마을일지라도 7, 8냥을 바치지 않는 곳이 없다. …… 나라 안의 모든 고을이 이방을 제일 좋은 자리로 여기지만, 식년이 되면 호적을 처리하는 아전을 제일로 치니, 호적을 처리하는 아전은 큰 고을에는 넉넉히 1만 냥을 먹고, 작은 고을이라도 3천 냥을 넘게 먹는다. p. 199.

- 부역을 공평히 하는 것은 ‘수령이 해야 할 일곱 가지 일’ 가운데 긴요한 일이다. 무릇 공평하지 못한 부역은 징수해서는 안되니, 저울 한 눈금만큼이라도 공평하지 않으면 정치라 할 수 없다.

  옛날에 전세는 9분의 1을 거두었고 부(賦)는 호산에 근거하였다. 전세는 토지에서 나오고 부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본래 전세가 가벼웠는데 중세 이래 토지에서 부를 징수하여 드디어 관례가 되고 말았다. 대동, 균역, 삼수미, 수령이 사용하는 치계미 등도 토지에 부과하는 것이고, 이것들은 조정에서도 알고 있다. …… 수령이 깨끗하지 않으니 아전도 따라 움직여 각종 비용을 토지에 부과한다. ……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날로 곤궁해져서 쓰러지고 진구렁을 메울 지경이 되었다. pp. 199-200.

- 농사는 식생활의 근본이고 양잠은 의생활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는 것은 수령의 중요한 임무이다. p/ 205.

-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은 백성을 가르치는 일일 따름이다. 전산(田産)을 고르게 하는 것도 장차 백성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부세와 요역을 고르게 하는 것도 장차 백성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는 것도 장차 백성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형벌을 밝히고 법귤를 갖추는 것도 장차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p. 215.

- 우리나라의 군현의 향교에도 역시 훈도(訓導)가 있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로 이 관직마저 없어졌다. p. 221.

- 먼 변방에는 벼슬을 한 사람이 있는 가문인 사족은 드물고 벼슬을 한 사람이 없지만 부유하거나 위세가 큰 가문인 토족이 많다. 사족은 향교에 왕래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토족이 향교를 독차지하여 그들의 소굴로 삼았다. 이들 토족 무리는 대부분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들로, …… 간사한 아전과 결탁해서 감사에게 허튼 소문을 알리며, 수령이 총애하는 기생을 통해 수령에게 뇌물을 바치며, 항상 아전과는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 너나들이하면서 교제하며, 늘 술집에서 만나서 아침저녁으로 싸움질만 한다. p. 222.


- 족(族)에는 귀천이 있으니 마땅히 그 등급을 구별해야 하고, 세력에는 강약이 있으니 마땅히 그 형편을 살펴야 한다. p. 224.


- 과거공부는 사람의 마음씨를 흐트러뜨리는 것이지만,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그 공부를 권하지 않을 수 없다.

  수령이 해야 할 일 일곱 가지 가운데 세 번째가 ‘학교가 일어난다’인데, 속된 관리는 ‘학교가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과거공부를 권하는 것으로 학문을 진작하는 일을 대체하고 있다. p. 226.

-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은 어린이는 따로 가려 뽑아서 가르쳐야 한다.


- 병역 의무자를 군안에 올려 군포를 거두는 법은 폐단이 크고 넓어 백성들의 뼈를 갂는 병이 되었다. 이 법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죽어갈 것이다.

  조성왕조 초기에는 호포(戶布)는 있었지만 군포라는 것은 없었다. 중종 대 대사헌 양연이 군적수포법을 제안해 시행하였지만, 군적수포법은 가구(戶) 단위로 부과하는 공포(貢布)라 부르고 군적에 오른 개인에 부과하는 번호(番布)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율곡이 “군졸이 공포를 상납하는 부담을 줄이려면 공포를 전결에 배정하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라고 상소하여 군적의 개혁을 청하였으니, 이것으로 알만하다. p. 231.

- 정군(正軍)을 호수(戶首)라 하고 각 호수에는 두세 명의 보인(保人)이 딸려 있어 이들에게서 쌀과 베를 거두어 물자와 장비로 쓰게 했다. p. 232.

- 서울의 군영에 군포를 상납하는 날에 영문 아전들의 횡포가 극심하다. 연중 관례로 주는 뇌물 외에 더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고,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군포를 퇴짜 놓기가 일쑤다. 또 시전의 면포상인들과 형제이거나 인척인 영문 아전들은 이들과 공모하여 읍포를 퇴짜 놓는다. 그러면 향리들은 시포를 구입해야 하는데 객지에서 시포를 구입하려면 반드시 두 배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시포를 납부하였으니 읍포는 반드시 팔아야 되는데, 객지에서 포를 팔게 되면 반드시 반값밖에 받지 못한다. p. 234.


- 조선 초에는 돈을 사용하지 않아 사채의 폐단이 심하지 않았으므로 법규가 조금 너그러워서, 어긴 자에 대한 벌이 장 80대에 지나지 않았다. 숙종 이래로 돈이 크게 유통되어 사채의 폐단이 나날이 증가되어 백성들이 몰락하였다.

- 살인에 대한 법이 엄한 것과 관련된 이야기. 판결을 잘못했을 때의 태도. p. 266.


- 무단적인 행동을 하는 토호는 백성들에게 승냥이나 호랑이 같다. 승냥이와 호랑이를 제거하야 양 같은 백성을 살려야만 이를 목민관이라 할 수 있다. p. 274.

- 관리가 창녀를 끼고 노는 데 대해서는 법률이 지극히 엄하다. 그러나 기강이 해이해지고 어지러워져서 습속으로 굳어진 지 오래 되었으므로, 이제 갑자기 이를 금하는 것은 소동을 일으키는 길이다. p. 275.



 

이이의 『동호문답』과

『만언봉사, 목숨을 건 직설의 미학』 


1. 치세와 난세에 대한 이이의 구별


(1) 치세

치세

군주의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여 뛰어난 영재들을 잘 임용하는 경우

군주의 재능과 지혜가 모자라지만 현자를 임용하는 경우

왕도정치: 인의의 도, 인정을 행함으로써 천리의 바름을 지극히 하는 것

오제와 삼왕

상의 태갑(이윤)과 주의 성왕(주공)

패도정치: 이름만 인의의 도 권모술수로 공리와 사익 채움

진 문공, 진 도공, 한 고조, 한 무제, 당 태종, 송 태조

제 환공(관중), 한 소열(제갈량)



(2) 난세

난세

군주의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지만 자신의 총명만을 믿고 신하들을 불신하는 경우

군주의 재능과 지혜가 모자라 간사한 자의 말만을 편중되게 믿어 자신의 귀와 눈을 가린 경우

폭군

하의 걸, 상의 주, 주의 여왕, 수의 양제

진의 이세(간사한 조고)

한의 환제(환관의 참소)

혼군

당의 덕종

송의 신종(왕안석)

용군

무기력하고 나태하여 보잘것없는 용군: 주의 난왕, 당의 희종, 송의 영종




2. 겸선(兼善)과 자수(自守):


대학(大學): 大學之道는 在明明덕德하며 在親(新)民하며 止於至善이니라.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서 그침에 있다.]


-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을 의미한다. 인욕(人慾)에 가리우면 어두워진다. (克己復禮?)


- 친(신)민은 수기 이후 명명덕을 타인에게까지 미친다. 즉 백성을 교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 지선은 사리의 당연한 극(極, 표준)이다. 명명덕과 친민은 지선의 경지에서 멈춘다.


  “사물의 이치가 이른 뒤에 지식이 지극해지고, 지식이 지극해진 뒤에 뜻이 성실해 지고, 뜻이 성실해진 뒤에 마음이 바루어지고, 마음이 바루어진 뒤에 몸이 닦여지고, 모이 닦아진 뒤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한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가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해진다.”


“선비라면 겸선(兼善)이 본래의 목적이지요. 물러나 자수(自守)하는 것이 어찌 본심이겠소. 다만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해 그럴 뿐이지요.” p. 23.

겸선의 세 가지 품격: 대신(大臣), 충신(忠臣), 간신(幹臣). pp. 23-24

자수의 세 가지 품격: 천민(天民), 학자(學者), 은자(銀字)


도학(道學)이란 ‘격물치지(格物致知)로 선(善)을 밝히고 성의(誠意), 정심(正心)으로 수신하는 것’으로 도학이 자신에게 쌓이면 천덕(天德)[자연적인 본성]이 되고, 정치에 시행되면 왕도정치가 되지요. 독서는 격물치지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 독서만 하고 실천이 없으면 앵무새가 말 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p. 29.


“도학하는 선비를 ‘진유(眞儒)’라 하는데, 맹자 이후 진유가 출현하지 않다가, 1,000여 년이 지나서야 주렴계[주돈이, 태극도설(太極圖說), 세계는 태극->음양->오행->남녀->만물의 순서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또,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같다고 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선생이 나옴으로써 미묘한 진리를 발양했고, 정자, 주자가 그것을 계승한 후에야 이 도학이라는 것이 세상에 크게 밝혀져서 중천에 솟아오른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었지요.”


“기자(箕子)께서 우리나라의 군주로 계실 적에 행한 정전(井田)제도와 팔조법금(八條之敎)은 피시 순수한 왕도정치의 산물일 것이오.” p. 38.


“이른반 진유라면 출사해서는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온 백성으로 하여금 태평을 누리게 하고, 물러나서는 만세에 교화를 베풀어 배우는 자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자라오.” p. 38.


◎『만언봉사, 목숨을 건 직설의 미학』에서 나오는 학문하는 방법 3가지


(1) 궁리(窮理): “안으로는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이치를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이 연구해 보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도 각기 법칙이 있습니다. 밖으로는 사물이 존재하는 이치를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이 연구해 보면, 풀과 나무나 새와 짐승에게도 각기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것은 반드시 책을 읽어서 밝히고, 옛 것과 견주어 깊이 생각하여 실제로 경험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궁리의 요점입니다.” p. 95.


(2) 거경(居敬): “거동할 때나 조용히 있을 때나 함께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조용히 있을 때에는 잡념을 일으키지 않고 편안히 마음을 가라앉혀 정신을 맑게 하고, 거동하여 일을 할 때에는 한 가지에 온 마음을 쏟으며 한결같이 하여 조금도 착오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몸가짐음 반드시 가지런히 엄숙하게 하고, 마음가짐은 반드시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경의 요점입니다.” pp. 95-96.


(3) 역행(力行):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극복하여 기질적으로 나타나는 병폐를 다스리는 데 있습니다. 유약함은 바로잡아 강하게 하고, 나약함은 바로잡아 스스로 서게 하며, 사나움은 온화하게 다스리고, 급함은 너그럽게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욕심이 많으면 맑고 깨끗하게 하여 반드시 청정해지도록 하고, 사사로움이 많으면 바로잡아 반드시 공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여 아침저녁으로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행의 요점입니다.“ p. 96.


궁리는 곧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얻는 것(格物致知)이고, 거경과 역행은 곧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며(正心), 몸을 닦는 것(修身)입니다.” pp. 96-97.




3.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는 방법: 입지-무실-용현-안민정책-교인지술-정명


입지(立志): “입지[뜻을 세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은 없지요. 옛날부터 유위(有爲)하는 군주는 먼저 자신의 뜻을 정하지 않은 이가 없었소.”: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는 것[窮理盡性]’,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 ‘아내에게 모범이 되는 것[刑于寡妻]’, ‘요 임금의 모자토계(茅茨土階)’, ‘박시제중(博施濟衆)’, ‘예악을 닦아 밝히는 일[修明禮樂]’에 뜻을 두기. p. 58.


무실(務實): “입지 후에는 무실만한 것이 없지요. …… 말을 헛되이 할 뿐 실제가 없다면 어찌 일을 구제할 수 있겠소. …… 한 가지 폐단도 개혁되지 않고 한 가지 정책조차 제대로 실시되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직 무실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 성의(誠意)하고자 하신다면 …… 어둠 속에 혼자 있거나 남모르게 은거해 있을 때에도 경외(敬畏)하여 게을러서는 아니 되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때에도 경계하고 두려워함을 잊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모든 염려들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게 하여 성의의 실제를 다해야 하지요.

  정심(正心하고자 하신다면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는 것으로 체(體)를 세워 과불급(過不及)이 없게 하고 용(用)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오.”

 수신(修身), 효친(孝親), 치가(治家), 용현(用賢), 거간(去奸), 보민(保民), 교화(敎化) 등의 실천을 해야 함. pp. 58-62.


간인의 판별이 용현(用賢)의 요체다 - 선조가 신하를 대할 때의 문제점: “지금 군주께서는 오직 경연에서만 어진 선비를 응대하시는데다가 그나마 예가 엄하고 말씀을 간단하게 하셔서 신하들이 떼 지어 줄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가 물러나오는 식이오. 그 결과 신하들의 뜻이 모두 주상께 전달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니 밝은 성상이실지라도 어찌 모든 상황을 살피실 수 있겠소. 이와 같이 지난날의 전철만 되풀이하여 헛되이 형식만 일삼는다면 주상께서는 여러 신하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끝내 살피지 못할 것입니다.” p. 66.

율곡 이이의 대책: “번거로운 절차는 생략하고 경연 자리 이외에서도 유신들과 만나 조용히 도를 의논하여 정무에 적용하는 방법만한 것이 없소. 주상께서는 침묵해서는 안 되고 신하와 더불어 수작(酬酌)하기를 메아리치듯이 하여 상하의 실정이 통하고 속내를 시원스럽게 알도록 해야 하오. 이렇게 되면 사특하고 올바른 이들이 하늘의 눈질을 피하기 어려워 용사(用捨)[등용하고 내침]가 성상의 권한 내에서 조용히 결정되어 성덕을 이루시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요.” p. 66.


율곡 이이가 제시하는 올바른 사람과 사악한 사람의 구별 방법: “소인이 저지르는 해악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으니 어떤 이는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여 비루하고 어떤 이는 윤리에 어긋나며, 어떤 이는 사익에 얽매여 공익을 외면하고 어떤 이는 현자를 해코지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여 그 과오와 죄악이 심하여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큰 요체는 모두 드러나기 마련이어서 지적하거나 말하기 어렵지 않소.” p. 67


입지, 무실, 용현 다음에 할 일: 안민정책(安民之術)

“먼저 폐법(弊法)부터 개혁하여 민생을 구제해야 하지요. 잘못된 법을 개혁하려면 마땅히 언로를 넓혀서 좋은 정책을 모아야 하니 위로는 공경대신에서 아래로는 가마꾼이나 말구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 시대의 폐법을 진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오. 그리하여 그들의 말이 결과적으로 채택할 만한 것이면 그것이 누가 한 말인지를 취사선택의 기준으로 삼지도 말고 해당 부서로 하여금 고식적으로 기존의 예를 따르지도 말도록 하여 상감께서 계책을 열도록 하는 것만이 잘못된 법을 완전히 개혁하리라는 것을 기약할 수 있소.” p. 73


◎ 폐법의 예


일족절린(一族切隣): 과중한 세금, 군포, 군역 등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백성이 있는 경우 반드시 그 일족과 이웃에게 세금, 군포, 군역을 부담시키는데, 일족과 그 이웃들도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 도망가면 다시 그 일족의 일족과 이웃의 이웃에게 부담시키고 있지요. pp. 73-74 [백성들이 도망간다]


진상번중(進上煩重): “진상이라는 것이 주상께 바치는 데 있어서 모두 다 적합한 것은 아니라오. 어떤 자질구레한 것도 헌상하지 않는 것이 없고 바다나 육지에서 산출되는 것을 빠짐없이 긁어 들이고 있으나 어찬에 진상할 만한 것을 고른다면 몇 가지 안 될 것이오. …… 다급하지도 않은 물품들로 백성을 해친단 말이오.

  이러한 폐법을 개혁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대신과 관할 관서로 하여금 진상하는 모든 품목을 모아서 긴급한 것과 긴급하지 않은 것을 강구하여 상납할 필요가 있는 것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긴요하지 않은 물품들은 모두 삭제해야 하오. 또 아무리 상납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수량이 너무 많을 경우에는 그 수량을 감소시켜야 하오. pp. 77-78.


공물방납(貢物防納): “세도(世道)가 점점 가라앉고 폐습이 나날이 늘고 간악하고 교활한 관노나 엉큼한 아전들이 온갖 물품을 사사로이 비축했다가 관청을 우롱하고 백성을 가로막아 비록 아주 우수한 물품을 가지고 와도 끝내 억지시켜 곧장 공납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반드시 자기들이 사사로이 비축한 물품들을 선납했다가 나중에 백 배나 되는 값을 백성들에게 요구하게 되었소.” p. 79.


역사불균(役事不均): 정군(正軍), 보솔(保率), 나장(羅將), 조예(皂隸) 등 여러 사람들이 온갖 역에 응하는 종류는 첫째, 장기간 번을 서거나 둘째, 두 번으로 나누어 서거나 셋째, 세 번에서 예닐곱 번으로 나누어 서는 것이지요. 따라서 혹자는 포악한 해를 감당하지 못하여 도망하는데 혹자는 생업을 편안히 하여 스스로 지키기도 하니, 같은 적자(백성)로서 어찌 이와 같이 괴롭고 즐거움이 차별적으로 동일하지 못한지요? p. 81.


이서주구(吏胥誅求): “간사한 권신들이 혼탁하고 어지러우며, 상하가 오직 뇌물만 일삼아서 관작도 뇌물이 아니면 승진하지 못하고, 소송도 뇌물이 아니면 승소하지 못하고, 죄수도 뇌물이 아니면 석방되지 못하오. 이리하여 모든 관료들은 하는 일마다 범법 행위를 하고, 아전들도 농간을 부려 법조문을 악용하니 …… 일개 군노나 일개 하인, 그리고 종까지 모두 약간의 말직만 맡고 있어도 으레 토색질을 일삼게 되었소.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일도 교활한 아전의 손에 맡겨져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곡직(曲直)을 결정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참으로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망하는 고질병이 되었소.” p. 82.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에 대한 율곡 이이의 반론: “세속의 식견은 매양 이와 같아서 한 가지 정책도 써보지 못하고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격이지요. 정자께서는 ‘생민의 이치가 막혔으면 성왕의 제도라도 고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소. 대저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고, 폐단이 생기면 고쳐야 하는 법이오. 《주역(周易)》에서 ‘궁하면 변한다. 변하면 통한다’라고 했지요.” p. 85.


교인지술(敎人之術): 안민 다음의 제도 개혁. “양민(養民)한 다음에야 교화(敎化)를 행할 수 있는데, 교육을 베푸는 방법으로는 학교보다 급한 것이 없소.” p. 89.

훈도(訓導)의 선발과 예우가 중요하다: “현재는 훈도를 극히 천한 직업으로 여겨 반드시 빈곤하고 기댈 곳 없는 사람을 훈도직에 임명하여 굶주리거나 얼어 죽는 것만 면하게 하고 있소.” p. 89.


반궁[성균관]에서 사림의 풍습이 날로 타락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영리만 추구하려 한다. “조정에서 지도하고 권장하는 방법이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재를 구하는 방법은 글재주만을 중시하고 도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소.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천하에서 다 통하는 학식을 가지고 있고 세상에 으뜸인 행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그의 도를 사용할 방법이 전혀 없소. 게다가 반궁에서는 원점(圓點)으로 선비를 모으기 때문에 선비들의 일상 행실이 모두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경우가 없게 되었소." p. 91.


율곡 이이의 정명(正名) 사상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진실로 현재의 급선무라오. 다만 아직 국시(國是: 국가 이념)가 바로잡히지 못함으로써 정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사기를 진작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소.

  우리나라는 개국 이래 정사, 소장이 사실 빈번하게 반복되었소. 그러나 그중에서도 사림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고 국가의 운명을 뒤흔든 것으로 을사사화만큼 심한 것이 없었소. 정순붕, 윤원형, 이기, 임백령, 허자 등 다섯 간흉은 그 죄가 하늘까지 달하니 반드시 죽이고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자들이오.” p. 99.


“현재의 대책으로는 먼저 다섯 간흉의 죄를 폭로하고 관작을 삭탈하여 위사공신[사직을 보위한 공신이라는 뜻]이라는 공훈을 모두 삭제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모두 사면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온 나라에 널리 알려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다시 시작해야 하오. 이렇게 하면 위로는 조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조야의 분통한 마음을 풀어서 유신[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정치가 차츰 이루어질 것이오.” p. 101.






『만언봉사, 목숨을 건 직설의 미학』



4. 변법(變法)의 의미와 변법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


“이른바 ‘시기가 적절하다(時宜)’는 것은 시기를 따라 적절하게 일을 처리하고(變通)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자가 …… 말하기를 “시기에 따라 알맞게 바꾸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常道)”이라 하였습니다. 대개 법은 시기를 따라 제정하고 시지가 바뀌면 법도 같지 않은 것입니다.“ p. 34.


“바로 신종에 이르러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여 분연히 개혁할 뜻을 갖고 있었으나, 믿고 맡긴 왕안석이 어짊과 의로움을 뒤로 하고 공명심과 이익을 앞세워 하늘의 뜻과 인사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멸망을 재촉하니, 도리어 개혁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점차 큰 화를 부르게 되어 중국을 오랑캐의 나라로 만들었으니 그 밖에 말할 나위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pp. 39-40.


 

H. L. A. Hart, “Are there Any Natural Rights?”, Theories of Rights, ed. by Jeremy Waldr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pp. 77-90.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LXIV, No. 2 (April, 1955), pp. 175-191)



Thesis


도덕적 권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하나의 자연권, 즉,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는 평등한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권리가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

권리가 평등한 권리라는 것과 일관된(consistent) 일정한 특수한 조건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선택할 능력이 있는 어떤 성인도

i) 강제(coercion)나 제재(restraint)를 막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강제나 제재를 모든 타인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권리를 갖는다.

ii) 타인에게 강제하거나 제제하거나 또는 그들을 해할 목적이 아닌 어떤 행위도 할 자유가 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는 평등한 권리를 자연권(natural right)으로 기술하는 두 가지 이유

i) 이 권리는 모든 사람들이 선택할 능력이 있다면 갖는 권리이다. 모든 인간은 이 권리를 인간으로서(qua men) 갖는다.

ii) 이 권리는 사람들의 자발적 행위에 의해 창출되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도덕적 권리들은 자발적 행위에 의해 창출되고 부여된다.)


부연: 이 thesis는 어떤 도덕적 권리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하나의 자연권이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조건적 주장이다.



I

(A) 도덕적 권리와 법적 권리의 밀접한 관계

  권리 개념은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을 때를 결정하는 것에, 그래서 어떤 행위가 강제적 법 규칙들의 주제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에 관계되는 도덕의 영역에 속한다.

  정의, 공정성, 권리와 의무(obligation)와 같은 도덕 개념들의 특징은 정의로운 것, 공정한 것이 행해질 것을 보장하기 위한 강제력(force)의 사용에 특수한 일치(congruity)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congruity의 상황에서만 타인의 강제력이 정당하다.


Kant:

officia juris - duty에 대한 존중이 그 자체로 의지의 규정적 원칙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 도덕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의무

officia virtutis 도덕 원칙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도덕적 가치(worth)가 없는 의무

⇒ Hart의 해석: 인간의 자유의 적절한 분배를 규제하는 원칙들, 이것만이 인간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냐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유의 분배를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만든다.


Hart가 제시하는 도덕적 권리의 중요한 특징

i) 도덕적 권리의 소유자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도덕적 정당화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ii) 그러한 정당화를 가지는 것은 그가 타인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그 행위가 어떤 도덕적 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위할 것인지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하도록 허용된다면, 인간 자유의 일정한 분배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B) 도덕적 권리가 ‘duties’와 상관적(correlative)인지의 문제를 검토하자.

‘X가 -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Y가 -할 (하지 말아야 할) duty가 있다’를 함축하고, 그것에 의해 함축된다.

        ‘X가 -에 대한 권리가 있다’ ⇔ ‘Y가 -할 (하지 말아야 할) duty가 있다’

그런데 X가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X나 다른 사람이 어떤 duty를 지닌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는 의미가 있다. 이런 종류의 권리를 법학자들은 ‘자유들’이라 부르며 상관자로 ‘duty'를 갖는 권리들과 구별했다.

  자유라 칭해지는 권리들은 사회적 삶의 영역, 즉 경쟁이 최소한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하지 않은 것으로 기능하는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길에 떨어진 돈을 타자가 줍도록 허락하기 위해 어느 누구도 ‘duty’ 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제적 경쟁의 도덕적 적절성(propriety)은 ‘X가 -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단지 X가 -하지 않을 어떤 ‘의무’ 하에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최소한의 의미에서의 ‘하나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C) 모든 도덕적 ‘duties’에 대해 상광적인 도덕적 권리들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

모든 duties에 상관적인 도덕적 권리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이 ‘duty’의 수행으로 인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권리를 가짐에 대한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상관적이라 생각한다면) 따라서 우리가 잘못 대우하지 말아야 할 ‘duty’를 수행하여 이익을 얻는 동물이나 아기들은 적절한 대우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런 추론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약속으로부터 발생하는 도덕적 상황: 권리를 갖는다는 개념과 ‘duty’의 수행에 의해 이익을 얻는다는 개념은 동일하지 않다. X가 Y에게 그간의 호의에 대해 Y가 없을 때 Y의 어머니를 돌보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거래에서 권리들이 발생하지만,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Y에게이지 권리를 갖고 있는 어머니에게가 아니다. 확실히 어머니는 X가 가진 obligation과 관련된 당사자이고, obligation의 수행으로 이익을 얻을 당사자이다. 그러나 Y의 어머니를 돌볼 X의 obligation은 Y에 대해서이다. 따라서 X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X가 무시하고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은 Y이지 Y의 어머니가 아니다. X에 대한 도덕적 주장을 하는 사람도 Y이다. Y는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게 할 권리가 부여된(entitled) 것이고, 그 주장을 철회하고 그 obligation으로부터 X(본문에는 Y이나 X가 맞는 듯)를 해방시켜 주는 것은 Y이다. X가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를 선택에 의해 결정할, 그리고 X의 선택의 자유를 이런 방식으로 제한할 위치에 도덕적으로 놓인 것은 Y인 것이다. 그래서 Y가 하나의 권리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을 적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이익을 얻을 것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위와 같은 사실이다. 약속 받은 사람과 이익을 얻는 사람이 동일하다고 해서 ‘권리를 가짐’과 ‘duty의 수행으로 인한 이익을 얻음’이 동일함을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권리를 갖는 사람은 ‘duty’가 발생하게 되는 거래, 이전 상황 또는 당사자들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서 발견된다.


