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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L. A. Hart, “Are there Any Natural Rights?”, Theories of Rights, ed. by Jeremy Waldr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pp. 77-90.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LXIV, No. 2 (April, 1955), pp. 175-191)



Thesis


도덕적 권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하나의 자연권, 즉,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는 평등한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권리가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

권리가 평등한 권리라는 것과 일관된(consistent) 일정한 특수한 조건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선택할 능력이 있는 어떤 성인도

i) 강제(coercion)나 제재(restraint)를 막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강제나 제재를 모든 타인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권리를 갖는다.

ii) 타인에게 강제하거나 제제하거나 또는 그들을 해할 목적이 아닌 어떤 행위도 할 자유가 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는 평등한 권리를 자연권(natural right)으로 기술하는 두 가지 이유

i) 이 권리는 모든 사람들이 선택할 능력이 있다면 갖는 권리이다. 모든 인간은 이 권리를 인간으로서(qua men) 갖는다.

ii) 이 권리는 사람들의 자발적 행위에 의해 창출되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도덕적 권리들은 자발적 행위에 의해 창출되고 부여된다.)


부연: 이 thesis는 어떤 도덕적 권리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하나의 자연권이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조건적 주장이다.



I

(A) 도덕적 권리와 법적 권리의 밀접한 관계

  권리 개념은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을 때를 결정하는 것에, 그래서 어떤 행위가 강제적 법 규칙들의 주제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에 관계되는 도덕의 영역에 속한다.

  정의, 공정성, 권리와 의무(obligation)와 같은 도덕 개념들의 특징은 정의로운 것, 공정한 것이 행해질 것을 보장하기 위한 강제력(force)의 사용에 특수한 일치(congruity)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congruity의 상황에서만 타인의 강제력이 정당하다.


Kant:

officia juris - duty에 대한 존중이 그 자체로 의지의 규정적 원칙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 도덕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의무

officia virtutis 도덕 원칙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도덕적 가치(worth)가 없는 의무

⇒ Hart의 해석: 인간의 자유의 적절한 분배를 규제하는 원칙들, 이것만이 인간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냐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유의 분배를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만든다.


Hart가 제시하는 도덕적 권리의 중요한 특징

i) 도덕적 권리의 소유자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도덕적 정당화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ii) 그러한 정당화를 가지는 것은 그가 타인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그 행위가 어떤 도덕적 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위할 것인지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하도록 허용된다면, 인간 자유의 일정한 분배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B) 도덕적 권리가 ‘duties’와 상관적(correlative)인지의 문제를 검토하자.

‘X가 -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Y가 -할 (하지 말아야 할) duty가 있다’를 함축하고, 그것에 의해 함축된다.

        ‘X가 -에 대한 권리가 있다’ ⇔ ‘Y가 -할 (하지 말아야 할) duty가 있다’

그런데 X가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X나 다른 사람이 어떤 duty를 지닌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는 의미가 있다. 이런 종류의 권리를 법학자들은 ‘자유들’이라 부르며 상관자로 ‘duty'를 갖는 권리들과 구별했다.

  자유라 칭해지는 권리들은 사회적 삶의 영역, 즉 경쟁이 최소한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하지 않은 것으로 기능하는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길에 떨어진 돈을 타자가 줍도록 허락하기 위해 어느 누구도 ‘duty’ 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제적 경쟁의 도덕적 적절성(propriety)은 ‘X가 -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단지 X가 -하지 않을 어떤 ‘의무’ 하에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최소한의 의미에서의 ‘하나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C) 모든 도덕적 ‘duties’에 대해 상광적인 도덕적 권리들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

모든 duties에 상관적인 도덕적 권리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이 ‘duty’의 수행으로 인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권리를 가짐에 대한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상관적이라 생각한다면) 따라서 우리가 잘못 대우하지 말아야 할 ‘duty’를 수행하여 이익을 얻는 동물이나 아기들은 적절한 대우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런 추론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약속으로부터 발생하는 도덕적 상황: 권리를 갖는다는 개념과 ‘duty’의 수행에 의해 이익을 얻는다는 개념은 동일하지 않다. X가 Y에게 그간의 호의에 대해 Y가 없을 때 Y의 어머니를 돌보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거래에서 권리들이 발생하지만,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Y에게이지 권리를 갖고 있는 어머니에게가 아니다. 확실히 어머니는 X가 가진 obligation과 관련된 당사자이고, obligation의 수행으로 이익을 얻을 당사자이다. 그러나 Y의 어머니를 돌볼 X의 obligation은 Y에 대해서이다. 따라서 X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X가 무시하고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은 Y이지 Y의 어머니가 아니다. X에 대한 도덕적 주장을 하는 사람도 Y이다. Y는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게 할 권리가 부여된(entitled) 것이고, 그 주장을 철회하고 그 obligation으로부터 X(본문에는 Y이나 X가 맞는 듯)를 해방시켜 주는 것은 Y이다. X가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를 선택에 의해 결정할, 그리고 X의 선택의 자유를 이런 방식으로 제한할 위치에 도덕적으로 놓인 것은 Y인 것이다. 그래서 Y가 하나의 권리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을 적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이익을 얻을 것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위와 같은 사실이다. 약속 받은 사람과 이익을 얻는 사람이 동일하다고 해서 ‘권리를 가짐’과 ‘duty의 수행으로 인한 이익을 얻음’이 동일함을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권리를 갖는 사람은 ‘duty’가 발생하게 되는 거래, 이전 상황 또는 당사자들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서 발견된다.