(D) 권리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무엇이 행해져야 할지를 명령하는 행동 codes

자연법 사상가들: 자연권이 아니라, 준수하면 인간을 이롭게 할 자연적 duties들이 있다고 생각(인간의 자연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 이런 codes들이 권리들을 창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런 행동 codes를 권리들을 창출하는 게임 규칙들과 대조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도덕적 code조차도 권리들을 정립할 필요가 없다. 십계명이 가장 중요한 예이다. 십계명이 권리들을 부여하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놀라운 해석일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십계명에 대한 복종은 단지 신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due 또는 owed된 것으로 간주되고, 불복종은 단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개인들에 대한 하나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면 십계명은 일정한 행동 유형을 배제하기 위해서만 고안된 gudq법으로 읽히기를 그만두고 개인들이 타자들로부터 일정한 행동을 요구할 수 있는 정도를 규제하는 규칙으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권리들은 전형적으로 개인들에 의해 소유되거나 개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표현들은 도덕 규칙들을 단지 행동을 명령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개인들의 도덕적 적절성(propriety)을 형성한다는 이해를 반영한다. 규칙들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될 때에만, 우리는 옳고 그른 행위들뿐만 아니라 권리들과 잘못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II

‘내가 -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두 유형의 상황

(A) 권리 주장자가 다른 사람의 자유의 간섭에 대한 정당화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정당화를 갖지 못한다.) 예) ‘나는 내 서비스에 대해 당신이 약속한 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

(B) 권리 주장자가 타인에 의한 어떤 간섭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반대하는 경우. 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다.’


(A) 특수한 권리들(Special rights)

  권리들이 개인들 사이에 특수한 거래로부터 발생할 때 권리를 가진 사람과 obligation을 가진 사람은 특수한 거래 당사자들에 제한된다. 이런 권리들을 특수한 권리들이라 부를 것이다. 이 권리들은 모두에게 obligation을 지우는 권리들로 생각되는 도덕적 권리들과 구별된다.

(i) 약속으로부터 발생하는 특수한 권리들

약속에 의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obligations를 발생시키고 약속을 한 사람에게 권리를 창출하거나 부여한다. 이 경우 우리는 어떤 행위와 관련된 당사자의 선택의 자유의 도덕적 독립성을 변경시키고 새로운 도덕적 관계를 창출한다. 그래서 약속을 받은 사람이 약속해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만든다.


약속으로부터 파악되는 모든 특수한 권리들의 특징 두 가지

i) 권리와 obligation이 발생하는 이유는 약속된 행위가 그 자체로 특정한 도덕적 질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당사자들 간의 자발적 거래 때문이다.

ii) 당사자들의 동일성(identity)이 핵심적이다.


(ii) 동의에 의한 권리 부여: 권리의 양도

  당신이 내 이익을 돌보도록 동의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했지만, 당신이 간섭한다고 불평할 수 없는 그런 권리를 당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권리의 양도이다. 이 경우에도 권리를 양도 받은 사람만이 이런 [간섭할 수 있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특징으로 확인된다.


(iii) 제한의 상호성(mutuality of restrictions)

  제한의 상호성을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정치적 의무(political obligations)를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이 동의나 약속과 같은 권리-창출 거래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규칙에 따라 어떤 공동의 기획을 수행하고 따라서 그들의 자유를 제한할 때, 이러 재한에 복종해온 사람들은 그들의 복종에 의해 이익을 얻어온 사람들로부터 유사한 복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규칙에 복종할 moral obligation은 사회의 협력적 구성원들 때문이고, 그들은 복종에 대한 상관적인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사회 계약론은 법에 대한 복종의 의무(obligations)가 benevolence의 특수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의 구성원들이 상호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의 실수는 약속과 같은 패러다임 사례를 권리를 창출하는 상호 제한의 상황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iv) 부모와 자식과 같이 특수한 자연적 관계의 경우 권리와 obligation이 창출된다.


(v)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속되어 있는 obligation에서 한 사람이 면제되지만, 상관적인 obligation이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아닌 경우 특수한 자유들이 특수한 권리들과 구별된다. 타인에게 간섭할 자유가 아니라 권리가 주어진 경우들은 licence가 그 권리를 부여한 사람에 의해 마음대로 철회될 수 있지 않은 경우들이다.



(B) 일반적 권리들(General rights)

  일반적 권리들은 정당화되지 않은 간섭이 예견될 때 그 간섭이 정당화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 주장되는 권리들이다.

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다.’, ‘나는 os 마음대로 숭배할 권리가 있다.’


일반적 권리와 특수한 권리의 공통점

i) 이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타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즉, 그가 간섭해서는 안 됨을 결정하기 위한 도덕적 정당화를 갖는다.

ii) 권리 주장자가 행위의 수행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는, 그 행위의 성격으로부터 도덕적 정당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권리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의 예시라는 점이다.


일반적 권리와 특수한 권리의 차이점

i) 일반적 권리는 특수한 관계나 거래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ii) 일반적 권리는 특정한 사람이 갖는 권리가 아니라 선택할 능력이 있는 모든 인간이 갖는 권리이다. (특수한 권리를 발생시키는 특수한 조건들이 없는 상황에서)

iii) 일반적 권리는 간섭하지 말아야할 상관물로서 obligations를 갖는데, 모든 이들은 이 obligations에 종속된다.


일반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수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특수한 조건들에 의해 구성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일반적 권리의 주장은 직접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울 권리를 평등하게 갖는다는 원칙에 호소하는(invoke) 것이다.

특수한 권리의 주장은 그 원칙에 간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III


타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이 도덕적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권리 개념은 도덕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런 정당화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권리’를 사용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도덕적 정당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이것이 도덕적 권리들의 인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짐에 대한 인정이 함축됨을 정립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리를 구성시킬 수 있는 간섭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의 유형과 관련하여 ‘하나의 권리’의 의미에 내재하는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그 원칙은 전적으로 공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간섭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는 일정한 특수한 조건들에 제한되어 있음이 분명하고, 이것은 ‘하나의 권리’의 의미에 내재해 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우리가 도덕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근거에 따라 간섭을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사실 간접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우리의 정당화로 호소하고 있다.


 

한비자(韓非子), 『이야기의 숲에서 한비자를 만나다』, 이상수 역 


1. 한비자의 인성론


“이익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맹분이나 전저와 같은 장사가 된다.” p. 94.


“오늘날 군주가 부유한 사람으로부터 거둬들여서 가난한 집안에 베푼다는 것은, 노력하고 절약하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낭비하고 게으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p. 99. [근검절약의 강조 및 복지국가에 대한 반대?]


“서로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면 결국 기대에 어긋나 서로 책망하게 되지만,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일이 되레 잘 진행된다.” p. 101 [자기이익 추구]


“이익이 있는 곳으로 백성들이 모여들고, 명성이 빛나는 곳에 선비들이 목숨을 바친다.” p. 101.


“사람에게는 털이나 깃이 없기 때문에 옷을 입지 않으면 추위를 견딜 수 없다. …… 장과 위를 뿌리 삼아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이로움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로움을 추구하는 마음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몸의 근심이다.” p. 106.


“법을 제정하는 것은 증삼이나 사어 같은 인격이 뛰어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한 게 아니라, 보통의 군주가 능히 도척과 같은 간악한 무리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부절을 사용하는 것은 미생처럼 신의를 지키는 이를 위한 예방책이 아니라 뭇사람들이 서로 속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p. 117.




2. 국가의 존속 또는 권자의 보존을 위한 필수 조건


(1) 권력(勢): 미자하와 용의 역린 이야기(p. 268?)

(2) 법치(法治)

(3) 통치술(術)


“대저 몸소 권력의 손잡이를 쥐고 행사하려 하지 않고 신하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자 하니 졸린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p. 139.


“신하에 대한 통제력이 군주 자신에게 있을 때 군주가 ‘무게가 있다(重)’라고 하고, 군주가 자기 지위를 떠나지 않을 때 군주가 ‘안정적이다(靜)’라고 한다. 군주가 무게가 있으면 능히 가벼운 신하들을 부릴 수 있으며, 군주가 안정적일 때 능히 떠다니는 신하들을 부릴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에서 말하기를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며, 안정됨은 떠다님의 군주가 된다”라고 했다.” p. 153.


“권력이란 군주의 연못이다.” p. 153.


“권력에 의지해야지 신뢰 관계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 통치술에 의지해야지 신뢰 관계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p. 154.


“대저 재능이 있더라도 권세가 없다면 비록 현명한 자라 하더라도 어리석은 자를 통제할 수 없다. …… 짧은 목재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위치 때문이고, 어리석은 자가 현명한 자를 통치할 수 있는 것은 권세 때문이다.” p. 157.


“신하는 군주에 대해 골육과 같은 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매여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p. 158.


“밝은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는 수단에는 두 가지 손잡이가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손잡이란 형벌과 덕(德)을 말한다. 형벌과 덕이란 무엇인가. 처벌하고 잡아 죽이는 것을 형벌이라 하고, 칭찬하여 상을 내리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 오늘날 군주가 상과 벌의 위엄과 이로움이 자기로부터 나오도록 하지 않고 신하의 말을 들어 상벌을 내린다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신하를 두려워하고 군주는 우습게 여길 것이며, 그 신하만 따르고 군주는 버릴 것이다. …… 군주는 형벌과 덕으로서 신하를 제압하는데, 지금 군주가 형벌과 덕을 버리고 신하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한다면, 군주는 도리어 신하에게 제압당할 것이다.” p. 162.


“포상과 처벌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로운 도구다. 군주가 이것을 장악하면 신하를 통제할 수 있지만, 신하가 이것을 장악하면 군주를 이기게 된다.” p. 164.


“군주가 통치술을 쓰면 대신들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게 되며, 총신들이 권력을 빙자해 사리사욕을 채울 수 없게 된다. 관리들이 법을 집행하면 떠돌이 백성들이 서둘러 농경지로 돌아오고, 유세하던 선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의 진영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법과 술이라는 것은 뭇 신하들과 선비와 백성의 재앙인 셈이다.” p. 165.


“지금 신불해는 통치술을 말하고, 공손앙은 법치주의를 말한다. 통치술이란 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고 신하가 말하는 것에 따라 그 실천 여부를 추궁하는 것이며,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서, 뭇 신하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가 장악해야 하는 일이다. 법치주의라는 것은, 관청의 문헌 보관소에 법률과 명령을 비치해두고, 백성들의 마음에 형벌이 새겨지도록 하여, 법령을 신중히 지킨 이에게 상이 주어지고 법령을 어긴 자에게 벌이 내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하가 따라야 하는 규범이다.” p. 169.




3. 한비자의 법치주의와 그 실현 조건


- 신도: “현명한 사람이 못난 사람에게 굽히는 것은 권력이 약하고 지위가 낮기 때문이며, 못난 사람이 능히 현명한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권력이 강하고 지위가 높기 때문이다. …… 나는 이로써 권력과 지위는 기댈 만한 것이지만, 현명함이나 지혜로움은 부러워할 것이 못 됨을 알았다. …… 이로써 본다면 현명하고 지혜로움은 뭇사람들을 복종시키기에 족하지 않지만, 권력과 지위는 현명한 사람조차 굴복시키기에 족한 것이다.” p. 118.

  반론: “현명한 사람이 그것[권력]을 사용하면 세상은 다스려지고, 못난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 대저 권력이라는 것은 다스리는 데에도 편리하지만 어지럽히는 데에도 편리한 것이다.” p. 119. [재능이 중요하다. 권력은 객관적 조건일 뿐이다.]

  재반론: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권력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나갈 수 있는 권력이다. …… 세상의 보통 통치자는 중간치 수준의 존재들이 끊어지지 않고 나온다. 내가 여기서 권력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 중간치 수준 통치자들을 위한 것이다. …… (군주가) 법을 지키고 권력을 놓치지 않으면 잘 다스려지며, (군주가) 법을 어기고 권력을 놓치면 어지러워진다. …… 그러니 권력의 효용이 충분하다는 게 분명한데, ‘반드시 현명한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다. …… [위 논객이] 정치에 대해 말할 때는 요임금이나 순임금이 권력을 잡지 않으면 반드시 걸임금이나 주임금이 권력을 잡아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런 논법은 이 세상 요리는 엿이나 꿀처럼 달지 아니하면 나머지는 모두 씀바귀나 두루미 냉이처럼 쓴맛이 날 것이라는 주장과 같다.” pp. 121-124.


“법술을 버리고 마음에 따라 다스리도록 한다면 요임금이라도 한 나라를 바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pp. 126-127.


“법도를 집행한다는 것은 공을 드러내면 상을 주고 능력에 따라서 관작을 수여하는 것입니다.” p. 224.


“법치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확립되면 똑똑한 자가 어리석은 자의 것을 빼앗을 수 없고,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짓밟을 수 없으며, 다수가 소수에 대해 횡포를 부릴 수 없게 된다.” p. 228.


“작은 신의가 이뤄져야 큰 신의도 세워진다. 그러므로 밝은 군주는 신의를 쌓는 데 힘쓴다.” p. 228.


“다스리는 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쓰고, 적은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수단은 버린다. 그러므로 덕을 버리고 법에 힘을 쏟는다.” p. 229.


“밝은 군주는 눈먼 상을 아무렇게나 내리지 않으며, 처벌할 것을 느슨하게 풀어주지 않는다. …… 진실로 공이 있다면 비록 관계가 멀고 신분이 천한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진실로 잘못이 있다면 비록 관계가 가깝고 아끼는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처벌한다.” p. 230.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하의 사조직을 분쇄해야 한다. 사조직이 분쇄되지 않으면 신하는 점점 더 많은 세력을 규합해나갈 것이다.” p. 231.


“법령은 군주의 주요한 통치 수단이다. 반드시 공사의 구분을 밝혀서 법제를 분명하게 하고 사사로운 은혜를 제거해야 한다. …… 사사로운 의지가 행해지면 어지러워지고 공변된 대의가 행해지면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공과 사는 구분이 있다. …… 군주는 계산을 가지고 신하를 기르며, 신하 또한 계산을 가지고 군주를 섬긴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 맺음은 일종의 계산이다. …… 군주와 신하란 이처럼 계산을 바탕으로 결합한 사이다. 대저 어려운 사태에 임하여 필사적인 태도로 임하고 지혜와 힘을 다 짜내는 것은 법률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공과 사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 되고 법률과 금지령은 엄격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pp. 233-235.


“대저 거울을 흔들면 밝게 비출 수 없고, 저울을 흔들면 바르게 달 수 없는 것은, 법치의 원리와 같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지도자는 거울과 저울처럼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있는 원리와 법규를 근본으로 삼는다.” p. 236.


“논변가들이나 능히 알 수 있는 내용은 법령으로 삼을 수 없다. 백성이 모두 그렇게 논변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자들이나 능히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은 법으로 삼을 수 없다. 백성이 모두 그렇게 현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p. 239.


“현명한 군주는 법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고르지 스스로 멋대로 사람을 들어 쓰지 않으며, 법에 따라 사업의 실적을 판단하지 스스로 멋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pp. 239-240.


“법은 신분이 귀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 잘못에 대한 처벌은 대신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으며, 공적에 대한 상은 평민이라 해도 아낌없이 주어진다. …… 백성들의 행동 규범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 법만 한 것이 없다.” pp. 240-241.


“법치의 원칙을 지키는 길은 처음에는 괴롭지만 길이 이로울 것이요, 어짊을 베푸는 길은 잠깐 즐겁지만 나중에는 궁하게 된다.” p. 261.


“옛 군주의 어짊과 의로움을 말하는 것은 오늘날 다스리는 데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p. 264.


“앞선 군주의 어짊과 의로움을 말하지만 그걸로 나라를 바로잡을 수는 없으니, 이 또한 이를 가지고 놀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p. 265.


“대저 엄한 형벌과 무거운 처벌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나라는 이 때문에 잘 다스려진다. 백성을 가련히 여기고 형벌과 처벌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이지만 나라는 이 때문에 위태로워진다.” p. 268.


“어질다는 것은 자비롭게 은혜를 베풀어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난폭하다는 것은 마음이 잔인해 사람을 처형하는 것을 쉽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 “어진 군주든 난폭한 군주든 모두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p. 270.




4. 한비자의 통치술(術)


순명책실(循名責實): 신하로 하여금 계획을 진술하도록 하고, 나중에 그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겨 얻은 실적인 신하가 처음에 말했던 계획과 대조하여 상벌을 내리는 통치술. p. 272.

이를 형명(刑名 또는 形名)이라 한다. 신하로 하여금 자기가 한 말(名) 또는 그 소명은 반드시 실천적 행위, 즉 ‘형(形)’을 통하여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군주는 신하들이 한 말이나 그 말의 명분(名)을 근거로 하여 그들이 실제로 행한 행위의 실질(實)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p. 470 주석.)


황로(黃老)학은 제(齊)의 직하(稷下)학궁을 중시므올 형성되어 나온 절대군주를 위한 통치술이다. 군주는 실제로 ‘무위(無爲)’하면서, 오직 ‘형명’의 술(術)로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각자 스스로 책임을 맡아 일하게 할 분, 그들의 일에 간여함이 없이 자유방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직 행위결과에 대한 책임만을 법도대로 물어야 한다는 통치 이론이다.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p. 470 주석.)


“밝은 군주가 신하들을 거느릴 때는 신하가 자기 직분을 넘어서 공을 세울 수 없도록 하고, 자기가 한 말이 실적과 일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직분을 넘어서면 사형에 처하고, 말과 실적이 일치하지 않으면 처벌한다.” p. 140.


- 진나라 대부 혼헌이 말하기를, “밝은 군주는 신하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자신이 신하들로 하여금 배신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통치술을 믿습니다. 밝은 군주는 또한 신하가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자신이 신하들로 하여금 속임수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 통치술을 믿습니다.” p. 142


“나라란 군주의 수레이며, 권력이란 군주의 말이다. 통치술이 없이 이를 다루려고 하면 몸을 비록 수고스럽게 하더라도 어지러워지는 것을 면할 수 없다. 통치술을 가지고 다스린다면 몸은 편안한 곳에 거하면서 제왕의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p. 150.


“옛말에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자기가 바라는 바를 드러내지 말라. 군주가 만약 그 바라는 것을 드러내어 보이면, 신하들은 장차 거기에 깎아 맞추려고 들 것이다. 군주는 자기 의지를 드러내지 말라. 군주가 만약 자기 의지를 드어내어 보이면, 신하들은 장차 자신이 남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할 것이다.”” p. 155.


“군주의 도는 신하에게 드러내어 보여주어서는 안 되며, 군주의 통치술은 변화무쌍하여 신하가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 p. 156.


한비자의 칠술(七術)

(1) 중단참관(衆端參觀): 여러 가지 일의 단서를 견주어 보아야 한다.

(2) 필벌명위(必罰明威): 잘못은 반드시 처벌하여 군주의 권위를 밝혀라.

(3) 신상진능(信賞盡能): 잘한 일은 반드시 미덥게 포상하여 신하들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다 발휘하도록 하라.

(4) 일청책하(一聽責下): 신하를 무리로 다루지 말고 한 사람씩 평가해서 추궁해야 한다.

(5) 의조궤사(疑詔詭使): 의심스러운 명령을 내리거나 거짓으로 일을 시켜보라.

(6) 협지이문(挾知而問):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물어보라.

(7) 도언반사(倒言反事): 말을 거꾸로 해보거나 일을 반대로 처리해보기도 하라. p. 273, pp. 292-293.


“뭇 신하들이 말로써 사업 계획을 진술하면, 군주는 그 말에 따라 사업을 맡기고, 실적을 가지고 그 사업을 평가한다.” p. 289.


“군주의 길은 신하로 하여금 반드시 말을 한 책임을 지도록 하며, 또 말을 하지 않은 책임도 지도록 해야 한다. 말에 처음과 끝이 맞지 않고, 논리에 근거가 없는 자는 말을 한 책임을 져야 한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면서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말을 하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한다.” p. 294.




5. 한비자에 대한 노자 사상의 영향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상상해낸 것을 말할 때 ‘상(象)’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도(道)라는 것은 비록 듣거나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성인(聖人)은 도의 작용이 드러난 것을 미루어 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노자』에서 말하기를 “도는 드러나는 형상이 없는 형상이며, 실체가 없는 형상이다”라고 한 것이다.” p. 47.


“억지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있는 것이 도(道)의 본래 모습이며, 온갖 것이 드러나 서로 견주어지는 것은 사물의 실제 정황이다.” p. 48.


“(군주는) 지혜를 버림으로써 도리어 총명해질 수 있고, 현명함을 버림으로써 도리어 공효가 있으며, 용기를 버림으로써 도리어 강해질 수 있다. 뭇 신하들로 하여금 직분을 지키게 하고 백관들로 하여금 일정한 법을 따르게 하여 각기 능력에 맞추어 부리는 것을 습상(習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너무나 조용하여 그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알 수 없으며, 텅 비어 있어 그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 현명한 군주는 윗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신하들은 아래에서 부들부들 두려움에 떨고 있다”라고 한다.” p. 49.


“『노자』에서 말하기를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에 기대고 감히 작위하려 들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p. 57


“『노자』에서 말하기를 “하늘 아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 비롯했으며, 하늘 아래 큰일은 반드시 미세한 데서 시작했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모두 쉬울 때 큰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며, 미세할 때 조심하여 멀고 큰 화근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pp. 58-59.

“도(道)는 쌓아갈 수 있으니, 도가 쌓이면 겉으로 드러나는 효과가 있다. 덕이란 도가 쌓여 겉으로 드러나는 효과다.” p. 103.


“대저 도(道)란 넓고 커서 모습이 없다. 덕(德)이란 분명한 이치가 있어서 곳곳에 두루 미친다.” pp. 103-104.




6. 한비자의 ‘이(理, 이치)’ 개념


“이치란 사물을 이루는 무늬다.” p. 79


“사물에는 각각 이치가 있어 서로 침범할 수 없다. 사물에 이치가 있어 서로 침범할 수 없으므로 이치는 사물을 결정하는 틀이다. 만물은 각각 그 이치가 다르다.” p. 79.


“사물의 결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일을 잘 이뤄낼 수 있다.” p. 81


“대저 얼음과 숯불은 한그릇에 오래 함께 있을 수 없고, 추위와 더위는 한때 함께 닥칠수 없으며, 잡스럽고 모순된 학설이 양립해서는 다스려질 수 없다.” (氷炭不相容) p. 85


장자(莊子)의『장자』

2010. 5. 1. 13:43 | Posted by 지송리

 장자(莊子)의『장자』

 

1. 1장 「소요유(逍遙遊)」의 의미


 북녘 바다의 물고기 곤, 이 새가 변하면 붕.

-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를 일으키기를 3천리,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9만 리, 6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p. 28.

  붕은 매미와 비둘기의 비웃음을 사지만, 이것들은 붕의 뜻을 모른다. 생과 사의 짧은 순간만을 사는 이것들은 대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붕은 도를 깨친 존재이다.


- 만약 천지의 본연의 모습을 모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자가 되면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게 있으랴. 그래서 「지인에게는 사심(私心)이 없고, 신인(神人)이게는 공적이 없으며, 성인(聖人)에게는 명예가 없다.」고 한다. p. 34.


- 장님에겐 빛깔의 아름다움이 안 보이고 귀머거리에겐 음악의 황홀한 가락이 안 들리지만,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비단 육체에만 한하는 게 아닐세. 지식에도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네. 그게 바로 지금의 자네를 말함일세. 신인의 덕은 만물을 혼합해서 하나로 만들려는 거지.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기를 바라지만, 신인이 무엇 때문에 [보잘것 없는] 천하를 위해 애써 수고하려 하겠나.


소요한다는 것은 무궁한 경지에서 노닒을 뜻한다. 세상사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 따라서 소요유는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을 뜻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구별을 한다. 선악, 시비, 미추, 삶과 죽음, 귀천 등의 구별이 있다. 이것들은 마음을 혼란되게 하는 것일 뿐이다. 도의 세계, 그 경지에서는 이런 것들의 구별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소요유의 경지란, 현실의 구별과 분별을 ‘초월한 완전히 자유로운 세계, 즉 대자연의 커다란 품에 안길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 (안동림, 해제, p. 25.)




2. 「제물론」의 구별 거부


  제물은 ‘만물(세상의 모든 사물)을 고르게’ 함을 이른다. 유일절대의 도의입장에서 현실 세계의 갖가지 현상, 시미, 선악, 미추, 정사(옳고 그름), 화복, 길흉, 각몽(깨어 있음과 꿈꿈), 생사 등을 명확히 부분하려는 상대적 가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지를 밝힌다. 대붕은 절대자(자유인)의 조건은 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고 궁극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안동림 해제, p. 45.)

  따라서 제물은 절대적인 명지(明智)의 경지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에 의한 구별과 시비가 없어진다. 즉, 인간의 지식은 상대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장자가 상대주의에 머무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명지와 같이 절대적인 도를 파악하는 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도의 경지는 인간의 상대성을 넘어선, 초월한 상태이다.


- (남곽자기가 말하기를) 지금 나는 스스로를 잊어 버렸다. 너는 그걸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사람의 퉁소 소리는 들어도 땅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했고, 또 땅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해도 아직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했겠지. p. 47.


스스로를 잊은 상태란, 망아의 상태, 즉, 만물과 하나가 된 경지. 일체의 구별이 없어진 상태. 근심과 걱정은 구별에서 온다. 자타의 구별로부터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근심과 걱정이 생겨난다. 망아에 이르러 구별이 없어지면, 자기를 위해, 또는 타자를 위해 근심과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평안과 안정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위의 퉁소 소리 우화에서 ‘구멍은 인간이나 사물의 덧없음을, 소리는 시비를 일삼는 사고나 언설을, 바람은 좀처럼 포착하기 힘든 도를 나타내고 있다.’ 소리는 시끄럽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 입장에서 보면 그런 자잘한 소리는 덧없는 것이다. 하늘의 퉁소 소리는 다른 소리들이 날 수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인 셈이다.


- 훌륭한 지혜는 한가하고 너그러우나 하잘것없는 잔꾀는 사소한 일을 따지려 든다. 훌륭한 말은 담담하나 쓸데없는 잔말은 이러쿵저러쿵 시끄럽다. …… 탐욕에 빠져 버리면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p. 51.


- 감정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감정이 나타날 데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에 가깝다고 하겠으나 무엇이 갖가지 감정을 생기게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p. 53.


- 참된 주재자가 있는 모양이지만 그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용은 뚜렷한데 그 형태는 볼 수 없다. 실체는 있으나 모습이 없다. p. 54.


- (편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덕이] 지극한 사람의 행동을 들은 일이 없는가? 간담을 잊고 눈귀[ 따위의 감각 기관]까지도 잊어버린 채 무심하게 세속밖에서 떠다니고 인위를 일삼지 않는 자연 속에 노닌다. p. 482.


- 무지 무심하여 의식을 작용시키지 않고 모든 생각을 버려 의심을 품지 않으며 온갖 것이 생기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은 전송하고 오는 것은 맞이하며 오는 것을 막지 않고 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배반하는 자를 그대로 버려두고 순순히 따르는 자를 그대로 두어 각기 힘을 다하도록 놓아둡니다. p. 493.




3. 도(道) 또는 도추(道樞)와 ‘제물론(齊物論)’의 의미


- 성인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의 조명에 비추어 본다. 그리고 커다란 긍정(긍정의 세계)에 의존한다. …… 저것과 이것이 그 대립을 없애 버린(대립을 초월한 절대적인) 경지, 이를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라 고 한다. 지도리이기 때문에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무한한 변전에 대처할 수 있다. 옳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며, 옳지 않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다. 그러므로  [시비를 내세우는 짓은] ‘명지’의 처지에 서느니만 못하다. p. 59.


- 길이란 그 곳을 다니니까 생기게 마련이고, 사물은 이름을 붙이니까 그렇게 된다. p. 61.

도추의 경지는 절대적 자연의 이치에 이른 경지. 구별이 없고 자연과 만물이 하나가 된 경지. 여기에 구별을 붙이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간의 상대적 지식에 의한 것. 인간은 그러한 상대적 지식에 의해 구애되고 속박된다. 유가의 정명은 이름을 바르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지 절대적인 도의 관점은 아니다. 정명에 의하면 시비의 판단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시비의 판단이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


- 충분히 자기의 삶을 즐길 수 있으면 도에 가깝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길 뿐, 그러면서도 그런 따위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을 도라 한다. p. 63.


- 애초 사물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경지이다. (무의 경지), 지극하고 완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일 수가 없다. 그 다음 경지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구별을 두지 않는 (사물과 자아가 하나라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구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시비를 고려하지 않는 입장이다. 시비가 나타나면 도가 파괴되는 원인이 되고, 도가 파괴되면 또한 편애(애증)가 이루어지는 원인이 된다. pp. 65-66.


→ 유가의 정명, 예악과 같은 것은 시비의 구별로부터 나옴. 인간을 구속하는 것.


- 자기의 판단을 가하지 않고 상시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 이것을 참된 명지에 의거함이라 한다. p. 67. [만물제동의 경지]


- 도란 본래 한계가 없고, 말이란 애초 일정한 의미 내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말로 표현하려 하면] 구별이 생기게 된다. p. 72.


- 대체로 참된 도는 명칭으로 나타낼 수가 없고, 참된 변론은 말로 할지 못한다. …… 알지 못한다는 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다. …… 이러한 경지를 보광(葆光: 속에 간직된 도)이라고 한다. p. 73.




4. 4장「인간세(人間世)」에서 나타나는 처세술로서의 ‘무용(無用)의 용(用)’


- 학문은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입장.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이의 학문관은 그런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등용되어 나라에 쓰임이 있는 것이 사대부가 할 일이다. 글만 읽는 것은 무용하다고 했다. 그러나 장자는 처세에서 자연의 도에 맡긴다. 특히 지식은 경쟁심에서 생기고 지식이란 다투기 위한 도구(p. 105)라고 한다. 그래서 노자의 ‘절성기지 민리백배’라는 말을 따른다.


- 격언에 “군주의 명령을 고치지 말라. 성공하려고 무리하게 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그저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을 유유히 자유롭게 풀어 놓고,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몸을 맡긴 채 중도를 지켜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p. 126.


- 내가 선생을 생각해 보니 선생은 자기 지식을 꾸며서 어리석은 사람을 놀라게 만들고 스스로의 행실을 닦아 남의 잘못도니 행동을 돋보이게 하며 눈부시게 마치 해나 달을 들고 가기라도 하듯 했을 거요. 때문에 재난을 면하지 못하오. (대공임이 공자에게 한 말) p. 495.

  장자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순응의 사상, 즉 부득이한 데에 몸을 맡기고 소요자적하라는 장자 본래의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쓸모없는 상수리나무 이야기는 무용의 용. 처세술. 인간 세상에 쓸모가 없어야 천수를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나는 그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므로 화를 아주 면하지는 못한다. 만약 [쓸모 있음과 없음 따위를 초월한] 자연의 도에 의거하여 유유히 노닌다면 그렇지 않게 된다. p. 487.


- 모순되어 보이는 장자의 말: 무한한 자연의 도의 경지에 노니라 한다. 그러나 편자와 손휴의 이야기에서 편자가 말하기를 “만약 저 새를 키우는 방법으로 새를 보양하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강이나 호수에 떠 있게 하며 제멋대로 먹게 하여 새의 본성에 따라 유유히 노닐게 하는 것뿐이다. 지금 손휴는 소견이 좁은 사람인데 내가 지인의 덕을 말해 주었으니 이건 비유컨대 생쥐를 수레나 말에 태우고 메추라기를 종소리나 북소리로 즐겁게 해주려 한 짓과 같아.” p. 484.




5. 장자의 이상적 인간상인 진인(眞人) (「대종사(大宗師)」 참고)


- 진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참된 지식이 있게 마련이다. …… 옛날의 진인은 역경을 [억지로] 거역하지 않았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아무 일도 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잘못을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고, 잘 되어도 자랑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다. [그] 지식이 [세속을 초월하여 자연의] 도이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그런 것이다. p. 176


- 옛날의 진인은 삶을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미워할 줄도 모른다.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무심(無心)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그 [태어난] 시초를 모르고, 그 [죽은 뒤]의 꿑을 알려 하지 않는다. 삶을 받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죽으면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이런 경지를 「분별심으로 도를 버리지 않고, 인위로 자연을 돕지 않음」이라 하고, 이런 [경지에 있는]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 pp. 178-179.


- [외계의] 사물을 [그 자체에 맡겨 두지 않고] 뜻대로 하기를 바라는 자는 성인이 아니다. [특정한 것에 대한] 친밀감이 있는 자는 인자(仁者)가 아니다. 자연을 [인위적인] 시간으로 구분하는 자는 현자가 아니다. 이(利)와 해를 구별하는 자는 군자가 아니다. 명예를 좇아 자기를 잃는 자는 선비가 아니다. 몸을 망치며 참된 삶을 잃고 있는 자는 [남에게 부림을 받을 뿐] 남을 부리지 못하는 자이다. pp. 180-181.


- 그 하나의 입장으로 [절대적인] 하늘(자연)의 무리가 되고, 하나가 아닌 입장으로 [차별적인] 사람의 무리가 된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고 [조화되어] 있다. 이런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 p. 185.


- 자연은 우리에게 모습을 주었다. 또 우리에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우리에게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며, 우리에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삶을 좋다고 하면 곧 스스로의 죽음도 좋다고 하는 셈이 된다. p. 188.


- 성인(聖人)은 그 무엇도 빠져 나갈 수 없는 [만물을 포함한] 경지에서 노닐며 만물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려 한다. p. 190.




6.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 긍정적 함의와 한계


  긍정적 측면은, 구별의 철폐를 통해, 만민 평등을 넘어 만물평등에까지 이르는 평등주의를 추구한다. 이것은 신분적 질서의 철폐를 위한 혁명적 사상이라 할 만하다. 유교적 명분 논리를 비판하는 것은 명분에 의한 자유 억압을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대주의적 지식을 폐하고, 절대적인 지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속에서 자연과 합일되고 만물제동이 된 상태가 된다. 이것은 육체를 잊는 망아, 자신의 존재도 잊는 망아이다. 곧 정신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이것은 내면적인 관념적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 밖의 현실 세계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독단의 비판, 구속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기도취적일 뿐이다.

  또한 인간세의 처세술은 현실 순응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단지 천수를 누리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물아의 경지, 절대적인 도의 경지에 이를 필요가 있겠는가. 물아가 육체의 욕망을 잊는 상태임에도 육신의 보존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 모순되어 보이는 장자의 말: 무한한 자연의 도의 경지에 노니라 한다. 그러나 편자와 손휴의 이야기에서 편자가 말하기를 “만약 저 새를 키우는 방법으로 새를 보양하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강이나 호수에 떠 있게 하며 제멋대로 먹게 하여 새의 본성에 따라 유유히 노닐게 하는 것뿐이다. 지금 손휴는 소견이 좁은 사람인데 내가 지인의 덕을 말해 주었으니 이건 비유컨대 생쥐를 수레나 말에 태우고 메추라기를 종소리나 북소리로 즐겁게 해주려 한 짓과 같아.” p. 484.

  즉,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는 범인은 이르지 못한다. 그렇다면 장자의 주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6장 「대종사」


대종사의 앞부분은 진인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고, 후반부에는 도에 따르는 삶이 생과 사를 초월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있다.


- 도란 실제로 [겉에] 나타나는 작용이 있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가가 있으나 행동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을] 전할 수는 있으나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어 있고,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의 옛날부터 본래 존재하며, 귀신이나 상제를 영묘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낳고 있다. p. 191.


- [자여(子輿)는] 대답하기를, …… 대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그런 때를 만났음이며, 삶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의] 도리(道理)를 따름이다. 태어난 때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감정)이 끼어들 수 없다네. 이것이 옛날에 말하던 현해(懸解: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라는 걸세. 그런데 스스로 [그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건 [외계의] 사물이 얽혀 매듭져 있기 때문이지. 대체 사물이 자연의 도리에 이기지 못한다는 건 옛날부터 사실일세. 내 또한 어찌 [이 병을] 싫다 하겠나. p. 199.


- 자래가 대답했다. 「…… 자연은 내게 형체를 주었지. [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주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하나로 이어진 것이니], 내 삶을 좋다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고 하는 게 된다네.」 p. 201.


안동림 해석: 장자는 인간의 변생(變生)과 생사의 초월이라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 생사를 초월한다 함은 자연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p. 202.


-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가 말하는 이 「자기」라는 것이 과연 자기인지 어찌 알겠느냐. 그런데 또 자네는 꿈에 새가 되어 하늘에 이르기도 하고, 꿈에 물고기가 되어 연못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겠지. [그러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과연] 깨어 있으며 그러는 건지, 꿈꾸며 그러는 건지를 알 수가 없지 않느냐. 남의 결점을 고자질함은 웃는(포섭하는) 것만 못하고, 웃음을 즐김은 사물의 추이(推移)에 [그래도] 맡기는 일만 못하다. 추이에 편히 [몸을] 맡긴 채 변화를 따르면, 곧 고요한 하늘(자연)과 하나가 되는 [절대의] 경지에 들게 된다.


- [허유(許由)가 말하기를] 내 스승, 내 스승이란 [도는] 만물을 이뤄 놓으면서도 의롭게 여기지 않고, 만세에 미치는 혜택을 베풀면서도 어질다 생각하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 살면서도 늙었다 하지 않고, 천지를 싣고 감싸서 갖가지 모양을 조각해 내면서도 재주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노닐게 하는 경지일세. p. 214.


- [안회(顔回)가 말하기를] 「저는 좌망(坐忘)하게 됐습니다.」 중니는 놀라서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고 하느냐?」 안회가 대답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서, 형체를 떠나 지식을 버리고 저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중니는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 [하는 차별 따위]가 없어지고, [도와 하나가 되어] 변하면 한 군데 집착하지 않게 된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라야겠다.」 p. 216.



제 8장 변무: 인의에 대한 논박


-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길게] 이어 주면 괴로워하고, 두루미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 주면 슬퍼한다. p. 246.


- 세상에서 인덕이 있다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떨쳐 버리고 부귀를 탐하고 있다. 때문에 인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참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p. 247.


- 예악에 따라 몸을 굽히고, 인의에 순순히 좇아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본래의 일정한 모습을 잃는 짓이다. p. 248.

안동림 주: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을 인의 따위 자로 규정해 버리려는 유가는 바로 그 어떤 구속도 배척하는 장자에게는 그야말로 강렬한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p. 249.


- 내가 말하는 선이란 인의가 아니라, 본성의 덕에 순순히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선이란 흔히 말하는 인의가 아니라, 본래 그대로의 모습에 맡긴다는 뜻이다. p. 252.



제9장 마제


- 대체 지극한 덕이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새나 짐승과 함께 살고, 만물과 함께 나란히 모여 있었다. [그런데] 어찌 군자와 소인[이라는 차별]을 헤아리겠는가! …… 성인이 나타나게 되자, 애써 인을 행하고 허둥지둥 의를 행해서 온 천하가 비로소 의혹을 품게 되었다. 제멋대로 음악을 연주하고 번잡하게 예의를 반들어 천하에 비로소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p. 260.


- 성인이 나타나게 되자, 예의나 음악에 따라 몸을 굽혀서 그것으로 천하[사람]의 겉모습을 바로잡으려 하고, 인의를 내걸어 천하[사람]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자 백성은 애써 지식에 몰두하고 다투어 이득을 좇게 되었는데, [이제는] 막을 수가 없다. 이 역시 성인의 잘못이다. p. 262.



제10장 거협: 인간의 지혜 비판. 성을 끊고 지혜를 버려라.


-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지자(知者)란 큰도둑을 위해 [물건을] 모아두는 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소위 성인이란 큰도둑 때문에 [물건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p. 268.


- 전성자는 하루 아침에 제나라 군주를 죽이고 그 나라를 훔치고 말았다. 훔친 것이 그 나라뿐이었을까? 아울러 성인과 지자가 이룩한 법까지도 훔쳐 버렸다.


- (도척이 말하기를) 어디서나 도 없는 곳이 있겠느냐?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맞히면 성(聖)이고, 스며들 때 선두에 서는 게 용이다. 나올 때 맨 뒤에 있으면 의이고, 될지 안 될지를 아는 게 지이며, 분배를 공평하게 함이 인이다. p. 270

-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존중하고 천하를 다스린다 해도 결국 그것은 도척 같은 인간을 존중하고 이롭게 하는 셈이 된다. pp. 270-271.


- 인의로 [백성을] 바로잡으려 하면 그 인의도 아울러 훔쳐 버린다. p. 272.a


- 성인을 근절하고 지혜를 내버리면 큰도둑은 없어진다. p. 273.

[<노자> 제 19장: 절성기지 민리백배.]


- 증삼이나 사추의 행위를 떼어 내고, 양주나 묵적의 입을 막으며 인의를 물리치면 비로소 온 천하의 덕은 현묘한 도와 하나가 된다. p. 275.


- 지혜를 좋아한다는 것이 온 천하를 이렇듯 혼란하게 하다니 참으로 심한 짓이다. p. 278.


 

제 3 장 동물에게도 평등을


제 1 절 인종주의와 종족주의


1.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 모든 인간의 평등을 보장해 줄 평등의 근본적인 원칙

우리가 도덕적 사고를 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들에 대하여 동등한 비중을 둔다는 것. (p. 43, 제 2 장)


2. 인간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로 확장

①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이 인간 종족 내에서 타자 관계에 대한 도덕적 근거로 타당하다면, 인간이 아닌 동물들과의 관계에도 타당한 도덕적 근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② 논거: 고통을 겪는 능력, 고통을 받거나 기쁨을 얻는 능력은 이익일반을 갖기 위한 전제이다. 따라서 타자의 이익을 고려할 때 감각(sentience)이 유일한 경계선이다.

  (고통에서 벗어나야 할 궁극적인 도덕적 이유는 고통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 p. 43)

③ 함축: 당사자의 이익 고려에서 당사자가 누구를 닮았느냐, 어떤 능력을 가지느냐와는 무관하다. 단순히 다르다는 사실로 다른 종의 존재들을 착취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④ 예: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은 유럽계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같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종족의 차이로 고통의 가치평가를 할 수는 없다.


3. 반론과 재반론

① 반론 i):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과 실험실 쥐의 고통은 다르다.

⇔ 재반론: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이 암으로 죽는 인간 아닌 것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한 이익의 평등 고려를 확장하지 못하게 하지 못한다.

-같은 양의 고통: 아기를 한 대 칠 때의 고통의 양은 말의 경우 큰 매로 두들겨 팰  때의 고통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에게 마땅한 이유 없이 그만한 고통을 가하 는 것이 잘못이라면 마땅한 이유 없이 말에게 같은 양의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 마찬가지로 쥐에게 마땅한 이유 없이 고통을 가하는 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

- 인간은 예기적 두려움을 갖지만 동물은 그런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반론?

→답변: 실험에서 정상적인 성인보다는 동물을 이용해야 할 종족주의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답변은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어린이들 등을 실험에 사용할 이유를 제공할 것이다.

② 반론 ii): 여러 종족들의 고통 비교 불가능하다.

⇔ 재반론: 인간들의 고통 역시 정확히 비교될 수 없다.

⇨ 결론: 고통은 나쁜 것이며, 고통을 겪고 있는 존재는 인종, 성, 종족에 관계없이 방지되거나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이 얼마나 나쁘냐 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 그것이 얼마나 지속적인가에 달려 있다.



제 2 절 종족주의의 실제

1. 음식으로서의 동물

① 주장: 동물 고기가 필수품이기보다 사치품일 때 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다.② 근거: 동물의 고기는 사람들이 그 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먹는 사치품이다.

i) 동물의 고기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적합한 음식을 쉽게 얻을 수 있다.

ii) 동물의 고기가 양호한 건강상태나 장수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의학적)

iii) 동물 고기는 동물 사육에 사용된 곡물의 영양가의 10% 정도만 인간에게 소비된다.

⇒ 동물 고기를 먹는 인간의 이익은 먹혀지는 동물의 생명과 복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에 따를 때 작은 이익 때문에 큰 이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예외: 에스키모들은 육식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 환경에 살고 있으므로, 생존이라는 이익이 그들이 죽이는 동물의 생존이라는 이익을 능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2. 동물 실험

(1) 동물 실험 옹호 주장의 모순점: 동물 실험은 인간에 대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주장이 동물 실험의 정당화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이 경우, 동물 실험 옹호자는 인간과 동물이 중요한 점에서 비슷하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2) 예에 의한 반대

① 생산품 안정성 시험을 위한 동물 실험. 이것들은 인간의 고통을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 제약회사의 샴푸와 화장품 시험을 위한 드레이즈 테스트(Draize test), 인공색소나 방부제와 같은 식품 첨가물에 대한 LD50 시험.)

② 핵공격을 받은 후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군인들의 능력 알기 위한 붉은털 원숭이 실험

③ 대학의 여러 실험

⇒ 이러한 동물 실험에서 인간의 이익이란 없거나 매우 불확실하다. 반면에 다른 종의 구성원들이 잃게 되는 것은 확실하고 실제적이다.


(3) 동물실험 찬성론자들의 [공리주의적] 반론: 동물실험 반대론자들은 한 마리의 동물 실험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동물 한 마리 < 인간 수천 명)

① 싱어의 답변: 하나 혹은 한 다스의 동물이 수천을 구하기 위하여 실험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옳고, 이익에 대한 평등한 고려와도 일치한다.

② 동물 실험 반대론자들의 반론: 그렇다면, 회복불가능한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고아에게 그 실험을 하려고 하는가? 동물과 뇌손상자들을 도덕적으로 구별하는 특징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그런 인간에게 실험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면, 동물 실험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3. 종족주의의 다른 형태들

모피무역, 여러 종류의 사냥, 서커스, 로데오, 동물원, 애완동물 사업 등.



제 3 절 몇 가지 반론들


1.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동물이 고통을 당할 때의 행동으로 알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① 모든 척추동물, 특히 새나 포유동물의 신경체계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것과 유사하다.

②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을 수 있게 하는 어떤 근거도 식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식물은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된 신경체계가 없다.


2. 동물들은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가?

(1) 동물은 동물을 먹는다.

①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반대: 생선의 위 속에 더 작은 생선이 들어 있었다. 생선들이 서로 먹는다면 인간이 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② 싱어의 반론

i) 동물이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음식 확보를 위한 것이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동물 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다.

ii) 동물들로부터 도덕적 지침을 구해야만 한다는 논변을 사용하는 것은 기이하다.

iii) 동물은 여러 대안을 고려할 능력이나 식사의 윤리성을 반성할 능력이 없다. 동물들에게 그들의 일에 책임을 지우거나 그들이 다른 동물을 죽인다고 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대접 받아야 한다고 판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한 육식

①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한 진화론적 육식 옹호론: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강한 놈이 약한 놈을 먹고 산다. 동물은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는 왜 먹지 말아야 하는가?

② 반론

i) 사실상의 잘못: 동물을 먹는 것이 자연적인 진화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가정이 잘못이다. 생존을 위해 사냥하는 소수의 원시문화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공장식 농장의 대규모 가축 사육은 생존과 상관이 없다.

ii) 추론상의 잘못: 동물이 동물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그러한 육식 과정에 간섭하는 것이 그릇도니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2년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아이를 낳지 않도록 간섭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3. 인간과 동물의 차이들

(1) 도구나 언어 사용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구별 경계인가

①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 → 갈라파고 섬의 딱따구리는 선인장 가시 이용

② 인간만이 도구를 유일하게 만든다? → 탄자니아 정글의 침팬지가 나뭇잎을 씹어 스펀지를 만들고, 벌레를 잡을 도구를 만들기 위해 가지에서 잎을 훑는다.

③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은 미국식 수화를 배웠다. 고래와 돌고래는 그들 나름의 복잡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존재의 고통을 무시할 이유는 될 수 없다.


(2) 생각이나 추론, 자의식, 자율성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경계인가?

자의식적 존재가 우선적 고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자의식적인 존재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그의 이익에 반할 것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자의식적이지 못한 존재의 이익에는 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도라면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과 양립가능하다. 그러나,

① 반박 1: 자의식적인 존재의 고통이 단순히 감각적인 존재의 고통보다 더 크지 않을 경우,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로운 존재이므로 전자의 고통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즉, 자의식의 유무가 이익의 비교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 자의식은 고려될 필요가 없다.

② 반박 2: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인간은 다른 많은 동물들보다 더 자의식적이지도 않고 더 자율적이지도 않다. 자의식과 자율성의 간격이 도덕적 위치의 차이를 결정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동물로서의 도덕적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3) 자율성과 자의식을 구별 기준으로 삼아도 문제 없다는 주장 세 가지

① 주장 1: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정상적인 인간의 종에 속하는 구성원이기 때문에 마치 정상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진 듯이 다루어야 한다.

⇔ 반론: 사람들을 개인으로 다루어야지 집단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민족 집단간 IQ의 차이). 특정한 인종이나 성에 속하는 사람들을 더 잘 대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듯이 우리 종족의 구성원을 다른 종족의 구성원보다 더 잘 대해서는 안 된다.

② 주장 2: 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인간이며, 우리는 다른 동물과 가지지 못하는 특별한 관계를 그들과 갖는다.

⇔ 반론: 애정에 의존하는 이 입장은 도덕적 의무를 감정에 호소하는 문제가 있다.

③ 주장 3: 미끄러운 경사길 논변 - 예를 들어, 일단 우리가 정신적 장애를 가지는 사람이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허용하면, 우리는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해서, 사회적 부적응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등의 전체주의로 나아간다. 따라서 음식으로 사용되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의 구분 기준으로 종족을 제시할 수 있다.

⇔ 반론: 위의 위험으로 감각 있는 존재들이 익을 무시하는 상황을 교정하려는 시도를 단념할 필요는 없다.


4. 윤리와 호혜성

① 계약론적 주장: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동물은 윤리적 계약의 경계 밖에 있다.

② 반론: 윤리적 판단의 기원에 대한 설명(explanation)과 판단의 정당화(justification)를 구분해야 한다. 윤리학의 기원을 상호 이익을 위한 묵시적인 계약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럴듯하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윤리체계의 옳음이나 그름에 대한 견해를 무엇이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계약론적 윤리관은 상호 이익의 묵시적 계약에 대한 보편화 과정을 인간 공동체라는 경계에서 정지시킨다.

③ 계약론의 문제점:

i) 윤리의 영역에서 동물,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나 유아 등을 배제

ii) 계약의 궁극적 이유는 자기이익이다. 윤리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면 윤리적으로 대우할 이유가 사라진다.

iii) 노예들은 계약 주체가 아니게 된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은 아무런 의무가 없다. 후손들에 대한 의무가 없다.

④ 느슨한 계약론의 대안: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실제 상호작용의 능력과 무관하게, 그런 능력의 소유 시점과 무관하게 상호 협약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도덕적 공동체 내에 있는데, 이들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실제로 그들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느냐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들이 언제 이러한 능력을 가지느냐와 무관하게, 상호적인 협약에 참여할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가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 반론: 더 이상 상호성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다.

제 5 장 살생: 동물


제 1 절 동물도 인격체일 수 있는가?


어떤 동물이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1) 동물이 자의식적이란는 증거들

침팬지 와슈와 저지 원숭이 코코와 미카엘의 수신호 조작, 오랑우탄 찬텍의 수화 학습: 원숭이들은 과거나 미래의 사건을 가리키는 데 수신호를 사용한다.

⇒ 수신호를 하는 원숭이들이 자의식적이라 가정해 보자. 그들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자의식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닌 동물 중 그들이 예외적임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이러한 동물들과 다른 동물들이 자의식적이라는 점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것인가?

(2) 반론: 스튜어트 햄프셔(Stuart Hampshire)와 리히(Michael Leahy) - 사유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동물은 언어가 없으므로 반성할 수단과 미래의 행위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단이 없다. 따라서 이런 동물에게 의도를 부여할 수 없다.