(D) 권리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무엇이 행해져야 할지를 명령하는 행동 codes

자연법 사상가들: 자연권이 아니라, 준수하면 인간을 이롭게 할 자연적 duties들이 있다고 생각(인간의 자연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 이런 codes들이 권리들을 창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런 행동 codes를 권리들을 창출하는 게임 규칙들과 대조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도덕적 code조차도 권리들을 정립할 필요가 없다. 십계명이 가장 중요한 예이다. 십계명이 권리들을 부여하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놀라운 해석일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십계명에 대한 복종은 단지 신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due 또는 owed된 것으로 간주되고, 불복종은 단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개인들에 대한 하나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면 십계명은 일정한 행동 유형을 배제하기 위해서만 고안된 gudq법으로 읽히기를 그만두고 개인들이 타자들로부터 일정한 행동을 요구할 수 있는 정도를 규제하는 규칙으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권리들은 전형적으로 개인들에 의해 소유되거나 개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표현들은 도덕 규칙들을 단지 행동을 명령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개인들의 도덕적 적절성(propriety)을 형성한다는 이해를 반영한다. 규칙들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될 때에만, 우리는 옳고 그른 행위들뿐만 아니라 권리들과 잘못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II

‘내가 -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두 유형의 상황

(A) 권리 주장자가 다른 사람의 자유의 간섭에 대한 정당화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정당화를 갖지 못한다.) 예) ‘나는 내 서비스에 대해 당신이 약속한 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

(B) 권리 주장자가 타인에 의한 어떤 간섭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반대하는 경우. 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다.’


(A) 특수한 권리들(Special rights)

  권리들이 개인들 사이에 특수한 거래로부터 발생할 때 권리를 가진 사람과 obligation을 가진 사람은 특수한 거래 당사자들에 제한된다. 이런 권리들을 특수한 권리들이라 부를 것이다. 이 권리들은 모두에게 obligation을 지우는 권리들로 생각되는 도덕적 권리들과 구별된다.

(i) 약속으로부터 발생하는 특수한 권리들

약속에 의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obligations를 발생시키고 약속을 한 사람에게 권리를 창출하거나 부여한다. 이 경우 우리는 어떤 행위와 관련된 당사자의 선택의 자유의 도덕적 독립성을 변경시키고 새로운 도덕적 관계를 창출한다. 그래서 약속을 받은 사람이 약속해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만든다.


약속으로부터 파악되는 모든 특수한 권리들의 특징 두 가지

i) 권리와 obligation이 발생하는 이유는 약속된 행위가 그 자체로 특정한 도덕적 질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당사자들 간의 자발적 거래 때문이다.

ii) 당사자들의 동일성(identity)이 핵심적이다.


(ii) 동의에 의한 권리 부여: 권리의 양도

  당신이 내 이익을 돌보도록 동의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했지만, 당신이 간섭한다고 불평할 수 없는 그런 권리를 당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권리의 양도이다. 이 경우에도 권리를 양도 받은 사람만이 이런 [간섭할 수 있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특징으로 확인된다.


(iii) 제한의 상호성(mutuality of restrictions)

  제한의 상호성을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정치적 의무(political obligations)를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이 동의나 약속과 같은 권리-창출 거래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규칙에 따라 어떤 공동의 기획을 수행하고 따라서 그들의 자유를 제한할 때, 이러 재한에 복종해온 사람들은 그들의 복종에 의해 이익을 얻어온 사람들로부터 유사한 복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규칙에 복종할 moral obligation은 사회의 협력적 구성원들 때문이고, 그들은 복종에 대한 상관적인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사회 계약론은 법에 대한 복종의 의무(obligations)가 benevolence의 특수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의 구성원들이 상호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의 실수는 약속과 같은 패러다임 사례를 권리를 창출하는 상호 제한의 상황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iv) 부모와 자식과 같이 특수한 자연적 관계의 경우 권리와 obligation이 창출된다.


(v)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속되어 있는 obligation에서 한 사람이 면제되지만, 상관적인 obligation이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아닌 경우 특수한 자유들이 특수한 권리들과 구별된다. 타인에게 간섭할 자유가 아니라 권리가 주어진 경우들은 licence가 그 권리를 부여한 사람에 의해 마음대로 철회될 수 있지 않은 경우들이다.



(B) 일반적 권리들(General rights)

  일반적 권리들은 정당화되지 않은 간섭이 예견될 때 그 간섭이 정당화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 주장되는 권리들이다.

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다.’, ‘나는 os 마음대로 숭배할 권리가 있다.’


일반적 권리와 특수한 권리의 공통점

i) 이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타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즉, 그가 간섭해서는 안 됨을 결정하기 위한 도덕적 정당화를 갖는다.

ii) 권리 주장자가 행위의 수행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는, 그 행위의 성격으로부터 도덕적 정당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권리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의 예시라는 점이다.


일반적 권리와 특수한 권리의 차이점

i) 일반적 권리는 특수한 관계나 거래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ii) 일반적 권리는 특정한 사람이 갖는 권리가 아니라 선택할 능력이 있는 모든 인간이 갖는 권리이다. (특수한 권리를 발생시키는 특수한 조건들이 없는 상황에서)

iii) 일반적 권리는 간섭하지 말아야할 상관물로서 obligations를 갖는데, 모든 이들은 이 obligations에 종속된다.


일반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수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특수한 조건들에 의해 구성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일반적 권리의 주장은 직접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울 권리를 평등하게 갖는다는 원칙에 호소하는(invoke) 것이다.

특수한 권리의 주장은 그 원칙에 간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III


타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이 도덕적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권리 개념은 도덕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런 정당화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권리’를 사용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도덕적 정당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이것이 도덕적 권리들의 인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짐에 대한 인정이 함축됨을 정립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리를 구성시킬 수 있는 간섭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의 유형과 관련하여 ‘하나의 권리’의 의미에 내재하는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그 원칙은 전적으로 공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간섭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는 일정한 특수한 조건들에 제한되어 있음이 분명하고, 이것은 ‘하나의 권리’의 의미에 내재해 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우리가 도덕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근거에 따라 간섭을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사실 간접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평등한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우리의 정당화로 호소하고 있다.


 

한비자(韓非子), 『이야기의 숲에서 한비자를 만나다』, 이상수 역 


1. 한비자의 인성론


“이익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맹분이나 전저와 같은 장사가 된다.” p. 94.