(3) 싱어의 재반론: 언어가 없는 동물도 의도를 가지고 있다. 동물이 개념적으로 생각한다고 가정해야 설명되는 예들이 있다. 열쇠로 상자를 열어 바나나를 얻는 침팬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나뭇잎을 먹는 침팬지, 암컷 유인 시 지배적 수컷을 기만하는 침팬지, 바나나를 얻기 위해 어른 침팬지가 떠날 때가지 기다리는 어린 침팬지 ⇒ 침팬지도 의도를 갖고 추리.



제 2 절 인간 아닌 인격체를 죽이는 것


인간 생명의 신성성 이론

① 주장: 인격체의 생명은 신성하다는 주장. 인간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 특별한 가치를 가지거나 보호되어야 한다.

② 이 주장의 확장: 인간이 아닌 어떤 동물이 인격체라면 이 동물의 생명도 특별한 가치를 갖거나 보호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우리 종족의 생명을 다른 종족의 생명보다 중요시하는 이론을 배격해야만 한다.

→ 파생되는 결과: 다른 종족의 어떤 구성원은 인격체이며, 우리 종족의 어떤 구성원은 인격체가 아니다. [인격체가 생명의 가치 평가에서 중요한 기준이라면,] 인격체인 다른 종족의 구성원보다 인격체가 아닌 우리 종족의 구성원을 죽이는 것이 언제나 더 나쁜 것은 아니다. 즉, 인격체인 침팬지를 죽이는 것은 인격체가 아니고 될 수도 없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고래, 돌고래, 개 또는 고양이도 자의식적이고 미래감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인격체일 가능성이 있다.

④ 의심의 이득: 만약 인격체를 죽이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을 죽이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죽이려는 어떤 존재가 인격체인지 아닌지 의심이 간다면 죽이지 말아야 한다. (사슴 사냥꾼들의 규칙) 이에 따라 동물 살생은 그릇된 일이다.


제 3 절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


1. 동물 살생에 반대하는 공리주의적인 간접적 이유들

① 동물을 죽이는 많은 방식들이 즉각적 죽음을 주지 않는다.

② 한 동물의 죽음이 그 짝이나 그 무리의 다른 구성원에게 주는 영향도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살생이 일으킬 수도 있는 고통이나 아픔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는 살생을 반대할 이유가 될 수 없다.


2. 살생이 고통 주지 않고 다른 것들에 손해를 주지 않을 때 공리주의적 판단

(1) 사전 존재적 견해(prior existence view): 고통보다 많은 쾌락이 있을 것 같은 삶을 살 존재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 육식을 위한 동물 살생은 일반적으로 그릇된 일이다. 육식을 통해 갖게 되는 우리의 이익은 그들이 누릴 쾌락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전체적 견해(total view): 육식의 정당화에 사용됨- 대체가능성 논변

① 주장: 감각 있는 존재가 쾌락과 같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경험을 하는 한, 그러한 존재는 가치 있는 존재이다. 감각 있는 존재는 가치로운 것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며, 내용물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을 수 있듯이 감각 있는 존재는 대체 가능하다. 따라서 육식가들은 일부 동물을 먹음으로써 쾌락의 상실을 야기하지만, 더 많은 동물의 출생을 야기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다른 동물에 부여하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육식을 정당화할 수 있다.

② 대체가능성 논변에 대한 반론

  i) 현대의 공장식 농장에서 고통스럽게 사육되는 동물의 육식을 정당화할 수 없다.

  ii) 육식옹호자들은 왜 가능한 최대다수의 행복한 존재들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더 좋은지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인간을 제거하는 것이 행복을 증진시킨다면?)

③ 솔트의 반론: 존재와 비존재의 비교를 시도하는 것은 혼동된 사고에 기인한다.


(3) 파피트(Derek Parfit)의 가설적 상황: 대체 가능성 논변을 강화하는 상황이다.

 

첫 번째 여인

두 번째 여인

상황

임신 3개월. 태아는 미래의 삶의 질을 낮출 결함을 가짐. 부작용이 전형 없는 약을 먹으면 결함 완치 가능

3개월 내 임신하면 아이는 아이의 삶의 질을 상당히 낮출 수 있는 치료불가능한 결함 가짐. 3개월 후 임신 시 결함 없음.

선택

약을 먹지 않았음

기다리지 않고 임신함

판단

여인은 잘못했음

여인은 잘못하지 않았음

근거

아이에게 해를 끼쳤음. 약을 먹었다면 결함 치료 가능

여인의 대응: 3개월 후 임신했으면 이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임.

① 두 번째 여인이 잘못했다고 믿는다면,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3개월 후 임신했을 때 태어났을 아이를 존재하지 못하게 한 것이 잘못이라고 대답하려면, 다른 사정이 같다면 장애 없는 아이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② 낳을 수 있었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덜 만족스러운 삶의 질을 가진 아이를 낳은 것이 잘못이라고 대답하는 것. 즉,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 그러나 이 대답 역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 파피트의 가설적 상황으로부터 본 대체 가능성의 문제에 대한 대답

① 핵심 문제: 대체 불가능성의 기준 - 가능적인 사람으로부터 실재적인 사람으로 가는 과정의 어떤 단계에서 대체가능성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② 대체 불가능성의 기준: 자신을 일정한 시기에 걸쳐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그래서 더 오래 살기를 갈망할 수 있는 자의식적인 능력이 대체 불가능성의 구별 기준이다.

③ 선호공리주의로부터의 지지: 선호공리주의는 고통이나 행복보다는 선호의 만족에 관심을 갖는다.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는 개별자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의미로도 어떤 양의 행복을 담고 있는 용기로 간주될 수 없다. 자의식적인 존재들의 경우 계속 살기를 욕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존재들의 죽임은 다른 존재들의 태어남으로 보완될 수 없는 손실을 가하는 것이다. 반면, 의식적이지만 자의식을 결여한 존재들은 쾌락과 고통과 같은 경험들의 그릇들이라는 그림에 거의 일치하여 살고 있다. 이런 비자의식적인 존재들의 경우 태어나게 함과 죽임이 서로를 상쇄한다.

④ 보편화 가능성의 시험으로부터의 지지: 내가 자의식적인 존재가 되었다가 의식적이지만 비자의식적인 존재가 된다고 할 때, 오직 전자의 경우에만 미래지향적 욕구를 갖는다. 이 경우에만 죽음은 일시적인 의식의 상실보다도 큰 상실이며 다른 존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보완될 수 없다.


(5) H. L. A. Hart의 비판에 대한 고려

① 하트: 공리주의자에게는 자의식적 존재도 비자의식적 존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체 가능해야만 한다. 선호공리주의자냐 고전적 공리주의자냐 하는 것은 아무 차이가 없다. 즉, 선호 공리주의 역시 극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어떤 선호들이 다른 존재의 선호에 의해 능가될 수 있다면, 왜 그들을 대체한 존재들의 새로운 선호에 의해서는 능가될 수 없는가?

② 반론: 현존 선호의 만족은 좋은 일이지만, 새로운 선호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일괄거래는 현존 선호의 만족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선호를 만들고 충족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③ 선호를 도덕장부 상의 부채로 생각하는 방법

i) 선호를 만드는 것은 도덕장부 상의 부채로 생각될 수 있다. 충족되지 않는 선호를 만들면 부채를 지는 것이고, 이것은 그릇된 일이다. 한 아이를 태어나게 하여 그의 선호가 충족될 수 있다면 상쇄할 수 있는 부채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다.

ii) 파피트의 두 여인에 대한 판단: 둘 모두 잘못이다. 두 여인은 모두 그들이 낳을 수 있었던 아이보다 장부에 보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아이를 쓸데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iii) 이 견해의 문제점: 최선의 삶도 장부에는 조그만 부채를 남기게 된다. 우리들 중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선호를 만들고 충족시키는 것에 대한 도덕장부 모델은 성립하지 않는다.

④ 여행 모델:

i) 한 유아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결정하는 것을 진행 중인 여행을 금지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는 심각하게 나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항해자는 아무런 계획도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ii) 점차 잠정적으로라도 목적지가 정해지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연성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이 행해짐에 따라, 그 여행을 끝내게 하는 것이 점점 더 그릇된 일이 된다.

iii) 이 모델에 따르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 존재들은 교체 불가능하다.

iv) 이 모델에 따르면 비참한 존재를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존재를 실망과 좌절에 빠지도록 되어 있는 여행으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파피트의 두 여인은 모두 같은 정도로 그릇된 일을 했다.



제 4 절 맺는 말


① 동물 중 자신을 과거와 미래를 가지는 개별적 존재로 생각하는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② 이성과 자의식이 없는 동물을 죽이는 경우에는 살생에 반대하는 주장이 약하다. 이런 동물을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그릇되었다면 그것은 이 존재가 담고 있는 쾌락의 감소 때문이다. 이런 동물들이 전체적으로 보아 즐거운 삶을 살지 못했을 것 같은 때에는 직접적으로 그릇된 것이 없다. 또 이들이 상실한 이익은 존재하게 될 다른 동물의 이익에 의해 대체 가능하기도 하다. 한 동물이 즐거운 삶을 살고 있고 고통 없이 죽음을 당하며 그 동물의 죽음이 다른 동물에게 고통을 일으키지 않고 그 동물이 죽지 않았더라면 태어나 살 수 없었을 다른 동물의 삶에 의해 대체 가능한 경우에는, 자의식이 없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 그릇되지 않을 수 도 있다.

③ 그러나 이런 관점의 적용은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 관점은 공장식 농장도 정당화할 수 없고(고통 가함), 야생동물의 살생도 정당화할 수 없다(대체되지 않음).

④ 실천적 도덕원칙의 수준에서,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음식을 얻기 위한 동물 살생은 전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플라톤의『국가•정체』, 박종현 역, 서광사, 1997 

 


1.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


  “저로서는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자의 편익(이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 주장합니다.” 338b (p. 82)

  “적어도 법률(nomoi)을 제정함에 있어서 각 정권(arche)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하여서 합니다. 민주 정체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주 정체는 참주 체제의 법률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정치 체제들도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를, 즉 자기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올바른 것으로서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 및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자로서 처벌하죠.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게 바로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 즉 수립된 정권의 편익이 올바른 것이지요. 확실히 이 정권이 힘을 행사(지배)하기에, 바르게 추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올바른 것은 동일한 것으로, 즉 더 강한 자의 편익으로 귀결합니다.”  338d-339a (pp. 83-84)


소크라테스의 반론: 트라시마코스는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통치자들도 실수를 한다. 어떤 법률은 옳게 제정하지만 어떤 법률은 옳게 제정하지 못한다. 이때 옳게 제정한 것은 자신들에게 편익이 되도록 제정한 법률이고, 옳지 못하게 제정한 것은 통치자들 자신들에게 편익이 되지 못하게 제정한 법률이다. 따라서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통치자들에게 편익이 되지 못하는 것을 따르는 것도 올바른 것이 된다. 따라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자기논박적이다. 339b-339d (pp. 84-85)


트라시마코스의 재반론: 전문가가 실수를 하는 때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한에서만 전문가이다. 그래서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 실수하지 않으며, 실수를 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정하게” 된다. 341a, (p. 88)


소크라테스: 어떤 기술은 그 기술들이 관여하는 대상의 편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 어떤 전문적지식(episteme)도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를 받는 자의 편익을 생각하며 지시”한다. 342d, (p. 92)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 밖의 다른 어떤 통솔(다스림, arche)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또한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342e, (pp. 92-93)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양이나 소를 치는 이들이 양이나 소에게 좋은 것을 생각하며 이들에게 좋은 것을 해주는 것이 사실은 양이나 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양이나 소를 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통치술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래서 “올바름 및 올바른 것이란실은 ‘남에게 좋은 것’, 즉 더 강한 자 및 통치자의 편익이되, 복종하며 섬기는 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인 반면에, ‘올바르지 못함’은 그 반대의 것이어서, 참으로 순진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조종하거니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저 강한 자에게 편익되는 것을 행하여, 그를 섬기며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결코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343b-d (pp. 93-94)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목자 논변에 반박한다. 그는 “모든 다스림(통솔)은 ,그것이 다스림인 한은, 나라의 다스림이든 또는 사사로운 다스림이든 간에, 다름 아닌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돌봄을 받는 쪽을 위한 최선의 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345d-e (p. 98).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도 자진해서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밖의 다른 다스림에서도 자진해서 다스리려 하지 않으며 보수를 요구한다는 경험적 사실 때문이다. 345e, p. 98.


소크라테스는 이어, “각각의 기술이 제공해 주는 이득은 그 특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346c (p. 99) 그래서 전문가가 얻는 보수와 같은 이득은 부수적 이득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통치자들이 얻는 이득은 부수적 이득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기술(techne)이나 다스림(통치: arche)도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줄곧 말해 왔듯, 그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며 지시를 내린다는 것, 다시 말해서 더 약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오. 보시오, 트라시마코스 선생! 바론 그런 까닭으로 해서 방금도 내가 말했던 것이오. 아무도 자진해서 다스리는 일(통치)을 맡아 남의 나쁜 일들을 바로잡는 일을 하려 들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보수를 요구하는데, 이는 자신의 기술로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을 하지도 않으며, 또한 자신의 기술에 다라 지시를 내릴 경우에도, 그런 것을 지시하는 일도 없고, 오히려 그 다스림을 받는 쪽을 위한 최선의 것을 하고 지시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오. 다스리는 일(관직)을 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인 것 같소. 그럿이 돈이든 명예이든 간에, e는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게 벌이 되는 간에 말이오.”라고 말한다. 346e-347a (p. 100)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보다 더 행복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347e (p. 102)

우선, 소크라테스는 “나라나 군대,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 또는 어떤 집단이 올바르지 못하게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에, 만약에 그들이 자기네기리 서로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다면, 그 일을 그들이 조금인들 수행해 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351c (p. 112) 그래서 “올바르지 못함의 기능(ergon)이 이런 것이라면, 즉 그것이 깃들인 곳에는 증오를 생기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자유민들 사이에서건 도는 노예들 사이에서건 간에 일단 생기게 되면, 그것은 서로들 미워하고 대립하게끔 만들고, 다라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351d-e (p. 112) 소크라테스는 이를 한 개인 차원에도 적용한다. 그래서 “올바르지 못함은 한 개인 안에 깃들이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이 본성상 하게 되어 있는 바로 그런 작용들을 하게 될 것으로 나는 생각하오. 첫째로, 그것은 당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갈등이 생기게 하고 한 마음이 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들 것이며,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이 되게끔 만들고 말 것이오.” 352a (p. 113)

소크라테스는 이를 기능, 특히 혼의 기능으로부터 논증하고자 한다.

“어떤 기능이 부여되어 있기도 한 각각의 것에는 ‘훌륭한 상태’(훌륭함: arete) 또한 있다”고 한다. 353b (p. 116). 그래서 “‘그 특유의 훌륭한 상태’에 의해서는 그 기능이 제 할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되지만, ‘나쁜 상태’에 의해서는 나쁘게 수행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353c (p. 117) 이를 혼에 적용하여 “나쁜 상태의 혼으로서는 ‘잘못’ 다스리고(통솔하고) 보살피겠지만, 훌륭한(좋은) 상태의 혼으로서는 이 모든 일을 ‘훌륭하게(잘) 해내게’ 될 게 필연적”이라 주장하며 353e (p. 118), “우리는 앞서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은 혼의 ‘훌륭한 상태’(훌륭함, 덕)이지만, ‘올바르지 못함’은 그것의 ‘나쁜 상태’ (나쁨, 악덕)라는 데 동의”했음을 상기시키면서 353e (p. 118), “올바른 혼과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게(잘) 살게 되겠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353e (p. 118). 결과적으로 “훌륭하게(잘) 사는 사람은 어쨌든 복받고 행복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이는 그 반대일 것”이며 354a (p. 118), “올바른 사람은 행복하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54a (p. 119)






2.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국가』 2권에서 올바름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이론적으로(in theory; 말로) 세워 보는 국가


“어쩌면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아내기도 더 쉬울 걸세. 자네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도록 하세나.” 368e-369a (p. 146)

“만약에 우리가 이론상으로 수립되고 있는 한 나라를 관찰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나라의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 역시 생겨나고 있는 걸 보게 되겠지?” 369a (p. 146)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라가 생기는 것은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일세.” 369b (p. 146)

“나라를 수립시키는 것은 우리의 ‘필요’가 하는 일인 것 같으이.” 369c (p. 147)

“여러 가지 필요 중에서도 첫째이며 가장 중대한 것은 생존을 위한 음식물의 마련일세.”  369d (p. 147)

“그리고 둘째 것은 주거의 마련일 것이며, 셋째 것은 의복 및 그와 같은 유의 것들의 마련일세.” 369d (p. 147)


공동선(common good)을 지향하는 국가

소크라테스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의 일(ergon)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koinon)으로 제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369e(pp. 147-148). 그래서 “각 부류의 사람들이 생산하게 되는 물건들을 이 나라 자체 안에서는 서로들 어떻게 나누게 되겠는가?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협력(공동) 관계’(koinonia)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었지.”라고 말한다. 371b (p. 151. 즉,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나라는 협력 공동체이다. 노동분업에 의해 각장의 필요를 서로서로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함에 있어서 유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어느 한 집단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행복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 내서 이들을 이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이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를 행복하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네.” 420b-c (p. 258)


“나라 전체를 염두에 두고서, 나라에 그런 행복이 생기도록 지켜보는 한편, 이들 보조자와 수호자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일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일꾼들로 되게끔 만들고 설득해야 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강대해지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히게 되었을 때에야, 각각의 집단으로 하여금 제 각각의 성향이 제공하는 대로 행복에 관여하도록 허용해야만 하는 것일지를 우리는 검토해야만 하네.” 421b-c (p. 260)






3.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국가의 세 계급


“각각의 것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kata physin) 적기에 하되,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에 있어서이네.” 370c (p. 149)


수호자

“수호자들의 일(기능: ergon)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만큼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를 요구하는 반면에,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도한 요하는 것일세.” 374d-e (p. 159)

“장차 우리 나라의 ‘훌륭하고도 훌륭한’ 수호자로 될 사람은 의당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 격정적이고 날래며 굳셀 걸세.” 376c (pp. 163-164)

수호자들에게 시가와 체육 등을 교육한 다음에 할 일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야 바로 이들(수호자들) 중에서 누가 ‘다스리고’, 또 누가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하는게 아니겠는가?” 412b (p. 243) 그래서 “통치자들은 수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어야만 되니까, 이들은 나라를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412c (p. 243)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자신을 단정하고 조화로운 사람으로 드러내 보인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가장 유용한 사람일 걸세.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나 청연들 사이에서 그리고 어른들 사이에서 언제나 그런 시험을 거쳐 더럽혀지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을 우리는 나라의 통치자 및 수호자로 임명해야 하네.” 413e-414a (p. 246)

“그러니까 이들이야말로 외부의 적들에 대하여서도 그리고 내부의 동료들에 대하여서도 참으로 ‘완벽한 수호자들’이라 불러 지당할 것인즉, 이들은 내부의 동료들이 나라를 해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한편으로, 외부의 l적들이 그럴 수도 없도록 하겠지? 하지만, 이제껏 우리가 수호자들이라 불러 왔던 그 젊은이들은 통치자들의 신념을 위한 보조자들 및 협력자들이라 불러 마땅할 테고?” 414b (p. 247)

이 대목에서 보듯이 수호자에서 통치자와 보조자가 나타난다.

(신이 통치자는 황금, 보조자는 은, 생산자(농부와 장인들)에게는 청동을 섞어서 태어나게 했다는 설화. 415a-c (pp. 249-250).


따라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세운 국가는 통치자로서의 수호자, 보조자로서의 수호자, 생산자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보조자인 수호자들이 시민들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를 제안한다.

“첫째로, 아무도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어떤 사유 자산도 가져서는 아니 되네. 그 다음으로는, 누구든 원하는 자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그런 집이나 곳간은 이들 중의 누구에게도 있어서는 아니 되네. 그리고 생활 필수품은, 절제할 줄 알고 용감한 전사들이 필요한 정도만큼의 것을 다른 시민들한테서 이들의 수호에 대한 보수로서 일정하게 정하여 받되, 이는 이들의 연간 소요량을 초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의 것이어야만 하네. 또한 이들은 공동 식사를 하면서, 마치 야영하는 군인들처럼, 공동으로 생활해야만 하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들에게 일러 주어야 할 것이니, 이들은 자신의 혼 안에 신들이 준 신성한 금은을 언제나 지니고 있어서, 이에 더하여 속인의 금은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도한 신에게서 받은 그 소유물을 사멸하는 인간의 소유물과 섞음으로써 더럽히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짓인데, 이는 다중의 화폐와 관련해서는 하고많은 불경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들의 것은 오염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일세.”416d-417a (p. 252)






4. 플라톤의 4주덕, 특히 올바름에 대하여


“물론 이 나라가 지혜롭고 용기 있으며 절제(절도) 있고 또한 올바를 것이라는 건 아주 분명하이.” 427e (p. 274)


1. 지혜(sophia):

“우리가 자세히 말한 이 나라는 정말로 지혜로운 나라일 것으로 내게는 생각되네. 그건 이 나라가 분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428b (p. 274)

“그렇지만 바로 이것, 즉 분별은 일종의 앎(episteme)인 것이 분명하이. 사람들이 분별 있게 되는 것은 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게 확실하겠기 때문일세.” 428b (p. 274)

“이제 막 우리에 의해서 수립된 이 나라에 사는 시민들 중의 어떤 사람들에겐 이런 어떤 지식이 있는가? 즉 이 나라의 부분적인 것들 중의 어떤 것에 관련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전체와 관련해서 어떤 방식으로 이 나라가 대내적으로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가장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를 숙의 결정해 주게 될 그런 지식 말일세.” 428c-d (p. 275) (이것이 수호술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지혜로운 것은 수호자들이 수호술이라는 지혜를 갖고 때문이라 본다.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그 작은 부분, 즉 각자 안에서 지배를 하며 이것들을 지시한 그런 부분에 의해서이니, 이 부분은 그 나름으로 이들 세 부분의 각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들 셋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유익한 것에 대한 지식을 그 자신 속에 지니고 있네.” (개인의 혼의 지혜와 관련하여)


2. 용기(andreia)

“내 말은 용기란 일종의 보전이란 뜻일세.” 429c (p. 277)

“법에 의한 교육을 통해, 두려워할 것들이 무엇무엇이며 또 어떠한 것들인지, 이와 관련해서 생기게 된 소신(판단)의 보전일세.” 429c (p. 277)

“두려워할 것들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관한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판단)’의 지속적인 보전과 그런 능력을 나로서는 용기라 부르며 도한 그렇게 간주하네.” 430b (pp. 278-279)

“나라를 위해 전쟁을 하고 군인으로 복무하는 이 부류 이외의 다른 어떤 걸 보고서 그 나라를 비겁한 나라니 또는 용기 있는 나라니 하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429b (pp. 276-277)

즉, 소크라테스는 한 국가가 용기 있는 것은 수호자들이 용기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절제

“절제란 어쩌면 일종의 질서요, 어떤 쾌락과 욕망의 억제일 걸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이긴다’(자기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표현을 써서 ... 말하듯이 말일세. 430e. (pp. 280-281)

“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한결 나은 것과 한결 못한 것이 있어서, 성향상 한결 나은 부분(면)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할 경우, 이를 가리켜 ‘자기 자신을 이긴다’고 말하는데, 이는 어쨌거나 칭찬하는 것일세.” 431a (p. 281)

“단순하며 절도 있는 욕구는, 지성(nous)과 바른 판단을 아울러 갖춘 헤아림(추론)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어서, 소수의 사람에게서, 성향에 있어서도 가장 훌륭하지만 교육도 가장 훌륭하게 받은 사람들에게서 만나 보게 될 걸세.” 431c (p. 282)

“이곳에서는 다수의 미천한 사람들의 욕구가 소수의 한결 더 공정한 사람들의 욕구와 슬기에 의해 제압되고 있”다. 431c-d (p. 282) 그래서 욕구가 제압되는 것을 절제라 주장한다.

“그건 용기나 지혜는 그 각각이 그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만 있어도, 뒤엣것은 그 나라를 곧 지혜로운 나라로, 반면에 앞엣것은 그걸 용기 있는 나라고 되게 하지만, 절제는 그러질 못하기 때문일세. 절제는 정말로 나라 전역에 걸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협화음처럼, 가장 약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가장 강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 그리고 중간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같은 노래를 합창함으로써 전음정을 통하여 마련되는 것일 세. ... 이 ‘한마음 한뜻’이, 즉 나라에 있어서나 한 개인에 있어서 성향상 한결 나은 쪽과 한결 못한 쪽 사이에 어느 쪽이 지배를 해야만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절제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옳을 걸세.” 431e-432b (pp. 283-284)

절제는 시민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피지배자는 복종을, 지배자는 지배를 하는 것이다.


4. 올바름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하기 시작할 당초부터 언제나 준수해야만 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게, 또는 그것의 일종이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일세. ... 각자는 자기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에서 자기의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에 종사해야 된다는 것이었네.” 433a (p. 285)

“또한 더 나아가서는 ‘제 일을 하고 참견하지 않는 것’이 올바름(올바른 상태)이”다. 433a (p. 285)

“이것이, 즉 ‘제 일을 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게 ‘올바른 상태’(올바름)인 것 같으이.” 433b. (p. 286)

“‘제 것의 소유’와 ‘제 일을 함’이 올바름(올바른 상태)이라는 데 합의를 보았네그려.” 433e-434a (p. 288)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국가에서의 올바름을 개인에게서의 올바름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한다.

“‘올바름’의 개념(형상) 자체의 관점에서는 올바른 사람은 올바른 나라와 아무런 차이도 없고, 닮은 것일 걸세.”  435b (p. 290)

“실은 한 나라가 올바른 나라인 것으로 생각된 것은 이 나라 안에 있는 성향(physis)이 다른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했을 때이며, 그리고 또한 이 나라가 절제 있고 용기 있으며, 또한 지혜로운 나라인 것도 바로 이들 세 부류가 처한 상이한 처지(감정 상태: pathos)와 상이한 습성(성격 상태: hexis)으로 인하여서였네.” 435b (pp. 290-291)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종류들을 자신의 혼 안에 지니고 있어서, 나라에 있어서의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로 인해서 나라의 경우와 똑같은 이름들로 불릴 자격이 당연히 있다고 우리는 판단할 걸세.” 435b-c (p. 291)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혼이 헤아리게(추론하게)되는 부분을 혼의 헤아리는(추론적, 이성적) 부분이라 부르는 반면, 그것으로써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 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헤아릴 줄 모르는)이며 욕구적인 부분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는 않을 걸세.” 439d (p. 300)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격정(기개: thymos)이 욕구도 아니고 이성적인 부분도 아니라는 논의를 펼친다. 439e-440c (pp. 300-303)

“나라 안에 있는 것들과 똑같은 부류의 것들이 개개인의 혼 안에도 있고, 그 수도 똑같다는 데 대해서 우리가 훌륭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네.” 441c (p. 303).