“오늘날 군주가 부유한 사람으로부터 거둬들여서 가난한 집안에 베푼다는 것은, 노력하고 절약하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낭비하고 게으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p. 99. [근검절약의 강조 및 복지국가에 대한 반대?]


“서로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면 결국 기대에 어긋나 서로 책망하게 되지만,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일이 되레 잘 진행된다.” p. 101 [자기이익 추구]


“이익이 있는 곳으로 백성들이 모여들고, 명성이 빛나는 곳에 선비들이 목숨을 바친다.” p. 101.


“사람에게는 털이나 깃이 없기 때문에 옷을 입지 않으면 추위를 견딜 수 없다. …… 장과 위를 뿌리 삼아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이로움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로움을 추구하는 마음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몸의 근심이다.” p. 106.


“법을 제정하는 것은 증삼이나 사어 같은 인격이 뛰어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한 게 아니라, 보통의 군주가 능히 도척과 같은 간악한 무리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부절을 사용하는 것은 미생처럼 신의를 지키는 이를 위한 예방책이 아니라 뭇사람들이 서로 속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p. 117.




2. 국가의 존속 또는 권자의 보존을 위한 필수 조건


(1) 권력(勢): 미자하와 용의 역린 이야기(p. 268?)

(2) 법치(法治)

(3) 통치술(術)


“대저 몸소 권력의 손잡이를 쥐고 행사하려 하지 않고 신하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자 하니 졸린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p. 139.


“신하에 대한 통제력이 군주 자신에게 있을 때 군주가 ‘무게가 있다(重)’라고 하고, 군주가 자기 지위를 떠나지 않을 때 군주가 ‘안정적이다(靜)’라고 한다. 군주가 무게가 있으면 능히 가벼운 신하들을 부릴 수 있으며, 군주가 안정적일 때 능히 떠다니는 신하들을 부릴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에서 말하기를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며, 안정됨은 떠다님의 군주가 된다”라고 했다.” p. 153.


“권력이란 군주의 연못이다.” p. 153.


“권력에 의지해야지 신뢰 관계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 통치술에 의지해야지 신뢰 관계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p. 154.


“대저 재능이 있더라도 권세가 없다면 비록 현명한 자라 하더라도 어리석은 자를 통제할 수 없다. …… 짧은 목재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위치 때문이고, 어리석은 자가 현명한 자를 통치할 수 있는 것은 권세 때문이다.” p. 157.


“신하는 군주에 대해 골육과 같은 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매여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p. 158.


“밝은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는 수단에는 두 가지 손잡이가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손잡이란 형벌과 덕(德)을 말한다. 형벌과 덕이란 무엇인가. 처벌하고 잡아 죽이는 것을 형벌이라 하고, 칭찬하여 상을 내리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 오늘날 군주가 상과 벌의 위엄과 이로움이 자기로부터 나오도록 하지 않고 신하의 말을 들어 상벌을 내린다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신하를 두려워하고 군주는 우습게 여길 것이며, 그 신하만 따르고 군주는 버릴 것이다. …… 군주는 형벌과 덕으로서 신하를 제압하는데, 지금 군주가 형벌과 덕을 버리고 신하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한다면, 군주는 도리어 신하에게 제압당할 것이다.” p. 162.


“포상과 처벌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로운 도구다. 군주가 이것을 장악하면 신하를 통제할 수 있지만, 신하가 이것을 장악하면 군주를 이기게 된다.” p. 164.


“군주가 통치술을 쓰면 대신들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게 되며, 총신들이 권력을 빙자해 사리사욕을 채울 수 없게 된다. 관리들이 법을 집행하면 떠돌이 백성들이 서둘러 농경지로 돌아오고, 유세하던 선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의 진영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법과 술이라는 것은 뭇 신하들과 선비와 백성의 재앙인 셈이다.” p. 165.


“지금 신불해는 통치술을 말하고, 공손앙은 법치주의를 말한다. 통치술이란 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고 신하가 말하는 것에 따라 그 실천 여부를 추궁하는 것이며,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서, 뭇 신하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가 장악해야 하는 일이다. 법치주의라는 것은, 관청의 문헌 보관소에 법률과 명령을 비치해두고, 백성들의 마음에 형벌이 새겨지도록 하여, 법령을 신중히 지킨 이에게 상이 주어지고 법령을 어긴 자에게 벌이 내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하가 따라야 하는 규범이다.” p. 169.




3. 한비자의 법치주의와 그 실현 조건


- 신도: “현명한 사람이 못난 사람에게 굽히는 것은 권력이 약하고 지위가 낮기 때문이며, 못난 사람이 능히 현명한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권력이 강하고 지위가 높기 때문이다. …… 나는 이로써 권력과 지위는 기댈 만한 것이지만, 현명함이나 지혜로움은 부러워할 것이 못 됨을 알았다. …… 이로써 본다면 현명하고 지혜로움은 뭇사람들을 복종시키기에 족하지 않지만, 권력과 지위는 현명한 사람조차 굴복시키기에 족한 것이다.” p. 118.

  반론: “현명한 사람이 그것[권력]을 사용하면 세상은 다스려지고, 못난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 대저 권력이라는 것은 다스리는 데에도 편리하지만 어지럽히는 데에도 편리한 것이다.” p. 119. [재능이 중요하다. 권력은 객관적 조건일 뿐이다.]

  재반론: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권력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나갈 수 있는 권력이다. …… 세상의 보통 통치자는 중간치 수준의 존재들이 끊어지지 않고 나온다. 내가 여기서 권력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 중간치 수준 통치자들을 위한 것이다. …… (군주가) 법을 지키고 권력을 놓치지 않으면 잘 다스려지며, (군주가) 법을 어기고 권력을 놓치면 어지러워진다. …… 그러니 권력의 효용이 충분하다는 게 분명한데, ‘반드시 현명한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다. …… [위 논객이] 정치에 대해 말할 때는 요임금이나 순임금이 권력을 잡지 않으면 반드시 걸임금이나 주임금이 권력을 잡아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런 논법은 이 세상 요리는 엿이나 꿀처럼 달지 아니하면 나머지는 모두 씀바귀나 두루미 냉이처럼 쓴맛이 날 것이라는 주장과 같다.” pp. 121-124.