즉, 나라에 통치자, 보조자, 생산자가 있듯이 이에 대응하여, 인간의 영혼에도 이성적인 부분, 격정(기개), 욕구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복합성을 본 사람이다.


“사람이 올바르게 되는 것도 나라가 올바르게 된 것과 똑같은 방식에 의해서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걸로 나는 생각하네.” 441d (p. 304)

“실상 이 나라가 올발랐던 것이 그 안에 있는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함’에 의해서였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잊지 않고 있을 게 확실하이.” 441d (p. 304)

“우리 각자의 경우에도, 자신 안에 있는 부분들의 각각이 제 일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올바른 사람으로, 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도리 것이라는 점일세.” 441d-e (p. 304)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들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443d (p. 308)

“이와는 달리 ‘올바르지 못함’은 이들 세 부분간의 일종의 내분이며, 참견과 간섭, 그리고 혼 전체에 대한 어떤 일부의 모반임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444b (p. 309)






5. 플라톤의 이상 국가: 최선자 정체 - 철인왕(philosopher-king)이 통치하는 국가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도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과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다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껏 우리가 논의를 통해서 자세히 말해 온 그 정체가 결코 가능한 한도까지 성장하여 햇빛을 보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473c-e (p. 365)

“우리는 철학자도 지혜(sophia)를 욕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지혜는 욕구하되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자라고 주장하지 않겠는가?” 475b (p. 369)

“[참된 철학자들이란] 진리(alegheia)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하네.” 475e (p. 370)

“있는 것(실재: to on)에는 인식(앎: genosis)이, ‘있지 않은 것’(비실재)에는 필연적으로 무지가 상관할진대, 그것들 ‘사이의 것’에 상관하는 것으로는 무지와 인식(앎: episteme) ‘사이의 어떤 것’을 찾아야만 되지 않겠는가?” 477a-b (p. 374)

“그런데 우리가 의견(판단: doxa)이라고 말하는 게 있겠지?” 477b (p. 374)

“인식은 ‘있는 것’(실재)에 관계하며,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겠지?” 478a(p. 376)

“반면에 ‘판단’(의견)은 ‘의견을 갖게 됨’이겠지? 478a (p. 376)

“각각의 그 자체의 것들을, 따라서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들’을 보는 사람들의 겨우는 어떤가? 그러니까 이들은 인식을 하지, ‘의견을 갖는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479e (p. 381)

“‘각각의 실재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들)로 불러야지 의견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불러서는 아니 되겠지?” 480a (p. 382)

“‘좋음의 이데아’가 ‘가장 중요한(최고의) 배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 이데아 덕분에 올바른 것들도 그 밖의 다른 것들도 유용하고 유익한 것들로 된다는 것을 자네는 여러 차례 들었을 테니까 말일세.” 505a (p. 428)


태양에의 비유(507e-509b)(pp. 435-439)

“그러니까 ‘보는’(‘봄’의) 감각과 ‘보이는’(‘보임’의) 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종류의 것에 의해, 즉 서로를 연결해 주는 다른 어떤 멍에들보다도 더 귀한 멍에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네. 빛이 정녕 귀하지 않은 게 아니라면 말일세.”

“그러니까 원래 시각은 이 신(태양)에 대하여 이런 관계에 있겠지?”

“시각 자체도, 그리고 시각이 그 속에 있게 되는 것, 즉 우리가 눈이라 일컫는 바로 그것도 태양은 아닐세.”

“그러나 눈은 감각과 관련되는 기관들 중에서는 어쨌든 태양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일세.”

“그런데 눈은 자기가 갖는 이 힘 또한 태양에서, 마치 넘쳐 흐르는 것을 받듯, 분배받아 갖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태양도 시각이 아니고, 이(시각)의 원인이 되는 것이어서, 시각 자체에 의해 보이게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태양을 ‘좋음’의 소산(소생)으로, 즉 ‘좋음’이 이것을 자기와 ‘유비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생기게 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나. 다시 말해, ‘좋음’이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지성에나 알려질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지성(정신: nous)과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에 대해서 갖는 바로 그런 관계를 태양은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 ‘시각’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갖는다고 말일세.”

“혼의 경우도 이렇게 생각해 보게. 진리(aletheia)와 실재가 비추는 곳, 이곳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이를 지성에 의해 대뜸 알게 되고 인식하게 되어,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h보이네. 그러나 어둠과 섞인 것에, 즉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의견’(판단: doxa)을 갖게 되고, 이 의견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가짐으로써 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이번에는 지성을 지니지 못한 이처럼 보인다네.”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dynamis)을 주는 것은 ‘좋음의 이데아’라고 선언하게. 이 이데아는 인식(episteme)과 진리의 원인(aitia)이지만, ‘인식되는 것’이라 생각하게나. 반면에 이 둘이, 즉 인식(앎: gnois)과 진리가 마찬가지로 훌륭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이 이데아는 이것들과도 다르며 이것들보다 한결 더 훌륭한 것이라 믿는다면, 자넨 옳게 믿게 되는 걸세. 그러나 인식과 진리를, 마치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의 빛과 시각을 태양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만, 태양으로 믿는 것은 옳지 않듯,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이들 둘을 ‘좋음’을 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으나, 어느 쪽 것도 [바로] ‘좋음’이라 믿는 것은 옳지 않다네. 오히려 ‘좋음’의 처지(상태: hexis)를 한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네.”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의 ‘인식됨’이 가능하게 되는 것도 ‘좋음’으로 인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ousia)을 갖게 되는 것도 그것에 의해서요, ‘좋음’은 [단순한] ‘존재’(ousia)가 아니라, 지위와 힘에 있어서 ‘존재’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나.



  7권은 동굴의 비유로 시작한다. 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것을 설명하는데, 사실 이것은 계몽(enlightenment)과 다름없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것이 계몽인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계몽된 자로서의 철학자가 계몽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다른 죄수들(사람들)로 하여금 좋음의 이데아를 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계몽이 아니라 인간 전체로서의 계몽을 말한 것과 유사하게 읽힌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통치자가 되어야 할 철학자가 좋음의 이데아를 관조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에 머무르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한다.

“나라의 수립자들인 우리의 할 일은 가장 훌륭한 성향(자질)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앞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최고의) 것이라고 말한 배움에 이르도록, 그래서 ‘좋음’을 보게끔 그 오르막을 오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되, 이들이 일단 이 길을 올라, 그것을 충분히 보게 되면, 이제 이들이 허용받고 있는 걸 이들에게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일세.” 519c-d (p. 458)

“바로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할 분, 저들 죄수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서 저들과 함께 노고와 명예를, 이게 다소 하찮은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간에,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일세.” 519d (p. 458)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며, 이들로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로 하여금 더 못한 삶을 살도록 만들게 될 텐데요?” 그가 말했네. 519d (p. 458)

“여보게 자넨 또 잊었네. 법(nomos)은 이런 것에, 즉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각별하게 잘 지내도록(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걸 말일세.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에 의해서 화합하게 하고 각자가 공동체에 이롭도록 해 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그런다네. 또한 법은 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생기도록 하는데, 이는 각자가 내키는 대로 향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나라의 단합을 위해 이 사람들을 십분 이용하기 위해서일세.” 519e-520a (p. 458)

“글라우콘, 더 나아가 이 점에 유의하게나. 즉 우리의 이 나라에서 철학자들로 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지켜주도록 우리가 강요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들에게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올바른 걸 이들한테 말해 주게 된다는 걸 말일세. 우리는 이렇게 말할 걸세. ‘...하지만 우리느니 여러분 자신들과 함께 여느 시민들을 위해, 마치 벌떼 사이에 있어서 지도자들 및 왕들처럼 여러분을 탄생시켜서는, 여느 시민들보다도 더 훌륭하고 완벽하게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또한 양쪽 생활 다에 더 잘 관여할 수 있도록 했소.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느 시민들과의 동거를 위해 각자가 번갈아 내려가서는,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오.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그곳 사람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보게도 될 것이며, 각각의 상들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들의 상들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여러분이 아름다운 것들과 올바른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 진실된 것을 이미 본 탓이오. 또한 이렇게 해서 우리와 여러분의 이 나라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경영될 것이니, 결코 꿈 속에서 경영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 520a-c (pp. 458-460)



정체(Politeia)의 종류와 변혁: 정체의 변화의 원인은 관직 장악 집단의 내분

  8권 이하에서는 정체의 유형에 대해서 논의한다. 그래서 ‘최선자 정체 > 명예 지상 정체 > 과두 정체 > 민주 정체 > 참주 정체’의 도식을 설명한다. 이 각 정체에 대응하는 혼의 상태도 함께 다루는데, 결국 어떤 상태의 혼이 지배적이냐에 따라 각 정체 유형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위의 도식은 좋음의 상태에 따른 도식이면서도 정체가 나쁜 상태로 변화해 가는 순서를 나타낸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한 마디로 내분이라 할 수 있다.


① 최선자 정체: 철인왕이 통치하는 정체, 아내 공유, 아이들에 대한 공동 육아와 교육

② 명예지상정체: 승리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 잘못된 동숙으로 인해 철과 동의 성분이 든 사람들 등장하여 재화의 사유화와 노예제 수립. 이 정체의 통치자는 평화보다는 전쟁 취향인 사람들이며 재물에 대해 욕심을 낸다. 기개(격정)의 덕이 우세하여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정체이다.

③ 과두정체(oligarchia): 평가 재산에 근거한 정체. 부자들이 통치하고 가난한 사람은 통치에 관여하지 못한다. 명예지상정체는 재화의 사유화로 인해 부를 찬양하게 됨으로써 과두정체로 변화한다.

④ 민주정체(demokratia): 가난한 사람들이 내란을 일으켜 승리하게 되면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시민권과 관직을 배정하고, 관직은 추첨에 의해 할당된다. 자유 시민인 까닭에 이들은'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자유가 개개인과 각 가정에까지 스며들어 무정부상태가 된다.

⑤ 참주정체(tyrannis): 부의 분배를 미끼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선동하여 참주가 된 자는 적을 숙청한다.





Immanuel Kant, 『윤리 형이상학 정초(Grundlegun zur Metaphysik der Sitten)』, 백종현 역, 아카넷, 2005.




머리말




(1) 이성인식의 구별

① 질료적 이성인식: 어느 객관의 고찰. 특정한 대상들과 그 대상들이 종속되는 법칙들을 다루는 질료적 철학

ⓐ 물리학 - 자연의 법칙을 다룸, 자연이론. 경험 대상인 자연에 법칙들 규정함.

ⓑ 윤리학 - 자유의 법칙을 다룸, 윤리학. 자연에 의해 촉발되는 의지에 법칙들 규정함.

② 형식적 이성인식: 객관들의 구별 없이, 순전히 지성과 이성 자신의 형식 및 사고 일반의 보편적 규칙들 다룸

ⓒ 논리학: 형식적 철학. 사고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은 경험에서 취한 근거들에 의존할 수 없으므로 어떤 경험적 부분도 가질 수 없다.


(2) 순수 철학: 이론들을 오로지 선험적 원리들로부터 개진하는 철학, 경험적 부분 배제

① 논리학: 순전히 형식적인 것

② 형이상학: 지성의 특정한 대상들에 제한된 순수 철학

ⓐ 자연 형이상학: (경험적인) 물리학에 앞에 있음

ⓑ 윤리 형이상학: 실천적 인간학 앞에 있음


(3) 선험 법칙으로서의 도덕 법칙(『윤리형이상학 정초』, pp. 68-69)

① 단지 경험적인 인간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서 독립적인 순수 도덕철학의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의무와 윤리적 법칙들의 통상적인 이념으로부터 그러한 도덕철학이 있어야 함이 저절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② 만약 법칙이 도덕적으로, 즉, 책무의 근거로서 타당해야 한다면, 그 법칙은 절대적 필연성을 동반해야만 한다. (예: ‘너는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책무의 근거는 인간의 자연본성이나 세계 내의 정황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오로지 순수 이성의 개념들 안에서만 선험적으로 찾아야 한다.

③ 한낱 경험의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는 훈계는 경험적 근거들에 의지하고 있는 한, 실천적 규칙일 수는 없지만 도덕 법칙일 수는 없다.

④ 도덕 법칙은 경험적인 것을 품고 있는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며, 모든 도덕철학은 전적으로 순수한 부분에 의거하고,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선험적 법칙들을 수립해 준다.


(4)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윤리형이상학 정초』, pp. 69-72)

① 선험적으로 우리 이성 안에 놓여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원천들을 탐구하기 위해, 그리고 윤리들 자체를 올바르게 반정할 실마리와 최상의 규범이 필요하기 때문에, 윤리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②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윤리 법칙에 알맞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윤리 법칙을 위하여(때문에) 일어난 것이어야 한다.

③ 윤리 법칙에 알맞은 것은 단지 우연적일 수 있는데, 비윤리적 근거는 때때로 합법칙적인  행위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④ 윤리 법칙은 순수성과 진정성에 있어 순수 철학이 아닌 곳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순수 철학(형이상학)이 선행해야만 한다.

⑤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의 의욕 일반의 작용들과 조건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5) 『윤리 형이상학 정초』 저술에 대한 변(『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2-74)

① 형이상학을 위해 순수 사변 이성 비판 저술, 윤리 형이상학의 기초로는 순수 실천 이성 비판. 그러나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전자만큼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이성은 도덕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가장 평범한 지성에서조차도 쉽게 매우 정확하고 세밀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동일한 단 하나의 이성만이 있을 수 있고, 순전히 그 적용에서만 구별된다. 따라서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과의 통일은 어떤 공동의 원리에서 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완벽함을 성취할 수 없기에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라는 명칭 대신 ‘윤리 형이상학 정초’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③ 윤리 형이상학은 토대적인 예비 작업으로 대중적이고 또한 평범한 지성에도 걸맞을 수 있다.


(6) 정초의 목적과 집필 방식(『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4-76)

①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는 도덕성의 최상 원리의 탐색과 확립이다.

② 저술 방식:  만약 사람들이 보통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인식의 최상 원리를 규정하는 데에 이르는 분석적인 길을 취하고, 다시금 거꾸로 이 원리의 검토 및 이 원리의 원천들에서 출발하여, 그 원리가 사용되고 있는 보통의 인식에 이르는 종합적인 길을 취한다.



제 1 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 이행




(1) 선의지(『윤리형이상학 정초』, pp. 77-80)

① 선의지: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

② 선의지가 없으면 지성, 기지, 판단력, 그밖의 정신의 재능들, 용기, 결단성, 초지일관성 같은 기질상의 성질들은 극도로 악하고 해가 될 수 있다.

③ 권력, 부, 명예, 건강, 행복도 마음 및 마음의 전체 원리에 미치는 영향을 올바르게 하고, 보편적이며 합목적적으로 만들어 주는 선의지가 없으면 악해진다.

④ 선의지는 행복을 누릴 품격[자격] 있음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을 이룬다.

⑤ 여러 성질들은 내적인 무조건적인 가치는 갖지 못하는 것으로 선의지를 전제한다.

선의지는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결과는 성취 또는 목적에 대한 유용성으로 선한 것이 아니다.

⑦ 선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킬 능력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이 의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해 오직 선의지만 남더라도, 선의지는 그 자신 안에 온전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으로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2) 본능: 행복이 목적이 아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0-82)

① 이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자에게 보존과 번영, 즉 행복이 자연의 본래 목적이라면, 본능에 의해 규칙이 정확하게 지시될 수 있을 것이고, 행복이라는 목적도 더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② 행복이 목적이라면, 자연은 이성이 실천적 사용에서 이성 스스로 행복과 그 수단을 구상해 내는 오만불손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방지했을 것이다. 즉, 자연은 목적과 수단의 선택을 본능에 믿고 맡겼을 것이다.

③ 이성이 행복에 집착할수록 인간은 참된 만족에서 멀어진다. 게다가 사람들은 행동거지에 대한 이성의 영향을 허락하지 않는 세속적인 부류의 인간을 오히려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④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은 본래 행복이 아니라 훨씬 더 품격 있는 실존의 의도에 맞춰져 있고, 인간의 사적 의도는 최상의 조건인 이 의도 뒤에 있어야 한다.


(3) 이성: 인간 실존의 의도에 대한 이념이 존재한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2-84)

이성은 의지에 영향을 미쳐야 할 실천 능력으로서 품수[선천적으로 타고남]되어 있고,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다른 의도를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를 낳는 것이어야 한다.

② 그러므로 이 의지는 유일한 선, 전체 선일 수는 없으나 최고선이어야만 하고, 행복을 포함하여 여타의 모든 선을 위한 조건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성의 개발은 행복의 달성을 갖가지 방식으로 제한한다.

③ 이성은 선의지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최고의 실천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성만이 규정하는 목적을 실현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다.


(4) 의무에 대한 명제 세 가지

더 이상의 의도가 없는 선의지라는 개념은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는 없으며 단지 계발될 필요만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 개념은 행위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언제나 상위에 있어 여타 모든 가치의 조건을 이룬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 84)


제 1 명제: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4-89)

ⓐ 의무에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된 모든 행위는 배제한다.

ⓑ 의무에 맞기는 하지만 의무에 대한 경향성 없이 다른 경향성으로 인해 한 행위들도 배제한다.

ⓒ 의무에 맞으며 주관이 그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는 행위도 배제(예: 가게 주인이 어리숙한 고객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것. 이익이 그런 정직을 요구했을 수도 있으므로)

ⓓ 예

ⅰ) 생명 보전은 의무이며 누구나 생명 보존에 대한 직접적인 경향성을 가진다. 그러나 생명 보전이 의무에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도덕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ⅱ) 선행(동정심)은 의무이고 매우 사랑받을 만한 일이지만, 이것은 명예에 대한 경향성 같은 것이어서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존중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ⅲ)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의무이다. 경향성이 아니라 의무에서 자신의 행복을 촉진할 때에야 그 태도에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ⅳ) 사랑도 의무이다. 그러나 의무로부터 하는 선행은 실천적 사랑이지 정념적 사랑이 아니다. 경향성은 지시명령할 수 없는 반면, 실천적 사랑만이 지시명령될 수 있다.

제 2 명제: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의욕의 원리에 의존한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89-90)

ⓐ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그 도덕적 가치를 행위 대상의 현실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욕구능력의 모든 대상과는 무관하게 행위를 일어나게 한 의욕의 원리에 의존한다.

ⓑ 만약 행위가 의무로부터 말미암아 일어난다면, 의지에서 모든 질료적 원리는 제거된 것이므로, 의지는 의욕 일반의 형식적 원리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제 3 명제: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다.(『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1-92)

ⓐ 결과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경향성에 대해서는 존경을 가질 수 없다. 경향성을 시인하고 좋아할 수 있을 뿐이다.

ⓑ 결과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근거로서 나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이, 경향성을 압도하는 것, 선택에서 경향성을 배제하는 것, 즉, 순전한 법칙 그 자체만이 존경의 대상일 수 있고, 그와 함께 명령일 수 있다.

ⓒ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경향성의 영향과 의지의 일체 대상을 전적으로 격리해야 한다.

ⓓ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법칙, 주관적으로는 이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이다. 따라서 나의 모든 경향성을 단절하고, 그러한 법칙을 준수한다는 준칙만이 남는다.

(참고 1: 준칙은 의욕의 주관적 원리이고, 객관적 원리는 실천 법칙이다.)

(참고 2: 법칙에 의한 의지의 직접적 규정 및 그 규정에 대한 의식이 존경이다.)


(5) 법칙(『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2-97)

법칙의 표상이 의지의 동인이며 윤리적이다: 최고의 무조건적인 선은 오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서만 마주칠 수 있다. 의지의 동인이 예상되는 결과가 아니라 법칙의 표상인 한에서, 이성적 존재자에게서만 생기는 이 법칙의 표상 자체만이 윤리적이라 불릴 수 있는 탁월한 선을 이룰 수 있다. 이 탁월한 선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하는 인격 자체 안에 이미 현전한다.

② 의지를 단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의지를 규정해야 한다. 의지에서 모든 충동을 제거했으므로, 남는 것은 행위 일반의 보편적 합법칙성뿐이고, 이것이 의지의 원리로 쓰여야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합법칙 일반이 의지의 원리이다: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어야만 할 것을 내가 의욕할 수 있도록 오로지 그렇게만 처신해야 한다.

ⓐ 거짓 약속의 예: 내가 궁지에 빠졌을 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의도에서 어떤 약속을 해서는 안 되는가?

i) 영리한 거짓 약속[영리의 준칙]: 거짓말로 이 곤경을 벗어나더라도 거짓말로 인한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신용의 훼손으로 인해 나중에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음을 숙고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점을 숙고하더라도 이것은 의무로부터가 아니라 걱정스런 결과에 대한 숙고일 뿐이다.

ii) 의무의 원리: 내가 만약 의무의 원리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악하다. 거짓 약속이 의무에 맞는지 알기 위해 보편화 테스트를 한다. 나의 준칙[곤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리함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에 정말로 만족할 것인가? 이에 대해, 비록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의욕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법칙에 따르게 되면 약속이라는 것이 아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거짓말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거짓말은 허사이고, 설사 그들이 믿는다 해도 그들은 나에게 똑같은 화폐[거짓말]로 되갚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리함의 준칙은 법칙이 되자마자 자기파괴적이다.

④ 보편화 테스트: 나의 의욕이 윤리적으로 선하기 위해 내가 행해야만 할 것을 판별하는 방법

ⓐ 보편화 테스트: ‘너 또한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그 준칙은 버려야 한다.

ⓑ 보편적 법칙 수립에 대한 존경: 이성은 나에게 이런 보편적 법칙 수립을 존경하도록 강요한다.

ⓒ 존경과 의무: 존경은 경향성에 의해 칭찬받는 것의 모든 가치를 훨씬 능가하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다. 그리고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나의 행위들의 필연성이 의무를 형성한다. 의무는 그 가치가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 자체로 선한 의지의 조건이므로, 여타의 모든 동인은 이 의무에게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6) 평범한 인간이성의 도덕 인식에서 도덕의 원리에 도달(『윤리형이상학 정초』, pp. 97-101)

① 평범한 이성은 도덕 원리를 가치판단의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성에게 자신의 원리에 주목하도록 하기만 하면 선악과 의무의 구별을 쉽게 할 수 있다.

② 평범한 인간지성에서 그 실천적 가치판단능력이 이론적 가치판단능력보다 월등히 앞선다. 평범한 이성이 경험법칙들과 감관의 지각들에서 이탈한다면, 이성은 순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실천적인 것에 있어서 가치판단력은, 평범한 지성이 실천 법칙들로부터 모든 감성적인 동기들을 배제할 때, 그 자체가 제대로 장점을 드러낸다. 즉, 평범한 지성은 사태에 잘 적중할 것이다.

③ 자연적 변증학: 의무의 엄격한 법칙들에 반대하여 궤변을 늘어놓고, 그 법칙들의 타당성을 우리의 소망이나 경향성들에 더 맞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짓은 평범한 실천 이성조차도 인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인간 이성은 자신의 권역에서 벗어 나와 실천 철학의 분야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따라서 실천적인 평범한 이성도 이론 이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대한 완벽한 비판을 필요로 한다.



제 2 절 대중적 윤리 세계지혜에서 윤리 형이상학으로 이행



(1) 의무 개념을 경험적 실례에서 도출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

① 실천 이성의 평범한 사용에서 의무 개념을 도출한 것은 우리가 의무 개념을 경험개념으로 취급한 것은 아니다. 경험에 주목한다면 순수한 의무로부터 행위하는 마음씨에 관한 확실한 실례를 들 수 없다.

② 의무에 맞는 행위의 준칙이 오로지 도덕적 근거들과 의무의 표상에만 의거한 경우는 단 하나라도 경험을 통해서 결정하기는 단적으로 불가능하다.

③ 인간애 때문에 우리 행위들이 대부분 의무에 맞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위들의 의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자기이지, 번번이 자기부정을 요구할, 의무의 엄격한 지시명령이 아니다. 의무에 대한 우리의 이념들의 함몰을 막아주고, 의무의 법칙에 대한 공고한 존경을 영혼 중에 보존하는 것은 오로지 이성이 현상과 독립적으로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지시명령한다는 명확한 확신뿐이다.

④ 윤리성의 개념에서 진리성 또는 어떤 가능한 객관과의 관계를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윤리성의 법칙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 일반에게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어떠한 경험도 명증적 법칙들의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지 못한다.

⑤ 모든 실례는 근원적인 실례가 될 만한 것인지 도덕성의 원리에 따라 평가되어야만 한다. 즉, 어떤 실례도 도덕성의 개념을 맨 위에서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윤리적인 것에서 모방이란 없으며, 실레들은 단지 격려하는 데 쓰일 뿐이다.


(2) 대중적 실천 철학이 아닌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

① 윤리 이론을 형이상학 위에 세우고, 그 뒤에 대중성을 통해 유포시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첫 단계의 연구에서부터 대중성을 좇는 것은 불합리하다.

② 윤리 형이상학의 필요성: 윤리성의 원리들은 온전히 선험적으로, 일체의 경험적인 것에서 자유롭게, 단적으로 순수한 이성개념들 중에서만 만날 수 있다면, 이 연구를 순수한 실천적 세계지혜[철학] 또는 윤리 형이상학으로 따로 떼어내어 완벽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③ 윤리 형이상학은 의무들에 대한 훈계들을 실제로 수행하기 위해 최고로 중요한 숙원 사항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의무 표상과 윤리 법칙의 표상은 오직 이성의 길을 통해서만 경험적인 다른 동기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④ 모든 윤리적 개념들은 선험적 이성 안에 자신들의 자리와 근원을 가지며, 이것들은 어떤 경험적인 우연적 인식으로부터 추상될 수 없다. 바로 윤리적 개념들의 근원의 순수성에 최상의 실천 원리들로 쓰이기 위한 존엄성이 놓여 있다.

⑤ 순수한 실천 이성의 전체 능력을 규정하는 일은, 이론적인 의도에서 순전이 사변이 문제될 때에, 최대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최대로 중요하다. 즉, 도덕 법칙들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 타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도덕 법칙들을 이성 존재자 일반의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하고,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인간학을 필요로 하는 모든 도덕을 인간학과는 독립적으로 순수한 철학으로서, 즉, 형이상학으로서 완벽하게 진술해야 한다.

⑥ 우리는 실천적인 이성 능력을, 이 이성 능력을 규정하는 규칙들로부터, 의무 개념이 생겨나는 곳에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명료하게 서술해야만 한다.


(3) 의지와 명령

① 의지(『윤리형이상학 정초』, p. 115)

ⓐ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즉, 원리들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또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법칙들로부터 행위들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이성이 요구되므로, 의지가 실천 이성이다.

ⓒ 의지: 의지는 이성이 경향성에 독립해서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즉,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② 명령(『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16-118)

ⓐ 강요: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들이 주관적으로는 우연적이고, 그러한 의지를 객관적인 법칙들에 맞게 결정하는 것은 강요이다. (의지가 주관적인 조건들인 동기들에도 종속되는 경우)

ⓑ 객관적인 원리의 표상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서 (이성의) 지시명령(Gebot)이라 부르며, 이 지시명령의 정식을 명령(Imperativ)이라 부른다.

ⓒ 모든 명령은 당위[‘해야 한다’]로 표현되며, 그에 의해, 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주관적 성질상 필연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의지에 대한 관계(강요)를 고지한다.

ⓓ 명령들이 주어지는 상대는 제시된 선을 언제나 행하는 것은 아닌 의지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선한 것은 이성의 표상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타당한, 즉,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 자체로서 타당한 근거들에서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쾌적과는 다르다)

(칸트의 주석

경향성: 욕구능력의 감각에 대한 의존성. 따라서 경향성은 항상 필요를 실증한다.

[이해]관심: 우연히 결정될 수 있는 의지의 이성 원리에 대한 의존성.)

ⓔ 완전한 선의지는 객관적인 법칙들 아래에 있지만, 그것이 법칙에 맞는 행위를 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선의지는 그것의 주관적인 성질상 스스로 오로지 선의 표상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적 의지에 대해서는 어떤 명령도 타당하지 않다.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욕이 이미 법칙과 필연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4) 명령의 구분(『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18-124)

① 가언 명령: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 행위가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즉 수단으로서 선한다면, 가언적 명령. 행위가 가능한 또는 현실적인 의도를 위해 좋다[선하다]는 것을 말한다. 가능한 의도의 경우 명령은 미정적-실천 원리, 현실적 의도의 명령은 확정적-실천 원리이다.

ⓐ 미정적-실천 원리: 행위가 가능한 의도를 위해 좋은 경우의 명령. 이성적 존재자임과는 무관하게, 그래서 목적의 합리성과 선함과는 무관하게, 임의적인 목적들을 위한 수단들의 사용에서 숙련에 마음을 쓰게 하는 명령. 숙련의 규칙들. 기술적 명령

ⓑ 행위가 현실적인 의도를 위해 좋은 경우의 명령.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서 현실적인 것으로 전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 필연성에 따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전제할 수 있는 의도인 행복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표상하는 가언 명령은 확정적이다. 영리함의 충고들. 실용적 명령.

② 정언 명령: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명령. 행위가 그 자체로 선 한 것으로 표상된다면, 즉, 그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으로,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정언 명령.

ⓐ 명증적-실천 원리: 어떤 의도와도 관계없이, 어떤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단언하는 정언 명령. 어떤 처신을 의도를 조건으로 두지 않고 직접적으로 지시명령하는 명령. 질료나 행위 결과와는 상관없이, 형식 및 형식으로부터 행위 자체가 나오는 원리에 관여한다. 윤리성의 명령(법칙). 도덕적 명령

 

판단의 양태

목적-수단의 관계

관계 영역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언 

명령

미정적-실천 원리

숙련의 규칙들-목적 설정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수단들 가능

(기술에 속하는)

기술적 명령

분석적-목적을 의욕하는자는 수단 또한 의욕

확정적-실천 원리

영리함의 충고들-이성적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을 간주하는 목적에 대한 수단(행복에 대한 수단)

(복지를 위한) 실용적 명령

분석적-목적이 주어졌고, 이를 위한 수단 또한 의욕

정언 

명령

명증적-실천 원리

윤리성의 명령들(법칙들)

- 행위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지시명령

(윤리에 속하는) 도덕적 명령

선험적 종합적-실천 명제


*** 법칙만이 무조건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필연성을 개념을 동반하며, 명령이란 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시 말해 경향성에 반하여서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다.


(5) 윤리성의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pp. 128-131)

① 정언 명령의 가능성은 선험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② 정언 명령은 선험적 종합적-실천 명제이다.

③ 명령은 법칙 외에 오로지 이 법칙에 적합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함유하지만, 법칙은 그것을 제한했던 아무런 조건도 함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행위의 준칙이 법칙에 적합해야 할, 이 법칙 일반의 보편성만 남는다. 이 적합성만이 명령을 본래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pp. 131-132)

⇒ 정언 명령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제1정식: 보편 법칙의 정식) (pp. 132-133)

④ 의무의 사례들에 대한 고려: 도덕적 평가 규준은 우리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pp. 133-137)

ⓐ 자살 금지의 의무: 자살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기사랑의 원리가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 자기 사랑의 사명이 생의 촉진을 추동하는 것인 바로 그 감각이 생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자연은 자기 자신과 모순을 일으킨다.

ⓑ 거짓 약속 금지 의무: 자기사랑의 원리에 입각해 거짓 약속을 하는 경우도 자기모순적이다. 왜냐하면 거짓 약속은 약속 및 목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재능 개발의 의무: 재능을 내버려 두고 생을 안일과 향락에 바치는 것은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능력은 온갖 가능한 의도들을 위해 쓰이도록 주어져 있으므로,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능력이 발전될 것을 필연적으로 의욕하기 때문이다.

ⓓ 타인을 도울 의무(사랑과 동정의 의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보편적 자연법칙이 잘 존속할 수 있음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원리가 어디서나 타당하기를 의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라면 자신이 기대하는 모든 희망을 스스로 앗아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⑤ 만약 의무가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 의미를 갖고, 실제적인 법칙수립을 가져야만 한다면, 이 의무는 오로지 정언 명령들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p.139)

⑥ 인간의 특수한 자연소질로부터, 어떤 감정이나 성벽으로부터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 타당하지는 못한 특수한 성향으로부터 도출된 것은 우리에게 준칙은 제공할 수 있어도, 법칙은 제공할 수 없다. 도덕감 같은 천성적 감각이나 착한 본성과 같은 후견자적인 자연본성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지만, 결코 이성이 명하는 원칙들을 제공할 수는 없다. 윤리에 있어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고유한 행위의 원리가 오직 경험이 제공할 수 있는 우연적인 근거들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 있다. (pp. 140-142)


(6) 정언 명령의 도출

① 실천 철학은 윤리 형이상학으로 나아간다. 비록 결코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일어나야만 할 것의 법칙들, 객관적-실천적 법칙들을 납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의지가 순전히 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의지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가 문제이다. 따라서 경험적인 것과 관계를 갖는 모든 것은 제외된다. 이성이 독자적으로 태도를 결정한다면, 이성은 이 일을 반드시 선험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pp. 143-144)

의지: 의지란 어떤 법칙의 표상에 맞게 행위하게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이다. 의지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들에게서만 만날 수 있다. (p. 144)

목적: 의지의 자기 규정에서 객관적 근거로 쓰이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이 순전한 이성에 의해 주어진다면, 이 목적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똑같이 타당하다. 그 결과가 목적인 행위의 가능 근거만을 함유하는 것은 수단이라 불린다. (pp. 144-145)

ⓐ 욕구의 주관적 근거는 동기이며 의욕의 객관적 근거는 동인이다. 주관적 목적은 동기의 의거하는 반면, 객관적 목적은 동인들에 의존한다.

ⓑ 실천적 원리들이 모든 주관적 목적들을 도외시한다면, 그 원리들은 형식적이다. 반면 주관적 목적들을, 즉, 모종의 동기들을 기초로 한다면 그것들은 질료적[실질적]이다. 이 질료적 목적들은 행위의 결과로서 임의로 설정되는 것으로 단지 상대적이다. 그래서 이 상대적인 목적들은 단지 가언적인 명령들의 근거일 뿐이다. 목적의 현존재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목적 그 자체로서 일정한 법칙들의 근거일 수 있는 것은 정언적 명령의 근거이다.

④ 인격(pp. 1145-148)

ⓐ 인간과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하며, 수단으로서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 이성이 없는 존재자들은 단지 수단으로서 상대적 가치만을 가지며, 그래서 물건들이라 불린다. 반면 이성적 존재자들은 인격들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자들의 본성이 그들을 이미 목적들 그 자체로 표시하고, 그런 한에서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들은 주관적 목적들이 아니라 객관적 목적들이다. 즉, 인격들의 현존 그 자체가 목적인, 그것 대신 다른 어떤 목적도 두어질 수 없는 것들로, 다른 것들은 한낱 수단으로서 이에 봉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서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을 우리는 만날 수 없다.

제 2 정식 - 인격의 정식: “무릇 최상의 실천 원리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인간의 의지에 관련한 정언 명령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구에게나 목적인 것의 표상으로부터 의지의 객관적 원리를 형성하고, 그러니까 보편적 실천 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이 원리의 근거인즉, 이성적 자연 본성은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현존을 이렇게 표상한다. 그런 한에서 이 원리는 그러므로 인간 행위들의 주관적 원리이다. 그러나 또한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자도, 나에게도 타당한 바로 그 동일한 이성 근거를 좇아, 그의 현존재를 그러한 것으로 표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객관적 원리로서, 최상의 실천 근거인 이 원리로부터 의지의 모든 법칙이 도출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실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제 2 정식: 인격의 정식)(pp. 147-148)

ⓓ 실례 (pp. 148-151)

i)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ii) 거짓 약속은 다른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iii) 인간성의 완성을 향한 소질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인간의 보존과는 양립할 수 있으나 목적의 촉진과는 양립할 수 없다.

iv) 타인의 행복에서 아무것도 고의로 빼앗지 않는다면, 인간성은 성립할 수 있지만, 목적 그 자체인 인간성에 단지 소극적으로 합치할 뿐 적극적으로 합치하지는 않는다.

⑤ 제 3 정식: 자율의 정식 - 경험과는 무관한 원리: 인간성과 목적 그 자체로서의 모든 이성적 자연[존재자] 일반의 원리는 경험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 아니다.(pp. 151-156)

ⓐ 보편성 요구: 경험으로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 적용되는 것을 규정할 수 없다.

ⓑ 객관적 목적: 모든 주관적 목적들을 제한하는 최상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객관적 목적이고, 이것은 순수한 이성으로부터 생겨난다. 모든 실천적 법칙 수립의 근거는 객관적으로는 규칙에 있고, 이 규칙을 법칙일 수 있도록 만드는 보편성의 형식에 있으나, 주관적으로는 목적에 있다. 모든 목적들의 주체는 목적 자체인 이성적 존재자이다. 이로부터 세 번째 실천 원리, 즉, 보편적 법칙 수립의 의지는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이 나온다.

의지는 자기 법칙수립적인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법칙에 종속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종속된다. (p. 152)

ⓒ 이성적 존재자들에 대한 보편적 명령들은, 사람들이 의무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할 때,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언적인 것으로 상정된 것이다. 정언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실천적 명제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무로부터의 의욕에서 모든 관심의 포기는 정언적 명령과 가언적 명령의 구별 표지로서, 그 명령 자신 안에 그 명령이 함유하고 있는 어떤 규정에 의해, 함께 암시되어 있다. 이 원리는 셋째 정식에서, 즉, 보편적-법칙수립적 의지로서의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에서 증명된다.

ⓓ 셋째 원리, 모든 준칙을 통해 보편적으로 법칙을 수립하는 의지라는 개개 인간 의지의 원리가 정언 명령이 되기에 적합하다: 보편적 법칙 수립의 이념 때문에 어떤 이해 관심에도 기초하지 않고, 모든 가능한 명령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무조건적일 수 있다. 또는 거꾸로 말하면, 하나의 정언 명령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하는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동시에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인 자기 의지의 준칙에서 모든 것을 행하라고 지시명령할 것이다. 이 경우에만 실천 원리, 그리고 의지가 복종하는 그 명령은 무조건적일 것이다.

ⓔ 의지의 자율의 원리: 무조건적인 이 원리를 의지의 자율이라 한다. 반면 조건적인 명령은 이해관심으로 인한 행위의 필연성으로 타율이라 불린다.

― 의지의 실천 원리 세 가지, 즉, 정언 명령의 세 가지 정식 ―

 

1.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2.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3. 보편적-법칙수립적 의지는 개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이다. (의지의 자율의 원리)


(7) 목적의 나라(『윤리형이상학 정초』, pp. 156-161)

① 목적의 나라: ‘나라’는 공동의 법칙들에 의한 서로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을 뜻한다. 그래서 이성적 존재자들의 개성적 차이와 사적 목적을 배제하고,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이성적 존재자들과 그들이 세우는 고유한 목적들이 체계적으로 연결된 전체, 그래서 앞에서 말한 원리들에 따라 가능한 목적들의 나라가 생각될 수 있다.

② 이성적 존재자들 모두는 모두를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만 한다는 법칙 아래에 종속되어 있다. 이로부터 공동의 객관적 법칙들에 의한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이 생긴다.

③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수립자로서 타자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이 나라에서 원수(元首)로서 속해 있는 것이다.

④ 도덕성은 이성적 존재자에 의해서만 목적들의 나라가 가능해지는, 그러한 법칙 수립에 대한 모든 행위의 관계에서만 존립한다. 이 법칙 수립은 개개 이성적 존재자 자신에서 만날 수 있고, 그의 의지로부터 생겨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지의 원리인즉, 준칙이 보편적 법칙임이 그 준칙과 양립할 수 있는, 그러므로 오로지,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하는 자로 볼 수 있는, 그런 준칙 이외의 것에 따라서는 행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준칙들이 이 객관적 원리와 이미 필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원리에 따르는 행위의 필연성은 실천적 강요, 즉, 의무라 불린다.

⑤ 객관적 원리에 따라 행위해야 하는 실천적 필연성인 의무는 감정이나 충동 그리고 경향성에 의거해 있지 않고, 순전히 이성적 존재자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거한다. 이 관계 안에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항상 동시에 법칙수립자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의지의 각 준칙을 보편적으로 법칙수립하는 것으로 모든 타자의 의지에 관계시키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행위에도 관계시킨다. 이성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세우는 법칙 이외의 어떤 것에도 복종하지 않는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의 이념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⑥ 목적들의 나라에서 모든 것은 가격을 갖거나 존엄성을 갖는다.

ⓐ 시장 가격: 보편적 인간의 경향성과 필요들에 관련되어 있는 것은 시장가격을 가짐.

ⓑ 애호 가격: 필요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무목적적인 유의에서 마음 능력의 흡족함에 따르는 것은 애호가격을 갖는다.

ⓒ 존엄성: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은 내적 가치, 즉, 존엄성을 갖는다.

⑦ 도덕성이 이성적 존재자가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도덕성을 통해서만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수립적인 성원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성과, 윤리적일 수 있는 한에서의 인간성만이 존엄성을 갖는다.

⑧ 윤리적으로 선한 마음씨 또는 덕으로 하여금 그토록 높은 요구를 할 권리를 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선한 마음씨 또는 덕이 보편적 법칙 수립에 있어 이성적 존재자에게 가져다주고, 그로써 이성적 존재자로 하여금 목적들의 가능한 나라의 성원이 될 수 있게끔 해주는 몫(持分)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들의 나라에서 법칙을 수립하는 자로, 모든 자연법칙들에 대해 자유롭게, 오직 자신이 세운 법칙들에만 복종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리고 모든 가치를 규정하는 법칙수립 자신은 바로 이 때문에 존엄성을 가지며 이에 대해 이성적 존재자는 존경이라는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율은 인간과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의 근거이다.


(8) 윤리성의 원리를 표상하는 세 가지 정식의 통일

① 형식: 보편성 - 준칙들은 보편적 자연법칙들 같이 타당해야 하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② 질료: 목적 -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서 준칙에 대해 목적들을 제한하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

③ 완벽한 규정: ‘모든 준칙은 자신의 법칙 수립에 의해 자연의 나라로서의 목적들이 가능한 나라와 조화로워야 한다.’


(9) 무조건적으로 선한 의지

①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때에도 자신과 결코 상충할 수 없는, 악할 수 없는 의지는 단적으로 선하다.

② ‘그것의 보편성을 법칙으로서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 항상 행위하라’가 선의지의 최상 원칙이다.

③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보편적 법칙으로서의 의지의 타당성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에 따른 사물들의 보편적 연결과 유사함을 갖는다. 따라서 선한 의지의 정식, 즉, 정언 명령은 ‘그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자연법칙들로서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준칙들에 따라 행위하라’로 표현될 수 있다.

④ 이성적 자연존재자가 자신에게 세우는 목적이 선의지의 질료가 된다. 그러나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이념에서는 목적은 산출되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립적 목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즉 그 목적에 결코 반해서 행위해서는 안 되며, 한낱 수단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개개 의욕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이 목적은 모든 가능한 목적들의 주체 이외의 것일 수 없고,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주체이기도 하다.

⑤ 결론: 개개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서 그가 언제든 종속해 있을 모든 법칙들에 대해,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자로 간주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와 함께 나오는 결론은,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이 법칙수립자로서 자신 및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준칙들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성적 존재자들의 세계(예지적 세계)가 목적들의 나라로 가능하며, 그것도 성원인 모든 인격들의 고유한 법칙 수립에 의해 가능하다.



윤리성의 최상 원리로서의 의지의 자율(pp. 169-170)


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방식만을 선택한다. 이 실천 규칙은 종합 명제이다. 명증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이 종합 명제는 온전히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순수 실천 이성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율의 원리만이 도덕의 유일한 원리라는 점은 윤리성의 개념들을 순전히 분해만 해보아도 충분히 밝혀진다.



윤리성의 모든 사이비 원리들의 원천으로서 의지의 타율(pp. 170-171)


만약 의지가 자기 자신을 넘어 나가서 객관들 중 어느 하나의 성질에서, 자기를 결정하는 법칙을 구한다면, 언제나 타율이 나타난다. 이때에는 객관이 의지와의 관계를 통해 의지에게 법칙을 준다. 이 법칙들은 가언적이다. 이에 반해 도덕적인, 즉 정언 명령은 내가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러그러하게 행위해야 함을 말한다.



타율의 가정된 기본개념들로부터 가능한 윤리성의 모든 원리들의 구분


(1) 의지의 타율의 원리로서 경험적 원리와 이성적 원리

① 경험적 원리: 행복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 자연적 감정 또는 도덕적 감정 위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경험적 원리들은 도덕 법칙들을 세우기 위한 기초로 사용될 수 없다. 보편성이나 무조건적인 실천적 필연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행복의 원리가 윤리성의 기초로 놓는 동기들은 윤리성을 매장시키고 윤리성의 전체적인 숭고함을 파괴한다. 도덕 감정 윤리성 및 윤리성의 존엄성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러나 도덕 감정이라는 느낌에 호소하여 보편적 법칙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천박한 짓이다. 항상 차이가 있는 감정들은 선악에 대한 동일한 척도를 제공하지 못한다.

② 이성적 원리: 완전성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 우리의 의지의 가능한 결과로서 완전성이라는 이성 개념 위에 세워져 있거나,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원인으로서 자립적인 완전성(신의 의지)이라는 개념 위에 세워져 있다. 윤리성의 이성적 근거들, 또는 이성적 근거들 가운데서도 완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은 신의 최고로 완전한 의지로부터 윤리성을 도출해내는 신학적 개념보다는 더 좋다.


(2) 의지의 타율

① 타율: 의지를 규정하는 규칙을 위해 의지의 객관이 근저에 놓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 규칙은 의지에 대해 타율일 따름이다.

② 타율의 명령은 조건적이다: 객관을 의욕한다면, 또는 객관을 의욕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하게 행위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무릇 객관이 의지를 규정하는 것은, 행복의 원리에서처럼 경향성에 의한 것이든, 완전성의 원리에서처럼 우리의 가능한 의욕 일반의 대상들에 지향되어 있는 이성에 의한 것이든, 의지가 결코 직접적으로 스스로 행위의 표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견되는 행위 결과가 동기들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즉, 나는 다른 어떤 것을 의욕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행해야 한다.

③ 가언 명령의 법칙을 주는 것은 자연이다. 이 법칙은 단지 경험에 의해 인식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즉, 우연적인 것으로 명증적인 실천 규칙이기에는 부적당할 뿐 아니라 언제나 의지의 타율일 뿐이다. 이런 의지는 충동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주관의 자연 본성을 매개로, 외부의 충동이 의지에게 법칙을 제공한다.


(3) 단적으로 선한 의지

①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원리는 정언 명령이어야 한다.

②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모든 객관에 대해서는 무규정적인 채, 한낱 의욕의 형식 일반만을 보유할 것이며, 그것도 자율로서 보유할 것이다.

③ 즉, 개개 선의지의 준칙이 그 자신을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 수 있기에 적합함 그 자체가 유일한 법칙이다.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어떤 동기를 기초로 두지 않고 이 법칙을 자신에게 부과한다.


(4) 과제

① 어떻게 선험적인 종합적 실천 명제가 가능한가, 그리고 그 명제가 왜 필연적인가라는 과제에 대해 우리는 이 명제가 참이라고, 또 증명이 가능하다고 내세운 적이 없다.

② 우리가 한 작업은 일단 보편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윤리성 개념을 발전시켜, 의지의 자율이 이 윤리성 개념에 부착해 있다는 것, 즉, 윤리성 개념 근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③ 윤리성은 환영이 아니라는 주장(정언 명령과 의지의 자율이 진실하고 선험적 원리로서 단적으로 필연적이라면 나오는 주장)은 순수 실천 이성의 가능한 종합적 사용을 요구한다. 이런 사용을 위해서는 이 이성능력 자체에 대한 비판을 선행시켜야 한다.

제 3 절 윤리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 이성 비판으로 이행




자유 개념은 의지의 자율을 설명하는 열쇠이다


(1) 자유와 자연 필연성

① 의지는 생물이 이성적인 한에서 갖는 일종의 원인성이다. 자유는 이런 원인성의 특성이며, 자유는 그것을 규정하는 외래의 원인들에 독립해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자연필연성은, 외래 원인들의 영향에 의해 활동하게끔 규정받는, 모든 이성 없는 존재자들의 원인성의 특성이다.

③ 자유는 자연법칙들에 따르는 의지의 성질은 아니지만, 전혀 무법칙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변적인 법칙들에 따르는 특수한 종류의 원인성이다.


(2) 자율과 타율

① 자연 필연성은 작용하는 원인들의 타율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작용결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작용하는 원인을 원인성으로 규정한 법칙에 따라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② 의지의 자유가 자율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이 자율인 것이다.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이다’라는 명제는, 자기 자신을 보편적 법칙으로서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준칙 이외의 다른 어떤 준칙에 따라서도 행위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표시한다. 이것이 정언 명령의 정식이자 윤리성의 원리이다. 따라서 자유 의지와 윤리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는 한 가지이다.


(3) 윤리성의 원리는 종합 명제

자유 의지가 전제된다면, 윤리성 및 윤리성의 원리는 자유 의지의 개념을 분해하기만 하면 나온다. 그럼에도 윤리성의 원리는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그것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법칙으로 보인, 자지 자신을 자기 안에 함유할 수 있는, 그런 의지이다’라는 종합 명제이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개념의 분해에 의해 준칙의 보편성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종합 명제는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인식과 준칙의 보편 법칙성이라는 인식이 자유의 적극적 개념에 의해 결합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자유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속성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① 윤리성은 이성적 존재자들에게만 법칙으로 쓰이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타당해야 하며, 윤리성은 오로지 자유의 속성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하며, 자유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의 의지의 속성으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유를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부가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② 자유의 이념 아래서밖에는 행위할 수 없는 모든 존재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인 관점에서, 실제로 자유롭다. 즉, 자유와 불가분 결합되어 있는 모든 법칙들은 그 같은 존재자에게 타당하다.

③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가 그 아래서만 행위할 수 있는 자유의 이념을 또한 필연적으로 수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존재자에서는 실천적인, 다시 말해 그의 객관에 대해서 원인성을 갖는 이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외부의 영향에서 독립적으로 그 자신을 그의 원리들의 창시자로 간주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성은 실천 이성으로서, 또는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로서, 그 자신에 의해 자유롭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오로지 자유의 이념 아래서만 자신의 의지일 수 있고, 그러므로 그런 의지는 실천적 의도에서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부여되어야만 한다.



윤리성의 이념에 부착되어 있는 관심에 대하여


(1) 요약

① 만약 우리가 어떤 존재자를 이성적이고, 행위들에 대한 자기의 원인성을 의식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자 하면, 자유의 이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근거에서 이성과 의지를 갖춘 모든 존재자에게는 자신의 자유의 이념 아래서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속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② 자유의 이념에 대한 전제로부터 준칙이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박에 없읆을, 즉, 우리 자신의 보편적인 법칙 수립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의식도 나왔다.


(2) 위의 원리에 대한 관심

① 이성적 원리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이해관심 때문이 아니다. 이해관심은 정언 명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② 이성이 실천적이라면, ‘해야만 함’[당위]는 모든 이성적존재자에게 타당한 ‘하고자 함’[의욕]이기 때문에, 원리에 대한 관심의 발생을 고찰해야 한다.

③ 자유의 이념에서 도덕 법칙을, 곧 의지의 자율의 원리를 전제할 뿐이고, 이 원리의 실재성 및 객관적 필연성은 그 자체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리를 정확하게 규정한다 해도 이 원리의 타당성 및 복종해야 할 실천적 필연성에 관해서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법칙으로서 우리 준칙의 타당성은 왜 우리 행위들을 제한하는 조건이어야 하며, 이런 종류의 행위에 부여하는 가치를 무엇에 기초지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④ 우리가 행위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보종의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즉, 무엇으로부터 도덕 법칙은 구속력을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종의 순환론이다. 우리가 목적들의 질서 안에서 윤리 법칙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작용하는 원인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롭다고 상정하며,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의지의 자유를 부가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유와 의지의 자기 법칙수립은 둘 다 자율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중 하나가 다른 것을 설명하고 그것의 근거를 대는 데 사용될 수 없다.