“법술을 버리고 마음에 따라 다스리도록 한다면 요임금이라도 한 나라를 바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pp. 126-127.


“법도를 집행한다는 것은 공을 드러내면 상을 주고 능력에 따라서 관작을 수여하는 것입니다.” p. 224.


“법치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확립되면 똑똑한 자가 어리석은 자의 것을 빼앗을 수 없고,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짓밟을 수 없으며, 다수가 소수에 대해 횡포를 부릴 수 없게 된다.” p. 228.


“작은 신의가 이뤄져야 큰 신의도 세워진다. 그러므로 밝은 군주는 신의를 쌓는 데 힘쓴다.” p. 228.


“다스리는 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쓰고, 적은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수단은 버린다. 그러므로 덕을 버리고 법에 힘을 쏟는다.” p. 229.


“밝은 군주는 눈먼 상을 아무렇게나 내리지 않으며, 처벌할 것을 느슨하게 풀어주지 않는다. …… 진실로 공이 있다면 비록 관계가 멀고 신분이 천한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진실로 잘못이 있다면 비록 관계가 가깝고 아끼는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처벌한다.” p. 230.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하의 사조직을 분쇄해야 한다. 사조직이 분쇄되지 않으면 신하는 점점 더 많은 세력을 규합해나갈 것이다.” p. 231.


“법령은 군주의 주요한 통치 수단이다. 반드시 공사의 구분을 밝혀서 법제를 분명하게 하고 사사로운 은혜를 제거해야 한다. …… 사사로운 의지가 행해지면 어지러워지고 공변된 대의가 행해지면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공과 사는 구분이 있다. …… 군주는 계산을 가지고 신하를 기르며, 신하 또한 계산을 가지고 군주를 섬긴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 맺음은 일종의 계산이다. …… 군주와 신하란 이처럼 계산을 바탕으로 결합한 사이다. 대저 어려운 사태에 임하여 필사적인 태도로 임하고 지혜와 힘을 다 짜내는 것은 법률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공과 사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 되고 법률과 금지령은 엄격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pp. 233-235.


“대저 거울을 흔들면 밝게 비출 수 없고, 저울을 흔들면 바르게 달 수 없는 것은, 법치의 원리와 같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지도자는 거울과 저울처럼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있는 원리와 법규를 근본으로 삼는다.” p. 236.


“논변가들이나 능히 알 수 있는 내용은 법령으로 삼을 수 없다. 백성이 모두 그렇게 논변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자들이나 능히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은 법으로 삼을 수 없다. 백성이 모두 그렇게 현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p. 239.


“현명한 군주는 법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고르지 스스로 멋대로 사람을 들어 쓰지 않으며, 법에 따라 사업의 실적을 판단하지 스스로 멋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pp. 239-240.


“법은 신분이 귀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 잘못에 대한 처벌은 대신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으며, 공적에 대한 상은 평민이라 해도 아낌없이 주어진다. …… 백성들의 행동 규범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 법만 한 것이 없다.” pp. 240-241.


“법치의 원칙을 지키는 길은 처음에는 괴롭지만 길이 이로울 것이요, 어짊을 베푸는 길은 잠깐 즐겁지만 나중에는 궁하게 된다.” p. 261.


“옛 군주의 어짊과 의로움을 말하는 것은 오늘날 다스리는 데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p. 264.


“앞선 군주의 어짊과 의로움을 말하지만 그걸로 나라를 바로잡을 수는 없으니, 이 또한 이를 가지고 놀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p. 265.


“대저 엄한 형벌과 무거운 처벌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나라는 이 때문에 잘 다스려진다. 백성을 가련히 여기고 형벌과 처벌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이지만 나라는 이 때문에 위태로워진다.” p. 268.


“어질다는 것은 자비롭게 은혜를 베풀어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난폭하다는 것은 마음이 잔인해 사람을 처형하는 것을 쉽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 “어진 군주든 난폭한 군주든 모두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p. 270.




4. 한비자의 통치술(術)


순명책실(循名責實): 신하로 하여금 계획을 진술하도록 하고, 나중에 그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겨 얻은 실적인 신하가 처음에 말했던 계획과 대조하여 상벌을 내리는 통치술. p. 272.

이를 형명(刑名 또는 形名)이라 한다. 신하로 하여금 자기가 한 말(名) 또는 그 소명은 반드시 실천적 행위, 즉 ‘형(形)’을 통하여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군주는 신하들이 한 말이나 그 말의 명분(名)을 근거로 하여 그들이 실제로 행한 행위의 실질(實)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p. 470 주석.)


황로(黃老)학은 제(齊)의 직하(稷下)학궁을 중시므올 형성되어 나온 절대군주를 위한 통치술이다. 군주는 실제로 ‘무위(無爲)’하면서, 오직 ‘형명’의 술(術)로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각자 스스로 책임을 맡아 일하게 할 분, 그들의 일에 간여함이 없이 자유방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직 행위결과에 대한 책임만을 법도대로 물어야 한다는 통치 이론이다.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p. 470 주석.)


“밝은 군주가 신하들을 거느릴 때는 신하가 자기 직분을 넘어서 공을 세울 수 없도록 하고, 자기가 한 말이 실적과 일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직분을 넘어서면 사형에 처하고, 말과 실적이 일치하지 않으면 처벌한다.” p. 140.


- 진나라 대부 혼헌이 말하기를, “밝은 군주는 신하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자신이 신하들로 하여금 배신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통치술을 믿습니다. 밝은 군주는 또한 신하가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자신이 신하들로 하여금 속임수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 통치술을 믿습니다.” p. 142


“나라란 군주의 수레이며, 권력이란 군주의 말이다. 통치술이 없이 이를 다루려고 하면 몸을 비록 수고스럽게 하더라도 어지러워지는 것을 면할 수 없다. 통치술을 가지고 다스린다면 몸은 편안한 곳에 거하면서 제왕의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p. 150.


“옛말에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자기가 바라는 바를 드러내지 말라. 군주가 만약 그 바라는 것을 드러내어 보이면, 신하들은 장차 거기에 깎아 맞추려고 들 것이다. 군주는 자기 의지를 드러내지 말라. 군주가 만약 자기 의지를 드어내어 보이면, 신하들은 장차 자신이 남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할 것이다.”” p. 155.


“군주의 도는 신하에게 드러내어 보여주어서는 안 되며, 군주의 통치술은 변화무쌍하여 신하가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 p. 156.


한비자의 칠술(七術)

(1) 중단참관(衆端參觀): 여러 가지 일의 단서를 견주어 보아야 한다.

(2) 필벌명위(必罰明威): 잘못은 반드시 처벌하여 군주의 권위를 밝혀라.

(3) 신상진능(信賞盡能): 잘한 일은 반드시 미덥게 포상하여 신하들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다 발휘하도록 하라.

(4) 일청책하(一聽責下): 신하를 무리로 다루지 말고 한 사람씩 평가해서 추궁해야 한다.

(5) 의조궤사(疑詔詭使): 의심스러운 명령을 내리거나 거짓으로 일을 시켜보라.

(6) 협지이문(挾知而問):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물어보라.

(7) 도언반사(倒言反事): 말을 거꾸로 해보거나 일을 반대로 처리해보기도 하라. p. 273, pp. 292-293.


“뭇 신하들이 말로써 사업 계획을 진술하면, 군주는 그 말에 따라 사업을 맡기고, 실적을 가지고 그 사업을 평가한다.” p. 289.


“군주의 길은 신하로 하여금 반드시 말을 한 책임을 지도록 하며, 또 말을 하지 않은 책임도 지도록 해야 한다. 말에 처음과 끝이 맞지 않고, 논리에 근거가 없는 자는 말을 한 책임을 져야 한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면서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말을 하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한다.” p. 294.




5. 한비자에 대한 노자 사상의 영향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상상해낸 것을 말할 때 ‘상(象)’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도(道)라는 것은 비록 듣거나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성인(聖人)은 도의 작용이 드러난 것을 미루어 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노자』에서 말하기를 “도는 드러나는 형상이 없는 형상이며, 실체가 없는 형상이다”라고 한 것이다.” p. 47.


“억지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있는 것이 도(道)의 본래 모습이며, 온갖 것이 드러나 서로 견주어지는 것은 사물의 실제 정황이다.” p. 48.


“(군주는) 지혜를 버림으로써 도리어 총명해질 수 있고, 현명함을 버림으로써 도리어 공효가 있으며, 용기를 버림으로써 도리어 강해질 수 있다. 뭇 신하들로 하여금 직분을 지키게 하고 백관들로 하여금 일정한 법을 따르게 하여 각기 능력에 맞추어 부리는 것을 습상(習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너무나 조용하여 그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알 수 없으며, 텅 비어 있어 그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 현명한 군주는 윗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신하들은 아래에서 부들부들 두려움에 떨고 있다”라고 한다.” p. 49.


“『노자』에서 말하기를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에 기대고 감히 작위하려 들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p. 57


“『노자』에서 말하기를 “하늘 아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 비롯했으며, 하늘 아래 큰일은 반드시 미세한 데서 시작했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모두 쉬울 때 큰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며, 미세할 때 조심하여 멀고 큰 화근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pp. 58-59.

“도(道)는 쌓아갈 수 있으니, 도가 쌓이면 겉으로 드러나는 효과가 있다. 덕이란 도가 쌓여 겉으로 드러나는 효과다.” p. 103.


“대저 도(道)란 넓고 커서 모습이 없다. 덕(德)이란 분명한 이치가 있어서 곳곳에 두루 미친다.” pp. 103-104.




6. 한비자의 ‘이(理, 이치)’ 개념


“이치란 사물을 이루는 무늬다.” p. 79


“사물에는 각각 이치가 있어 서로 침범할 수 없다. 사물에 이치가 있어 서로 침범할 수 없으므로 이치는 사물을 결정하는 틀이다. 만물은 각각 그 이치가 다르다.” p. 79.


“사물의 결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일을 잘 이뤄낼 수 있다.” p. 81


“대저 얼음과 숯불은 한그릇에 오래 함께 있을 수 없고, 추위와 더위는 한때 함께 닥칠수 없으며, 잡스럽고 모순된 학설이 양립해서는 다스려질 수 없다.” (氷炭不相容) p. 85


장자(莊子)의『장자』

2010. 5. 1. 13:43 | Posted by 지송리

 장자(莊子)의『장자』

 

1. 1장 「소요유(逍遙遊)」의 의미


 북녘 바다의 물고기 곤, 이 새가 변하면 붕.

-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를 일으키기를 3천리,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9만 리, 6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p. 28.

  붕은 매미와 비둘기의 비웃음을 사지만, 이것들은 붕의 뜻을 모른다. 생과 사의 짧은 순간만을 사는 이것들은 대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붕은 도를 깨친 존재이다.


- 만약 천지의 본연의 모습을 모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자가 되면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게 있으랴. 그래서 「지인에게는 사심(私心)이 없고, 신인(神人)이게는 공적이 없으며, 성인(聖人)에게는 명예가 없다.」고 한다. p. 34.


- 장님에겐 빛깔의 아름다움이 안 보이고 귀머거리에겐 음악의 황홀한 가락이 안 들리지만,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비단 육체에만 한하는 게 아닐세. 지식에도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네. 그게 바로 지금의 자네를 말함일세. 신인의 덕은 만물을 혼합해서 하나로 만들려는 거지.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기를 바라지만, 신인이 무엇 때문에 [보잘것 없는] 천하를 위해 애써 수고하려 하겠나.