(3) 순환론을 피하기 위한 방책: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①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우리에게 나타나는 표상들(감관의 표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들을 대상들이 우리를 촉발하는 대로만 인식하게끔 하고, 그때 대상들이 그 자체로 무엇일 수 있는가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다. 즉, 이런 종류의 표상들에 관해서는 우리가, 지성은 한낱 현상들의 인식에 이를 뿐, 결코 사물들 그 자체에는 이를 수 없다. 이런 구별로부터, 우리는 현상들 배후에 현상이 아닌 어떤 다른 것, 곧 사물들 자체를 용인하고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감성세계와 오성세계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② 자기 인식에서 감성세계와 오성세계의 구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어는 것이고, 내감에 의해 의식이 촉발되는 방식대로만 자기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순전히 현상들에서 합성된 그 자신의 주관의 성질을 넘어서 그것의 근저에 놓여 있는 다른 어떤 것, 곧 그의 자아를 그 자체로 상정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를 순전한 지각과 감각들의 수용성의 관점에서는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이지만, 인간에게서 순수 활동성임 직한 것(감관의 촉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의식에 이른 것)과 관련해서는 지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용어 설명(백종현 주):

① ‘Verstand’는 일반적으로 ‘지성’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지만, 이 경우에만은 ‘오성(悟性)’으로 옮겨 ‘예지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낫다. ‘Verstandwelt’가 ‘예지세계(intelligibele Welt)’ 또는 ‘이성세계(Vernunftwelt)’와 똑같은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말이다.

② 지성세계는 intellektuelle Welt. 칸트가 ‘Verstand’ 곧 ‘intellecuts’(‘지성’, 때로는 ‘오성’)에서 파생한 형용사 ‘intelletuell(지성적)’과 ‘intelligibel(예지적)’을 구별해서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지성적’은 인식을, ‘예지적’은 대상을 수식해 주는 말이라고 규정한 뜻에 따른다면, ‘intellektuelle Welt’는 ‘intelligibele Welt’라고 표현했어야 할 것이다.

이성(Vernunft; reason): 인간은 모든 사물들과, 그리고 인간이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한에서는 그 자신과도 구별되는 하나의 능력인 이성(Vernunft; reason)을 발견한다. 순수한 자기활동성으로서의 이성은 지성(Verstand; understanding)도 뛰어넘는다.

ⓐ 지성도 자기활동성이지만, 이 활동성으로부터, 감성적 표상들을 규칙들 아래로 보내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감성적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에서 통합하기 위해 쓰일 뿐인 개념들 외에는 아무런 개념도 산출할 수가 없다.

ⓑ 이성은 이념들 아래에서 순수한 자발성을 내보인다. 이성은 감성이 자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 훨씬 멀리까지 나아가며, 감성세계와 오성세계를 서로 구별한다. 이런 구별을 통해 지성 자신에게 그 경계를 지정해 주기도 한다. 이로 인해 이성적 존재자는 예지자로서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 이성적 존재자는 감성세계에 속해 있는 한에서 자연 법칙들(타율) 아래에 있으면서, 예지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이성에 기초하고 있는 경험적이지 않은 법칙들 아래에 있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그 자신의 의지의 원인성을 자유의 이념 아래서 말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감성세계의 원인들로부터의 독립성이 자유이므로) 자유의 이념에는 자율의 개념이 결합되어 있고, 자율의 개념과는 윤리성의 보편적 원리가 결합되어 있다. 이 윤리성의 원리가 이성적 존재자들의 모든 행위들의 근저에 놓인다.

ⓓ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오성세계의 성원으로 놓고, 의지의 자율을 이 자율의 결과인 도덕성과 함께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무지워져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감성세계에 속하면서 또한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정언적 명령은 가능한가?


① 오성세계와 감성세계의 성원: 이성적 존재자는 오성세계의 성원으로서 그의 모든 행위들은 순수 의지의 자율의 원리에 완전히 적합할 것이다.(윤리성의 최상 원칙에 의거한다)이성적 존재자는 감성세계의 일부로서 그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욕구들과 경향성들의 자연법칙에, 즉, 자연의 타율에 알맞게 취해진다.(행복의 최상 원칙에 의거한다)

② 오성세계의 법칙이 명령이며 여기에서 의무가 나온다: 오성세계는 감성세계의 근거를, 즉, 감성세계의 법칙들의 근거를 함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예지자로서 스스로를 오성세계의 법칙에 즉, 자유의 이념 중에 오성세계의 법칙을 함유하는 이성에, 따라서 의지의 자율에 복종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오성세계의 법칙들을 나에 대한 명령들로 보고, 이 원리에 알맞은 행위들을 의무들로 볼 수밖에 없다.

③ 따라서 자유의 이념이 나를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 만듦으로써 정언 명령들은 가능하다. 그리고 예지 세계의 성원이자 동시에 감성세계의 성원이므로 나의 행위가 항상 의지의 자율에 맞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행위들은 의지의 자율에 알맞아야만 하는 것이다.

④ 선험적 종합 명제: 정언적 당위는 선험적 종합 명제를 표상한다. 왜냐하면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나의 의지 위에 오성세계에 속하는 실천적 의지의 이념이 덧붙여지고, 이 의지는 전자의 의지가 이성에 따르는 최상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성세계에 대한 직관들에 법칙적 형식 일반으로서의 지성의 개념들이 덧붙여짐으로써 자연에 대한 모든 인식이 의거하는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⑤ 평범한 인간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이 연역의 옳음을 확증한다. 그는 경향성들과 충동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소망한다. 자유의 이념, 즉 감성세계의 규정하는 원인들로부터 독립함의 이념이 오성세계의 성원의 입장으로 그가 옮겨간다면, 그는 보다 좋은 인격일 것으로 믿는다. 그는 그런 입장 안에서 선의지를 의식한다. 이 선의지는 감성세계의 성원으로서 법칙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당위는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서 자신의 필연적인 의욕이고, 그가 자신을 동시에 감성세계의 성원으로 보는 한에서만 당위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모든 실천 철학의 최종 한계에 대하여



① 자유는 경험 개념이 아니며 경험 개념일 수도 없다. 필연성 역시 경험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험적 인식 개념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필연성 개념은 경험에 의해 확증되며, 경험, 즉 감관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야 한다면 불가피하게 전제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는 단지 이성의 이념일 따름이고, 객관적 실재성 자체는 의심스러우나, 자연은 그 실재성을 경험의 실례들에서 증명하고 또 필연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지성개념이다.

② 철학은 인간 행위들에서 자유와 자연필연성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자유 개념과 자연 개념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자유가 자연필연성과 모순된다면, 자유가 포기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③ 우리가 인간을 자유롭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자연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와 다른 관계로 생각한다. 자유로운 인간과 자연 필연성에 종속된 인간은 공존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주고나 안에서 필연적으로 합일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유의 이념으로 이성을 괴롭혀야 하는가의 근거를 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분쟁은 사변 철학의 소관사이다.

④ 의지의 자유에 대한 권리주장은 이성이 독립적이라는 의식 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예지자로 보는 인간은 자신을 의지를 가진, 즉, 원인성을 갖춘 예지자로 생각할 때, 자신을 자연법칙에 종속시킬 때와는 다른 질서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전혀 다른 종류의 규정 근거들과의 관계 속에 놓인다. 이로써 자신이 현상 중의 사물에 종속해 있고, 동시에 사물 그 자체로서는 자연 법칙들에서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즉 자신을 감관에 의해 촉발되는 대상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예지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욕구와 감각적 자극들을 배제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는 행위들이 자신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심지어는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 행위들의 원인성은 예지자로서 인간 안에 있으며, 예지 세계의 원리들에 따르는 작용과 행위들의 법칙들 안에 있다.

⑤ 인간이 예지 세계에 대해 아는 바는, 오직 이성만이 법칙을 수립한다는 것뿐이다. 또한 인간은 예지 세계에서 예지자로서만 본래적 자기이기 때문에, 그 법칙들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정언적으로 관계된다. 그래서 경향성과 충동들은 예지자로서 인간의 의욕의 법칙들을 훼손할 수 없다.

⑥ 자유가 의지라는 이성의 원인성과 결합된다는 점에서만 적극적이다. 자유의 적극적 측면이란 행위들의 원리가 이성원인의 본질적 성질에, 즉, 법칙으로서의 준칙의 보편타당성 조건에 알맞게, 그렇게 행위하는 능력이다. 실천 이성이 의지의 객관을 오성세계로부터 가져온다면, 그것은 실천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오성세계 개념은, 이성이 자신을 실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현상들 밖에서 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한 입장일 따름이다.

⑦ 순수 이성이 어떻게 실천적일 수 있는가를 이성이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성은 자신의 모든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과제와 같은 것이다. 자유는 순전한 이념으로서, 자유의 실재성은 자연법칙들에 따라, 또는 어떤 가능한 경험에서도 밝혀질 수도 없다. 유비의 의한 실례도 제시할 수 없고, 개념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다. 자유는 욕구 능력과는 구별되는 한 능력을 의식한다고 믿는 존재자에게 이성의 필연적인 저제일 뿐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을 현상으로만 보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것뿐이다.

⑧ 의지의 자유를 설명하는 일이 주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도덕 법칙들에 가질 수 있는 관심을 찾아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성이 실천적으로 되는 것은 관심에 의해서이다. 즉, 관심이 의지를 결정하는 원인인 것이다. 이성의 준칙의 보편적 타당성이 의지의 충분한 규정 근거일 때만, 이성은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순수 이성이 이념들에 의해 경험 안에 있는 어떤 결과의 원인이어야 하므로, 어떻게 그리고 왜 법칙으로서 준칙의 보편성이, 즉, 윤리성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가 하는 설명은 인간에게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윤리성이 관심을 끌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 아니라, 예지자인 인간의 의지로부터 윤리성이 생겨났기 때문에, 인간에게 타당하고 그 때문에 관심을 끈다.

⑨ ‘어떻게 정언 명령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은 우리가 자유의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한에서, 이 전제의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는 한에서만 대답될 수 있다. 즉, 예지자의 의지의 자유의 전제 아래서 의지의 자율은 의지가 결정될 수 있는 형식적 조건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인간 이성에 의해 통찰되지 않는다. 어떻게 법칙들로서 이성의 모든 준칙의 보편타당성의 순전한 원리가 그 자신만으로 동기를 제공하고, 순수하게 도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어떻게 순수 이성이 실천적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설명하는 데는 인간 이성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⑩ 감성의 분야로부터의 운동인들의 원리를 제한하는 것은, 감성의 분야에 한계를 긋고 그 분야가 모든 것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더 많은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맺음말


① 자연에 대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은 세계의 어떤 최상 원인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데에 이른다. 자유에 관한 이성의 실천적 사용 역시 행위들의 법칙들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데에 이른다. 인식을 필연성에 대한 의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이성의 모든 사용의 본질적 원리이다. 현존하는 것, 또는 일어나는 것, 일어나야만 할 것의 조건이 근저에 놓여 이지 않으면 이성은 어떤 필연성도 통찰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이성의 본질적인 제한이다. 그래서 이성은 무조건적으로-필연적인 것을 찾고 그것을 개념화하지 못하면서도 상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 전제와 화합하는 개념만 발견할 수 있으면 다행인 것이다.

② 우리는 비록 도덕적 명령의 실천적 무조건적 필연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필연성을 개념화하지 못함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바,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에까지 원리적으로 나아가려 하는 철학에 요구될 수 있는 전부이다.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경복, 고봉만 역, 책세상, 2003.




머리말


  이 논문의 주제를 철학이 제안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ㅇ지만 철학자들이 해결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문제의 하나로 본다. 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p. 35.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류의 모든 진보가 인간을 끊임없이 원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수록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p. 34.



  사람들을 구별하는 차이의 기원을 인간 구조의 변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서로 평등하다. p. 34.



  자연권droit naturel의 참된 정의가 그만큼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p. 36.



  사람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적절하게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규칙을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 이렇게 모여진 규칙들에다 자연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널리 실시해보니 결과가 좋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근거는 없다. 이것이 정의를 만들어내고 거의 터무니없는 일치에 의해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매우 편리한 방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p. 38.



  우리가 이 법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법의 강제를 받는 사람의 의지가 그 법을 의식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이기 위해서는 그 법이 자연의 소리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p. 38.



  거기에[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원리이다. 사회성의 원리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연법의 모든 규칙들은 우리의 정신이 이 두 가지 원리 사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일치와 조합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pp.  38-39.



  지식도 자유도 없는 동물들이 이 법칙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도 타고난 감성에 의해 어느 정도 우리의 본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도 자연법에 관여하며 인간은 그들에 대해 어떤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내가 동포에게 어떤 종류의 해도 입혀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동포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 같은 특질은 동물과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므로, 적어도 동물은 인간에 의해 불필요하게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p. 39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대한 논문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건강•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p. 45.



  대체 이 논문에서는 정확히 말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이 진보하는 가운데 폭력에 이어 권리가 생기고 자연이 법에 굴복한 시기를 지적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떠한 기적의 연쇄로 인해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 인민peuple이 현실의 행복을 대가로 하여 관념 속에서 안식을 찾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p. 46.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연 상태가 존재했다는 데 대해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성서를 읽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지식과 계율을 받은 최초의 인간은 이 같은 자연 상태에 있지 않았다. ...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기이한 사건에 의해 다시 자연 상태로 떨어진 셈이다. 이것은 변호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며 전혀 증명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므로 우선 이 모든 사실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 조금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추구할 수 있는 연구는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라 다만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p. 47.







        제 1 부


  인간의 자연 상태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인간을 그 기원을 통해, 이를테면 종의 최초의 발아를 통해 검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대신 인간은 어떤 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이 두 발로 걸어 다니고 현재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손을 사용했으며 자연 전체에 시선을 보내고 하늘의 광대한 넓이를 눈으로 가늠했으리라고 가정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성된 존재에게서 그가 받았을지 모를 종교 교육에 의한 신앙으로 축적된 지식과, 오랜 세월에 걸친 진보를 통해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인위적인 능력을 제거해버린다면, 요컨대 인간을 자연의 손에서 갓 나온 그대로의 상태에서 생각해보면, 아는 거기서 어떤 동물보다는 약하고 민첩하지 못하지만 결국 그 어떤 동물보다 유리하게 조직된 한 동물을 떠올리게 된다. pp. 50-51.




  자연은 그들에게 스파르타의 법률이 시민의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과 똑같이 행동한다. 즉 자연은 훌륭한 체격을 가진 자들은 더욱 강건하게 만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모두 도태시켜버리는 것이다. p. 52.



  동물의 힘에 있어서 뛰어난 이상으로 자신이 재주에 있어서는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p. 54.



  동물보다 더 무서운 적으로서 인간의 적절한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는 상대는 인간의 타고난 연약함, 유년기나 노화, 온갖 종류의 병들이다. 처음 두 가지는 모든 동물들에게 공통되지만 마지막 것은 주로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모두 우리가 약하다는 슬픈 증거들이다. pp. 54-55.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령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 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나는 감히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며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주저 없이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 ... 인간의 질병사(疾病史)는 문명 사회의 역사를 더듬어봄으로써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 56.



  사회화하고 노예화한 인간은 연약하고 겁이 많아지며 비굴해진다. 게다가 나약하고 여성화된 생활 양식은 인간의 힘과 용기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든다. ... 인간과 동물은 자연에 의해 동등한 대우를 받으므로 인간 스스로가 그가 길들이는 동물보다 그 자신에게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을 더욱 타락시키는 특별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p. 58.



  우선 나는 모든 동물을 하나의 정밀한 기계로밖에 보지 않는다. ... 나는 인간이라는 기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동물의 활동에서는 자연만이 오로지 모든 것을 행하는 데 반해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연의 활동에 협력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즉 동물은 본능에 따라,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에 따라 취사 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동물은 자기에게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에게 아무리 유리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신에게 해로워도 종종 그 규칙을 벗어나 행동한다.  p. 60.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지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특질이다. 자연은 모든 동물에게 명령하고 동물은 이에 따른다. 인간도 같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복종하느냐 저항하느냐의 선택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자유로움을 인식한다. 인간 영혼의 정신성이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자유의 의식을 통해서였다. p. 61.



  ... 나는 양자를 이렇게 구별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또 하나의 매우 특수한 성질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개량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인간은 환경의 도움을 얻어 다른 모든 능력을 점차 발전시켜가는 이러한 가능성을 종의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차원에서도 소유하고 있다. ... 인간과 동물을 분명히 구별하는 거의 무제한적인 이 가능성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며, 평온하고 순진무구한 나날이 계속되는 저 원초적인 상태로부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을 이끌어낸 것도 바로 이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오류, 악덕과 미덕을 몇 세기 동안의 흐름 속에서 부화시켜 드디어 인간을 자기 자신과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이 가능성이다. p. 62.



  주석 70)에서 (저자 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처럼 불행하게 만드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방대한 학문 연구, 수많은 기술의 발명, 막대한 노력이 소요된 심연 매립과 산을 깎고 바위를 쪼개고 운하를 만드는 등의 큰 공사, 토지 개간, 인공호 건설, 소택지 간척, 거대한 건물의 축조, 거대한 배의 건조 등 인간의 막대한 사업들을 생각할 때, 또 한 편으로는 이모든 것이 인류의 행복에 미친 참된 이득을 조금이라도 깊이 연구해볼 때,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불균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의 무분별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사리 분별을 못하고 어리석은 교만과 그지없이 공허한 자기 예찬을 위해 자연이 호의적으로 막아주었던 모든 참상을 오히려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pp. 171-172.


  인간은 본래 선량하며 나는 그러한 사실을 증명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토록 타락하게 만든 것은 그의 체질 속에 일어난 변화와 진보 그리고 그가 획득한 지식이 아닐까? 우리는 인간 사회를 얼마든지 찬미할 수 있으나 그 사회는 결국 사람들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겉으로는 상부상조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가능한 모든 해를 끼치려고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파멸시켜야 하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적이 되어야 하며 이해 관계의 충돌로 말미암아 사기꾼이 되는 상태가 과연 어떨 것인가를 반성해보아야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회는 각자가 타인에게 봉사함으로써 이득을 보게끔 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해를 끼침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얻지 않으면 그야말로 다행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pp. 172-173.


  사회 속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에게는 우선 생활필수품을, 다음에는 사치품을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에는 환락에 이어 엄청난 부와 시종과 노예가 따른다. 그는 잠시도 쉴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욕망이 자연적이고 절박하지 않을수록 정념이 점점 고조된다는 사실이며, 더욱 나쁜 것은 그것을 만족시키는 힘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자는 한참 동안 많은 재물을 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것을 착취하여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인간 사회, 적어도 모든 문명화된 인간 심정의 은밀한 의도를 담고 있는 도덕적인 그림이다. pp. 173-174.


  말살, 독살, 납치 등의 범죄와 그에 대한 처벌 역시 명백히 사유 제도의 탓, 따라서 결국은 사회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p. 174.


  사치는 치료하고자 하는 악보다도 훨씬 나쁜 치료법이다. 사치는 오히려 그 자체가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어떤 국가에서나 모든 악 가운데서 최악의 형태다. 사치는 자신이 창출해낸 무수한 종복들이나 부랑자들을 기르기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파멸시킨다. p. 176.


  사회와 그 사회가 발전시킨 사치는 자유 학예, 수공예, 상업, 문예를 낳는다. 이것들은 산업을 발달시키고 풍요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국가를 망치는 무용지물이다. p. 176.


  그러한 것들이 급기야는 가장 부유한 나라들까지도 벗어날 수 없는 모든 불행의 민감한 원인들이다. 산업이나 기술이 널리 보급되고 발전함에 따라 농민은 더욱 천대를 받고 몇몇의 사치를 위한 세금을 부담하면서 노동과 굶주림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마련이다. p. 176.


  나는 누군가가 마지막에, 인간이 발명한 기술이나 법률 같은 이 모든 위대한 것이 페스트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까 봐 두렵다. 우리에게 거주 공간으로 제공된 이 세계가 너무 비좁아지지 않도록 종의 지나친 번식을 억제하는 유익한 페스트 말이다. p. 177.


  사회를 파괴하여 내 것과 네 것의 경계를 없애고 숲으로 돌아가 곰들과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나의 적대자들이 내리는 결론이지만, 나는 그와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는 것에 대해 그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그에 대한 예방책을 마련하고자 한다. ...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저 태고의 원시적인 순진성을 되찾아보자. ... 인류의 악덕을 버리기 위해 그 지식도 버림으로써 인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정념이 원시의 순수성을 영원히 파괴해버린 나와 같은 인간들은 이제는 풀이나 도토리로 살아갈 수 없고 법률이나 통치자 없이 살아갈 수 없다. pp. 177-178.



  인간성을 탐구하는 자들이 뭐라고 하든지 인간의 지성은 정념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으며 누구나 알다시피 정념도 지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우리의 이성이 완성되는 것은 바로 이 양자의 활동에 의해서다. p. 63.



  그들[미개인들]의 욕망은 육체적인 욕구를 초월하지 못한다. ... 죽음과 그 공포에 대한 지식이란 인간이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 중의 하나다. pp. 63-64.



  ... 정신의 진보는 국민이 자연으로부터 받았거나 상황에 따라 국민에게 강요된 필요에 정확하게 비례하며 따라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재촉하는 정념에 비례한다. p. 64.



  요컨대 토지가 그들 사이에 분배되어 있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자연 상태가 조금도 소멸되어 있지 않는 한, 어떻게 그 같은 상황에서 땅을 경작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p. 67.



  모여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쓰이기 전에 인간에게 필요했던 유일한 언어는 ‘자연 그대로의 외침’이었다. ... 그들은 음성 어조의 변화를 증가시켰고 거기에 몸짓까지 덧붙였다. ... 또한 몸짓은 주의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주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마침내 몸짓 대신에 음성을 분절하여 발음하는 것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 이와 같은 대치(代置)는 모두의 동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또한 아직 훈련을 전혀 거치지 않아 조잡한 기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방식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원 일치의 동의에는 적절한 동기가 있어야 하며, 말의 사용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pp. 71-72.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관념은 단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인식될 수 없으며, 특히 지적 능력은 절들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일반적인 관념을 파악할 수 없다. ... 모든 일반적인 관념은 순전히 지적인 것이다. ... 만약 당신이 거기서 모든 나무에 공통된 것만을 보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무라고 할 수 없다. 순전히 추상적인 존재들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마음속에 그려지거나, 혹은 언술에 의해서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삼각형의 정의만이 삼각형의 참된 관념을 준다. 여러분이 머릿속에 하나의 삼각형을 그리자마자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삼각형이지 이미 다른 삼각형은 아니다. ... 따라서 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며 말해야만 한다. pp. 73-74.



  언어가 제정되기 위해서는 이미 결합된 사회가 있어야 했는지, 도는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 이미 발명된 언어가 있어야 했는지,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필요했는가 하는 문제다. p. 76.



  나는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중에서 어는 것이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지를 묻고 있다. ... 미개인은 자연 상태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본능 속에 갖고 있었으며,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훈련된 이성 속에 갖고 있었다. pp. 77-78.



  우선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서로간에 도덕적인 관계도, 분명한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아서 선인(善人)일 수도 악일 수도 없었으며, 악덕도 미덕도 가지고 잇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p. 78.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나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발달이나 법의 구속 때문이 아니라, 정념이 평정을 유지하고 악덕을 모르기 때문이다. ... 홉스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원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있어 인간의 강렬한 자기애가 크게 완화되도록, 또는 이 자기애가 생기기 전에 자기 보존의 욕구가 완화되도록 인류에게 주어진 원리다. 이 원리로 말미암아 인간은 공포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선천적인 감정에서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하게 된다. ...나는 지금 연민pitié에 대해 마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처럼 약하고 온갖 불행에 빠지기 쉬운 존재들에게 걸맞은 성향이다. 연민은 인간의 반성하는 모든 습관에 앞서는 것이므로 더욱 보편적이고 인간에게 유익한 미덕이며,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때로는 동물들도 뚜렷한 징후를 보이곤 하는 미덕이다. ... 『꿀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저자가 인간을 동정심 많고 감수성이 에민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예로 한 비통한 죄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냉정하고 치밀한 문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기뻐한다. 그 죄수는 한 마리 야수가 어린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 날카로운 이빨로 그 아이의 손발을 물어뜯고 꿈틀거리는 내장을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이 목격자라도 어찌 마음에 끔찍한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광경을 보고도 기절한 어머니나 곧 숨이 넘어가려는 어린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뻗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찌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pp. 79-82.



  이것은 모든 반성에 앞서는 자연의 순수한 충동이며, 또 아무리 타락한 풍속이라 하더라도 파괴하기 어려운 자연적 연민의 힘이다. ... 사실 너그러움이나 관대함 도는 인간애란 약자나 죄인 또는 인류 일반에 적용된 연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잘 생각해보면 친절이나 우정까지도 특정한 대상에 쏠린 변함 없는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는가? 동정심이란 우리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놓는 감정일 뿐이다. ... 사실 동정은 고통을 목격하는 동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과 마음속으로 하나가 되면 될수록 더욱 강해질 것이다. ...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 이 반성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 미개인에게는 이와 같은 훌륭한 재능이 전혀 없다. 그리고 지혜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무턱대고 인류 최초의 감정에 몸을 맡긴다. pp. 82-83.



  그러므로 연민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하면서 종 전체의 상호적 보존에 기여함이 분명하다.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깊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도와주러 나서게 되는 것은 바로 연민 때문이다. 연민은 자연 상태에서 법과 풍속과 미덕을 대신하며, 아무도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저항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이점을 누린다. ... 요컨대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원칙과는 별 관계가 없더라도 인간이 악을 행했을 때 느끼는 혐오감의 원인은 교묘한 논거 속보다 오히려 자연의 감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pp. 83-84.



  그들은 서로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 따라서 허영심도 신중함도 존경도 경멸도 모르고 지냈다. p. 84.