소요한다는 것은 무궁한 경지에서 노닒을 뜻한다. 세상사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 따라서 소요유는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을 뜻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구별을 한다. 선악, 시비, 미추, 삶과 죽음, 귀천 등의 구별이 있다. 이것들은 마음을 혼란되게 하는 것일 뿐이다. 도의 세계, 그 경지에서는 이런 것들의 구별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소요유의 경지란, 현실의 구별과 분별을 ‘초월한 완전히 자유로운 세계, 즉 대자연의 커다란 품에 안길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 (안동림, 해제, p. 25.)




2. 「제물론」의 구별 거부


  제물은 ‘만물(세상의 모든 사물)을 고르게’ 함을 이른다. 유일절대의 도의입장에서 현실 세계의 갖가지 현상, 시미, 선악, 미추, 정사(옳고 그름), 화복, 길흉, 각몽(깨어 있음과 꿈꿈), 생사 등을 명확히 부분하려는 상대적 가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지를 밝힌다. 대붕은 절대자(자유인)의 조건은 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고 궁극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안동림 해제, p. 45.)

  따라서 제물은 절대적인 명지(明智)의 경지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에 의한 구별과 시비가 없어진다. 즉, 인간의 지식은 상대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장자가 상대주의에 머무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명지와 같이 절대적인 도를 파악하는 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도의 경지는 인간의 상대성을 넘어선, 초월한 상태이다.


- (남곽자기가 말하기를) 지금 나는 스스로를 잊어 버렸다. 너는 그걸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사람의 퉁소 소리는 들어도 땅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했고, 또 땅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해도 아직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했겠지. p. 47.


스스로를 잊은 상태란, 망아의 상태, 즉, 만물과 하나가 된 경지. 일체의 구별이 없어진 상태. 근심과 걱정은 구별에서 온다. 자타의 구별로부터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근심과 걱정이 생겨난다. 망아에 이르러 구별이 없어지면, 자기를 위해, 또는 타자를 위해 근심과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평안과 안정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위의 퉁소 소리 우화에서 ‘구멍은 인간이나 사물의 덧없음을, 소리는 시비를 일삼는 사고나 언설을, 바람은 좀처럼 포착하기 힘든 도를 나타내고 있다.’ 소리는 시끄럽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 입장에서 보면 그런 자잘한 소리는 덧없는 것이다. 하늘의 퉁소 소리는 다른 소리들이 날 수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인 셈이다.


- 훌륭한 지혜는 한가하고 너그러우나 하잘것없는 잔꾀는 사소한 일을 따지려 든다. 훌륭한 말은 담담하나 쓸데없는 잔말은 이러쿵저러쿵 시끄럽다. …… 탐욕에 빠져 버리면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p. 51.


- 감정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감정이 나타날 데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에 가깝다고 하겠으나 무엇이 갖가지 감정을 생기게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p. 53.


- 참된 주재자가 있는 모양이지만 그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용은 뚜렷한데 그 형태는 볼 수 없다. 실체는 있으나 모습이 없다. p. 54.


- (편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덕이] 지극한 사람의 행동을 들은 일이 없는가? 간담을 잊고 눈귀[ 따위의 감각 기관]까지도 잊어버린 채 무심하게 세속밖에서 떠다니고 인위를 일삼지 않는 자연 속에 노닌다. p. 482.


- 무지 무심하여 의식을 작용시키지 않고 모든 생각을 버려 의심을 품지 않으며 온갖 것이 생기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은 전송하고 오는 것은 맞이하며 오는 것을 막지 않고 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배반하는 자를 그대로 버려두고 순순히 따르는 자를 그대로 두어 각기 힘을 다하도록 놓아둡니다. p. 493.




3. 도(道) 또는 도추(道樞)와 ‘제물론(齊物論)’의 의미


- 성인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의 조명에 비추어 본다. 그리고 커다란 긍정(긍정의 세계)에 의존한다. …… 저것과 이것이 그 대립을 없애 버린(대립을 초월한 절대적인) 경지, 이를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라 고 한다. 지도리이기 때문에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무한한 변전에 대처할 수 있다. 옳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며, 옳지 않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다. 그러므로  [시비를 내세우는 짓은] ‘명지’의 처지에 서느니만 못하다. p. 59.


- 길이란 그 곳을 다니니까 생기게 마련이고, 사물은 이름을 붙이니까 그렇게 된다. p. 61.

도추의 경지는 절대적 자연의 이치에 이른 경지. 구별이 없고 자연과 만물이 하나가 된 경지. 여기에 구별을 붙이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간의 상대적 지식에 의한 것. 인간은 그러한 상대적 지식에 의해 구애되고 속박된다. 유가의 정명은 이름을 바르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지 절대적인 도의 관점은 아니다. 정명에 의하면 시비의 판단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시비의 판단이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


- 충분히 자기의 삶을 즐길 수 있으면 도에 가깝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길 뿐, 그러면서도 그런 따위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을 도라 한다. p. 63.


- 애초 사물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경지이다. (무의 경지), 지극하고 완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일 수가 없다. 그 다음 경지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구별을 두지 않는 (사물과 자아가 하나라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구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시비를 고려하지 않는 입장이다. 시비가 나타나면 도가 파괴되는 원인이 되고, 도가 파괴되면 또한 편애(애증)가 이루어지는 원인이 된다. pp. 65-66.


→ 유가의 정명, 예악과 같은 것은 시비의 구별로부터 나옴. 인간을 구속하는 것.


- 자기의 판단을 가하지 않고 상시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 이것을 참된 명지에 의거함이라 한다. p. 67. [만물제동의 경지]


- 도란 본래 한계가 없고, 말이란 애초 일정한 의미 내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말로 표현하려 하면] 구별이 생기게 된다. p. 72.


- 대체로 참된 도는 명칭으로 나타낼 수가 없고, 참된 변론은 말로 할지 못한다. …… 알지 못한다는 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다. …… 이러한 경지를 보광(葆光: 속에 간직된 도)이라고 한다. p. 73.




4. 4장「인간세(人間世)」에서 나타나는 처세술로서의 ‘무용(無用)의 용(用)’


- 학문은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입장.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이의 학문관은 그런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등용되어 나라에 쓰임이 있는 것이 사대부가 할 일이다. 글만 읽는 것은 무용하다고 했다. 그러나 장자는 처세에서 자연의 도에 맡긴다. 특히 지식은 경쟁심에서 생기고 지식이란 다투기 위한 도구(p. 105)라고 한다. 그래서 노자의 ‘절성기지 민리백배’라는 말을 따른다.


- 격언에 “군주의 명령을 고치지 말라. 성공하려고 무리하게 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그저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을 유유히 자유롭게 풀어 놓고,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몸을 맡긴 채 중도를 지켜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p. 126.


- 내가 선생을 생각해 보니 선생은 자기 지식을 꾸며서 어리석은 사람을 놀라게 만들고 스스로의 행실을 닦아 남의 잘못도니 행동을 돋보이게 하며 눈부시게 마치 해나 달을 들고 가기라도 하듯 했을 거요. 때문에 재난을 면하지 못하오. (대공임이 공자에게 한 말) p. 495.

  장자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순응의 사상, 즉 부득이한 데에 몸을 맡기고 소요자적하라는 장자 본래의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쓸모없는 상수리나무 이야기는 무용의 용. 처세술. 인간 세상에 쓸모가 없어야 천수를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나는 그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므로 화를 아주 면하지는 못한다. 만약 [쓸모 있음과 없음 따위를 초월한] 자연의 도에 의거하여 유유히 노닌다면 그렇지 않게 된다. p. 487.


- 모순되어 보이는 장자의 말: 무한한 자연의 도의 경지에 노니라 한다. 그러나 편자와 손휴의 이야기에서 편자가 말하기를 “만약 저 새를 키우는 방법으로 새를 보양하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강이나 호수에 떠 있게 하며 제멋대로 먹게 하여 새의 본성에 따라 유유히 노닐게 하는 것뿐이다. 지금 손휴는 소견이 좁은 사람인데 내가 지인의 덕을 말해 주었으니 이건 비유컨대 생쥐를 수레나 말에 태우고 메추라기를 종소리나 북소리로 즐겁게 해주려 한 짓과 같아.” p. 484.




5. 장자의 이상적 인간상인 진인(眞人) (「대종사(大宗師)」 참고)


- 진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참된 지식이 있게 마련이다. …… 옛날의 진인은 역경을 [억지로] 거역하지 않았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아무 일도 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잘못을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고, 잘 되어도 자랑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다. [그] 지식이 [세속을 초월하여 자연의] 도이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그런 것이다. p. 176


- 옛날의 진인은 삶을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미워할 줄도 모른다.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무심(無心)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그 [태어난] 시초를 모르고, 그 [죽은 뒤]의 꿑을 알려 하지 않는다. 삶을 받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죽으면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이런 경지를 「분별심으로 도를 버리지 않고, 인위로 자연을 돕지 않음」이라 하고, 이런 [경지에 있는]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 pp. 178-179.


- [외계의] 사물을 [그 자체에 맡겨 두지 않고] 뜻대로 하기를 바라는 자는 성인이 아니다. [특정한 것에 대한] 친밀감이 있는 자는 인자(仁者)가 아니다. 자연을 [인위적인] 시간으로 구분하는 자는 현자가 아니다. 이(利)와 해를 구별하는 자는 군자가 아니다. 명예를 좇아 자기를 잃는 자는 선비가 아니다. 몸을 망치며 참된 삶을 잃고 있는 자는 [남에게 부림을 받을 뿐] 남을 부리지 못하는 자이다. pp. 180-181.


- 그 하나의 입장으로 [절대적인] 하늘(자연)의 무리가 되고, 하나가 아닌 입장으로 [차별적인] 사람의 무리가 된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고 [조화되어] 있다. 이런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 p. 185.


- 자연은 우리에게 모습을 주었다. 또 우리에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우리에게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며, 우리에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삶을 좋다고 하면 곧 스스로의 죽음도 좋다고 하는 셈이 된다. p. 188.


- 성인(聖人)은 그 무엇도 빠져 나갈 수 없는 [만물을 포함한] 경지에서 노닐며 만물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려 한다. p. 190.




6.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 긍정적 함의와 한계


  긍정적 측면은, 구별의 철폐를 통해, 만민 평등을 넘어 만물평등에까지 이르는 평등주의를 추구한다. 이것은 신분적 질서의 철폐를 위한 혁명적 사상이라 할 만하다. 유교적 명분 논리를 비판하는 것은 명분에 의한 자유 억압을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대주의적 지식을 폐하고, 절대적인 지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속에서 자연과 합일되고 만물제동이 된 상태가 된다. 이것은 육체를 잊는 망아, 자신의 존재도 잊는 망아이다. 곧 정신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이것은 내면적인 관념적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 밖의 현실 세계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독단의 비판, 구속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기도취적일 뿐이다.

  또한 인간세의 처세술은 현실 순응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단지 천수를 누리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물아의 경지, 절대적인 도의 경지에 이를 필요가 있겠는가. 물아가 육체의 욕망을 잊는 상태임에도 육신의 보존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 모순되어 보이는 장자의 말: 무한한 자연의 도의 경지에 노니라 한다. 그러나 편자와 손휴의 이야기에서 편자가 말하기를 “만약 저 새를 키우는 방법으로 새를 보양하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강이나 호수에 떠 있게 하며 제멋대로 먹게 하여 새의 본성에 따라 유유히 노닐게 하는 것뿐이다. 지금 손휴는 소견이 좁은 사람인데 내가 지인의 덕을 말해 주었으니 이건 비유컨대 생쥐를 수레나 말에 태우고 메추라기를 종소리나 북소리로 즐겁게 해주려 한 짓과 같아.” p. 484.

  즉,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는 범인은 이르지 못한다. 그렇다면 장자의 주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6장 「대종사」


대종사의 앞부분은 진인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고, 후반부에는 도에 따르는 삶이 생과 사를 초월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있다.