  인간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여러 가지 정념들 중에는 이성을 필요로 하는 열렬하고 격렬한 정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장애를 물리치며, 본래는 인류를 보존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면 인류를 파멸시키기 십상일 만큼 무서운 정념이다. p. 85.



  우선 정념들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억제를 위한 법률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p. 85.



  미개인들에게 이 감정[사람의 감정]은 거의 무가치한 것임에 틀림없다. ... 미개인들은 자연이 심어준 성욕을 따랐을 뿐이며, 자기가 자연에서 얻지 못한 취향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개인들에게는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좋은 것이다. p. 86.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그토록 자주 인간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오게 만드는 저 격렬한 열정을 사회 속에서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p. 87.



  결론을 내려보자. 원시의 인간은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고, 싸움도 교제도 없으며, 타인을 해칠 욕구가 없듯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어쩌면 동류의 인간을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그저 숲속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정념의 지배를 받을 뿐 스스로 자족하면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감정과 지적 능력만을 갖고 있었다. 원시의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눈으로 보아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것만 쳐다보았다. 그의 지능은 그의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발달하지 못했다. 우연히 그가 어떤 발견을 한다 해도, 그는 자신의 자식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수할 수 없었다. 기술은 발명자와 더불어 소멸했다. 교육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진보도 없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대가 이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세대는 언제나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으므로, 최초 시대의 모든 조야함 속에서 수백 년이 되풀이되며 흘러갔다. 종은 이미 늙었으나 인간 개체는 항상 어린애로 머물러 있었다. p. 89.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사회 상태보다 자연 상태에서 훨씬 적으며 아울러 자연적 불평등이 인류에게는 제도의 불평등에 의해 한층 증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90.



  그러나 원시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굴종과 지배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 게다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속의 쇠사슬이 있을 수 있겠는가? p. 91.


  

  굴종의 끈은 인간 상호간의 의존과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 필요성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이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는 이와 같은 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p. 92.



  이제 나는 그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을 인간 정신의 지속적인 진보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 이제 나는 인간 종을 손상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완성하고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듦으로써 사악하게 하며 마침내는 인간과 세계를 까마득한 출발점에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연을 검토하고 비교해보려 한다.p. 92.






        제 2 부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 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 무렵에 사태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 관념은 순차적으로 발생한 그 이전의 많은 관념들에 의존하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 한순간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 95.



  인간이 가진 최초의 감정은 자기 생존에 대한 것이며, 최초의 관심은 자기 보존에 대한 것이다. 땅에서 나는 생산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으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게 되었다. 굶주림이나 그 밖의 다른 욕구들이 그에게 갖가지 생존 방식을 차례로 경험하게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자기의 종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방식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난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러한 맹목적인 경향은 순전히 동물적인 행위만을 낳았을 뿐이다. p. 96.



  갓 태어난 인간의 상태는 이와 같은 것이었다. 최초에는 순수한 감각에 국한되어, 자연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자연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동물처럼 생활했다. 그러나 이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나타났고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 그는 자연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동물들과 싸우기도 했으며, 먹이를 두고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강자에게 양보했던 것을 다른 데서 보충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p. 96.



  인구가 증가하고 확산되면서 어려운 점들도 늘어났다. p. 97.



  우리가 표현하는 관계는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어떤 성찰,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안전에 가장 필요한 경각심을 가르쳐준 반사적인 조심성을 낳았다.

  이 같은 발전의 결과로 얻은 새로운 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에 대한 우월성을 자각하고 과시하게 했다. ... 이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눈길을 보냄으로써 비로소 자존심이라는 것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존재의 서열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던 중에 인류라는 자기의 종이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일찍부터 개인으로서도 첫째라고 자부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pp. 97-98.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과 동족들 사이 또는 자신의 이성과 자기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이 아직 모르고 있었던 그들과의 공통점까지 알게 되었다. ... 그들의 사고 방식이나 감정이 자기와 일치한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정신 속에 확립된 이러한 중요한 진리 때문에 그는 철학적 추론만큼이나 신속하고 확실한 예감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그들과 함께 지켜야 할 최상의 행동 규칙들을 지키게 되었다. p. 98.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호간의 약속과 그로 인한 이득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p. 99.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어느 지방이든 그 언어의 성립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발음이 명확해지고 합의에 의한 몇 가지 음들이 첨가됨으로써 그 지방 특유의, 하지만 조잡하고 불완전한 언어가 생겨났다. 그 언어는 오늘날 여러 미개 민족이 사용하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pp. 99-100.



  이와 같은 초기의 진보 덕분에 인간은 더욱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정신이 계몽됨에 따라 솜씨도 점점 향상되었다. ... 이윽고 인간들은 ... 돌도끼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이 돌도끼는 나무를 자르고 흙을 파고 나뭇가지로 오두막을 짓는 데 쓸모가 있었다. 사람들은 곧진흙 같은 것으로 그 오두막의 벽을 바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가족이 형성되고 구별이 생겨나고 일종의 소유 개념이 도입된 최초의 혁명기이다. p. 100.



  인간의 마음에 최초의 변화가 생겨난 것은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이 공동의 거처에서 함께 사는 새로운 상황의 결과였다. 함께 생활하는 습관은 인간이 체험한 가장 감미로운 감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부애와 부성애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가정은 상호간의 애착과 자유가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긴밀하게 결합된 하나의 작은 사회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일했던 남녀의 생활 방식에 처음으로 차이가 생겨났다. p. 101.



  그러한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한 도구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었고, 그들의 선조들이 알지 못했던 편리함을 얻기 위해 이 여가를 활용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꿈꾸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에게 부과한 최초의 멍에였고, 그들의 자손에게는 불행의 단초였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정신을 유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p. 101.



  ... 점차 서로 가까워져 모리를 이루고 드디어 각 지방마다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규칙이나 법률이 아닌 풍습과 성격의 공통성에 따라, 즉 같은 생활 양식이나 음식에 따라, 도는 기후의 공통된 영향에 따라 결합되어 있다. ... 젊은 남녀들이 이웃이 되어 오두막에 사록, 자연이 요구하는 일시적 교류가 곧 거듭되는 왕래로 인해 즐겁고 영속적인 또 다른 교류를 낳는다. ... 무의식중에 가치와 미의 관념을 얻게 되고 그것이 다시 좋고 나쁨에 대한 감정을 낳게 된다. pp. 102-103.



  여러 가지 개념과 감정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정신과 마음이 훈련됨에 따라, 인류는 점차 유순해지고 관계가 확대되고 유대가 강화되었다. ...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러한 최초의 선호(選好)에서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태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부러움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효모에서 생긴 효소가 마침내 행복과 무구(無垢)에 치명적인 화합물을 생성시켰다. pp. 103-104.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하여 존경이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형성되자, 누구나 자기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의범절의 의무가 미개인들 사이에도 생기게 되었으며 고의적인 범행은 모두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그 범행으로 인해 초래되는 손해보다는 인격을 모욕당했다는 점 대문에 더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관념들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하고 또 이들 민족이 이미 최초의 자연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인간은 본래 사악하므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규제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p. 104.



  우리는 사회가 형성되고 사람 사이에 여러 가지 인간 관계가 성립되자 이미 그들 사이에는 애초의 구조에서 물려 받은 것과는 다른 성질이 요구되었으며 도덕이 인간의 행위 속에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 원시 상태의 무위(indolence)와 우리 이기심의 극성스러운 활동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인간 기능 발달의 이 시기가 가장 해복하고 안정된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 인간이 그 상태에서 벗어난 것은 공동의 유용성을 위해서는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어떤 불행한 우연 때문일 뿐이다. p. 105.



  요컨대 그들이 혼자 할 수 있는 작업과 다른 사람의 협력이 필요 없는 기술에 전념하는 동안, 그들의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건전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계속해서 상호간에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렸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순간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곳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p. 106.



  토지의 경작은 필연적으로 토지의 분배라는 문제를 낳았으며 일단 소유가 인정되자 정의에 관한 최초의 규칙이 생겼다. ... 이러한 기원은 이제 막 생겨난 소유의 관념이 육체 노동 이외의 것에서 유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큼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다. ... 오직 노동만이 경작자에게 자신이 경작한 토지의 산물에 대한 권리를 적어도 수확기까지 부여하며, 따라서 토지에 대한 권리를 해마다 보유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토지의 점유possession가 반복되면 그것은 쉽게 소유로 전환된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 자연법에서 생겨난 권리와는 다른 ‘소유’라는 권리를 낳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p. 109.



  이리하여 자연적 불평등이 새로운 원인의 결합에 따른 불평등과 더불어 조금씩 전개되었다. p. 110.



  다시 말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체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에서 위압적인 호사(豪奢)의 과시와 기만적인 책략, 이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 마침내 인간은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진정한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열망 때문에 서로를 해치려고 하는 옳지 못한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더욱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친절의 가면을 쓰기 일쑤이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 pp. 111-112.



  이렇게 해서 가장 강한 자 또는 가장 궁핍한 자가 그의 힘이나 욕구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일종의 권리―그들이 볼 때 소유의 권리와 동등한 권리―로 생각함에 따라 평등은 깨지고 뒤이어 가장 끔찍한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 가장 강한 자의 권리와 최초의 점유자의 권리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투쟁과 살인에 의해 종식될 수밖에 없었다. 갓 태어난 사회는 더없이 끔찍한 전쟁 상태로 변해버렸다. p. 113.



  부자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유효한 이유나 자신을 방어할 충분한 힘도 없고, 한 사람 정도는 쉽게 짓누른다 해도 강도 떼에게는 오히려 짓밟힐 수밖에 없고, 상호간의 질투심 대문에 약탈의 공통된 희망으로 결집된 적들에 대항하여 자기와 동료들과 결합할 수도 없어서 만인에서 홀로 맞서게 되었다. 마침내 부자는 절박한 필요에 따라 인간의 정신 속에 스며든 적이 없는 가장 교묘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의 세력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 자신의 적대자들을 자신의 방어자들로 만들고, 그 적대자들에게 다른 준칙을 불어넣어 자연법이 자신에게 불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유리한 다른 제도들을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pp. 114-115.



  그 후 부자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쉽사리 생각해냈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말했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를 제지하며 각자에게 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해 단결합시다.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규칙을 정합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며, 어느 쪽도 차별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를 평등하게 서로의 의무에 따르게 하는, 말하자면 운명의 변덕을 보상하려는 규칙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힘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의 최고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현명한 법률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성원을 보호하고 방위하며,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영원히 우리를 단합시키는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p. 115.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심산으로 자신의 쇠사슬을 향해 달려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 제도의 이점을 느낄 만한 이성은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내다볼 정도로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p. 116.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러하거나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이다. p. 116.



  사람들은 세상 어디를 가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며, 누구의 머리 위에나 매달려 있는 검이 잘못되어 떨어질 때 목을 움츠려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기가 벌써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시민법이 공동체 성원들의 공통된 규칙이 되었으므로, 자연법은 서로 다른 사회 사이에서만 유지되었다. 이로써 자연법은 국제법이라는 명칭으로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자연적 동정심을 대신하는 것으로 약화되었다. pp. 116-117.



  이렇게 해서 서로간에는 여전히 자연 상태에 머무르고 있던 다양한 정치체들도 곧 개인을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 바로 그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 이것이 인간이 여러 사회로 분할된 데서 엿볼 수 있는 최초의 결과다. pp. 117-118.



  몇몇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는 강자의 정복이나 약자의 단결에서 유래한다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 그러나 내가 방금 설명한 원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첫째, 앞에서 말한 강자의 정복이라는 경우에서 정복의 권리 그 자체는 아무 권리도 아니므로 다른 권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 상태로 다시 돌아간 국민이 자진하여 정복자를 자기의 우두머리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 정복자와 피정복자인 국민은 언제까지나 서로 전쟁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 둘째, 약자의 단결이라는 경우를 놓고 볼 때, 이 ‘강하고’ ‘약하다’는 말 자체가 애매하다. ... 셋째, 자유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가 교환으로 얻을 것이 전혀 없는데도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을 자진하여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부자는, 이를테면 자기 재산의 모든 부분에서 민감하므로 손해를 입기가 훨씬 쉬웠다. pp. 118-119.



  정치 상태란 거의 우연의 소산이며 출발부터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점이 발견되고 대책이 제시되긴 했지만 구조적인 결함 자체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p. 119.



  국민들이 애당초 아무런 조건이나 반대 급부 없이 절대적 지배자에게 몸을 내맡겼다거나, 자존심이 강하고 쉽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공동의 안전을 위해 생각해낸 최초의 수단이 노예 상태에 뛰어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다. ...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란 한쪽이 다른 쪽에 예속되는 것이므로, 통치자의 도움을 빌려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모두 통치자의 손에 맡겨버린 것은 양식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 국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가 그에게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모든 국법의 기본적인 준칙이다. pp. 120-121.



  나는 노예가 된 인민이 쇠사슬에 매인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예속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p. 122.



  몇몇 사람들은 전제적인 정치 체제와 모든 사회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

  ... 아버지를 존경할 의무는 있어도 아버지에게 복종할 의무는 없다. ... 시민 사회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이 시민 사회에서 주된 힘을 끌어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개인이 여럿의 아버지로 인정받은 것은, 그의 둘레에 여럿이 모여 있을 때뿐이었다. pp. 122-123.



   이와 같이 권리를 통해 사실을 검토해보면, 전제 정치의 자발적인 성립이라는 주장에는 확실성이나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의무를 지우고 다른 한쪽에는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무를 지는 쪽만 손해를 보는 이러한 계약의 유효성을 납득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하겠다. ... 다만 이렇게까지 자기의 품위를 떨어뜨려도 아무렇지 않는 자들이 무슨 권리로 자손을 똑같은 불명예에 복종시킬 수 있으며, 또한 자손들이 그들의 적선으로 얻게 된 것이 아닌 자유라는 재산―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을 무슨 권리로 자손들 대신 포기하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pp. 123-125.



  푸펜도르프는 “인간은 합의나 계약에 따라 재산을 남에게 양도하듯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첫째, 내가 양도하는 재산은 나와 전혀 무관하여 설령 남용되더라도 상관이 없으나, 남이 내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며, 억지로 강요되어 저지르는 악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범죄의 도구가 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유권은 사람 사이의 합의와 제도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나 자유 같은 자연의 본질적인 선물은 그렇지 않다. ... 자유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자연에서 받은 선물이므로, 어느 부모도 자식들에게서 이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pp. 125-126.



  여기서는 다만 세상의 통념에 따라 정치체의 성립을 인민과 그들이 선택한 통치자 사이의 참된 계약이라고 보는 데서 그치고자 한다. 이 계약에서 당사자 양측은 그 속에 명시된 법규들을 준수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쌍방의 결합은 확고해진다. 인민은 사회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그들 모두의 의지를 하나의 의지로 결합시켰다. 그러므로 이 의지가 표명되고 있는 모든 조항은 각각 기본적인 법률이 되어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예외 없이 의무를 부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는 법률의 집행을 감시하는 의무를 맡은 행정관의 선정과 그 권력을 규정하고 있다. 이 권력은 정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되지만 그것을 변경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법률과 그 집행자들을 종경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명예가 주어지고, 집행자 개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선정을 위해 기울인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여러 가지 특권이 부가된다. 대신 행정관은 자기에게 맡겨진 권력을 오직 맡긴 자의 의향에 따라 행사하고 각자가 자기의 소유물을 언제나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와 같은 정치 구조가 갖는 불가피한 폐해를 경험으로 알지 못하게 되거나 인간 마음에 대한 지식을 통해 예상하기 전에는 이 정치 구조의 유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 그 유지에 가장 큰 이해 관계를 갖는 만큼, 그 정치 구조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pp. 126-127.



  계약을 그것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취소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 어느 쪽이든 상대가 그 계약 조건을 어기거나 그 조건이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언제고 계약을 포기할 권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이 원칙을 근거로 구축될 수 있는 것 같다. pp. 128.



  정부의 여러 가지 형태는 그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이 수립되던 시기에 개개인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크고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 p. 129.



  인민은 이미 종속과 휴식이 생활의 안락에 길들여져 쇠사슬을 끊을 만한 힘도 없었으므로 자기들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예속 상태를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 p. 130.



  이러한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의 설정이 제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p. 130.



  정치상의 차별은 필연적으로 시민들 간의 차별을 가져온다. 인민과 통치자들 사이에 증가되어가는 불평등은 이윽고 개인들 사이에서도 느껴지게 되며, 정념이나 재능에 따라, 그리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바뀐다. p. 131.



  개인이 동일한 사회 속에 결합되어 서로 비교하고 끊임없이 이용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차별을 고려하게 되면, 곧 그들 사이에 신용과 권위의 불평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부, 신분이나 지위, 권력, 개인적인 장점이 주요한 구분 기준이 되며 여기에 따라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위치를 차지하므로, 나는 이들 서로 다른 세력의 조화나 충돌이 국가의 구성이 좋은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임을 증명할 수 있다. pp. 132-133.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여 애쓴 결과 오히려 내부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p. 134.



  신분과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하찮은 학문에서, 이성과 행복과 미덕에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p. 135.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를 갖게 된다. ... 전제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이미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 이 자연 상태와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자연 상태의 차이는 후자가 순수한 자연 상태인 반면 전자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두 상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정부의 계약은 전제군주제에 의해 너무 많이 파기되어 있으므로, 전제 군주는 자기가 최강자로 있는 동안만 지배자이다. pp. 135-136.



  미개인은 안식과 자유만을 추구하고 한가로이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스토아 학파의 아타락시아ataraxia도 미개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항상 활동하면서도 땀을 흘리고 불안해하며 더욱더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 사실상 이 모든 차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pp. 138-139.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 p. 140.

  



에드워드 윌슨,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책의 구절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유전적으로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질문거리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p.46


  유전적으로 결정된 형질이란 최소한 하나 이상의 유전자가 존재함으로써 다른 형질들과 구별이되는 형질을 말한다. p. 46


  이런 사실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유전적 토대 위에 있다는 가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행동이 근연 관계에 있는 종들과 공유하고 있는 일부 유전자와 인간 종 고유의 유전자로 조직된다는 가설과 일치한다. p. 63


  유전자 가설의 핵심은 신다윈 진화론에서 직접 이끌어낸 명제, 즉 인간 본성을 형성하는 형질들은 인간 종이 진화해 온 기간만큼 적응을 거쳐왔고, 그 결과 유전자들은 그 형질들의 발달 성향을 지닌 운반체 집단을 통해 퍼진다는 명제이다. 적응이란 간단히 말해, 한 개체가 형질을 드러내지 않을 때보다 드러냈을 때 다음 세대에 그의 유전자를 발현시킬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본 개체들의 차등적 이점을 <유전자 적합성>이라고 한다. 유전자 적합성은 개체의 생존 능력 강화, 개체의 번식 능력 강화, 공통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는 친족들의 생존 및 번식 능력 강화라는 세 가지 기본 요소로 구성된다. pp. 63-64


  다윈이 자연선택이라고 부른 이 과정은 인과 관계의 꽉 짜인 순환을 의미한다. 만일 어떤 유전자를 소유한 개체에게 특정 형질이 발현된다고 예정되어 있다면, 즉 그 형질이 어떤 형태의 사회적 반응을 낳고 다시 우월한 적합성을 수반한다면, 그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더 많이 발현될 것이다. 자연선택이 무수한 세대 동안 계속된다면, 적합한 유전자는 집단 전체에 퍼질 것이고 그 형질은 종의 특징이 될 것이다. 수많은 사회생물학자, 인류학자, 기타 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인간 본성이 자연선택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p. 64.


  워딩턴은 발달이란 고지대에서 해안까지 뻗어 있는 경관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눈동자의 색깔, 오른손잡이 또는 왼손잡이, 분열증 같은 형질의 발달은 경사지에서 공을 굴리는 것과 비슷하다. 각 형질은 경관의 서로 다른 부분을 가로질러, 서로 다른 형상의 골짜기와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눈동자의 색깔에서는 청색이나 홍채 색소에 해당하는 유전자들이 출발점이 되고, 그 지형은 하나의 깊은 통로가 된다. 그 공은 하나의 운명을 향해 곧장 굴러간다. 즉 일단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면 한 종류의 색깔만이 가능하다. pp. 96-97.


  인간 행동의 발달 지형은 훨씬 더 폭넓고 더 복잡하지만, 그래도 지형인 것은 틀림 없다. ... 경관은 은유일 뿐이고, 더 복잡한 현상을 다루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관한 중요한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그 행동의 결정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각 행동을 유전자로부터 최종 산물까지 진행되는 발달 과정으로 나누어 처리하고 추적해야 한다. pp. 97-98


  인간의 정신은 경험을 통해 선과 점으로 뒤엉킨 그림들이 그려지는 백지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대안 중에 어떤 특정한 대안에 먼저 다가가서 본능적으로 특정한 하나를 선택하고, 유아에서 어른으로 자동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화하도록 정해진 신축적인 계획표에 따라 육체한테 어떤 행동을 하라고 촉구하는, 주변 환경을 빈틈없이 경게하는 탐색자, 즉 자치적 의사 결정 기구로 기술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오랫동안 해온 선택의 축적, 그것들의 기억, 앞으로 해야 할 선택에 대한 심사숙고, 각인된 감정들의 재경험, 이 모든 것이 정신을 구성한다. 한 개인의 의사 결정은 그를 다른 인간과 구별해 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결정에 따라붙는 규칙들은 모든 개인이 내린 결정들을 폭넓게 중첩시키고, 그리하여 인간 본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에 충분하고 강력한 수렴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빈틈이 없다. pp. 105-106


  하지만 개인의 세세한 행동들을 단기적으로라도 예측하려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술이 필요할 것이고, 그런 예측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지성을 지닌 존재의 능력을 넘어설 것이다. 고려할 변수들이 수백 가지 아니 수천 가지가 되면, 그 중 어느 한 변수가 지니는 미미한 부정확성이라도 정신 작용의 일부나 전체를 바꿔놓을 만큼 확대되기 쉽다.
 
게다가 아원자 입자에 적용되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여기에도 비유적으로 적용된다. 관찰자가 그 행동을 더 깊이 탐구할수록, 그 행동은 탐구 행위에 의해 더욱 변형되며 그 행위의 의미 자체는 선택한 측정 수단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관찰자의 의지와 운명은 관찰 대상자의 그것과 연계된다. 엄청난 수의 체내 신경 작용들을 동시에 그리고 원격적으로 기록할 능력이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관측 장치만이 그 상호작용을 허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수학적 비결정성과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 어떠한 신경계도 다른 지능 체계의 미래를 의미 있는 수준까지 상세히 예측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 법칙일지 모른다. ...
  인간 정신 같은 복잡한 활동을 예측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근본적인 어려움은 원래의 자료가 뇌의 심층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변형된다는 점이다. pp. 114-115


  타협안은 인지심리학자들이 스키마 또는 지식 구조라고 부르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스키마는 뇌 속에 있는 타고난 또는 학습된 구조로서, 신경 세포에 입력된 자료들은 이 스키마와 비교된다. 실제 패턴과 예상 패턴이 일치하면 몇 가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스키마는 좋고싫음에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파악하고 걸러내, 정신이 환경의 특정 부분을 더 생생하게 지각하고 특정 결정을 더 선호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개인의 정신적 <성향>에 기여할 수 있다. 스키마는 감각 기관에 실제로 입력된 것 중 누락된 부분을 세세하게 채울 수 있고, 현실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정신속에 창조할 수 있다. p. 117.


  가장 중요한 점은 뇌 속의 스키마가 의지의 물리적 토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의 활동은 되먹임고리를 통해 유도될 수 있다. 감각 기관이 뇌의 스키마로 전달하는 신호들은 감각 기관으로 되먹임되며, 행동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스키마가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순환은 반복된다. ... 정확히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증거는 없다. 지금은 그런 근본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p. 118

 

[끄적임]

사회 생물학과 진화론. 혁신적이지만 확신적이진 않다. 아직은 많은 주장들이 추정적 진술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연구가 훨씬 더 진척된다면, 추정이 확신으로 변모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키마 또는 지식 구조". 윌슨은 물리적  토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물리적 토대는 아직 아닌 것 같다. 사회 생물학의 문외한으로서 이 내용을 접했을 때에는, 선이해(pre-understanding)의 작동으로 말미암아,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형식의 일종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윌슨은 물리적 토대라 말한다. 물리적 토대라 한다면, 스키마가 뇌의 물리적 구조 중 일부일 것이다. 윌슨이 정확히 그런 뜻으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신뢰하는 심리학자 중 한 명에게 스키마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냐고 했다. 그러나 대답은 스키마가 학자마다 달리 쓰인다는 것이다. 이어진 질문은 스키마는 어떻게 획득되느냐는 것이었고, 대답은 학습에 의한 것이라 했다. 확인해야 할 것은, 윌슨이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느냐는 것인데, 이 책의 내용으로는 아직 불분명하다.

  경관의 비유는 유전자에 결정되는 특징을 상당히 정확히 묘사하는 것 같다. 유전자에 의해 100%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계가 존재한다. 이것이 답이다.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이지만, 유전자는 인간의 한계를 노정한다.

  자유 의지의 가능성, 즉, 의지의 비결정성을 윌슨은 두 가지 이유에서 지지한다. 수학적 비결정성(수많은 변수)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그러나 수학적 비결정성은 불필요한 것 같다. 신경의 작동이 전기화학 반응이라면, 이미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될 테니까. 확률적으로만 예측이 된다. 수학적 비결정성은 변수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다. 만일 수학적 비결정성이 redundant하지 않도록 해석하자면, 그러한 확률적 예측마저도 불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변수 때문에 사건의 인과적 연쇄를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수학적 비결정성을 redundant하게 간주한다면, - 이것은 철학의 사고 실험에 의해 가능하다 - 즉,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무한한 요소들을 우리가 안다고 가정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가 물리적으로 결정되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 의지를 정당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정한 확률적 예측 내에 존재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확률적 예측을 벗어나는 부분, 예를 들어 그것이 약 5%라 한다면, 자유 의지는 그 5% 내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유 의지는 elbow room 정도의 여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윌슨은 물리적 토대, 물질적 토대를 중요시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 이래 중요한 변혁의 과정을 따르는 노선이다. 그럼에도 의식의 문제에서는 여전히 철학의 일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너무 단순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창발론이 지금은 어쩌면 환원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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