- 도란 실제로 [겉에] 나타나는 작용이 있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가가 있으나 행동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을] 전할 수는 있으나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어 있고,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의 옛날부터 본래 존재하며, 귀신이나 상제를 영묘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낳고 있다. p. 191.


- [자여(子輿)는] 대답하기를, …… 대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그런 때를 만났음이며, 삶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의] 도리(道理)를 따름이다. 태어난 때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감정)이 끼어들 수 없다네. 이것이 옛날에 말하던 현해(懸解: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라는 걸세. 그런데 스스로 [그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건 [외계의] 사물이 얽혀 매듭져 있기 때문이지. 대체 사물이 자연의 도리에 이기지 못한다는 건 옛날부터 사실일세. 내 또한 어찌 [이 병을] 싫다 하겠나. p. 199.


- 자래가 대답했다. 「…… 자연은 내게 형체를 주었지. [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주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하나로 이어진 것이니], 내 삶을 좋다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고 하는 게 된다네.」 p. 201.


안동림 해석: 장자는 인간의 변생(變生)과 생사의 초월이라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 생사를 초월한다 함은 자연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p. 202.


-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가 말하는 이 「자기」라는 것이 과연 자기인지 어찌 알겠느냐. 그런데 또 자네는 꿈에 새가 되어 하늘에 이르기도 하고, 꿈에 물고기가 되어 연못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겠지. [그러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과연] 깨어 있으며 그러는 건지, 꿈꾸며 그러는 건지를 알 수가 없지 않느냐. 남의 결점을 고자질함은 웃는(포섭하는) 것만 못하고, 웃음을 즐김은 사물의 추이(推移)에 [그래도] 맡기는 일만 못하다. 추이에 편히 [몸을] 맡긴 채 변화를 따르면, 곧 고요한 하늘(자연)과 하나가 되는 [절대의] 경지에 들게 된다.


- [허유(許由)가 말하기를] 내 스승, 내 스승이란 [도는] 만물을 이뤄 놓으면서도 의롭게 여기지 않고, 만세에 미치는 혜택을 베풀면서도 어질다 생각하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 살면서도 늙었다 하지 않고, 천지를 싣고 감싸서 갖가지 모양을 조각해 내면서도 재주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노닐게 하는 경지일세. p. 214.


- [안회(顔回)가 말하기를] 「저는 좌망(坐忘)하게 됐습니다.」 중니는 놀라서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고 하느냐?」 안회가 대답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서, 형체를 떠나 지식을 버리고 저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중니는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 [하는 차별 따위]가 없어지고, [도와 하나가 되어] 변하면 한 군데 집착하지 않게 된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라야겠다.」 p. 216.



제 8장 변무: 인의에 대한 논박


-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길게] 이어 주면 괴로워하고, 두루미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 주면 슬퍼한다. p. 246.


- 세상에서 인덕이 있다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떨쳐 버리고 부귀를 탐하고 있다. 때문에 인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참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p. 247.


- 예악에 따라 몸을 굽히고, 인의에 순순히 좇아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본래의 일정한 모습을 잃는 짓이다. p. 248.

안동림 주: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을 인의 따위 자로 규정해 버리려는 유가는 바로 그 어떤 구속도 배척하는 장자에게는 그야말로 강렬한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p. 249.


- 내가 말하는 선이란 인의가 아니라, 본성의 덕에 순순히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선이란 흔히 말하는 인의가 아니라, 본래 그대로의 모습에 맡긴다는 뜻이다. p. 252.



제9장 마제


- 대체 지극한 덕이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새나 짐승과 함께 살고, 만물과 함께 나란히 모여 있었다. [그런데] 어찌 군자와 소인[이라는 차별]을 헤아리겠는가! …… 성인이 나타나게 되자, 애써 인을 행하고 허둥지둥 의를 행해서 온 천하가 비로소 의혹을 품게 되었다. 제멋대로 음악을 연주하고 번잡하게 예의를 반들어 천하에 비로소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p. 260.


- 성인이 나타나게 되자, 예의나 음악에 따라 몸을 굽혀서 그것으로 천하[사람]의 겉모습을 바로잡으려 하고, 인의를 내걸어 천하[사람]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자 백성은 애써 지식에 몰두하고 다투어 이득을 좇게 되었는데, [이제는] 막을 수가 없다. 이 역시 성인의 잘못이다. p. 262.



제10장 거협: 인간의 지혜 비판. 성을 끊고 지혜를 버려라.


-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지자(知者)란 큰도둑을 위해 [물건을] 모아두는 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소위 성인이란 큰도둑 때문에 [물건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p. 268.


- 전성자는 하루 아침에 제나라 군주를 죽이고 그 나라를 훔치고 말았다. 훔친 것이 그 나라뿐이었을까? 아울러 성인과 지자가 이룩한 법까지도 훔쳐 버렸다.


- (도척이 말하기를) 어디서나 도 없는 곳이 있겠느냐?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맞히면 성(聖)이고, 스며들 때 선두에 서는 게 용이다. 나올 때 맨 뒤에 있으면 의이고, 될지 안 될지를 아는 게 지이며, 분배를 공평하게 함이 인이다. p. 270

-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존중하고 천하를 다스린다 해도 결국 그것은 도척 같은 인간을 존중하고 이롭게 하는 셈이 된다. pp. 270-271.


- 인의로 [백성을] 바로잡으려 하면 그 인의도 아울러 훔쳐 버린다. p. 272.a


- 성인을 근절하고 지혜를 내버리면 큰도둑은 없어진다. p. 273.

[<노자> 제 19장: 절성기지 민리백배.]


- 증삼이나 사추의 행위를 떼어 내고, 양주나 묵적의 입을 막으며 인의를 물리치면 비로소 온 천하의 덕은 현묘한 도와 하나가 된다. p. 275.


- 지혜를 좋아한다는 것이 온 천하를 이렇듯 혼란하게 하다니 참으로 심한 짓이다. 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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